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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귀국후 연설하는 이승만 박사.ⓒ연세대이승만연구원
    어느 날 갑자기 항일 독립운동이 끝났다. 
    독립투쟁이 아닌 미국이 일본을 원폭 두 방으로 항복시켰다.
    독립운동가들은 허탈했다. 남의 힘으로 투쟁 대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다음 순간 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꿈에 그리던 ’우리 땅‘을 찾았다는 기쁨은 짧았다.
    독립운동가들은 놀라고 당황했다. 어느날 갑자기 한반도 허리를 38선이 가로막았다.
    “일본만 없어지면 삼천리 금수강산은 우리 나라인줄 알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북한은 소련이 점령하고 남한은 미국이 점령했다. 한반도는 승전 강대국들 차지다.
    전혀 새로운 세상, 새로운 판세!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나. 독립운동가들은 우왕좌왕이다,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독립국가를 세워야 하는데 속수무책이다.

    공산주의자들은 때를 만난 듯 북한의 소련 품으로 몰려갔다. 항일투쟁의 목표가 이것 아닌가. 그동안 갈고 닦은 코민테른의 전략전술대로 삼천리 붉은 강산 ’인민공화국‘을 만들면 된다. 중국에서 해방순간 그들은 임시정부를 해체하라 외쳤다. ”너희는 이제 용도폐기야.“
    그 임시정부는 어떤가. 소위 민족주의 세력의 대표기관 임시정부를 이끌던 김구와 임정인사들은 안절부절이다. 항일투쟁 밖에 몰랐던 그들은 상상도 못했던 상황 전개 앞에서 갈팡질팡이다. ”소련이나 미국은 곧 물러가겠지. 임정이 귀국해서 집권하면 만사해결 되겠지...“ 하지만 자신이 없다. 중국 장제스에 구원을 청해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장제스는 해방후에도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다. ’개인자격‘으로 귀국하라’는 명령에 망연자실이다. 

    이승만이 돌아온다. 37세에 떠난 조국, 70세에 귀국하는 이승만은 달랐다. 
    해방순간 그는 허탈하지도 않았고 38선 출현에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예견했고 얄타회담의 ’밀약‘을 예상하고 분노하였으며 미국과 소련을 상대로 싸워왔기 때문이다.
    ”일본이 물러가면 소련이 점령하고 공산정권 세운다”는 예고와 경고를 얼마나 했던가.
    세계는 이미 항일투쟁 단계를 넘어선지 오래다. 소련 공산세력과 자유세계의 이념전쟁 시대가 다가왔음을 미국보다 먼저 느끼고 확인하고 이에 대비하려 주먹을 쥔 이승만이다. 
    해방되자마자 ’건국외교‘부터 시작한다. 이승만은 미국, 영국, 중국과 소련 스탈린까지 강대국 정상들과 유엔 사무총장에게 축전을 보내고 대한민국 독립을 지원해달라고 요청하는 편지 외교를 서둘렀다. 침략 예상자 스탈린에겐 ’한반도 평화‘를 특별히 강조하였다. 

    여기서 ’유엔‘에 주목해야 한다. 해방 전부터 그는 유엔의 힘을 독립에 이용하고자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2년 후 유엔의 결의를 얻어내 대한민국을 건국하지 않았는가. 
    이것이 해방정국 3년간 이승만의 독립투쟁이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차원이 달랐던 까닭이오, ‘1인 투쟁’ 이승만만이 건국할 수 있었던 새 역사 창조의 글로벌 리더십이다. 그것은 약소국 지도자로서 불굴의 신념과 불굴의 신념이 낳은 불굴의 용기와, 평생 공부한 동서양의 지혜, 세계판도를 아우르는 투철한 통찰력과 예지력이 네트워킹한 전략전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선견지명의 역사적 혜안이 설계한 ‘이승만표 건국전쟁’의 발길을 따라 가보자.
  • ▲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와 미국무부 실세 소련간첩 알저 히스.ⓒ뉴데일리DB
    ▲ 독립운동가 이승만 박사와 미국무부 실세 소련간첩 알저 히스.ⓒ뉴데일리DB
    미국, ‘반소주의자’ 이승만의 귀국을 막다

    소련 빨치산 33세 김성주가 평양에서 ‘김일성’으로 변신하여 첫 공개신고식을 마친 이틀 후, 10월16일 오후 김포공항에 미군 군용기가 내려앉았다.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The Bataan)이다.
    그가 나타났다. 만70세 넘은 이승만이 미군복차림으로 내린다. 군복은 군용기 탑승의 매뉴얼이다. 망명 33년 만에, 유학부터 치면 41년 만에 돌아온 조국, 환영인사는 아무도 없다. 미국이 이승만의 귀국을 비밀로 했기 때문이다. 

