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68주년·한미상호방위조약 65주년에 보는 반미의 실상
  • 9월 15일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68주년을 맞는다. 9월 28일은 서울탈환 68주년이 되는 날이다. 금년은 또한 6·25전쟁 휴전과 함께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1953년 10월 1일)을 통한 한미동맹 결성 65년이 되는 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한반도에 상륙한 시점인 1945년 9월 8일을 기준으로 하면 한미동맹의 핵심인 주한미군의 역사는 73년에 이른다. 

    국제정치상 하나의 동맹이 1세기 가까이 존속하면서 동맹국 군대가 상대방 영토에 70년 이상 주둔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런 점에서 한미동맹은 세계의 동맹사상 가장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꼽혀왔다. 

    하지만 친북 성향이 강한 문재인 정부 들어 한미동맹은 북한 비핵화 문제 등을 싸고 도처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북한은 판문점 남북정상회담과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 이후 달라진 것이 거의 없는데도 한국정부가 취하고 있는 여러 가지 대북유 화조치들에 대해 미국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도 반미투쟁집회는 연례행사처럼 열리고 있다. 6‧25 정전협정 체결 65주년을 맞은 지난 7월 27일 인천 자유공원에서는 맥아더동상 방화파괴사건, 다음날인 28일 서울의 미대사관 앞에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는 반미투쟁 집회가 열렸다.

    시위주도 단체들은 종전선언, 주한미군 추방, 국가보안법 폐지, 자주(연방제)통일 등을 주장한다.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효순‧미선양 추모집회 때 미국을 조롱하고 폄하하기 위해 등장한 ‘Fucking USA'(미국 엿이나 먹어라)란 노래는 반미투쟁집회 현장에 예외 없이 울려 퍼진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촛불집회 때도 미군철수와 계급투쟁을 선동하는 각종 구호와 함께 ‘Fucking USA'가 집회 주제가로 등장했을 정도였다. 
  • 미국 워싱턴D.C.의 한국전전몰용사추모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 Park)의 한국전 참전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우리 미합중국은 조국의 부름을 받고 생면부지의 나라, 일면식도 없는 그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분연히 나섰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한국전쟁 1950-1953년”(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e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Korean War 1950-1953)

    참전비에는 사망, 실종, 포로 및 부상자의 숫자를 미군, 그리고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으로 구분해 아래와 같이 명확히 적어놓았다.
  • 또한 공원 벽면에는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적혀있다.

    6‧25전쟁은 남북한을 통틀어 500여 만명의 사상자와 1000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들어 냈다. 그 경제적 손실은 전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대한민국은 가히 계수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태인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미국은 3년간 연인원 175만명의 장병이 참전, 5만4246명이 젊은 목숨을 바쳤고 10만3284명이 부상했으며, 아직도 8000여 명의 실종자를 남기고 있다. 유엔은 6‧25전쟁에 대해 안보리 결의를 통해 ‘북한군에 의한 대한민국 무력공격’, ‘평화파괴행위'로 규정했다. ‘내전(civil war)’이라는 관점을 거부한 것이다. 

    그럼에도 자칭 ‘진보’의 탈을 쓴 우리 사회의 좌파 진영에서는 한국전쟁을 ‘내전'이니, ‘조국해방전쟁’이니, ‘통일전쟁’이니, ‘혁명세력과 반혁명세력 간의 전쟁’이니 하면서 대한민국을 지킨 세력을 민족반역세력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금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린 미국 등 우방국들을 내전에 개입한 ‘제국주의’ 세력으로 매도하는 세력이 날뛰는 곳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반미(反美)의 다른 표현은 종북으로 해설될 수 있이며, 이러한 반미의 중심에는 거의 언제나 맥아더에 대한 증오가 서려있다. "맥아더가 38선 분단집행의 집달리였으며, 6‧25전쟁에 개입함으로써 희생을 키웠고, 김일성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의 통일을 방해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대표적인 반미 인사는 강정구 동국대 명예교수다. 그는 지난 2005년 9월 30일 한반도정세토론회에서 “우리는 광복 후 공산주의를 택했어야 했다. 6‧25전쟁은 내전이자 (북한에 의한) 통일전쟁이었으며, 6‧25전쟁에 맥아더의 미국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이승만 정권의 몰락과 함께 한 달 안에 전쟁은 끝나고 인명피해는 1만 명 이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에서의 반미투쟁은 1982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 1985년 서울미문화원 점거사건, 2000년 매향리 미군 폭격장 반대시위를 거쳐 2002년 효순·미선사건 촛불시위를 전환점으로 하여 본격화된다. 이라크파병 반대(2003년), 평택미군기지 저지(2005-2006년), 한미FTA협상 반대(2006-2007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2008년), 제주해군기지 설립반대(2011년), 사드배치 저지(2017년) 시위 때 절정을 이뤘다. 

