• 망국의 설움과 독립투쟁 35년, 몽매에 그리던 ‘해방’은 벼락 치는 원폭과 함께 도둑처럼 찾아왔다. 그 순간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 해방후 ‘건국전쟁’의 주역이던 이승만과 김구가 일본 패망이란 역사적인 시간에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더듬어 보자.

    해방 즉시 스탈린에 전보...‘신탁통치 반대...38선 반대’ 투쟁 

    포츠담선언이 발표된 다음날 7월27일, 이승만은 마닐라에 있던 맥아더(Douglas MacAthur) 장군과 태평양전선 해군사령관 니미츠(Chester W. Nimitz) 제독에게 전보를 친다. 이승만이 직접 마닐라로 가서 국내동포에게 방송을 하고 싶다는 제안을 보냈다. 
    “진주만 공격이래로 우리는 연합국을 위해 우리 인력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으나, 소련의 영향 때문에 미루어져 왔습니다. 1942년 7월의 방송에서 나는 한국인들에게 지시를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메시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봉기할 때가 왔습니다.”
    이승만은 필리핀의 로물로(Carlos P. Romulo,1899~1985) 장군이 마닐라에서 방송을 할 수 있게 주선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1942년 퓰리처(Pulitzer) 상을 받은 언론인 로물로는 진작부터 이승만이 친교를 맺은 동지이다. 로물로는 맥아더의 무관이며 국제연합창립시 필리핀 대표였다. 그러나 니미츠도 맥아더도 워싱턴 고위당국 소관이라 답하는 것이었다.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앞의 책).

    8월3일 이승만은 마셜 장군에게 편지를 보낸다. 마닐라에 가서 국내동포에게 방송을 보내고 한국에 상륙하는 연합군과 함께 귀국하고 싶다는 희망을 간곡히 전했다. 히로시마에 원폭이 터진 후 8월8일엔 트루먼 대통령에게 직접 편지를 보낸다. 나가사키에 연달아 원폭이 투하되자 이승만은 8월10일 미국 전쟁부에 즉시 귀국하겠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하지만 응답도 없이 급박한 시간만 흘러간다. 

    마침내 일본 천화의 항복 방송을 들은 이승만은 8월15일 워싱턴에서 긴급회합을 소집하였다. 임병직, 장기영, 한표욱(韓豹頊) 부부 외 측근들이 참석, 일본 패망의 기쁨을 나누며 귀국문제와 해방 후의 한국 사태를 점검하였다. 침통한 이승만이 말한다.
    “문제는 대일전에 뛰어든 소련인데 한반도에서 어떤 일을 벌일지 큰 걱정이다. 미국이 일을 지혜롭게 처리하지 못한다면 민족주의 세력과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당 사이에 피를 흘리게 될지 모른다.”(한표욱 [이승만과 한미외교] 중앙일보사, 1996)
    해방 순간에 ‘공산세력과의 유혈 내전’을 예견한 발언은 이승만이기에 가능한 말이다. 그때 ‘38선’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8선’ 뉴스가 보도된 것은 8월24일이다.  

