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남 여운형은 체격도 언변도 좋아 남녀 청년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나가는 여운형이 연설하는 모습. 남다른 열정과 어퍼컷 주먹질이 청중을 휘어잡았다고 한다.(자료사진)
    ▲ 미남 여운형은 체격도 언변도 좋아 남녀 청년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해나가는 여운형이 연설하는 모습. 남다른 열정과 어퍼컷 주먹질이 청중을 휘어잡았다고 한다.(자료사진)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내려 온다”
    이승만이 수없이 경고했던 말이 현실로, 그것도 전광석화처럼 닥쳐왔다.
    “스탈린은 한인부대를 훈련시켜 한반도를 점령하고 공산정권을 세우려 한다”
    트루먼과 미국무부에 이승만이 여러 번 예고했던 대로, 대일참전 소련군은 물밀 듯이 쳐들어와 며칠 내로 서울까지 점령할 기세였고 남한의 공산세력도 눈앞에 다가온 ‘공산 천국’의 꿈에 부풀어 일제히 지상으로 뛰쳐나왔다. 이때 전국 형무소에서 석방된 좌익 사범들만 1만 명도 넘는다. 

    ◆해방 그날,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 발족...금방 전국 조직화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다급했다. 8월10일 항복 의사만 밝힌 본국의 조선정책이 없어 금방 소련군에 짓밟힐 듯. 아니, 한국인들이 먼저 들고 일어나 77만 일본인들을 보복할 긴박한 위험에 빠졌다. 경무국장 니시히로 타다오(西廣忠雄)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가 나선다.
    먼저 민족세력의 중심인물 송진우(宋鎭禹,1890~1945)에게 교섭하여 ‘치안’을 맡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송진우는 즉각 거절한다. “일본인들이 후퇴하면 될 것인데. 지금 조선인이 일본인의 지시를 받아 일할 때란 말이냐” 그리고 집에 몰려온 동지들에게 말한다.
    “지금은 침묵이 상책, 우리가 움직일수록 일본의 손아귀에 끌려들어갈 뿐이오” 송진우는 임시정부가 귀국하기만 하면 ‘만사 해결되리라’ 태평이었다고 한다. 
    안재홍은 “참 로맨틱도 하시오. 침묵만 하고 앉아있으면 이승만 박사가 미국 군함이라도 타고 인천 항구에 들어올 줄 아시오?” 화를 냈다. ([고하 송진우선생전] 동아일보, 1965, 김준연 ‘나만이 아는 비밀, 송진우 안재홍 여운형과 해방정국’ [독립노선] 돌베개. 1984)
  • ▲ 여운형과 마지막 일본총독 아베 노부유키(오른쪽).
    ▲ 여운형과 마지막 일본총독 아베 노부유키(오른쪽).
    다급한 총독부는 여운형(呂運亨)을 부른다. 
    소련군이 8월17일경이면 서울에 들어 올 것인데, 레닌의 지도를 받은 친공 인물 여운형이 오히려 훨 유리하다. 소련군 앞에 내세우면 답답한 송진우보다 좋은 방패 아니냐.
    8월15일 이른 아침 6시 필동의 정무총감 관사(현 한국의 집 자리)에 달려간 여운형은 즉시 수락하였다. 엔도의 간청에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겠다“며 ‘치안권’을 접수, 식량사정과 경찰 관할권 등을 챙기는 것이었다. 이때, 총독부는 활동비라며 일본돈 2,000만 엔을 여운형에게 주었다고 한다. (미군정문서 [주한미군사] 돌베개, 1979)
    여운형과 안재홍(安在鴻,1891~1965)은 ”치안권 만으론 안 되고 정치를 장악해야 한다”고 합의, 그날로 여운형은 1년 전에 만든 비밀 측근조직 ‘건국동맹’ 인사들을 소집한다. 
    소련치하의 독립을 위해 모든 공산주의자들과의 제휴를 확인한 여운형은 그 자리에서 ‘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을 발족시켰다. 이름은 문재 좋은 안재홍이 즉석에서 지었다. 
    안재홍은 ‘공산당 일색’의 조직에 놀라 여운형에게 ”우파도 넣자‘고 몇 번 말하다가 결국 얼마후 탈퇴하게 된다. 
    이튿날부터 전국에 지방 ‘건준’이 조직되었다. 해방과 동시에 나타난 ‘건준’에 전국이 열광한다. 
    ”드디어 이것이 우리 독립정부구나“ 너도 나도 건준 조직에 뛰어들었다. 산불처럼 번지는 ‘빨간 정부’가 며칠 사이 지방도 휩쓸었다.
    송진우는 약병을 머리맡에 두고 아프다며 이불속에서 꼼짝도 안한다. 

