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정권의 집요한 '한미동맹 흔들기'‥ 北의 대남적화통일 노선과 일치
  • ▲ 제52차 한미안보협의회(SCM)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서욱 국방부 장관이 지난 14일(현지시각)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과 함께 워싱턴DC에 있는 6·25전쟁 참전 기념공원을 방문해 헌화행사를 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연합뉴스
    ▲ 제52차 한미안보협의회(SCM)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서욱 국방부 장관이 지난 14일(현지시각) 마크 에스퍼 미국 국방부 장관과 함께 워싱턴DC에 있는 6·25전쟁 참전 기념공원을 방문해 헌화행사를 하고 있다. ⓒ국방부 제공/연합뉴스
    이수혁 주미 한국대사가 국정감사를 받는 자리에서 “한국은 70년 전에 미국을 선택했기 때문에 앞으로 70년간 미국을 선택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도 미국을 사랑할 수 있어야, 우리의 국익이 되어야 미국을 선택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사랑하지도 않는데 70년 전에 동맹을 맺었다고 해서 그것(한미동맹)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모욕”이라도 했다.

    문재인 정부 들어 한미동맹에 파열음이 들린 게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급기야 우리는 70년 혈맹국에 파견된 대사의 입에서 한미동맹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발언이 나오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바야흐로 미국과 중국은 명운을 건 패권경쟁에 들어간 상태다. 이수혁 같은 베테랑 외교관이 자신이 한 말의 의미와 파장을 모르고, 그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그냥 내뱉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대사의 발언에 대해 미국 국무부는 즉각 반발하며 “70년 역사의 한미동맹을 극도로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논평을 내놨다. 에번스 리비어 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 담당 수석부차관보는 “처음에는 이 대사의 말이 잘못 번역된 거라고 확신했다”는 말로 상황의 심각성을 표현했다. 그는 “더 확인해보고 나서야 이 대사 발언이 정확하게 보도됐다는 것을 알았다”며 “이 대사의 발언은 한국이 미국과의 동맹에서 멀어질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메시지는 워싱턴에서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해리스 주한미국대사 지난 6월 한국전쟁 70주년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미동맹은 한반도 평화와 번영의 토대이며 이 지역 전체의 안보 및 안정의 핵심축입니다. 전쟁의 참화 속에 형성되고 함께 흘린 피로 더욱 단단해진 한미동맹은 지난 수세대 간 지속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발전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함께 챙기고, 자원을 제공하고, 헌신한다면 말입니다.”

    피로 만든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동맹은 6·25전쟁 과정에서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다. 1차적으로는 6·25 전쟁 중 흘린 피의 댓가이자 분단이라는 비극의 댓가다.

    6·25 전쟁 기간 중에 20대 초반 꽃다운 나이의 우리 국군 14만명이 전사했다. 45만명이 다쳤고, 불구가 되거나 후유증으로 숨진 사람은 통계에 잡히지도 않는다. 유해를 찾지 못한 실종자가 2만5000명이며, 국군포로 6만명이 전쟁 후에도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간인이 대략 250만명이 희생됐다. 미군은 5만4000명이 사망했고, 10만명이 부상했다. 그래서 단순한 동맹이 아니라 혈맹(血盟)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희생이 커지자 미국은 하루속히 한반도에서 발을 빼고 싶어했다. 영국도 유럽이 소련 공산주의로부터 위협받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6·25 휴전협정을 빨리 마무리하고 발을 빼려는 미국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엄청난 인명이 희생된 전쟁을 그대로 중단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90만이나 되는 공산군이 북한에 남게 되면 미군 철수 후 우리가 공산화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내다봤다.

    미국은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해 휴전 직전까지도 여러 계획을 세웠지만, 결국 그를 대신할 마땅한 지도자가 없어서 이 계획을 추진할 수 없었다. 미국은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미군을 오키나와로 철수시키지만, 적이 재침할 경우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겠다”는 ‘대제재 선언’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런 선언은 무의미하다. 유엔군을 철수시켜도 좋다. 누구한테도 우리를 위해 싸워달라고 요청하지 않겠다. 처음부터 우리를 도와달라고 한 게 잘못”이라며 미국이 제시한 휴전조건을 단번에 거절했다.

    한미동맹이 이루어낸 놀라운 결과

     
    하지만 이승만도 휴전이라는 대세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은 휴전을 인정하는 대신 우리의 안보를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이승만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요구에 미국은 “어느 나라와도 이런 조약을 체결한 전례가 없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만약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중국 군대가 북에 주둔한다면 국군 단독으로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미국에 통보했다.

