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포츠담 회담이 열린 독일 포츠담의 체칠리엔호프 궁.(자료사진)
    ▲ 포츠담 회담이 열린 독일 포츠담의 체칠리엔호프 궁.(자료사진)
    베를린 근교의 포츠담에서 트루먼, 처칠, 스탈린의 3거두 회담 개막, 7월17일 독일 빌헤름 황태자의 집 체칠리엔 궁 회담장에 들어선 트루먼은 상기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 참석한 국제정상회담은 미국이 4년간 싸운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전후처리를 결정해야하는 자리...그것만이 아니다.  
    바로 전날 16일 새벽 5시(미국시간) 뉴멕시코주 앨러모고도(Alamogordo)에서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코드명:트리니티 trinity)이 성공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트루먼도 몰랐다가 대통령 되고서야 브리핑 받은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1942년 시작된 원자탄 개발이 마침내 성공, 세계사를 바꾸는 쾌거를 이루었다는 흥분에 신참 대통령은 초조감에서 갑자기 자신감으로 넘쳐흘렀다.
  • ▲ 포츠담 회담 3거두, 처칠, 트루먼, 스탈린.(자료사진)
    ▲ 포츠담 회담 3거두, 처칠, 트루먼, 스탈린.(자료사진)
    ★트루먼 "스탈린은 얄타협약을 깨는 배신자"

    트루먼은 이번에 스탈린을 처음 만났다. 
    친소주의 루즈벨트가 남긴 유산 중에 가장 버거운 짐 스탈린! 얄타회담이 끝나자 동유럽 점령의 기득권을 주장하고, 폴란드의 좌우 자유선거 약속도 버린 채 루블린(Lublin) 공산정권을 r기정사실화하는 공산독재자 스탈린은 신뢰할 수 없는 국제법 파괴자 ‘배신자’ 아닌가. 
    이 같은 스탈린에 대한 경계심은 얄타 이후 미국정부에 널리 번졌다.
    국무부가 6월22일 작성한 「종전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정세와 미국의 정책」 중 ‘한국항목’에서 “소련이 참전하면 한국의 전부 또는 일부를 점령하고 친소정부를 수립할지 모른다”고 경고하며 이를 막기 위한 정책은 ‘카이로선언’의 실현이라 강조하였다.
    (Department of State, ‘An Estimate of Conditions in Asia and the Pacific in the Close of War in the Far East and the Objective Polices of the United States’ FRUS 1945, vol. Ⅵ. 손세일, 앞의 책)
    포츠담회담 개막 전날 트루먼에게 보고서를 제출한 전쟁부(국방부) 장관 스팀슨(Henry L. Stimson)은 이승만이 주장해 온 ‘소련의 한반도 공산정권 수립론’을 이야기 한다.
    “소련이 4개국 신탁통치에 동의했지만 상세한 것은 합의된 게 없다. 소련이 외국군의 한반도주둔을 원치 않는 이유가 있다. 제가 알기로 소련은 이미 1-2개 한인병력사단의 훈련을 마쳤는데 이를 소련지배하의 정권수립에 이용할 것이다. 이것은 소련이 약속을 깬 ‘폴란드 복사판’을 극동에 옮겨놓는 격이다.”
    이러면서 스팀슨도 ‘신탁통치’의 강력한 추진을 건의하고 미군의 상징적 병력을 한국에 주둔시키자고 제안하고 있다. 즉, 한반도를 어느 특정국가가 지배하면 국제분쟁이 재발할 것이므로 소련의 지배를 막으려면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의 반복이다.(Stimson to Truman, Jul.16,1945, FRUS 1945 Conference of Berlin Potsdam, vol.Ⅱ)