  • ▲ 박헌영과 여운형.(자료사진)
    ▲ 박헌영과 여운형.(자료사진)
    ◆박헌영, 서울로 직행 ‘8월 테제’ 발표...조선공산당 재건

    박헌영이 나타났다. 6년 전 출옥한 그는 전라남도 광주에 숨어 똥지게를 지고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벽돌공장으로 옮겨 벽돌을 나르던 중에 뛰쳐나온 것, 8월17일 광주역에 달려가 양복을 사 입고 트럭에 올라탄다. 광주 ‘건준’을 만들고 서울 가는 트럭이다. 
    가장 급한 일은 조선공산당 재건이다. 자신이 25세 때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로 뛰면서 지하활동을 벌여 1925년 창립했다가 무너진 조선공산당 재건은 코민테른의 명령을 받고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번번이 실패하였다. 

    8월18일 서울에 내려보니 ‘박헌영 동무는 빨리 나와 우리를 지도하라”는 벽보들이 반긴다. 
    박헌영은 정동의 소련영사관 부영사 샤브신(Anatoli I. Shabshin)부터 찾아갔다. 은신 중에도 자주 연락했던 ’공산 종주국 지도자‘ 샤브신과 운동방향을 논의한 그는 ’8월 테제’를 발표한다. 그것은 소련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국제공산당)이 1927년에 발표한 ‘12월 테제’의 복사판, 즉 한국은 지금 단계에서는 ‘부르주아( Bourgeois) 민주주의 혁명’으로 공산당 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음달 9월20일 스탈린이 북한에 지령한 ‘민주기지론’과 똑 같다.
    그 사이 장안빌딩에서 만든 장안파 공산당을 부정하고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따라 모든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따르라“고 선언, 소위 ‘재건파 공산당’을 새 출발시킨 것이었다. 

    박헌영은 ‘코민테른의 적자(嫡子)’임을 자처한다. 그만의 국제공산주의 지도자 자격, 일찌기 소련 레닌이 총괄하는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지휘 감독하는 조선위원회는 지하공산당들이 ‘국제선’이라 부르는 기구, 박헌영은 그래서 ‘레닌의 직계’로서 20대 후반부터 ‘조선의 레닌’으로 떠받들어졌다.
  • ▲ 레닌의 공산주의에 매몰된 청년 박헌영(오른쪽).
    ▲ 레닌의 공산주의에 매몰된 청년 박헌영(오른쪽).
    ▶박헌영 이야기◀