    이승만은 자신의 북진통일 주장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1953년 6월 18일 0시를 기해 그 유명한 ‘반공포로석방’을 단행한 것이다. 전국 각지의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3만5천여명 중 2만7천명을 일시에 석방해버린 것이다. 미국과 서방은 이승만의 일방적인 반공포로 석방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승만의 의지를 확인한 미국은 휴전협정을 위해서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우리는 한반도에 전쟁이 발생했을 때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자동으로 개입한다는 보장을 받아낸 것이다.

    1958년 8월 이승만은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후손들은 누대에 걸쳐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승만은 북한 동포들에게도 “희망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그는 “우리는 결코 당신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버리지 않을 것이다. 잃어버린 영토를 다시 찾고, 동포들을 구출하겠다는 목표는 그대로 남아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결과가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전쟁 전 10만명에 불과하던 우리 군은 한미동맹 조약에 따라 20개 사단을 현대화했고, 70만 대군을 보유하는 막강한 군대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국방비에 들어갈 엄청난 재원을 경제개발에 우선 투입할 여력이 생겼고, 그 결과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주한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함으로써 전쟁이 그치지 않던 동북아시아는 1953년 이후 지금까지 평화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 두 나라가 안정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北, 대남적화의 마지막 걸림돌 한미동맹


    우리가 굳건한 한미동맹을 통해 경제발전에 힘을 쏟고 있는 사이, 북한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대남적화통일에 쏟아부었다.

    북한 대남전략의 궁극적 목표는 전 한반도를 공산화하는 것이다. 이는 북한 조선노당당 규약 전문에 명시된 사항이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북한은 내부적으로 주민들의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다.

    6·25전쟁을 통한 ‘남한무력해방’ 노선이 실패로 돌아간 후 북한은 이른바 남조선혁명을 위해 남한 사회 자체의 혁명 역량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 위해 지하당구축전술, 통일전선전술, 대중투쟁전술, 국군와해전술 등을 시의적절하게 사용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지원해 왔다.

    북한의 집요한 대남공작은 드디어 효과를 보려하고 있다. 전교조는 학교를 장학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교육을 끊임없이 주입시키고 있으며, 그 결과 해마다 수십만명의 청년들이 좌파적 세계관에 물든 채 사회로 진출하고 있다.

    김일성주의 사상을 신봉했던 386세대들은 486, 586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의 요직을 대부분 장악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의 정치, 사회, 경제, 예술, 문화 등 사회의 모든 분야가 좌파일색으로 바뀌었다.

    북한 입장에서는 3대에 걸쳐 노력해온 ‘남조선혁명’ 완성이 바로 코 앞에 와 있는 상황이지만, 단 하나의 걸림돌이 남아 있다. 바로 70년간 바위처럼 버티고 있는 한미동맹이다. 북한은 이른바 남조선 적화의 최대 걸림돌인 이 한미동맹을 깨부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남한 사회의 전반적인 좌경화와 북한에 우호적인 문재인 정권을 만난 북한은 이제 이 한미동맹에 결정타를 먹일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었다고 판단한 듯하다.

    주미대사의 발언을 통해 확신이 든 것


    김일성은 생전에 대남통일정책에서 ‘갓끈전술’을 교시했다. 이 이론은 고인이 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에 의해 국내에 알려졌다. 남한 체제가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갓끈으로 유지되고 있는데, 어느 한쪽 끈만 잘라내도 갓이 날라간다는 의미다.

    2018년 문재인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내세워 반일선동에 앞장서더니 급기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인 지소미아 파기를 내세우며 한일 관계를 파탄직전까지 몰아갔다. 당시 많은 안보전문가들이 문 정권의 시대착오적인 반일·친일청산 주장이 북한의 갓끈전술과 궤를 같이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보냈다.

    문 정부는 2018년 8월 일본과의 지소미아 파기를 우려하는 미국대사를 우리 정부가 불러 초치하는 초유의 일을 벌이더니, 국회의원이라는 자들이 나서서 동맹국 대사에게 ‘조선총독’이니 ‘통감정치’니 하는 감정적인 단어들을 서슴없이 쏟아냈다. 급기야 대사란 직책을 가진 사람 입에서 한미동맹에 결정타를 가할 수 있는 발언까지 나온 것이다.

    이 대사의 발언은 그 동안 필자의 가슴 한구석에 의구심으로 자리잡고 있던 부분을 확신으로 바꾸어 주었다. 이 정권 들어와 벌어진 일련의 한미동맹 흔들기(발언, 인사, 정책 포함)는 결국 미국이 먼저 나서서 동맹을 걷어차도록 유도하기 위한 밑그림의 일부라는 점이다.
  • ▲ 북한 군인들이 지난달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2돌'(9·9절)을 맞아 평양 만수대 언덕에 있는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평양 교도=연합뉴스
    ▲ 북한 군인들이 지난달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2돌'(9·9절)을 맞아 평양 만수대 언덕에 있는 김일성·김정일 동상을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평양 교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