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셉 젠 前 홍콩 추기경 “교황청이 공산당과 손잡고 중국 지하교회 활동 제지”
  • ▲ 조셉 젠 前홍콩 추기경. 사진은 지난해 6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다. ⓒ조셉 젠 前홍콩 추기경 페이스북 캡쳐.
    ▲ 조셉 젠 前홍콩 추기경. 사진은 지난해 6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다. ⓒ조셉 젠 前홍콩 추기경 페이스북 캡쳐.
    미국의 소리 (VOA) 방송은 지난 8일과 작년 12월 7일, 교황청은 현재로써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북한 방문이 예정돼 있지 않다고 보도했다.

    공산권 국가를 활발히 접촉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미국과 쿠바의 관계 개선 당시 적극 중재에 나섰었다. 또한 작년 7월 교황청과 외교관계가 없는 중국 애국회 카톨릭 주교 7명을 승인했으며, 이 중 2명은 작년 10월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에 참석했다. 반면 대만은 지난해 중미 가톨릭 국가인 파나마, 도미니카 공화국, 엘살바도르 3개국으로부터 단교당했다.

    필자는 작년 말 조셉 젠(陳日君, 87) 전 홍콩교구 추기경을 만났다. 젠 전 추기경은 “요즘 들어 교황청이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는 이유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공산당의 위험성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조셉 젠 추기경은 1932년 상하이의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했다. 일본군 점령 시절(1937-1945) 상하이의 가톨릭 학교와 수도원에서 생활했으며, 1948년 홍콩으로 이주했다. 1996년 홍콩교구 추기경에 임명됐으며 2009년 은퇴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인권, 정치 및 종교자유 문제에 목소리를 내 왔다. 다음은 젠 추기경과의 일문일답.

    필자: 유년시절에 대해 말해 달라. 어릴 적에 공산당을 경험했나?

    젠 추기경: 일본군 점령 시기(1937년)에 상하이의 카톨릭 학교에 들어갔다. 내 기억으로는 일본군 장교들은 자신감이 강하지만 이성적이어서 상하이 종교시설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때때로 범죄를 저질렀다. 일본군이 군수물자를 공출하는 바람에 많은 상하이 사람들이 겨울에 굶어 죽었다. 아버지가 이 시기에 중풍을 앓아 직장을 잃고 가족들이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다행히 아무도 목숨을 잃지 않았다.

    “교황청에서 공산당 잘 아는 사람 사라졌다”

    나는 1948년 홍콩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어린 시절 공산당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홍콩에 공산당의 학정을 피해 몰려온 사람들로부터 공산당의 실체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상하이를 떠난 지 26년 만인 1974년 중국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는 문화대혁명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라 현지 광경은 비참했다. 많은 종교인들이 공안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필자: 교황청과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말해 달라.

    젠 추기경: 2000년대 초반까지는 교황청에 있던 체코 출신의 도미니크 두카 추기경이 중국 문제를 잘 다루고 있었다. 당시 교황이던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와 두카 추기경 모두 공산권을 모국으로 두고 있어, 공산당의 실체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개방 정책을 확대하던 시기였고, 중국에는 지하교회와 정부 공인교회가 존재했다. 공인교회에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많아 교황청으로서는 교류하기 편했는데, 중국 정부는 이를 두려워 한 나머지 공인교회마저 탄압하기 시작했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고 베네딕트 16세가 즉위하자 교황청 내부에 아고스티노 카잘로니 추기경(1998년 작고)을 따르던 중국 유화론자들이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서독 출신이자 명석한 원칙론자인 베네딕트 16세 역시 전체주의(나치)와 공산당의 실체를 잘 알고 있어 유화론자들의 중국과의 대화 시도를 막았다. 하지만 그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중국 유화론자들이 베네딕트 16세의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베네딕트 16세가 은퇴하기 직전인 2013년, 카잘로니 추기경 그룹인 이반 디아즈 추기경(인도 출신, 주한 교황청 대사 역임)이 교황 측근인 타르시시오 베르토네 추기경을 축출하고 요직을 차지하려 했으나 베네딕트 16세가 이를 거부했다.

    2013년 새로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조국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 시절 빈민 중심의 공산당 탄압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공산당에 대해 동정적이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좌파 국가인 베네주엘라 교황청 대사이며 북한 방문 경험이 있는 피에트로 패롤린 추기경을 교황청 최고실권자인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패롤린 추기경은 주변의 유화론자들과 함께 중국과 대화하기 시작했지만,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유화론자들은 이전 베네딕트16세의 말을 잘 안듣긴 했지만, 공산당과 대화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이미 알고 있었고, 때로는 뇌물도 오가야 했다.

    “교황청, 중국 말 듣고 대만과는 단교할 것”

    실권자인 패롤린 추기경은 주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그의 최종 목표는 프란치스코 교황으로 하여금 중국과의 수교(대만과 단교) 결단을 내리게 하는 것이다.

    필자: 교황청은 결국 대만과 단교할 것으로 전망하는지?

