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사 "수백억원대 규모 부담…고금리탓 자금조달도 어려워" '수주 양극화'로 인한 경쟁기회 제한, '브랜드 양극화' 우려
  • 시공사 입찰자격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입찰보증금'이 도리어 재개발·재건축 등 정비사업 수주를 기피하는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과도한 입찰보증금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서울 송파구 가락프라자 주택재건축정비조합은 시공사선정 총회에 앞서 입찰공고시 입찰보증금 300억원을 내걸었고 올초 시공사로 GS건설을 선택한 용산구 한강맨션 재건축조합은 2021년 입찰공고 때 입찰보증금으로 1000억원을 요구한 바 있다. 지난해에는 동대문구 이문4구역이 입찰보증금 1200억원을 주문하기도 했다.  

    1000억원대 입찰보증금이 등장한 건 2019년 8월 용산구 한남3구역 재건축조합이 발단이 됐다. 당시 한남3 재건축조합은 입찰조건으로 보증금 1500억원을 제시해 업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후 그해 10월 은평 갈현1구역 재건축조합이 다시 입찰보증금 1000억원을 청구하면서 보증금 규모가 적게는 수백억원에서 많게는 수천억원으로 널뛰었기 시작했다. 

    실제 지난 9월 시공사 입찰공고를 낸 동작구 노량진1구역 재건축조합은 입찰보증금으로 500억원을 제안했고 지난해 대우건설을 시공 파트너로 뽑은 용산구 한남2구역은 800억원을, 영등포구 여의도동 한양아파트는 150억원을 각각 제시했다. 

    제아무리 날고 긴다는 대형건설사라고 해도 과도한 입찰보증금은 '눈엣가시'일 수 있다. 이경우 '총알'이 없어서 주저한다기 보다 통상 예정공사비의 10%를 입찰보증금으로 정하는 관행을 무시하고 조합이 임의로 가격을 책정한 것을 두고 '갑질'의 기운을 느꼈다고 보는 게 더 가깝다. 

    서울내 한 재개발조합 관계자는 "입찰보증금이 일부건설사에는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조합 입장에선 사업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시공사를 가려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론 조합이 시공사를 선정할 때까지 사용한 운영비·사업비·협력업체비용 등을 지급하는데 사용해 보증금 규모를 정하는 측면도 있다"고 해명했다.  

    실제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대 입찰보증금은 중견건설사에 '장애'로 작용하긴 한다.   

    한 중견건설A사 관계자는 "갖고 있는 현금이 부족한 업체들은 고금리로 인해 자금조달도 여의치 않아 분명 입찰보증금에 대한 부담이 있다"며 "돌려받는 돈이라고는 하지만 지급 관련해서 지연된다든지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입장에서는 민간사업장에 대한 문제기 때문에 크게 개입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면서도 "다만 보증금 범위 법제화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다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시장의 유동적인 결정논리를 침해할 수 있어 일장일단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관련제도 개선에 소극적인 모습이다.

    2020년 국토부는 정비사업계약업무 처리기준을 개정해 현장설명회 당시 입찰보증금중 일부를 납부하는 '현설보증금 납부조건'을 금지했다. 하지만 입찰보증금 규모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건을 달지 않았다.

    입찰보증금은 조합에 대여형식으로 지급돼 정식도급계약 체결후에는 사업비로 전환된다. 결국 사업추진과 관련한 비용으로 참작하기 때문에 손질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재건축·재개발 등 정비사업은 누군가에겐 주거불편해소가 목적이고 누군가에겐 사업성이 우선이다. 다만 주거불편해소를 얘기하는 쪽은 주된 논의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사업에서는 돈이 나머지를 압도하기 때문이다.

    입찰보증금과 관련된 '수주 양극화'는 결국 '아파트 브랜드 양극화'로 확장될 수 있다. 사업성이 좋은 탓에 보증금 규모가 크게 책정된 곳은 대형건설사가 수주하고, 상대적으로 낮은 곳은 중견건설사가 시공하게 되면 브랜드에 따라 그 인식 자체가 나뉠 수 있다.

    이미 아파트 브랜드는 시공능력평가순위에 의해 급이 나눠져 있고 이런 계급화는 해당 아파트 입주민에게까지 전가되고 있다.

    수백억원대 입찰보증금이 촉발한 수주 불균형은 결국 업체간 시공 실적을 더 선명하게 나누는 기준이 되고, 경쟁 기회 자체를 박탈할 수 있다.

    입찰보증금이 시공권을 따내는 티켓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업장에 대한 수주는 각 건설사가 갖고 있는 시공 역량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 공정한 경쟁을 통한 시공 경쟁이 곧 더 나은 건물을 지을 수 있고 업계에 잔존하는 불필요한 관행도 없앨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