    왜 해방을 두 달이나 넘겨서야 귀국했나? 소련과 신탁통치를 추진해야하는 미국은 ‘반소’ 이승만의 귀국을 원하지 않았다. 더구나 미국무부의 소련 간첩들이 가만있겠는가.
    그때까지도 ‘무국적’을 고수하고 있던 이승만은 일본이 1차 항복의사를 밝혔던 8월10일 귀국 여권을 신청하였다. 미국무장관 번스가 한 달 지나서 일단 여행권을 재가하였다. 하지만 출국을 위해서는 일본 점령사령관 맥아더의 ‘입경허가’를 받아야하고 교통편의를 허용하는 전쟁부의 보증을 받아야 한다. 아직도 한반도는 일본 땅, 아니 미국의 점령지다. 
    차일피일 세월만 흘러가는 가운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여권 취소‘ 통보였다. 
    이유는 여권신청서에 기재한 ‘주미고등판무관’이란 신분이 부절적하다는 것, 그 신분명칭은 4년전 임시정부가 부여한 ‘주미외교위원장’이란 직명을 ‘High Commissioner to the United States’로 영어 표기하여 사용해온 것인데 이제 와서 새삼 왜 시비일까. 
    또 일주일이 지난 9월21일 다른 통보가 왔다. 이승만의 신분을 그냥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국인’(Korean national returning to Korea)이나 그 밖의 다른 용어로 바꿔서 신청하라고 했다. 즉, 임시정부 직함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 무명의 개인자격으로 가라는 이야기이다.
    이승만의 직명표기대로 ‘입경 허가’를 내준 합동참모본부의 스위니 대령은 이미 ‘처벌’까지 받았다고 했다. (올리버 [신화속의 인물 이승만] 앞의 책). 
    이승만의 귀국을 돕기 위해 앞장선 굿펠로가 이리저리 뛰어도 ‘국무부는 더 이상 이승만의 여행계획을 지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입을 막았다. 

    이런 시비의 주역은 새로 부임한 극동국장 빈센트(John C. Vincent)와 일본과장 딕오버(Dickover)였다. 중국 근무시 중국공산당에 기울었던 빈센트는 루즈벨트 측근이자 소련 간첩인 알저 히스(Alger Hiss)와 함께 사상적 문제아임이 밝혀진다. 1951년에 전 소련간첩에게 고발당한 빈센트는 ‘공무수행 부적격’ 판정을 받고 1953년 덜레스 국무장관 요청으로 축출된다.

    이승만은 10월1일자 메모랜덤에 ”이들 국무부 안의 친공친일분자들이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아래 두기로 스탈린과 비밀협약을 만든 자들이고, 자신의 여행까지 막고 있다“고 적었다.(이정식 [해방전후의 이승만과 미국], [대한민국의 기원], 일조각 2006)