    이렇듯 당시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한국인의 즉각 독립 희망’과 관계없이 오로지 ‘분쟁방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게다가 미군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소련을 꼭 참전시켜야한다고 거듭 확인하였다.
    미국 엘리트층의 정치적배경이 약한 ‘시골 출신’ 대통령 트루먼이 국무부나 군부의 주도에 끌려가던 당시, 한국문제는 ‘카이로 선언’에서 한발작도 나아가지 않은 상태로 포츠담회담에서 군사작전상의 부수적 문제로 다뤄지고 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트루먼은 루즈벨트와 달리 공산주의자 스탈린을 싫어하고 배척하려 했다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도 미국의 이익에 관한 것일 뿐, 한국의 독립과는 직결되지 않았다는 데에 ‘한국의 비극’은 불가피한 숙명처럼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 ▲ 총선에서 패배한 처칠은 귀국하고 노동당 애틀리(왼쪽)가 참석한 포츠담회담. 가운데 트루먼, 오른쪽 스탈린.(자료사진)
    ▲ 총선에서 패배한 처칠은 귀국하고 노동당 애틀리(왼쪽)가 참석한 포츠담회담. 가운데 트루먼, 오른쪽 스탈린.(자료사진)
    ◆ 트루먼 “소련 참전 불필요”...처칠 “일본 상륙작전도 불필요”

    개막 다음날 트루먼은 원폭개발에 참여한 영국 처칠에게 ‘성공’을 알려주고, 스탈린에게 알릴 것인지 말 것인지 의논했다. 지금 스탈린에게 모든 것을 말해주면 소련이 당장 참전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처칠은 “지구를 흔들만한 뉴스”라며 기뻐하였다. 그리고 ‘원자폭탄이 두 가지 난제를 해결했구나’ 생각했다. 미-영군은 이제 엄청난 희생을 치를 일본본토 상륙작전을 안해도 되고, 더 좋은 일은 대일전에 소련이 참전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처칠 [세계2차대전:승리와 비극] 1953)

    당연히 트루먼의 인식도 다르지 않았다. 포츠담회담에서 가장 급한 것이 ‘소련의 참전’을 앞당기려는 것이었는데 이제 거꾸로 소련의 참전여부를 미국이 재검토해야할 상황으로 변한 것이다. 그는 소련군의 도움 없이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종결, 미국 단독 승리를 원하고 있었다.
    회담이 폴란드 등 동유럽문제와 독일처리문제, 태평양 전쟁 종결 문제를 논의하는 가운데 7월21일 트루먼이 기다리던 ‘반가운 보고’가 또 들어왔다. 
    “8월1일 이후에는 원자탄의 사용이 가능합니다.”
    트루먼은 무릎을 쳤다. 골치 아픈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드디어 전쟁을 끝낼 수 있다.
    7월24일 미-영연합참모본부와 소련참모본부가 처음 합동회의를 열고 한반도에서의 작전문제를 협의하던 날 저녁, 식사를 위해 휴식에 들어갔을 때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굉장한 파괴력을 가진 신무기를 갖게 되었소.” 원자탄이란 말은 빼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스탈린은 ‘반가운 소식이다. 일본에 잘 쓰기 바란다’고 말했다. 
    (손세일 번역, [트루먼 회고록] 지문각, 1968. 원전 Harry S. Truman [Memoires] Doubleday & Company,1955). 

    ★이날 열렸던 연합국 3개국 참모본부 연석회의에서 논의된 한반도 작전 문제는 애매하게 끝났다. 소련군 참모총장 안토노프(Aleksei Antonov)가 소련군의 작전에 미군의 대응 여부를 물었을 때 마셜(George C. Marshall) 미국 참모총장은 “그런 계획은 없다”고 미국의 상륙작전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그리고 뒤늦게 작전부장 헐(John E. Hull) 중장에게 “미군의 한국진공작전 계획을 준비하라” 지시하였다. 
    이것이 포츠담회담에서 미군의 한국 진주문제가 처음 표면화된 대목이다.
    이처럼 미국 정부나 미 군부는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한국 내륙 점령 문제나 내정문제 등에는  한 가지도 확정된 계획이 없이 ‘원자폭탄에 의한 종전’에만 매몰되어갔다.
    단지 7월26일 발표된 ‘포츠담 선언’ 제8항에 “카이로 선언의 조항은 이행될 것”이라고 연합3국이 확인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같은 날 영국 총선결과가 최종 집계되었다. 80% 승리를 예상했던 전쟁영웅 처칠의 보수당이 참패하고 노동당이 승리, 애틀리(Clement Richard Attlee,1883~1967)가 포츠담에 참석하고 처칠은 돌아갔다. 