    그리 되기까지 박헌영의 파란만장한 역정을 잠깐 돌아보자. 
    충남 예산 신양면에서 1900년 지주의 서자로 태어난 박헌영의 생모는 장터 주막집 과부였다. ‘첩의 자식’이란 눈길과 자격지심에 말없는 외톨이가 된 소년, 얼굴이 유난히 까무잡잡하여 ‘기왓장’이란 별명까지 얻은 소학교시절부터 독서와 공부에 열중하여 경성고보(현 경기고)에 진학한다. 신문물을 접하자 ‘미국 유학’ 꿈을 꾸며 영어실력을 키운다. 3.1운동을 겪으며 졸업한 후, 비싼 여비를 대겠다며 함께 유학 가자던 부잣집 아들 친구가 병으로 쓰러지자 박헌영은 일본 밀항을 감행한다. 두 달을 못 견디고 1920년 상하이로 밀항한다. 거기서 국제유학준비학교에 들어가 영어공부에 매달리면서 평생 동지들 김단야(金丹冶, 1899~1938), 임원근(林元根, 1899년~1963)을 만났다. 일찌감치 공산주의에 몰입한 김단야와 함께 공산주의에 눈뜬 그에게 여운형이 나타났다. 
    소련 코민테른이 1920년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를 앞세워 고려공산당을 만들 때 창립멤버였던 여운형은 그때 이르쿠츠크파 상하이 지부장으로 박헌영보다 14세 위였다.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한 박헌영은 뛰어난 이론가로 맹활약하여 비서가 된다. 고려공산당에 가입, 사회주의연구소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유학생 미인 주세죽(朱世竹)이 나타나자 결혼한다.  여운형은 앞장서 결혼반지 등 준비와 주례를 맡아주고 프랑스조계의 자기 집 뒷방에 신혼 살림방까지 내어준다. (안재성 [박헌영 평전] 인문서원, 2020)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회의에 여운형, 이동휘, 김규식 등과 참가한 박헌영은 레닌의 ‘조선 공산당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아 국내로 잠입한다. 
    신의주에서 붙잡혀 2년 복역한 뒤 출옥한 그는 서울로 들어와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로 위장취업하여, 전국 지방조직을 만들면서 마침내 조선공산당을 창립한다.
    1925년 4월17일 점심시간,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자리)옆 중국집 아서원(雅敍園)에서 연회를 가장하여 조봉암(曺奉岩,1898~1959) 김단야 주세죽 등 19명이 모여 전격적으로 창당을 선언, 책임비서가 된다.
    다음날 18일 박헌영은 종묘앞 훈정동(薰井洞) 사글세 단칸방에서 조봉암 등 30세이하 20명이 고려공산청년회도 일사천리로 출범, 책임비서로서 코민테른에 보고하여 모두 승인을 받는다. 고려공산당도 분열되어 승인을 못 받았는데 이로써 사상처음 코민테른의 승인을 받은 공산당이 되었다. 
    만25세 박헌영은 일약 국제공산당의 조선 지도자로 우뚝 선다. 이제 우리나이 40세 여운형도 젊은 지도자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