    ★”우리 대통령 왜 안데려 오느냐“ 국민들 성화에 하지 나서다
    이승만의 조속한 귀국은 주한미군정 사령관 하지(Hodge)도 원하고 있었다. 지방시찰한 민정장관 아널드가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왜 데려오지 않느냐’는 주민들의 성화에 놀라 건의하자, 이를 하지가 직속상관 맥아더에게 요청한 것이었다.
    ”워싱턴에 있는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을 찾아서 서울로 보내라“는 합동참모본부의 전문을 받은 전쟁부 소속 군사정보부는 이승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비밀리에 동양노인을 찾았다
    마침내 이승만은 10월4일 밤 민간 비행기로 워싱턴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 군용기로 바꿔 타고 멀리 괌(Guam) 섬을 경유하여 10월10일 도쿄 아쓰기(厚木) 기지에 도착한다. 하지는 10월12일 도쿄로 건너가 이승만을 맞이하였다. 
    이승만은 하지와 만나 국내상황을 점검한 뒤 맥아더와 장시간 요담한다. 맥아더는 하지에게 ”이승만을 국민적 영웅으로 환영하라‘고 권고, 하지는 먼저 서울로 돌아왔다.
    (임병직 ’워싱턴 외교위원부 장거리 전화‘ [북미시보] 1945,10.18일자. 손세일, 앞의 책)
    이승만은 맥아더와 회담을 더 한 뒤, 10월16일 맥아더가 내준 전용기 ’바탄‘을 타고 김포에 내린 것이다. 이제부터 진짜 독립운동이다. 아니 ’건국전쟁‘의 첫 걸음이다.
  • ▲ 하지 미군정사령관은 망명33년만에 귀국한 이승만 박사에게 조선호텔 최고의 스위트룸을 제공하였다. 사진은 일본이 1914년 건축한 경성철도호텔의 일제시대 모습. 오른쪽 건물은 1966년 철거후 신축한 오늘의 조선호텔ⓒ뉴데일리DB
    ▲ 하지 미군정사령관은 망명33년만에 귀국한 이승만 박사에게 조선호텔 최고의 스위트룸을 제공하였다. 사진은 일본이 1914년 건축한 경성철도호텔의 일제시대 모습. 오른쪽 건물은 1966년 철거후 신축한 오늘의 조선호텔ⓒ뉴데일리DB
    ◆“나는 평생 싸움꾼...건국 위해 당당히 싸우겠다”

    하지(52세)는 7순의 이승만을 극진히 모셨다. 숙소는 옛 왕궁터 조선호텔 3층에 식당과 회의실이 달린 스위트 룸, 맨 먼저 윤치영, 허정이 달려왔고 송진우, 김성수, 백관수, 장덕수, 김도연, 김준연 등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청년시절 일본이나 미국 유학중에 이승만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거나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다. 

    ★국내파 우익진영 ’한민당‘ 창당=식민시대 온갖 시련을 겪은 국내파 우익진영의 움직임은 왠지 참 느리다. 해방후 소련군 진주설에 긴장하고 임시정부의 귀환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제각기 여러 정당을 구상하다가 8월 말에야 ”미군 진주“ 소식을 접하고 ’대동단결‘로 모였다.
    9월6일 오후4시 종로의 협성실업학교 강당에서 700여명이 ’단일정당 결성 통합발기총회‘를 열고 ’강령‘과 ’정책‘을 기초하며 ’선언‘을 채택한다. ”우리는 맹세한다. 중경의 대한임시정부를 광복 벽두의 우리 정부로서 맞이하려 한다.“(허정 [내일을 위한 증언] 샘터사,1979)
    이날 밤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한민당은 열흘 후에야 창당식을 천도교회관 대강당에서 개최하고 ”미군정부에 적극 협력하면서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세력과 대결하겠다“는 당노선을 밝혔다. 수석총무 송진우는 사실상 당 대표가 된다. 이 한민당 간부들이 청년시절 우상이자 임정 대통령이던 이승만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 ▲ 1945년 9월6일 창당한 한국민주당의 주요인사들. 김성수, 송진우, 이인, 장덕수(왼쪽부터)ⓒ뉴데일리DB
    ▲ 1945년 9월6일 창당한 한국민주당의 주요인사들. 김성수, 송진우, 이인, 장덕수(왼쪽부터)ⓒ뉴데일리DB
    ◆첫 기자회견 ”38선은 소련의 요구인가?“ 미-소에 일격