    6차에 걸친 북한 핵실험(2006-2017년)에 대해 일부 전·현직 대통령은 북핵을 용인하는 한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몇몇 극렬 좌파 단체는 반미정서를 드러내며 북핵을 옹호했다. 한미FTA 체결 때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FTA로 가장 이득을 보는 집단은 자동차의 대미(對美) 수출 증가를 보게 될 자동차회사 직원들인데도 당시 한미FTA 반대시위를  주도한 세력이 민주노총 금속노조 산하 현대자동차노조라는 사실은 이들의 이데올로기적 DNA가 ‘친북적 성향을 보이는 '반미'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 맥아더가 누구인가? 그는 김일성의 6‧25 불법 남침으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사흘 만에 함락되고 한 달 후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리자 불가능에 가까운 성공학률 5000분의 1이라는 인천상륙전쟁을 감행, 대한민국을 패망의 위기에서 구출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우리 내부의 극렬 좌파세력들은 맥아더를 ‘침략과 학살의 원흉’, ‘38선 분단 집행의 집달리’, ‘극악무도한 살인마’, ‘전쟁 미치광이’, ‘민족의 철천지 원수’라면서 주한미군을 ‘침략‧전쟁‧살육‧약탈’을 자행한 ‘만악의 근원’이라고 규정한다.

    소위 한국 현대사 연구의 성과를 자부하는 일부 학자들을 포함한 일부 좌파들은 물론 심지어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까지도 38선의 획정과 6‧25전쟁 발생 과정을 '미국 책임론'과 '내전'이라는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하려 하고 있다. 

    맥아더는 38선 분단 집행의 집달리(執達吏)가 아니다. 일부 전교조 교사들을 비롯한 국내 좌파들은 지금도 이런 주장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마치 미국이 이유 없이 38선을 긋고 한반도를 분단시키기나 한 것처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선동한다. 하지만 38선은 미국의 히로시마 원폭투하 후 뒤늦게 대일전(對日戰)에 가담한 소련군이 일본군 무장해제를 이유로 전 한반도를 점령하려고 하자  “더 이상 내려오지 말라”며 그은 저지선이다. 만약 미국이 그때 38선을 긋지 않았으면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하고 동북아의 위성국가로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38선을 획정, 한반도를 분단시킨 게 아니라 38선을 그었기 때문에 남한만은 적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트루만 대통령의 회고록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대목이 나온다. 트루만은 8월 12일 소련의 스탈린에게 긴급전문을 보내 소련군이 38선 이남으로는 진군하지 말 것을 권고했고 스탈린은 이를 받아들여 38선 이남에 진군한 소련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친북 좌파들은 공산주의도 좋으니 6‧25전쟁 때 김일성의 통일 실패가 원통할지 모르지만,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은 미국이 38선을 그어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것은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 남한 내 반미의 연원(淵源)을 거슬러 올라가면 미군정 시기의 반탁운동과 1946년의 ‘2‧7 구국투쟁’과 대구 10‧1 폭동, 1948년의 ‘제주4‧3사건’과 ‘여수·순천반란사건’,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일제말 전시체제기 반미친일파 지식인들에게서 찾을 수 있다. 한참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05년 7월 29일 미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Taft–Katsura Agreement)’을 체결해 일본의 한반도의 침략을 묵인했다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남한 내 친북적 반미의 본격적인 뿌리는 1961년 9월 11일 북한이 제4차 노동당대회에서 미국을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수인 제국주의 침략자’로 규정하며 전(全)한반도의 주체사상화와 공산화를 채택한 노동당규약, 그리고 김일성이 1964년 2월 25일 대남혁명 3대역량강화노선을 채택한 이래 지속적으로 하달한 대남비밀교시와 지령, 김정일 친필지시에 깊숙이 박혀 있다. 