    한 달 후 5월 동아일보 기자들의 동맹파업을 주도한 박헌영은 해직된다. 동아일보 영업국장이던 홍증식(충남 당진 출신 공산주의자)이 조선일보 영업국장으로 이동하자 홍증식의 주선으로 박헌영은 8월에 사회부 기자로 취업한다. 그리고 9월 소련 총영사관 개설을 위해 총영사가 부임하였다. 박헌영은 즉각 김단야를 샤르마노프 총영사에게 보내 고려공산청년회와 연계를 맺는다. 
    그때 조선일보에 ”소련의 힘을 빌려 조선 독립을 쟁취하자“는 폭탄 사설이 터진다.
    총독부는 9월8일자로 조선일보를 무기한 정간 시키고 윤전기에 압류 딱지를 붙였다.
    문제의 사설은 인기 잡지 [조선지광] 기자를 거쳐 박헌영과 함께 조선일보 기자로 들어온 청년회소속 논설위원 신일용(辛日鎔)이 썼다. 한 달을 넘긴 필화사건은 총독부 요구대로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 기자 17명을 해고함으로서 끝난다. 
  • ▲ 모스크바의 28세 박헌영과 27세 부인 주세죽. 어린 딸은 소련으로 탈출길에 기차에서 출산한 비비안나.(자료사진)
    ▲ 모스크바의 28세 박헌영과 27세 부인 주세죽. 어린 딸은 소련으로 탈출길에 기차에서 출산한 비비안나.(자료사진)
    ★미친 짓 3개월...원산에서 소련으로 밀항
    박헌영을 ”더욱 위대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11월25일 밤 신의주 일경 구타사건. 결혼피로연에서 만취해 소란을 피우던 청년들은 식당주인이 아래층에 일본 순사가 와있으니 조용하라고 말리자 흥분한 청년들이 뛰어 내려가 집단 폭행을 가한다. 그 때 팔뚝에 숨겨 감았던 ‘붉은 완장’을 경찰들이 보았다. 일제 수사를 벌이자 ‘붉은 완장’ 청년 집에서 박헌영의 극비편지가 나왔다. 29일밤 박헌영 부부가 체포되고 전국에서 66명이 연행된다.
    다음해 6.10만세 사건을 비롯하며 갖가지 혐의로 2년간 참혹한 고문에 시달린 박헌영은 ‘정신이상’이 왔다. 아내도 못 알아보는 헛소리와 욕설, 자기 대변을 칠하고 먹는 미친 짓을 계속하자 1927년 11월 병보석이 떨어졌다. 
    박헌영의 목적은 소련 망명, 두 달 동안 매일 계속한 미친 짓은 ”귀신도 속아 넘어 갈“ 연극이었다.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청계연구소, 1986)
    10개월 ‘요양’이 끝난 다음해 원산항에 숨어들어 소련으로 밀항한다.
    (그동안 ‘박헌영이 두만강을 건너갔다’며 이때 「영화감독 김용환이 박헌영을 ‘님’으로 삼아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를 지었다」는 스토리를 [박헌영 평전]등에서 주장해왔는데, 이는 확인 결과 김용환의 활동경력과 시간적 격차 등 사실과 맞지 않는 일방적 기술임이 확인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열차 편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한 부부는 1928년 1월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했다. 코민테른이 운영하는 공산주의 최고 간부를 교육하는 기관, 아무나 입학할 수 없는 그곳에 박헌영은 특별히 선택받은 것이었다.  
    그는 곧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3년간 혁명가 수련에 올인하며 조선의 현장지도에 매진한다. ‘1국1당’ 체제로 세계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통제하는 기관 코민테른의 동양비서부는 극동3국 담당, 조선위원회는 무너진 조선공산당의 재건과 확산이 시급하고 그 전권을 위임밭은 코민테른 지도자는 박헌영이다. 그는 이제 완벽한 파시스트 레닌주의자로서 소련의 국제공산주의 노선에 충성하는 ‘국제선’(國際線)이다. 그의 조국은 소련 공산당, 뒷날 이승만이 ”공산당은 저의 조국 소련으로 가라“고 외쳤던 그 공산당의 주인공이 박헌영이었다.
  • ▲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교육생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단야. 그 옆 중앙이 박헌영. 주세죽은 두번째줄 왼쪽 끝.(자료사진)
    ▲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교육생들.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김단야. 그 옆 중앙이 박헌영. 주세죽은 두번째줄 왼쪽 끝.(자료사진)
    ★박헌영의 김구 비판
    1932년 국제레닌학교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수료한 박헌영은 상하이로 파견된다. 주세죽과 세 살 난 딸, 김단야와 함께 프랑스조계에서 코민테른의 공산당 재건 기관지 [꼼무니스트]를 제작, 국내에 배포하였다. 
    이때 박헌영이 ‘윤봉길 의거’에 대하여 김구를 비판하는 글이 눈길을 끈다.
    ”개인적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애가 되며.....안중근을 대대로 팔아먹 듯이 윤봉길의 생명을 제단에 바친 김구 일당이 각 방면으로부터 윤봉길의 값을 받아서 부자가 되었고, 좀 더 얻어먹으려고 각 신문에다 ‘윤봉길을 시켜 폭탄을 던지게 한 어른은 누구냐? 곧 나다. 나는 누구냐? 나는 김구다’라고 커다란 광고를 냈다는 것은 기괴할 것이 없는 것이나 이런 것이 임시정부 수령들이 하는 ‘조선독립운동’이라니...“ ([꼼무니스트] 제6호, 1932). 박헌영은 공산주의 투쟁 방식은 동맹파업, 농민쟁의 조직화라고 주장했다.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잃다
    두 번 째 상하이 생활 1년 6개월 만에 박헌영은 또 체포된다. 거리에서 붙잡힌 그가 주세죽에게 연락할 틈도 없이 일본경찰은 일본으로 서울로 끌고다녔다. 온갖 고문 끝에 6년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으로 옮겨진다.
    그 사이 상하이의 주세죽은 ”남편이 죽은 줄 알고“ 김단야와 모스크바로 돌아갔는데, 두 사람은 동거하여 아이까지 낳았다. 