  • ▲ 냉전기류가 표면화한 포츠담 회담 전경.(자료사진)
    ▲ 냉전기류가 표면화한 포츠담 회담 전경.(자료사진)
    ★미, 포츠담선언문 서명에 스탈린 이름 빼다...‘냉전 기류’ 표면화

    미국무장관 번즈(James F. Byrnes)가 주도한 포츠담 선언문 서명자 명단에서 스탈린의 이름이 빠졌다. 대신 중국의 장제스가 들어갔다. 갑자기 무슨 까닭인가.
    미국의 설명은 ‘1941년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은 태평양전쟁의 비교전국’이므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불복시 섬멸전을 규정한 선언문에 서명하기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이었다.
    요컨대, 소련에게는 ‘참전자격이 없다’는 메시지, 즉 “참전 말라”는 통보나 마찬가지다.
    그동안 회담에서 미국이나 영국은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원자탄 성공이후 달라진 미국정부의 노선이 처음 ‘냉전의 안개’처럼 피어오른 장면이다.
    선언문 사본을 받아본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발표를 늦춰달라 했지만 번즈는 이미 언론에 배포되어 안 된다고 잘랐다. 스탈린은 ‘미국의 배신’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스탈린의 참전 준비는 회담전 벌써 끝나 있었다

    트루먼이 ‘신무기를 가졌다’고 말했을 때 스탈린은 즉각 알아차렸다.
    오래전부터 ‘맨해튼 프로젝트’에 심어놓은 과학자나 간첩 등 정보망을 통하여 ‘원자탄 성공’을 예측하고 있던 스탈린이다. 거의 동시에 정보 보고도 받았다. 
    예상보다 빠른 원폭성공을 확인하자 스탈린은 기존의 참전계획을 독려하고 나선다.
    독일 항복 3개월 뒤 대일전에 참전하겠다고 스탈린은 얄타회담에서 약속했다. 그것은 8월이다. 소련군 참모본부는 그때부터 ‘극동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시베리아 철도로 병력과 무기, 군장비를 계속 실어 날랐다. 당시 40개사단이던 극동군은 80개 사단으로 배나 커졌다.
    스탈린은 얄타에서 루즈벨트로부터 확약 받은 만주, 사할린, 쿠릴열도 점령을 위한 작전계획을 착착 진행시킨 것이었다.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 공격, 동시 점령을 목표로 한다.
    이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후퇴하는 일본군의 배후 차단 작전이 기본, 그것은 바로 한반도 북부부터 점령해야하고 필요하면 소련이 원하는 부산(釜山)까지도 선점해야 한다.

    미-영이 포츠담선언문에서 스탈린의 서명을 제외시킨 일은 오히려 ‘반전의 행운’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궁지에 몰린 일본이 서명에서 빠진 소련에게 불가침조약을 근거로 미-영과의 종전협상 중재를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귀축’(鬼畜)으로 선전해놓은 미-영에 항복하느니 소련의 중재를 통해 보다 유리한 항복조건을 원했던 일본정부는 포츠담 선언이 26일 발표되자 28일 “오직 묵살할 뿐”이라 선언한다. 일본 군부가 “1억 옥쇄”(玉碎)를 부르짖으며 항거했던 까닭이다.
    ‘묵살’은 ‘항복 거부’--미국은 즉각 ‘섬멸전’에 돌입한다.