    이승만은 점심 식사를 끝낸 일행과 헤어져 즉각 행동에 나섰다.
    맨 먼저 미국 트루먼, 소련 스탈린, 중국 장제스에게 축하전보를 쳤다. 
    “각하. 우리는 대한이 일본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데 대하여 마음 깊이 밥힌 감사를 각하와 미국인들에게 표합니다. 미국 군인의 용기와 과학적 천재력을 보여준 미국 군력과 공업적 위력으로 인하여 일본은 무릎을 꿇고 항복하였습니다. 영구적 감사를 간직합니다. 27년전 대한이 일본에 대항하는 혁명(3.1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우리 민국정부는 미국 제도를 모방하였습니다....” ([주미외교위원부 통신] 제115호). 이승만은 이처럼 축하전보에서도 한국과 미국의 자유 민주주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 ▲ 이승만(왼쪽)이 해방즉시 '평화 촉구' 전보를 보낸 스탈린.(자료사진)
    ▲ 이승만(왼쪽)이 해방즉시 '평화 촉구' 전보를 보낸 스탈린.(자료사진)
    이승만이 공산 전체주의 독재자로 규탄해온 스탈린에게는 왜 축하전보를 쳤을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서 소비에트 연방이 거둔 승리와 세계 평화의 복구를 짐심으로 축하합니다....평화를 사랑하고 소비에트연방에 호의를 갖고 있는 3천만 한국인이 건설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국가 한국이 소비에트공화국과 극동 아시아의 평화와 안보를 지키는 안전장치가 될 것을 확약합니다.” (이승만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서한집). 
    ‘평화’를 거듭 강조한 이승만의 본심은 무엇인가. 소련의 침략주의를 훤히 알고 있기에 이승만은 스탈린에게 한반도의 평화를 깨지 말라고 완곡한 경고를 발한 전보였다. 이것은 이승만이 소련에 의한 ‘한반도 공산화’를 염려하여 스탈린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직접 호소한 글이다. 

    중국 장제스에게는 ‘성심껏 축하’한다며 “대한과 중국은 동일한 전후문제에 당면하였으므로 밀접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강조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김구에게는 “임시정부는 ‘조선정신’을 유지하라”면서 귀국후에 정식정부가 되면 일반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환기시켰다. “선거가 잘 이루어져야 동적간의 피흘림을 막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을 거듭 주입시키고자 했다.

    18일에는 임정 외교부장 조소앙이 김구와 공동명의로 트루먼에게 보낸 축하편지를 백악관으로 보내고, 20일에 번즈 국무장관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 ▲ 이승만(왼쪽)이 해방순간 전보를 보낸 연합국 지도자들. 트루먼, 장제스, 애틀리.ⓒ뉴데일리DB
    ▲ 이승만(왼쪽)이 해방순간 전보를 보낸 연합국 지도자들. 트루먼, 장제스, 애틀리.ⓒ뉴데일리DB
    이때 이승만은 ‘38선 분할점령’이라는 소식을 처음 듣고 경악한다.
    설마설마 했지만 역시나...‘얄타 밀약’의 현실화, 격분한 이승만은 8월21일 트루먼과 장제스에게 또 급전을 날린다. 
    “독립을 보장한다고 위장하여 한국을 ‘괴뢰’(傀儡:꼭두각시)로 이용하려는 계략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채택하지 말도록 권고해주십시오.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부여하지 않는 어떤 계획도 모두 한국인은 거부합니다.” (이승만이 장제스에게 보낸 전보).

    이승만은 동시에 영국 애틀리 수상에게도 전보를 친다. 
    “한국이 또 다른 폴란드가 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하여 각하께서 중재해 주시기를 간곡히 요청합니다. 명목상의 독립이라는 미명아래 한국을 노리개로 이용하려합니다. 자유를 사랑하는 3천만 한국인을 위해 개입해 주시고 통일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승만이 애틀리에게 보낸 전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서한집)

    다급한 이승만은 한미협회의 더글러스 아메리칸 대학총장, 스태거스 변호사, 언론인 윌리엄스 세사람으로 하여금 트루먼에게 ‘이승만의 조속귀국’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내게 한다.

    백악관의 회답을 기다리다 지친 이승만은 또 트루먼에게 전보를 친다. 8월들어 다섯 번이나 트루먼에게 전보와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한국 국민들은 오로지 미군만을 한국의 점령군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단일민족을 분열시켜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초래할 공동신탁통치나 공동위원단에 전적으로 반대합니다....각하께서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해주기기를 간청합니다. 제 조국의 미래는 대통령 각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8월27일자 전보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서한집)

    28일 마닐라 맥아더에게 또 전보를 친다. 조속히 귀국할 수 있도록 트루먼에게 건의해 달라고부탁 하면서 되풀이 간청한다. 
    “...우리는 공동점령 또는 신탁통치에 반대합니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군만의 단독 점령을 환영합니다. 왜 우리가 소련이 들어와 공산주의를 세우고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합니까?...” 