    1937년 스탈린의 대숙청 바람에 공산당 김단야도 죽는다.
    베리야가 ‘반혁명분자’ 대청소에서 70만명 이상을 처형하였다. 주세죽도 체포되어 카자흐스탄에 유배되는데 거기엔 홍범도가 유형되어 와있었다. 주세죽은 방직공장서 15년간 노동하다가 남편을 보지 못한 채 죽는다. 
    아내와 친구의 일을 전혀 모르는 박헌영은 1939년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어 인천, 서울 등지의 아지트에 숨어 다니며 코민테른의 지상명령 ‘조선공산당 재건’사업을 또 한다. 
    이때 ‘아지트키퍼’이던 18세 처녀 정순년과 동거한 박헌영은 41세때 1941년 3월 첫 아들 박병삼(朴秉三, 족보명 박세원朴世元)을 낳았다. 그가 뒷날 법명 원경(圓鏡)이란 스님이 되어, 박원순(朴元淳, 1955~2020, 전 서울시장)과 손을 잡고 ‘이정 박헌영 전집’을 출간한다. 이정(而丁)은 박헌영의 호. 
  • ▲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기사(애일신문 1945.9.7일자)와 조각 인선 발표기사(매일신문,1945.9.15일자). 폐간되었던 조선-동아일보가 속간되기 전에, 조선공산당은 매일신문을 기관지처럼 사용했다.
    ▲ '조선인민공화국' 선포 기사(애일신문 1945.9.7일자)와 조각 인선 발표기사(매일신문,1945.9.15일자). 폐간되었던 조선-동아일보가 속간되기 전에, 조선공산당은 매일신문을 기관지처럼 사용했다.
    박헌영, 여운형의 ‘건준’ 장악...‘조선인민공화국’ 선포

