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선동술에 국민이 속절없이 넘어가""당시 美 종군기자 작성 자료에 민간인 없어"
  • ▲ 왼쪽부터 류석춘 교수, 홍승기 변호사, 박종인 기자, 송재윤 교수 ⓒ정상윤 기자
    ▲ 왼쪽부터 류석춘 교수, 홍승기 변호사, 박종인 기자, 송재윤 교수 ⓒ정상윤 기자
    美 종군기자 3인이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이라는 주제로 22일 서울글로벌센터 국제회의장에서 '1950 한강 인도교 폭파의 재구성' 공개 포럼이 열렸다. 행사는 정규재TV, 포럼1948에서 주최했다. 발표에는 송재윤 맥마스터대 교수가 나섰고, 2부 토론은 박종인 조선일보 기자와 류석춘 전 연세대 교수가 맡았다.

    포럼1948은 지난 1월부터 대한민국 건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이뤄나가기 위해 전문가들이 모인 공부모임에서 시작된 포럼이다. 발표를 맡은 송 교수는 "침략군 저지 목적의 한강 인도교 폭파 작전을 이승만 정권의 대민 테러로 뒤바꾸는 정치적 선동술에 많은 국민이 속절없이 넘어갔다"며 발표를 시작했다.

    송 교수는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30분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과 관련한 사료들의 신빙성에 대해 역설했다. 그는 버튼 크레인, 프랑크 기브니, 카이스 비치 등 3명의 미국인 종군기자를 소개했다. 송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사건 당일 기사를 작성했다.

    송 교수는 "3명 중 비치의 기록이 제일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비치는 기브니와 크레인과 달리 현장에서 부상을 당하지 않았고 두 사람보다 비치의 상황 묘사가 훨씬 더 정교하고 상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비치는 현장에서 작성한 칼럼 말고도 1954년 책을 출판하면서 당시 상황을 다시 파악하고 정리해 최종적으로 기록했다"며 "따라서 한강다리 폭파 사건의 진상 규명에서 비치의 증언이 다른 두 기자의 증언보다 더 중시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송 교수는 "다만 비치는 인도교 진입로에 몰려드는 피난민을 보았다고 묘사했고, 기브니는 '(중지도에) 쏟아져서 밀려 드는 피난민'이라고 했다. 이 둘의 어긋나는 주장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당시 상황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종군기자라면 피난민의 동향을 주시할 수밖에 없다. 전쟁 상황에서는 희생 당하는 민간인의 모습이 더 특종감이기 때문"이라고 비치의 주장에 힘을 실었다.

    이어 송 교수는 한강 다리를 건너고 있던 500~8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는 설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송 교수는 "(당시의) 법정기록을 살펴봤을 때, 구체적인 숫자가 특정되지 않는다. 그 기록의 핵심은 우리의 전력 손실이 얼마나 컸느냐이지, 민간인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송 교수는 '500~800명 민간인 사망설'에 대해 "제임스 하우스만의 증언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에 500~800명의 인명 희생이 있었다는 언급이 나온다"며 "당시 미 군사 고문이던 하우스만은 다리가 폭파되기 직전 다리를 건넜고, 그 순간 폭음과 강한 열로 지프 전체가 불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 같았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그는 이 정도로만 이야기하고 수원으로 내려갔다. 그런 그가 어떻게 (희생자 규모를 알겠나). 그러나 하우스만이 추정한 500~800명 희생자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어 "역사가 정치화되면 정치적 무기가 된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갑자기 1990년대에 양민학살의 주범으로 '런승만'이 된 시기가 바로 1990년대 이념적 공황 상태였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 '1950 한강 인도교 폭파의 재구성'공개포럼 ⓒ정상윤 기자
    ▲ '1950 한강 인도교 폭파의 재구성'공개포럼 ⓒ정상윤 기자
    이후 토론에 나선 박 기자는 자신이 북한군에 의해 찍혔다고 판단한 영상을 재생하며 말문을 열었다. 영상은 당시 사건 현장을 담고 있다. 희생자들이 뒤엉켜 있는데, 박 기자는 여기서 희생자들의 옷차림에 주목했다.

    박 기자는 "사람들이 유일하게 공신력 있는 기록이라는 게 국방부가 만든 '한국 전쟁사'인데, 거기에는 '피난민'이 아니라 '인원'으로 표현돼 있다"며 "결국에는 하우스만이 만든 (500~800명) 추정치가 돌아가며 확대 재생된 것이자 (영상에) 산재해 있는 군인과 경찰은 사라지고 민간으로 뒤덮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어떤 경위로 사람들이 모인 것이고 어떤 희생이 있었는지 '디테일'을 파고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2번, 3번 상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만큼 피해자 규모에 대한 총체적 재조사가 필요하다"며 "이건 민간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 국방부가 나서야 할 일"이라고 부연했다. 

    류 교수도 다음 토론에서 '한강 인도교 폭파로 인한 민간인 희생' 주장에 대한 논리적 오류를 지적했다. 그는 "('500~800명 민간인 사망설을 이야기한) 하우스만은 다리 폭파 7분 전에 현장을 통과했다. 폭파 현장에 있었던 종군기자들보다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또 "6월 28일 오전부터 정오 사이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북한군의 영상을 보았을 때 다리 밑으로 빠진 사람들은 확인할 수 없지만 다리 위에서 희생된 사람들은 그대로 보전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다리가 엄격히 통제돼 민간인이 있을 수 없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