    젠 추기경: 표면적인 이유는 중국의 가톨릭 인구가 대만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은 점이다. 대만은 종교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단교를 하더라도 다른 방법으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고 교황청은 생각하고 있다. 아마 언젠가는 중국과 수교를 할 것이다. 단 최근 대만과 단교한 중미 3개국은 그 나라들의 정치외교적인 판단에 의해 단교했다고 본다.

    필자: 교황이 공산당의 실체를 모른다고 보나?

    젠 추기경: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는 공산 치하 폴란드를 수차례 방문해서 (공산당이 몰락하는) 기적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은 중국에 가더라도 그가 원하는 중국의 현실을 못 볼 것이다. 교황이 쿠바를 방문했을 때 쿠바의 불편한 진실은 모두 교황 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중국에 가면 당연히 중국 당국에 의해 조작된 공인 교회들만 돌아보게 될 것이다.

    필자: 가톨릭과 공산당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 달라.

    젠 추기경: 나는 항상 (중국) 교인들에게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라고 묻는다. 그러면 많은 이들이 “교회의 통일을 이루고 싶다”고 답한다. 지금 공인교회에는 교황청 임명 주교가 있지만 완벽하게 정부 통제 하에 있다.

    중국 정부는 지금까지 지하교회의 활동을 방치해 왔는데, 이는 그들의 조직이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교황청이 이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교황청과 공인교회 주교들이 나서서 “조용히 항복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교황청이 지하교회 담당 주교 임명을 중지하는 바람에 공인교회 주교 수가 이들의 숫자를 넘어서, 지하교회 세력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교황청, 中지하교회에 “활동 자제하라” 요구

    최근 상하이 지하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 공인교회 신도 포함 5천여 명이 모였는데 교황청이 이들에게 자제를 요구했다. 패롤린 국무장관은 지하교회를 외면하며 나를 ‘검투사(gladiator)’ 라고 부르고, 동유럽 교회를 재건했던 추기경들을 배척했다. 나는 이 진실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여기서 이 사실을 공개한다.

    필자: 그러면 교황과 주변 실권자들이 중국 지하교회를 탄압하고 있다는 말인가?

    젠 추기경: 그렇다. 교황청 내부의 문제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로, 교황은 교황청의 모든 결정에 대한 비토권이 있지만, 지금은 나쁜(very bad) 실권자들이 모든 결정을 내리고 있다.

    두 번째로, 교황청이 7명의 중국 주교를 임명하는 과정에서 2명의 지하교회 주교들을 사임시킨 건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임명된 7명의 주교 중 5명은 이미 부인이나 자녀를 둬서 파문당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주교로 임명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중국 교회와 정부가 서로 결탁하고 교황청이 이들에게 항복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교회에서는 무슨 불만스런 결정이 있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원상 복구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중국은 다르다. 현재 지하교회에는 30명의 주교가 있다. 중국 정부는 이들에게 공인교회의 주교회의에 나오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이는 앞으로 지하교회 활동을 하지 말라는 소리이다.

    나는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중국 공인교회에서 교리를 강의한 적이 있는데, 비참한 광경을 많이 목격했고,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모르고 있다.

    필자: 그런 상황의 개선을 위한 활동을 소개해 달라.

    젠 추기경: 얼마 전 독일을 방문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최근 중국의 상황을 전해 줬다. 그들이 교황에게 내 말을 제대로 전달한 것으로 안다. 나도 교황을 한번 만나 상황을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내 말을 이해했으며, 이에 일말의 기대를 갖고 있다.

    “홍콩 우산시위, 시작 좋았으나 마무리는 이합집산 돼”

    필자: 추기경께서는 홍콩에서 유혈사태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 홍콩이 중국정부의 정치탄압에 시달리고 있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설명해 달라.

    젠 추기경: 지난 2014년 우산시위는 작은 성공을 거뒀지만 크게 봐서는 실패했다. 근본적 원인은 시위 주도 세력이 세 그룹으로 분열된 것이다. 시위에 앞서 있었던 홍콩 행정장관 직선제 여론투표와 이의 주도 세력(대학교수)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뒤이어 나타난 학생그룹은 명확한 목표가 없었다. 민주세력 내 특수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 나는 당시 시위 주도세력의 통일을 주장하며 학생그룹의 문제점을 지적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또 다른 세력인 범민주파 정치인들 모두 내 말을 듣지 않았고, 각자 제 길을 가려 했다. 이런 결과 우산시위 이후 정부의 탄압은 강화됐고, 안타깝게도 학생들이 투옥당하는 등 많이 고생하고 있다. 앞으로 단결한다면 희망이 생길 것이다.

    필자: 마지막으로, 가톨릭이 홍콩 민주화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설명해 달라.

    젠 추기경: 자유의 가치를 대중들에게 설파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교회라는 최적의 강의시설이 있다. 시위에 참가하고 말고는 자유지만, 모두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을 나는 중요하게 생각한다. 불의를 보면 이를 용납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외칠 줄 알아야 한다.

    젠 추기경은 은퇴한지 10년이 다 되 가지만,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고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도옹(不倒翁)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