    귀국 이튿날 10월17일 미군청정 회의실에서 열린 첫 귀국 회견에서 이승만은 소련과 미국에 일격을 가한다.
    ”33년만에 그립던 고국에 돌아오니 감개가 무량하다’고 입을 연 이승만은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감상만을 말하고있을 처지가 아니다. 나는 해외에서 싸움을 해온 싸움꾼이다. 건국을 위하여 동포의 살길을 찾아 당당히 싸우겠소”라며 “지금까지 미국 외무성과 싸워온 사람으로서 우리가 지금 이 기회에 정신을 못 차리고 뭉치지 않는다면 이 기회는 다시 얻기 힘들다”고 강조하고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였다.
    미국 기자가 38선 문제를 제기하자 기다렸다는 듯 이승만은 거침없이 속내를 쏟아냈다.
    “38선 문제는 미국서도 전혀 몰랐다. 소련 쪽의 요구가 있었던 모양이다. 미국 내에서도 이 38선 분할점령이 미-소 연합군이 합작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으며 나도 그 진실을 묻고 싶다....우리가 뭉쳐서 협력하면 해결될 줄 안다. 북한 점령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실지(失地:북한)의 완전회복이 급선무이다.” ([매일신문] [자유신문] 보도)
    이 발언은 이승만이 얄타회담의 ‘밀약설’을 폭로한바 ‘미국이 소련에게 한반도를 팔아먹은 게 아니냐’는 평소의 의구심을 다시 한번 폭로하면서 미국무부의 ‘친소친일분자’들을 공개 공격한 것이었다. 게다가 ‘북한 회복의 장애물 소련 제거하자‘는 주장이다.
    뉴욕타임스는 기사와 사설로 크게 보도하였다. “이승만이 소련에 대한 적개심을 거리낌없이 표명”했다며 얄타 폭로사건을 되짚으면서 “한국은 38선 분할에 대하여 진실된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는 이승만의 발언을 지지하였다. 
    미국무장관 번스는 놀라고 당황하였다. 미군정에 협력하겠다는 이승만의 출국 서약에 주의를 환기시키라는 전문을 일본주재관에게 보낸다. 이는 국무부 안의 알저 히스와 빈센트 등 친소세력이 번스에게 압력을 가한 것임은 물을 필요도 없다. 
  • ▲ 독립촉성회 결성을 보도한 [신조선보] 1945.10.25 (자료사진)
    ▲ 독립촉성회 결성을 보도한 [신조선보] 1945.10.25 (자료사진)
    ◆1주일 만에 ‘독립촉성회’ 결성...”신탁통치 막자“

    독립운동의 신화적 인물 이승만의 등장이 일으킨 열풍은 가히 ‘이승만 신드롬’이라 할만했다.(손세일, 앞의 책).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복간하기 전, 좌경적 신문들이 다수인데도 ‘우리의 최고 지도자’ ‘독입운동의 선구자’ ‘건국의 아버지’ 등 이승만을 추앙하는 특집들로 도배하고 일반 기사와 사설에서까지 이승만에게 ‘존댓말’을 쓰는 ‘이승만 바람’이다. 
    특히 박헌영과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주석’으로 발표했던 여운형은 ”민족 최고의 지도자로서 잘 지도해 주실 것이므로 충실히 복종할 뿐“이라며 ”동양화도 한시도 잘 하시며 동양 사상을 잘 알고 계신다”고 찬양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인공 부주석으로서 간부들을 데리고 ‘인공 주석’ 수락을 기대하며 이승만을 찾아갔다. 이승만은 ‘인공 대표’는 만날 수 없고 여독이 안 풀려 피곤하다며 거절했다.

    ★“뭉치고 뭉쳐서 38선을 없애고 북한을 찾자. 나에게 계획이 있다”
    “우리의 급한 문제는 삼천리 강산을 찾는 것이다. 여러분이 나를 따르겠다면 동포를 위하여 죽기를 배우자. 북한문제가 캄캄하다. 그러나 나에게 계획이 있다. 우리의 돈과 힘을 모아서 조국에 바치자. 이 국가의 목숨을 살리자”
    날마다 조선호텔에 몰려드는 인사들을 향하여 “강토환원의 장애는 제거되어야 한다‘며 소련군이 점령한 북한땅을 찾아야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되풀이 역설하는 이승만이다. 10월20일 연합군환영대회의 시민들 앞에 처음 나선 자리에서 건국은 ’남북통일 독립‘이어야 하고 38선을 없애기 위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를 부르짖었다.

    귀국 1주일이 되는 10월23일 조선호텔에 한민당, 국민당, 건국동맹, 조선공산당을 포함한 좌우 50여개 정당-사회단체의 대표 200여명이 모였다. 통일독립을 위한 정파통합 회의다.
    “지금 이 자리는 역사를 만드는 모임이다. 세계 각국이 이 한 곳을 주시하고 있다.”
    이승만의 개회사는 필생의 목표를 향한 필살의 애국선동 열변으로 변한다.
    “모든 정파가 한덩어리로 뭉칩시다. 이 자리는 대한독립의 역사에 남을 것이다. 여러분에게 나는 억지로 뭉치라고 강요하지도 아니한다. 여러분이 뭉쳐서 대한동포에게 실감을 가르쳐라.
    우리가 죽으려면 죽고 살려면 살길이 이 자리에 있다. 깊이 생각하라. 나의 묻고자 하는 것은, 듣고자 하는 것은, 어느 정파의 편협된 의견이 아니오. 3천만 민족의 원하는 바를 대표하는 부르짖음이다. 타국사람들에게 대한을 대표할 수 있는 책임있는 기관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 방을 나갈 때에는 기쁨의 만세를 부르고 나가도록 약속하자.”
    이어진 토론에서 ‘친일파 처단’ ‘임시정부와 인민공화국 통합’ 등 논쟁이 이어지자 여자국민당의 임영신이 일어나 ‘모든 것을 무조건 이승만에게 일임하자’고 제의하자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모임의 명칭은 ‘건준’을 작명했던 안재홍이 또 지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약칭 ‘독촉’)의 탄생. 그것은 강대국들의 ‘신탁통치’ 음모를 미리 막기 위해 좌우가 결속한 한국인의 ‘민족통일결집체‘를 만든 것으로서 ‘통일정부’ 창출의 기초를 놓은 것이었다.

