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와 한미동맹 출범 선도박정희, 월남파병·한일관계 정상화로 비대칭동맹 극복노태우, 미군 감축·연합사 해체 저지…방위조약 재확인김영삼, 대북공동협의체제 합의…북핵해결 적기 놓쳐김대중, 햇볕정책 확고한 미국 지지 확보해 北생명 연장이명박, 한미FTA 비준 파격예우…한미동맹 한 차원 도약尹, 한미일 삼각협력 복원…쿼드 참여 가능성 초미의 관심
  • ▲ 2022년 11월 13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뉴시스
    ▲ 2022년 11월 13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캄보디아 프놈펜 한 호텔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뉴시스
    윤석열 대통령이 다음 달 26일 미국을 국빈 방문한다. 한국 대통령의 12년 만의 방미는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미 당시와 비슷한 대외환경에서 이뤄졌다.

    한국을 둘러싼 북·중·러 공산주의 진영의 위협이 북·중·러 권위주의 진영으로 겉모습만 바꿨을 뿐이다. 미국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는 '사실상 핵보유국'인 북한의 핵위협, 현상변경을 위한 중국의 패권적 팽창정책,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대외환경이 녹록지 않다.

    한·미·일 삼각협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두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섰다. 2018년 대법원판결이 촉발한 강제징용 배상문제를 풀기 위해 윤 대통령이 추진한 '제3자 변제안'을, 박 대통령은 한일관계 정상화하기 위해 체결한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4개의 부속협정(청구권협정·재일교포협정·어업협정·문화재협정)을 떠올리게 한다.

    본지는 한국 대통령의 12년 만의 국빈 방미를 앞두고 △이승만(1954년) △박정희(1965년) △노태우(1991년) △김영삼(1995년) △김대중(1998년) △이명박(2011년) 등 역대 한국 대통령의 국빈 방미 의미를 짚어봤다(대통령 호칭은 생략). 
  • ▲ 1954년 7월 미국을 국빈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모습. ⓒ뉴데일리DB
    ▲ 1954년 7월 미국을 국빈방문한 이승만 대통령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모습. ⓒ뉴데일리DB
    '한미상호방위조약' 발효와 한미동맹 출범 이끈 이승만

    1954년 7월 이승만의 국빈 방미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발효와 한미군사동맹 출범이라는 성과를 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과의 극심한 불화를 극복하고 이룬 외교적 쾌거였다. 아이젠하워는 조약이 조인되기 전까지 조약 체결에 반대했고, 조인 후에도 '플랜 에버레디'(Plan Everready)라는 이승만 축출작전을 검토했을 정도였다.

    △한국전쟁의 '명예로운 조기 종식' △일본을 주축으로 한 한미일 협력 강화로 대변되는 아이젠하워의 아시아 정책과 △휴전반대 △북진통일 △강경한 반일사상 같은 이승만의 민족주의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한미동맹의 원년은 상호방위조약이 조인된 1953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조약의 실제 발효는 예정일로부터 8개월, 조인된 날로부터 1년 이상 유예된 이유다.

    이승만은 국빈 방미를 통해 아이젠하워가 아닌, 미 국민들을 설득하기로 결심했다. 미국 의회 등에서의 연설을 통해 "현명치 못한" 휴전을 비판하며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을 막으려면 '제한적 예방전쟁'이라는 결단을 내려 달라고 호소했다. 약소국 대통령의 도발적인 연설은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등에 대서특필됐다. 뉴욕타임스, 세계 3대 주간지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 등과의 인터뷰, 회견, 미국 외교기자클럽 연설뿐 아니라 독자투고로까지 이어졌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승만의 국빈 방미 후 약 4개월이 지난 11월 발효했다. 양국은 미국이 한국에 △7억 달러의 원조(4억 2천만 달러의 군사원조와 2억 8천만 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하고 △10개 예비사단 신설을 포함한 해군과 공군력의 증강을 약속하고, 한국은 △한국군을 유엔군사령부의 작전지휘권 하에 두기로 합의했다.
  • ▲ 1965년 5월 미국을 국빈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모습. ⓒ대통령기록관
    ▲ 1965년 5월 미국을 국빈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의 모습. ⓒ대통령기록관
    박정희, 월남파병과 한일관계 정상화로 '비대칭동맹' 극복

