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8년 5월의 조용한 밤, 어느 시골의 보통학교 숙직실. 두 남자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다가 정적이 흐른다. 이윽고 한 남자가 속삭이자, 다른 남자는 곧바로 면도칼을 꺼내어 자신의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갖다 댄다. 빨갛게 차오르던 것이 이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 손가락으로 종이에 대고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이라고 써내려 간다. 만주군관학교(1940~1942), 일본육군사관학교(1942~1944), 조선경비사관학교(1946)의 3개국 사관학교와 미군 포병학교(1957) 유학 경험을 가진 당대 최고 엘리트 박정희 대통령(1917~1979)의 일화다.

    그가 혈서를 쓰면서까지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한 이유는 입학 연령제한을 넘긴 상태였으며, 무엇보다도 군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고,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이러한 모습은 훗날 장군이 되어 거사를 일으키고, 대통령으로서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할 때에도 감추어지지 않았다.

    5.16군사혁명 이후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이병철 회장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최고회의 부의장이던 박 대통령은 겸손한 자세와 유연한 사고로 경제에 대해서 배우려 했다고 한다. 실용주의적이고 실천적인 박 대통령은 탁상공론보다는 실제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기업인들과 잘 맞았다고 한다. 그는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독재자’로 기억하지만, 실제 그와 함께한 사람들은 정책결정 과정에 있어서 가장 ‘민주적’이었다고 회상한다.

    주요 정책 결정을 할 때는 반드시 관련자들과 심도 있는 토론과 협의 과정을 거쳤다. 이러한 그에게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라는 호칭이 걸맞을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화학 공업 및 방위산업 육성 등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축을 형성한 다양한 정책들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결정됐다고 한다. 일단 결정이 되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무자비할 정도의 실천과 추진 과정의 꼼꼼한 점검이 뒤따랐다. 전문가들에게 소신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결과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책임질 수 있게 하는 신상필벌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은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의 오늘은, ‘노력하지 않으면서 남들처럼 살아보기’로 피폐해지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서 잘한 사람은 그에 합당하게 좋은 직장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이 자연스럽고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권리가 되고 당연시하는 사회가 됐다. 노력과 능력에 상관없이 '더불어 하향평준화' 되는 사회는 죽어있는 사회이자 노예로의 길인데 깜깜하게 잠들어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정치·경제·법률·문화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남탓하기에 급급하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정체성과 주인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 ▲ 땅투기 의혹이 일고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의 매입농지. 매입한 토지엔 빼곡히 묘목을 심어놓았다. 묘목마다 보상금을 받는 제도를 악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남들처럼 잘 살아보기’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권창회 기자
    ▲ 땅투기 의혹이 일고있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의 매입농지. 매입한 토지엔 빼곡히 묘목을 심어놓았다. 묘목마다 보상금을 받는 제도를 악용한 것으로 보인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남들처럼 잘 살아보기’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권창회 기자

    박 대통령은 평생토록 ‘가난’을 자신의 스승이자 은인으로 여기고 살며, 자조정신·자립경제·자주국방을 바탕으로 한 독립국가·통일한국을 꿈꾸었다.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나라의 이익을 위해 살다간 그를 떠올리며, 과연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대구사범대(1932~1937) 시절, 그는 하급생들을 지도할 만큼 ‘나팔의 1인자’로 불렸다. 이후 문경공립보통학교에서 3년간(1937~1940) 교사 생활을 했는데, 새벽 4~5시만 되면 학교 운동장에 올라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나팔을 불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를 듣고 “야, 박 선생 나팔소리다. 일어나서 소여물을 끓여야겠다”며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스무살 교사 시절부터 잠든 백성들을 일깨우는 일을 소명으로 여기며 살았던 것이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 어둠이 짙게 드리운 운동장에서 홀로 입김을 불어 희망찬 하루를 꿈꾸며 새벽을 깨웠을 박 대통령의 나팔 소리가 듣고 싶다. 잠자는 대한민국을 다시 깨울 나팔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가.

    강휘중
    정암리더십스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