    ★연합국에 보내는 ‘결의문’ 직접 작성...“38선 철폐–신탁통치 반대”
    이승만은 ‘4대연합국과 아메리카 민중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직접 만들었다.
    좌우를 망라한 최대의 통일정부추진 단체 ‘독촉’의 이름으로 38선 철폐와 신탁통치 반대를 해결하려면 4대연합국에 결의서를 보내자며 영문과 국문으로 자신이 결의문을 썼다.
    첫째, 남북의 점령구역 분활은 가장 중대한 과오이다. 우리와 무관한 국토양단의 책임자를 알아야하며 조선의 운명에 중대 관계가 있는 연합국의 명백한 성명을 요구한다.
    둘째, 조선에 암담한 공동신탁제가 제안되었다는 보도에 경악한다. 미국에 또 다시 중대한 과오가 될 것이다. 미국이 일본말만 듣다가 진주만의 비극을 초래하였거늘, 트루먼 대통령과 번스 국무장관이 앞으로 양국관계를 양호한 길로 타개할 줄로 확신한디.
    이에 덧붙여 임시정부를 승인해주고 환국하면 1년내 국민선거를 단행할 것이라 다짐했다.
    이 결의문은 문구수정을 거쳐 연합국에 발송되었다.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이때에도 ‘친일파 축출’을 요구하였다. ‘독촉’ 결성 때부터 좌익단체들은 “대동단결하려면 매국노와 민족반역자들을 먼저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박헌영도 기회 있을 때마다 ‘친일파 청산’을 떠들었는데 결의안 문구를 시비하며 또 나섰다. “친일파를 철저히 배격하는 것만이 진정한 민족통일이 완성된다는 원칙을 채택하지 않으면 탈퇴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 ▲ 이승만이 1945년 귀국후 거처하던 돈암장, 오늘의 모습(자료사진)
    ▲ 이승만이 1945년 귀국후 거처하던 돈암장, 오늘의 모습(자료사진)
    이승만, 박헌영 불러 설득...‘인공 부인’ 방송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한 이승만은 돈암장(敦岩莊)으로 박헌영을 불러 마지막 설득을 해보기로 했다. 미국 정부가 ‘좌우통합’을 원할 뿐 아니라, 공산주의 수법을 잘 아는 이승만도 가능하다면 일부라도 전향시켜 포용하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아니하다. 
    돈암장은 ‘독촉’ 결성 뒷날 번잡한 조선호텔을 나와 이사한 돈암동 산중턱의 저택이다. 한민당의 장덕수가 같은 황해도 출신 광산 부자 장진섭(張震燮)에게 교섭하여 이승만에게 제공하였다. 양옥은 이승만이 쓰고, 한옥은 윤치영(尹致暎), 이기붕(李起鵬), 윤석오(尹錫五) 등 비서들이 사용하였다. 미국 유학때 이승만의 동지회에 가담했던 이기붕은 당시  장덕수, 허정 등과 [삼일신문]을 발행하면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도왔는데, 돈암장에서 대통령후보 1순위 이승만의 살림담당 집사가 된 것이다. 