    이와 같이 이승만은 ‘38선 분할점령’ 대하여 미국을 설득하려고 몸부림을 쳤다.
    ‘38선 반대’ ‘신탁통치 반대’ 투쟁을 귀국 전부터 사면팔방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승만은 또 다시 특유의 이벤트를 펼친다. 
    ‘한국 해방의 밤’(Korea’s Liberation Night) 만찬 연설회를 여는 캠페인이다.
    그것은 해방축하라는 이름으로 미국에게 ‘즉각적인 완전독립’을 호소하는 행사였다.
    8월30일 저녁, 워싱턴에 친한 미국인사들이 130여명 모여 해방과 독립을 축하하는 연설을 쏟아낸다. 선전 전문가 이승만의 놀라운 동원력, 미국 ABC 방송이 주요 연설을 생방송으로 중계하였다. 
    그러나 그의 귀국은 10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이승만도 그 까닭은 잘 알고 있었다.


  • ▲ 김구(왼쪽앞)와 도노반 장군이 중국 서안에서 광복군의 OSS 특별작전문제를 논의함.ⓒ김구선생기념사업회
    ▲ 김구(왼쪽앞)와 도노반 장군이 중국 서안에서 광복군의 OSS 특별작전문제를 논의함.ⓒ김구선생기념사업회
    ◆김구 ‘좌우합작’의 마지막 시련...김원봉당, 임정 해체 주장

    김구가 ‘일본의 항복’ 소식을 알게 된 것은 8월10일 서안(西安)에서였다.
    이승만이 주선하고 미국 OSS가 이끄는 광복군 게릴라 훈련 현장을 시찰하고, 중국에 온 미국 도노반(William J. Donovan) 장군을 만나 국내침투 합동작전을 의논한 김구는 이청천, 이범석 등 일행과 함께 산시성(陜西省) 성주 축소주(祝紹周)의 집을 방문했다. 저녁식사를 마쳤을 때 축소주가 전화를 받더니 “왜적이 항복한다” 소리치는 것이었다.
    청천벽력! 김구 일행은 순간 놀라고 기쁘고 감격하면서도 뭔가 어안이 벙벙했다고 한다.
    “내게 희소식이라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고 김구는 [백범일지]에 썼다. 훈련받은 청년들을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침입하게 하려는 계획을 한번 실시해 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하였으니 “지금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다가올 일이 걱정되었다”고 한다.

    일본이 완전 항복한 사흘후 8월18일 충칭(중경)에 돌아온 김구는 주말에 휴식을 취하고나서, 21일 중국국민당 실세 오철성(吳鐵城)을 방문했다. 8년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국민정부에 감사인사를 하자 오철성은 각정파들의 단합부터 강조했다. 김구는 “임시정부가 귀국하면 선거를 실시하여 정식 정부가 될 터이니 순조롭게 귀국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한다. 이승만이 강조한 ‘선거‘를 인용하는 것이 눈길을 끈다.
    오철성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공동으로 임시정부를 조직하라면서, “듣자하니 소련군과 미군-중국군이 조선을 분할 점령하여 적의 무장을 해제시킬 것”이라는 정보를 김구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추측이지만 한국은 당분간 신탁통치나 과도적 군사정부 통치가 될지도 모르며 장래에는 폴란드와 같이 통일적 임시정부가 들어설지도 모른다”고 부연설명을 한다. 
    ’분할점령‘ ’신탁통치‘ ’폴란드와 같이‘라는 당시 최대의 국제적 핫이슈에 대하여, 김구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진 게 없다. 
    다만 김구는 그 자리에서 한국독립당을 계속 지원해달라는 것과 임시정부의 조속한 승인을 부탁하였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장제스 정부는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있었다.

    ★ 좌익세력 “임정 해체하라”...줄줄이 총사퇴한 까닭은...