  • ▲ 역사상 최초의 원자탄 투하.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한 원폭 '리틀보이' 핵구름.(자료사진)
    ▲ 역사상 최초의 원자탄 투하. 1945년 8월6일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폭발한 원폭 '리틀보이' 핵구름.(자료사진)
    ◆사상 최초의 원폭 투하...소련군은 만주-한반도에 쇄도

    남태평양 티니언(Tinian) 섬에서 일본의 태풍이 잠자기를 기다리던 B-29 폭격기는 8월6일 새벽 2시45분에 이륙, 일본 열도를 향해 고공비행을 시작한다. 기장 티베츠(Paul W. Tibbets) 대령은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지은 ‘에놀라 게이’(Enola Gay) 폭격기에 원자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싣고 히로시마(廣島)를 찾아간다. 
    당시 실험한 원폭은 두 개, 플로토늄탄이 길죽한 ‘꼬마’ 리틀 보이, 우라늄탄은 통통한 ‘팻맨’(fat man)이다. 
    열도 상공을 선회한 에놀라 게이가 리틀보이를 투하한 시간은 아침 8시 15분, 출근시간 히로시마는 7만6,000여개 건물중 7만개가 핵폭풍에 전소하고 11만명의 시민과 군인2만명이 즉사, 그해만 14만명이 사망한다. 
    포츠담에서 귀국하는 트루먼은 오거스타 함상에서 기쁨의 웃음을 터트린다.
    “이 폭탄은 일본이 진주만 공격으로 전쟁을 도발한 행위에 대한 보복이다. 포츠담 선언은 일본 국민들을 구하려는 것이었는데 일본 지도자들이 즉시 거부하였다. 만일 그들이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본적 없는 ‘파괴의 비’(rain of ruin)를 받아야 한다.” 백악관이 발표한 트루먼의 성명이다.

    ‘원폭 투하’ 듣자마자 스탈린은 총공격명령을 내린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스탈린은 급하다. 
    미국이 원자탄을 투하하여 소련을 제쳐놓고 단독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으면 절대 안된다.
    원자탄을 쓰기 전에 참전하자. 아니다, 원자탄을 맞은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이 절호의 기회다.
    기회를 놓치면 미국이 원자탄을 무기로 소련까지 지배하는 상황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빼낸 정보로 개발 중인 소련의 핵무기는 언제 성공할지 아직 막막하다.

    8월6일 드디어 원폭 투하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작전개시, 총공격명령을 내린다.
    외상 몰로토프가 일본대사에게 선전포고문을 전달한 것이 모스크바 시간 8월8일 오후6시, 포츠담회담 폐막과 함께 전투태세로 배치해 둔 3개방면군, 제1극동방면군, 제2극동1방면군, 자바이칼방면군은 일제히 만주 국경지대와 한국의 두만강을 넘어 쇄도하였다.

    그 시간 두 번째 원폭 ‘팻맨’을 탑재한 B-29가 일본열도로 들이닥친다.
    당초 목표는 큐슈(九州) 고쿠라(小倉)라였으나 두꺼운 구름 때문에 선회하다가 U턴, 나가사키(長崎)에 투하한다. 일본시간 8월9일 오전 11시, 4만명이 즉사했다.
    트루먼은 또 라디오로 ‘진주만의 보복’을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소련군의 목표, 미군 상륙 전에 서울 점령

    두만강을 넘어온 소련군은 제1극동방면군 산하 제25군, 연해주집단군의 사단장이던 치스차코프(Ivan H. Chistiakov)가 지휘하는 4만명 규모의 병력이다. 8월8일밤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경찰서 습격 방화하고, 나진(羅津)항엔 조명탄을 쏘아올려 일본 관동군의 물자와 창고를 불태우며 부두의 유류드럼통이 모두 폭발하여 항구일대는 바다까지 불바다가 되었다. 
    웅기(雄基) 항에 소련 군함2척이 들어와 쏟아져 나온 소련군이 일제히 상륙작전을 벌였다. 13일엔 청진(淸津)에 함포사격, 15일까지 육군 1개사단과 전차부대가 상륙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사흘간의 전쟁은 18일 소련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일본군의 소련 침공 작전기지가 완전히 파괴되고 소련군은 21일 원산(元山)에 상륙, 함경도를 장악했다. 
    서부지역에 쇄도한 소련군은 8월22일 평양을 점령하고 25일엔 황해도까지 장악한다.
    일본 천황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항복방송(8.15)이 나간 지 불과 열흘 만에 소련군은 북한 전역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다. 미군 선발대는 9월8일에야 인천에 들어온다. 
  • ▲ 1945년 8월12일 새벽, 백악관 별채 3부조정위원회 지시에 따라 본스틸 대령이 30분만에 그렸다는 38선 표시 지도.(자료사진)
    ▲ 1945년 8월12일 새벽, 백악관 별채 3부조정위원회 지시에 따라 본스틸 대령이 30분만에 그렸다는 38선 표시 지도.(자료사진)
    ◆ 38선 탄생 이야기...벽걸이 지도 내려 30분만에 그렸다

