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화된 'MBC 흔들기'와 이탈 움직임정권과 언론노조, '언론장악' 위해 합심
  • 문재인 정권 5년 동안 국내 언론 지형은 급격히 왼쪽으로 기울었다. 특히 공영방송 MBC의 편향성은 두드러졌다. 2017년 말 최승호 전 PD가 사장으로 부임한 이후부터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으로 이슈를 다룬 불공정 편파방송·편파보도가 쏟아졌다. 문 정권 내내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적폐'로 내몰리는 상황에서도 공영방송 기자로서의 신념을 지켜온 MBC노동조합(3노조)원들은 최 전 PD가 MBC의 새 사장으로 첫 출근한 2017년 12월 8일을 '학살의 날'이라고 부른다. 출근 첫날 그는 자신을 포함한 해고자 6명을 전원 복직시키고, 오정환 보도본부장을 비롯한 보도국의 국·부장단 전원을 보직해임했다. 배현진·이상현 앵커는 그날부로 방송에서 퇴출됐고, 언론노조가 주도한 총파업에 동참하지 않았던 80여명의 기자들은 이때부터 취재·보도 일선에서 밀려났다. 본지는 MBC노조가 펴낸 '2017 MBC 잔혹사'를 4회에 걸쳐 연재, MBC의 '보도 지형'이 기울어지게 된 배경과, 지금까지도 마이크를 잡지 못하고 있는 MBC 기자들의 실태를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Ⅰ 강압·차별의 전조

    ‘무조건 가결이다’ ‘아니다, 가봐야 안다’ ... 수많은 예측과 ‘썰’이 나돌았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너무도 깔끔하고 허망하게 났다.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결정.

    어수선했던 회사 분위기는 갈수록 흉흉해졌고 하나 마나 한 대선 시즌에 돌입했다. 오래지 않은 후의 상황이 뻔히 짐작됐지만, 뉴스시간을 알차게 구성하기 위한 노력은 변함없었다. 단내나게 뛰었고, 열심히 제작했다. 벌써 정권을 가진 듯, MBC 취재기자들을 벌레 보듯 하는 민주당 의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묵묵히 견디며 취재했다. MBC 출신의 모 의원은 여러 언론사 기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놓고 MBC 기자만 투명인간 취급을 했으며, “지금 MBC 기자들은 후배 취급하지 않는다”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그럼에도 이 같은 수모를 견딜 수 있게 한 것은 직업윤리로 똘똘 뭉친 구성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 같은 공동체 의식에도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며 자리를 비우는 후배들이 늘어났고, 이들의 사정을 듣고 때로는 달래기 위해 함께 하는 시간 역시 늘어났다. 후배들은 갑자기 우리 보도 행태가 이상하다고 하소연했다. 전과 크게 다를 게 없었지만 이들의 눈에 우리 보도는 무너져가는 정권을 옹위하기 위해 편향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때로는 달랬고 그러다 안 되면 일을 맡기지 않았다. 반장들이 그냥 직접 쓰고 읽는 경우가 늘었다. 발제의 취지를 공감 못하는 기자에게 취재와 기사 작성을 맡길 수는 없었다.

    본격화된 MBC 흔들기와 이탈 움직임


    5월 9일, 예상대로 정권이 바뀌는 걸로 대선은 끝이 났다. 회사는 앵커 교체를 통한 뉴스 개편을 단행했다. 당시 파격적인 연차와 나이의 모 후배가 강력히 천거를 받아 앵커 자리를 꿰차는 게 유력시됐다. 심지어 그 후배 기자는 평소 앵커에 대한 꿈이 컸다. 그런데 앵커직 수락 과정부터 석연치 않았던 이 후배는 앵커멘트 수정 문제로 사사건건 윗선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공영방송의 경우 해외의 사례를 봐도 무색무취의 앵커멘트를 지향한다. 사적 의견이 개입할 여지를 차단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후배 기자는 대단한 내용도 아닌데 임의대로 앵커멘트를 수정했다. 팩트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그 후배 기자의 ‘신념’ 내지는 의견이었겠지만, 어떤 신념을 가졌는지는 몇 달 후 행보를 통해 확실히 드러났다. 그는 비슷한 연차의 경력 기자들과 함께 이른바 ‘마지막 9인방’에 이름을 올리며 파업에 동참했다.  

    5월 말부터 보도국의 언론노조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각 기수별로 성명서를 내놓으며 취임한 지 몇 달도 안 된 김장겸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떠나지 않으면 끌어내리겠다”라는 위협부터 ‘심판’, ‘적폐 청산’과 같은 날 선 단어들로 그들의 성명서는 채워졌으며, 20~30년 차 고참부터 입사 4년 차의 막내 기수까지 불과 열흘 만에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김장겸 사장!  제발 떠나라. 그 자리는 더 이상 당신 자리가 아니다. 만약 스스로 떠나지 않으면 끌어내릴 것이다. 국민과 함께 끌어내릴 것이다. 아주 분명하고 단호하고 철저한 방식으로 당신을 쫓아낼 것이다" (2017년 6월 17일 20~30년 차 성명 중에서)

    "사퇴하라고, 물러나라고 외치는 것도 이제 질렸다. 당신들을 끌어내리고 당신들의 회사를 정의로운 국민의 품에 돌려놓을 것이다. 그 한걸음 한걸음에 빠지지 않고 반드시 우리의 이름을 더할 것이다" (2017년 6월 7일 45기 성명 중에서)

    그러던 중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8월 10일 보도국 취재기자들의 제작 거부가 시작된 것이다. 언론노조 소속 내근 데스크는 출근을 한 뒤 기사 대신 동영상을 보다가 점심시간 이후엔 자리를 떠나기 일쑤였고, 취재기자들 또한 출입처 대신 회사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그간 기회만 엿보고 있던 언론노조 소속 취재기자들을 중심으로 보도국 수뇌부와 회사 경영진에 대한 항명이 시작됐다. 광화문, 용산의 출입처에서 취재를 해야 할 기자들이 11시 무렵부터 상암동 본사 로비와 출입구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게 목격됐고, 보도국장의 지시로 근태 확인이 시작됐다.