    박정희의 국빈 방미는 이로부터 11년 만인 1965년 5월에 이뤄졌다. 국제수지 역조현상을 겪고 있던 미국이 베트남전에 개입하면서 주한미군 감축과 군사원조 프로그램 이관(MAP transfer)을 검토하던 엄중한 시기였다. 미국이 1억2600만 달러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1970년까지 이관하겠다고 통보하자, 한국은 유보를 요청했다. 이관이 야기할 국방비 증가, 세수부담 증대, 경제개발계획 수행 차질 등을 우려해서였다.

    박정희는 한미동맹이라는 전형적인 '비대칭 동맹'이 가지는 한계를 '편승'을 통해 극복했다. 비전투원(1964년)과 전투원(1965년)을 베트남에 파병하고 1965년 한일관계를 정상화하는 등 미국의 세계전략에 적극적으로 편승함으로써 약소국의 지위를 강화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린든 존슨 미 대통령은 파병에 대한 깊은 감사를 표하는 한편 "한일 관계의 발전을 배경으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은 한미일 삼각관계에 있어서도 새로운 시대를 마련하게 됐다"고 찬사를 보냈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에 대한 무력침략 발생 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군사력 행사와 모든 가능한 원조 제공 △주한미군 감축 유보 △군원이관 연기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체결 △한국에 대한 경제 및 군사 지원의 지속 △1억 5천만 달러의 장기 저리 개발차관 제공 등을 약속했다. 

    특히 1억 5천만 달러에 달하는 개발차관은 1959년에 국제개발처가 개편 발족한 이후 약 6년 동안 한국이 승인받은 차관총액(1억 387만 1192달러)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성과였다.
  • ▲ 1991년 7월 미국을 공식방문한 노태우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 ⓒ대통령기록관
ⓒ
    ▲ 1991년 7월 미국을 공식방문한 노태우 대통령과 조지 H. W. 부시 미국 대통령. ⓒ대통령기록관
    노태우, 주한미군 감축과 한미연합사 해체 저지

    노태우는 이른바 조지 H.W. 부시의 초청을 받고 1991년 7월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소련이 해체되기 약 5개월 전이었다. 당시 미국 내에서는 주한미군을 감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주한미군을 비롯한 해외주둔 미군을 감축한다는 '넌, 워너' 수정안이 미국 의회에서 통과됐고, '1990년대 후반에 한미연합사 해체를 검토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동아시아 전략 구상'도 작성됐다.

    노태우 정부의 청와대 공보수석 비서관이었던 김학준 인천대 이사장은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방위조약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확인한 것을 방미의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양 정상이 한국정부와 국민이 원하는 한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다짐했고, 현 수준의 한미연합방위 능력에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기 때문이다.

    김영삼, 북핵 해결 적기 놓치고 '대북공동협의체제' 합의

    김영삼은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1995년 7월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핵확산금지조약(NPT)과 세계원자력기구(IAEA)를 탈퇴한 북한이 '커다란 외교적 승리'라며 대대적으로 자축했던 1994년 미북 제네바합의(Agreed Framework) 체결 이후로, '1차 북핵위기' 시기로 분류된다.

    김영삼은 클린턴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사회의 개혁.개방을 유도하기 위한 '대북 공동전략고위협의체제'를 구축하기로 합의했고,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수립하는 문제는 '당사자 해결원칙'에 따라 남북간에 협의돼야 할 사안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양국은 결과적으로 북핵 문제를 해결할 적기를 놓치고 말았다. 전 외교부 북핵담당대사 등을 역임한 이용준 한미협회 상근부회장은 '1993년 초 북한의 NPT 탈퇴 이후 1994년 제네바 합의(Agreed Framework)까지의 1년'을 북핵 문제를 조기에 해결할 수 있었을 첫 번째 기회로 꼽는다. 