    8월10일 일본이 항복의사를 밝힌 다음날 8월11일, 미국정부 3부(국무부, 전쟁부, 해군부) 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SWNCC)가 열렸다. 포츠담 회담 한 달 전에 트루먼이 소집한 군 수뇌회의에서 처음 한반도 작전문제를 포함한 소련 참전 대책을 논의한 뒤 두 달 만에야 이번엔 국무부까지 포함하여 일본 항복후의 미국정책을 결정하는 회의를 연 것이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스탈린은 이미 포츠담회담 전에 모든 참전 준비를 끝냈고 지금 만주와 한반도를 동시에 공격, 물밀 듯이 전격작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8월11일 군부의 요구에 따라 포츠담선언의 ‘조건부 수락’을 내놓았다. ‘천황의 지위 유지’가 항복 조건이다.
    미국은 즉각 거부하였다. 그리고 지금 3부조정위원회는 최종 방침을 결정하고 이를 문서화하느라 분주하다. 이 회의가 만든 것이 ‘일반명령1호‘(General Order No. One)이다.
    제1항은 ‘일본 천황과 일본 정부의 권위(authority)는 항복한 순간부터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것을 규정하고, 제4항에서 ‘일본의 궁극적인 정체(政體)는 일본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결정된다’고 하여 ‘천황제 유지’의 가능성을 일단 양보한 것이 되었다.
    일본에 관한 것은 영국, 중국, 소련의 동의를 거쳐 일본정부에 일방 통보하였다.

    유명한 <일반명령 1호>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정해진 것이 38선이다.
    원자탄 투하로 소련의 참전 없이 일본의 항복을 받으려던 미국의 생각은 생각일 뿐, 일찌감치 물 건너갔다. 스탈린이 예상보다 빨리 선전포고를 발하고 만주와 한반도를 빠른 속도로 진격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당황하였다. 이대로 두면 한반도는 우려했던바 ‘폴란드의 복사판’이 될 수 밖에 없는 형편이다. 

    38선을 그은 장교 트리오—링컨, 본스틸, 러스크 

    트루먼 대통령이 만든 SWNCC는 백악관 비서실 별채에 상주하였는데, 임시 차출된 엘리트 장교들 중에 ‘38선’을 뚝딱 만들어낸 3명이 들어있었다.
    바로 ‘일반명령 1호’ 작성을 담당한 팀의 조지 링컨(George A. Lincoln·1907~1975) 소장,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III·1909~1977) 대령, 딘 러스크(Dean Rusk·1909~1994) 중령이 그들인데 모두 옥스퍼드 출신 30대중반 ‘자칭 천재’들이라 한다. 

    지난달 7월 포츠담에서 마셜의 지시를 받은 육군 작전국이 만들었던 계획안은 한반도를 독일처럼 4개연합국이 도별로 분할 점령하는 것이었다. 이 안은 소련이 파죽지세로 쳐내려오는 긴급 상황에선 무용지물이다. 
    3부조정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차관보 제임스 던((James C. Dunnn)은 8월 11일 육군부 작전국에 소련군의 남진에 대응하여 미국이 수도 서울과 인천, 부산을 장악하는 군사분계선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시간은 새벽2시, 뉴욕 타임즈를 읽고 있던 링컨 소장은 본스틸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똑 같은 지시를 내린다. 본스틸과 러스크는 코리아 지도를 찾았으나 마땅한 게 없어 고민하다가 벽걸이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지도를 보았다. 이를 내려놓고 두 사람은 “30분쯤 궁리 끝에” 푸른 잉크로 서울과 인천을 포함하는 38선을 그어 링컨 소장에게 보고했다. (신복룡 [주간조선] 2015, 4.3, NO 2351)
    이 안이 합동참모본부(JCS)와 3부조정위원회의 번스(James Byrnes) 국무장관, 스팀슨(H. Stimson) 전쟁장관, 포레스털(J. V. Forrestal) 해군장관의 검토를 거쳐 트루먼 대통령에게 올라가고 최종적으로 맥아더 연합군총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 ▲ 38선을 만든 3인조. 링컨 소장,본스틸 대령, 러스크 중령.ⓒ조선DB
    ▲ 38선을 만든 3인조. 링컨 소장,본스틸 대령, 러스크 중령.ⓒ조선DB
    ◆스탈린, 연합군사령관 2명 제안...미국이 거부하자 38선 수락