    일본이 항복하자 지난 3년간 임시정부의 의정원(국회)를 장악하고 있던 좌익정파들이 들고 일어났다. 해방 대책을 논의하는 8월18일 의정원은 개회 벽두부터 김원봉의 민족혁명당 의원들이 임정 국무위원 총사직을 요구했다.
    그들은 의정원이 결의한 *정권의 국내봉환과 *임시정부의 조속 입국 등 두 가지를 적극반대하였다. 과격파 손두환이 가장 격렬하였는데 그는 김구의 황해도 청년시절 제자였다. 
    “그동안 총사직을 권고해 왔는데, 사직은 안하고 국내로 들어간다니 무슨 말이오? 당신들이 이 정부를 조선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즉 내란을 일으키자는 위험한 생각이오. 그런 위험한 정책을 가진 정부를 그대로 둘 수 없단 말이오...당신들이 언제 국내 인민의 정권을 받았소? 어서 사직들 하시오.”(임시의정원회의 제39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1945.8)
    요컨대 임시정부가 귀국하면 내란이 난다는 것, 국내 동포들이 선출한 정부가 아니므로 자격이 없다는 덧, 즉시 해체하라는 주장이다.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좌익세력이 해방이 되자 왜 이럴까. 
    한마디로 한국에 새로 세울 정부는 공산당 정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좌익정파들은 8월17일 독자적인 행동에 돌입, 한국혁명운동자대회를 열었다. 박건웅의 개회사와 윤기섭(尹琦燮) 의장 선출에 이어 김규식(金奎植)의 부인 김순애(金淳愛), 최형록, 손두환(孫斗煥), 이연호 등 조선민족혁명당 소속 10여명이 열변을 토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개조와 귀국문제, 연합4국에 축전발송 등 7개항을 결의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총서기 김원봉(金元鳳)은 김구보다 앞서 중국국민당 오철성 비서장을 방문, 귀국지원과 귀국후 정부수립문제를 논의하였다고 한다. (추헌수 편 [약산과 오철성의 회담요점] 자료한국독립운동(2)

    ★김구는 정부 총사직 문제를 분명히 반대한다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우리 임시정부는 기미년 3월1일에 국내에서 피를 흘린 결과로서 13도 대표가 모여 조직한 것이다. 이제 국무위원들이 결속하여 본토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 한국사람이 난타를 당한다면 중국이 법치국이 못되는 것이니, 우리는 중국군이 한국에 들어갈 때에 광복군을 동참시켜야 합니다. 보따리를 싸야 할 이때에 총사직은 불가하다.”
    위기를 당한 김구가 귀국을 앞두고서야, 이승만이 줄곧 법통을 주장해 온 13도대표의 한성임시정부를 앞세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김규식도 이때 비슷한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귀국‘ 결의안을 표결에 부치자 민족혁명당 등은 일제히 퇴장하였다. 
    사실상 마지막 의회의 파장! 폐회사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난 1942년 10월, 장제스의 단일지원 압력 앞에서 ’좌우 합작‘ 정부를 구성했던 김구의 꿈은 이렇게 3년 만에 사라졌다. 그 시련은 얼마나 컸던가. 김원봉을 군무부장(국방장관)과 광복군 부사령관에 앉힌 뒤에 겪은 갖가지 횡포, 의정원을 좌지우지하는 좌익 정파들의 독무대, 허울 좋은 ’통합 독립운동‘의 명분은 공산주의를 모르는 우파세력의 순진한 낭만이던가. 

    김구는 한국독립당만 귀국하기로 작정하였다. 
    장제스에게 비망록을 보내 자금지원을 부탁한다. 장기적으로 5억원이 필요한데 우선 5,000만원을 오철성에게 요청하고, 귀국에 대비하여 당헌, 당책을 손질한다. 국내에 시군구(市郡區)에 면(面) 단위까지 조직책을 임명하는 전당대회를 열었다. 이때 한독당에 남아있는 당원은 중국내에 174명, 재미동포 81명이 전부였다.(한국독립당원명부)
    이처럼 김구는 중국군이 한국을 점령할 줄 알았고 이들과 함께 귀국하면 한국독립당이 정국을 장악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의 귀국은 아직 멀었다. 11월까지 더 기다려야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