    그는 저서 '대한민국의 위험한 선택'에서 "미국 클린턴 행정부가 외교적 교섭을 통한 북핵문제 해결에 한계를 느끼고 유엔 제재를 추진하기로 어려운 결정"을 내렸지만, 김영삼 정부는 "미국의 과도한 대비태세"에 불만을 품고 주한미군의 패트리엇 미사일 추가배치를 고의로 지연시켰고 미국인 소개 계획도 검토단계에서 취소시켰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는 △1996년 북한의 노동미사일 실전배치 △북한 잠수함 강릉 침투사건 △서해상에서의 크루즈미사일 시험발사 등으로 이어졌다.

    김대중,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 확보

    1998년 6월 김대중의 국빈 방미의 핵심은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얻은 것이었다. 당시 김대중은 미 의회 연설에서 "행인의 코트를 벗기기 위해서는 강력한 바람보다는 햇볕이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햇볕정책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호소했다. 한미 양국은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를 남북 교류협력 증진에 맞춰 완화를 검토하되, 한국은 북한 경수로 사업비의 70%를 부담하는 한편, 미국이 중유 지원 비용을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이명박, 한미FTA 비준으로 한미동맹 도약 선도

    이명박은 2011년 10월 미국을 국빈방문했다. 미국 의회는 한미정상회담 하루 전날인 13일 한미FTA 이행법안을 비준한 '파격적인 예우'로 한미동맹이 안보동맹에서 경제동맹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쌓았다.

    당시 공동 기자회견에서 이명박은 "한미 FTA는 130년 양국관계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양국이 윈윈하는 역사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한미FTA는 한국과 미국 양국에서 공히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고 교역을 확대하며 경제성장을 촉진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한미FTA가 양국 고용창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한미FTA가 한국 국회에서 통과될 것이라고 이 대통령이 말씀하셨고 나는 이 대통령의 리더십을 믿는다"고 화답했다.

  • ▲ 2022년 6월 29일 윤석열 대통령이 마드리드 이페마(IFEMA)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미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 2022년 6월 29일 윤석열 대통령이 마드리드 이페마(IFEMA)에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한미일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쿼드와 오커스 등 對중국 안보동맹 참여?

    미·일과의 연이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국이 쿼드(Quad, 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 협의체) 실무그룹이나 오커스(AUKUS, 미국·영국·호주 3국 협의체) 등 대(對)중국 안보동맹 참여에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윤석열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쿼드 산하의 백신, 기후변화, 신기술 워킹그룹에 본격 참여해 기능적 협력을 해나가면서 추후 정식 가입을 모색하는 점진적 접근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김성한 국가안보실장도 최근 "한일관계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면 한미일 안보협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 한미일 협력이 더욱 포괄적이고 풍부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한 만큼, 올해 체결 70주년을 맺는 한미동맹의 질적변화가 예상된다. 

    이용준 한미협회 상근부회장은 뉴데일리와 통화에서 "국빈방문은 순전히 의전적 차원의 구분이라 실질문제와는 무관하다"면서도 "쿼드 가입 등 중국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좀 더 명확히 하는 합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방문 순서(일본→미국)는 일반적으로 의전수준을 넘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정치적 의미가 있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국내 일각의 비판 가능성을 감수하고 일본을 중시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적극적이고도 용기 있는 선택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외교안보수석 등을 역임한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한국이 (쿼드에) 조속히 참여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고 강조했다. 한미동맹이 '1차 보험'이라면 쿼드는 만만하거나 약점이 있는 나라에 대한 중국의 일대일 각개격파식 강압과 보복에 집단적으로 대응하는 데 유용한 플랫폼이자 '2차 보험'이라는 것이다. 

    그는 저서 '대통령의 외교안보 어젠다'에서 "우리가 없는 자리에서 한반도의 안보와 미래에 영향을 미칠 논의가 이뤄지는 것을 허용하거나 방치해서는 안 된다"며 "인도태평양 지역의 핵심 강국들이 역내 안보질서를 논의하는 자리에는 반드시 참여해 발언권을 행사해야 하며 우리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