    흔히 스탈린은 미국이 38선을 제안하자 “뜻밖에 순순히 응했다”고들 말한다.
    과연 그랬던가. 뒷날 공개된 미국무부 문서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즉, 협의과정에서 스탈린은 한반도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할 “연합군 최고사령관을 미국측과 소련측의 두 사람”으로 정하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패망 후 일본영토 분할에 스탈린은 얄타회담서 약속받은 전리품(남만주철도, 남사할린, 쿠릴열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양국이 대등하게 나눠 갖자는 속셈을 드러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미군이 상륙하기 전에 서울을 선점하려고 빠르게 남진, 미국이 38선을 제안했을 때 이미 38선을 넘어 개성(開城) 남쪽까지 밀고 내려온 참이었다.
    미국이 물론 ‘2명의 연합군총사령관’ 제안을 거부, 남진하던 소련군은 다시 개성이북으로 되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
    스탈린은 왜 미국의 거부에 반항하지 못하고 물러갔던가?
    미국의 원자탄 때문이다. 며칠 전 원폭 두 방을 거침없이 사용한 미국과 군사충돌이 일어난다면 전쟁이 되고 그 원폭은 모스크바를 때릴 지도 모른다. 트투먼은 루즈벨트가 아니었다.
    기다리자. 언제까지? 지금 미국의 기술을 훔쳐다가 개발 중인 소련의 핵실험이 성공할 때까지! 
    스탈린은 울멱 겨자먹기로 38선 제안을 수락하였고, 서울 점령을 눈앞에 둔 소련군을 북상시키며 다짐한다. 핵무기 가지게 되면 반드시 다시 오리라.

    ★스탈린, 베리야를 질책...원자탄 개발 총력전 돌입

    포츠담 회담 일주일째 되는 날, 트루먼이 스탈린에게 ‘신무기’를 은근히 자랑하던 7월24일.  스탈린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어찌 되었느냐? 한다 한다하는 원자폭탄 실험 결과는 무엇이냐?”
    “2주 전에 실험한다 했는데 계획했던 폭발 여부에 대한 정보는 아직 없다”
    스탈린이 폭발했다. 지금껏 미국서 빼내온 정보들이 모두 거짓 아니냐, 베리야는 미국의 간첩들 손에 농락당하는 것이냐? 펄펄 뛰는 스탈린은 미국이 유럽과 소련을 지배하면 어쩔것이냐고 식식거렸다. “그렇게는 안돼...안돼...” 미국의 핵무기독점은 절대로 안된다고 다짐하였다.
    (안드레이 그로미코 [회고록] 1989)

    스탈린의 특별지시로 베리야가 총지휘하는 ‘특별위원회’가 출범, ‘원자력 산업’이라는 이름아래 어마어마한 개발 총력전이 벌어진다. 우라늄 농축 기업들과 원자로, 원심분리기, 폭탄 제조 공장들이 단기간에 설립됐다. 우랄 산맥과 시베리아, 카자흐스탄 등 깊숙한 곳에 비밀 산업단지들이 나타났다. 그 도시들의 정체는 개발 관련자들만이 '아톰 그라드'로 부르는 ‘핵도시'. 그리고 4년후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에서 마침내 원자탄 폭발실험 성공! 
    다음해 6월25일 일요일 새벽, 한반도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침략전쟁을 개시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