    ★70세 반공주의자와 45세 공산주의자의 대화
    돈암장 넓은 정원에 단풍이 한창인 10월29일 오후 4시, 이승만은 박헌영과 마주 앉았다. 
    70세 자유민주주의 독립운동가와 45세 공산주의 하수인 투사, 지난 20여년간 스탈린과 싸운 반공주의자와 스탈린에 충성한 스탈린주의자, 이날의 만남을 신문들은 ‘역사적인 중대회의’라고 대서특필하였다. 과연 그런가,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통일을 위해 출범한 독립촉성회는 이미 각당 각파를 망라하게 되었는데, 남은 것은 공산당 뿐이다. 3천만의 총의를 모아서 만들어진 독촉을 이제 인정하고 같이 힘을 합쳐 나가야하지 않겠는가?”
    박헌영은 줄곧 주장해 온 바를 되풀이 한다.
    “그걸 인정하니까 무원칙한 단결에 찬성 못하는 것이다. 일본제국주의 잔재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모조리 소탕해야 한다. 그리고서 모든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을 결집시켜 민주주의 강령하에 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해야 할 것이고, 이 민족통일전선에 기초하여 통일민족정부를 수립해야 한다.”
    이승만은 그동안 기자회견이나 방송에서 밝혔던 친일파 처리 방법을 반복한다.
    “물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는 일수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우선 우리의 힘을 뭉쳐놓을 때다. 우리는 독립국가를 완성한 후에 우리 자신의 정부가 친일파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금 미군정에 그 문제를 맡겨선 안된다. 외국인의 손으로 우리 동포의 허물을 처벌하게 해서 되겠는가. 죄인들도 우리 동포다. 먼저 힘을 합쳐 우리 정부를 세우고 우리 법을 만들어서 우리 법정에서 우리 손으로 해결해도 늦지 않다고 본다.”
    박헌영이 화답한다.
    “지금 당장 처벌하지는 게 아니다. 오직 독립촉성회라는 건국기관에서 친일파만 제외시켜주면 우리는 얼마든지 이선생과 손을 잡을 수 있다”
    공산주의 이론가 이승만이 이런 얄팍한 꼼수에 넘어 갈 리 없다. 그는 화제를 바꾼다.
    “하지 중장은 비합법적으로 조직되어 미군정에 대립하는 인민공화국을 강제로 해산시키겠다고 나에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인민공화국 동포들을 설득하겠다며 강제해산을 중지시켰다. 인공이 다른 나라에서 존중하지도 않는 정부인 바에야 스스로 해산한다면 상황이 훨씬 좋아지지 않겠는가?”
    코민테른 이론가 박헌영도 요지부동이다.
    “어떤 근거로 해산을 요구하는지, 또 인민공화국이 미군정에 대립한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조선인이 자신의 정부를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다. 또한 선생의 정치활동에도 우리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대화는 끝났다. 이승만은 “해산하든 말든...뜻대로 할 수 밖에...“ 혀를 찼다고 한다.
       ([매일신보] [자유신문] [신조선보] 등 1945년11월2일자. 손세일, 앞의 책)
  • ▲ 1945년 10월29일 돈암장에서 단독 면담한 이승만 박사와 조선공산당 박헌영(오른쪽).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뉴데일리DB
    ▲ 1945년 10월29일 돈암장에서 단독 면담한 이승만 박사와 조선공산당 박헌영(오른쪽).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뉴데일리DB
    일주일 후 11월 5일 정례기자회견에서도 이승만은 ’친일파 질문‘에 똑 같이 답하고 설득하였다.
    마침내 11월7일 서울중앙방송국 아침 라디오 방송에서 중대선언을 던진다.
    ”고국에 돌아와 보니 인민공화국이 조직되어 있고 나를 주석으로 선정하였다하니 감사하나....나는 종래에 임시정부에 복종하여 온 터이므로 임시정부가 돌아와서 정식으로 타협하기 전에는 다른 정부나 정당에 이름을 줄 수 없다.....정부는 하나이다. 군정청에서는 조선인민공화당은 허락하나 국(國)의 명칭은 허락하지 않는다. 지금 조선의 정부는 군정청뿐이다...“

    방송이 나가자 ’인공‘ 총리 허헌은 ”이 박사의 주석취임문제는 이로써 해소한다’고 선언하였다. 공산화를 겨냥한 ‘민족통일전선’으로서의 인공은 두 달 만에 깨어진 꼴이다.
    이승만은 이로써 공산주의 배격을 공식화하였다. ‘스탈린의 하수인들’이 벌이는 공작과 싸우는 것은 임정대통령시절부터 시작한 스탈린과의 싸움이다. 이제 남북한을 휘두르는 ‘스탈린과의 건국전쟁’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