    이에 따라 198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당의 남파간첩과 지하당 활동 그리고 대남 통일전선전략기구인 조국통일평화위원회(조평통)·반제민전(통혁당)·조국전선 등의 대남선전선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같은 시기 남한에서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한 범민련·전대협·한총련·한대련·전민련(진보연대)·6.15남북선언공동위·통합진보당·민주노총·전교조·전국언론노조 등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반미정서는 더욱 확산된다.

    특히 남한사회는 1980년대 ‘광주항쟁’으로 반미정서가 극대화되는 계기를 맞는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고 있는 미군이 전두환 신군부의 군대 무단이동과 유혈진압을 묵인했다는 주장이 일면서 반미정서가 최고조에 달했다.
  • 남한에서의 반미투쟁은 기본적으로 북한의 이른바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혁명(NLPDR: National Liberation People’s Democratic Revolution)’에서 연원한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론과 계급투쟁론을 사실상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북한은 1970년 11월 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남한혁명의 성격을 과거 ‘혁명적 민주기지론’에서 ‘민족해방인민민주주의’라고 새롭게 규정했다. 이러한 NLPDR의 주요 내용은 “남조선혁명은 남한의 반미혁명세력이 주체가 돼 수행해야 한다”며 우선 1단계로 남한에서 ‘민족해방’(미제국주의 축출)을 수행한 다음, 2단계로 ‘인민민주주의’(자본가·지주를 타도한 다음 노동자·농민이 주인이 되는 평등사회 건설)을 진행시킨다는 ‘단계적 혁명론’이다. 

    국내 반미 좌파는 영문 이니셜 NLPDR을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People'을 ’인민' 대신 ‘민중’으로 바꿔,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으로 부른다. 이에 따라 남한의 좌파는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 계열과 PD(People's Democracy 민중민주) 계열 등 크게 둘로 나뉜다. NL이 ‘자주파’, 즉 다른 말로 '친북'을 의미한다면, PD 계열은 ‘평등파’, 즉 ‘계급투쟁’을 말한다. 좌파들은 한국사회의 모순이 아직도 미국이라는 외세의 지배‧간섭을 받고있는 데다 자본(資本)에 의해 억압‧착취‧차별을 당하고 있으니 자본주의 종주국 미 제(美帝)를 몰아내고 자본가를 타도, 평등사회를 건설해 북한과 통일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 그 목표다. 이런 의미에서 NL파는 특히 주사파, 민족공조파로도 불린다. 
  • 북한은 지금도 남한이 정치적으로는 ‘민족모순’, 즉 미제에 종속된 식민지이며 사회경제적으로는 자본가와 노동자, 지주와 농민, 매판자본·반동관료들과 근로인민 사이의 ‘계급모순’이 중첩돼있다고 본다. 때문에 남한에서 타도돼야 할 세력, 즉 혁명대상은 1차로 미제, 2차로 미제와 결탁한 파쇼집단(한국정권) 및 지주·자본가·반동관료 등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반미세력들은 북한에 굴종하면서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와해를 위한 상징적 투쟁목표로 맥아더 동상 부수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물론 맥아더 장군에 대해서는 6‧25전쟁 때 중공군 개입 오판 등 평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일제에 종살이 하던 나라를 해방시켰고 김일성의 남침으로 인한 국가 멸망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출한 그를 ‘학살의 원흉’, ‘살인마’, ‘전쟁광신자’ 등으로 내모는 것은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것이다. 
  • 맥아더 장군과 불화관계에 있었던 트루만 대통령까지도 맥아더 해임 이유에 대해 “나는 그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으려 해서 해임했지, 그가 멍청한 ‘개자식’이라서 해임한 게 아니다”(I fired him because he wouldn't respect the authority of the President. I didn't fire him because he was a dumb son of a bitch.)라고 말했을 정도다. 군인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을 인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