    박헌영에게 있어서 이념선배 여운형은 멘토로 시작하여 국제공산당 질서에 따라 180도 전도된 상하관계로 변한 것은 앞에서 간단히 보았다. 박헌영이 코민테른의 ‘국제선’으로서 온갖 고초를 극복한 투쟁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였기에 ‘건준’도 이제 조선공산당 총비서 박헌영의 손에 달려있다. 
    8월20일 조선공산당 재건을 발표한 박헌영은 ‘건준’을 인민위원회로 개편, 전국 조직을 더욱 확대한다. 
    그런데, 8월24일 ‘38선 분할점령’이 알려지고 미군이 남한에 진주한다는 발표를 듣자 비상이 걸렸다. 소련군이 먼저 올 줄만 알았던 좌익세력은 바쁘게 뛴다.
    9월4일 경성의전병원(현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건준’부위원장 허헌(許憲,1885~1951)의 병실에 박헌형, 여운형, 장안파공산당 지도자 정백((鄭栢,1899~1950) 네 사람이 모였다. 
    며칠사이 설왕설래한 ”비상한 시국에 비상한 방법으로 비상한 대책“(여운형의 말)의 비밀음모, 그 결론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이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정부를 세우자, 소련군도 연합군으로 오리라...그 앞에 ”조선인의 정부를 세워놓아야“ 오래된 코민테른의 목표 ‘고려인민공화국’을 실현할 수 있다.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마당이라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름을 정했다.
    비가 퍼붓는 9월6일 밤, 테러를 당했던 여운형이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섰다.
    ‘비상한 때에는 비상한 인물들이 비상한 방법으로 비상한 일을 하지않으면 안된다”
    인물 좋고 청산유수(靑山流水) 언변을 자랑하는 ’정열의 선동가‘ 여운형의 말이 끝나자 중앙인민위원회가 구성된다.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원봉 등 좌우를 망라한 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12명을 발표한다. 총75명 가운데 52명이 공산주의자들이다. 
    그 시간, 미군 선발대가 어둠 속에 인천으로 상륙하고 있었다.
  • ▲ 서울 인왕산 기슭 옥인동 높은 언덕에 우뚝 솟은 프랑스식 건물 윤덕영의 별장, 해방후 9월6일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이 건물을 사무실로 사용했다.(자료사진)
    ▲ 서울 인왕산 기슭 옥인동 높은 언덕에 우뚝 솟은 프랑스식 건물 윤덕영의 별장, 해방후 9월6일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이 건물을 사무실로 사용했다.(자료사진)
    미군의 진주 전에 부랴부랴 선포한 ’인민공화국‘ 사무실은 인왕산 기슭에 올라앉은 프랑스식 건물, 친일파 윤덕영(尹德榮,순종비 윤비의 백부)의 호화판 별장이다. 

    9월8일 미군의 서울 진주와 ’인민공화국‘의 출현에 전국이 들끓는 와중에 9월14일 각료명단이 발표되자 해방정국은 또 한번 소용돌이쳤다.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 여운형, 국무총리 허헌, 내무부장 김구, 군사부장 김원봉....박헌영은 빠졌다. 친미지도자 이승만을 ’주석‘에 앉힌 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위한 통일민족전선” 전략임을 코민테른 전문가 박헌영이 실토한다.
    이승만, 김구 등 귀국하지도 않은 본인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여운형 파는 속았다며 반발했다. 예고도 상의도 없이 공산당이 기습적으로 발표하였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전국 지방에 조직된 인민위원회는 남한 7개도, 12개시, 131개군 등 도합150개였다.
    무주공산(無主空山:임자없는 빈 산)을 단숨에 집어삼킨 공산주의, 북한은 스탈린이 먹고 남한은 ’조선의 레닌‘ 박헌영이 차지하였다.
    미국의 이승만이 귀국하기 한 달 전, 중국의 임시정부가 들어오기 두 달 전이다.

    지방 인민위원회에는 좌익뿐만 아니라 우익 유지들까지 너도나도 대거 참여하였다. 해방된 나라에 등장한 인민공화국을 36년간 갈망하던 독립국 정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코민테른 전략가 박헌영이 38선 이남의 헤게모니(Hegemony)를 선점하는데 성공하였다.
    한국을 모르는 미군정사령부가 ’영어 행정‘으로 갈팡질팡하는 사이, 이들 인민위원회가 정부 역할을 도맡았다. 해외에서 돌아오는 동포들을 뒷바라지 해주고 영어를 모르는 주민들을 도와지방행정에 앞장섰다. 
    그러는 한편 지하에선 좌익의 무장조직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다음해 1946년 3월 미군정장관 아널드(Archibald V. Arnold)가 ’인민공화국‘을 규탄하고 박헌영에게 ’국(國)을 당(黨)으로 바꾸라‘고 간청할 때까지 지속된다. 
    그 한달 전 2월엔 평양의 소련군정이 가짜 김일성을 만들어서 ’북한 인민위원회‘(정부)를 출범시켰다.
    일본이 물러간 6개월 넘기까지 남한은 공산당이 지배하고 북한엔 공산정권이 등장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