    근무 시간에는 시위를 할 수 없다는 통지가 내려가자 그들은 반차 휴가를 내고 피켓 시위를 이어갔으며, 확산 속도 또한 빨랐다. 회사의 지시로 “회사의 명에 의해 업무복귀를 지시합니다. 즉시 복귀해 기획안 제출, 기사 작성, 리포트 및 기획물 제작 업무를 수행하시기 바랍니다.” “회사의 명에 의해 업무복귀를 지시합니다. 즉시 근무 지역을 보고하고 리포트 및 단신 기사를 배정받아 촬영 업무를 수행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자 메시지가 발송되었지만 회사를 뒤집겠다는 그들의 집념을 꺾을 순 없었다.

    심지어 이틀 후에는 핵심 고위급 간부라고 할 수 있는 취재센터장까지 파업 동참 의사를 밝혔다. 당시 그는 SNS에 "너무 힘들다.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친다. 회사를 위해서 노력을 열심히 했지만… 어렵다"라고 심경을 토로했다. 평소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이 큰 걸로 알려졌던 그가 보도국을 위해 무슨 노력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서둘러 발을 뺐다. 탄력을 받은 제작 거부는 8월 17일부터 보도국 밖 인원들까지 가담하면서 그들의 행동은 보다 적극적이고 조직적이 되었다. 언론 노조원들은 상암 본사 건물이 낯선 선배들의 가이드를 자처하면서 업무를 하고 있는 사이를 오가며 ‘보도국 투어’를 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사내 분위기는 갓 입사한 경력기자들에게도 그대로 전달됐다. 4월 4일 수습 면제 임용된 9명의 기자들이 사회2부에서 업무를 시작해 5월 31일 이들은 각 취재부서로 배치되었으나 제대로 된 취재가 이뤄질 리 만무했다. “신문사에서만 근무해 방송 기사를 쓰는 법을 배우는 게 먼저”라며 거부한 1명을 제외하고 이들은 모두 제작 거부에 동참했다. 동참하지 않은 기자에게 이들은 “형도 같이 가자, 우리가 다 함께 해야 힘을 받는다”라며 동참을 요구했지만 해당 기자는 결국 자리를 지켰다. 왕OO 당시 기자협회장이 경력기자들에게 “파업 끝나면 잘 해줄 테니 일단 제작 거부에 동참하라”라고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왕 협회장은 2017년 8월 경력기자 채용 공고와 관련해 “회사원이 되지 맙시다. 언론인이 됩시다” “MBC 뉴스가 정상화가 됐을 때 당당하게 우리와 함께 나아가자”라며 “채용절차를 지금 진행해도 선발된 기자들의 수습 기간이 끝나기 전에 김장겸 체제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그들이 설 자리가 좁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파업에 참가하지 않고 본연의 업무를 위해 남아있던 이들에게 가장 큰 부담은 본사 로비와 보도국장실, 회의실 앞에 늘어선 언론노조원들의 피켓 시위였을지 모른다. 오전 8시 무렵부터 보도국 소속 언론노조원들은 각종 자극적인 문구가 담긴 피켓을 들고 도열하기 시작했고, 보도국을 떠나 있던 공채 출신 고참들은 회의실에 들어가는 경력직 출신 보직자의 뒤통수에 대고 “쟤는 뭐냐?”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뿐만 아니라 회의실 바로 옆 취재부서장이 회의실로 들어가는 가장 짧은 통로를 몸으로 막은 채 자신들의 스크럼으로 만든 ‘모욕의 길’로 입장할 것을 종용했다. 여성의 몸으로 그 같은 치욕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해당 부장과 언론노조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고, 문호철 보도국장이 직접 나서서 길은 막지 막아달라고 요청한 뒤에야 그들은 스크럼을 풀었다. 심지어 임원 회의실 앞도 언론노조원들의 피켓 시위 장소로 바뀌고 말았다.

    못 버티고 이탈하는 기자들

    얼마 남지 않은 인력으로 뉴스를 제작하느라 다른 곳에는 신경을 쓸 수도 없었던 상황. 그런데 푸념과 불안감을 호소하던 후배들이 하나둘씩 파업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내일은 누가 내려간다더라” “누구누구는 벌써 마음을 굳혔다더라” 등의 이야기가 나돌았다. 이탈을 예상했었던 이들도 있었고, 끝까지 믿었던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함께 했던 동료에게 등을 돌린다는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껴 눈물짓는 자와,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오히려 더 투쟁의 목소리를 높이는 자가 있었을 뿐 어쨌든 다른 배를 타게 된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이탈 이유는 ‘두려움’이었다. 기자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오직 그 일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비파업자로 분류돼 한직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로 산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했다. 기자로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이 더 많은데 언제까지가 될지 모르는 유배생활을 견딜 자신이 없다고 했다. 물론 앞에서는 “이해한다”라고 했다. 실제로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들과 비슷한 연차 혹은 더 어린 기자들 중에서도 끝까지 파업을 거부하며 남은 이들이 있었다. 남은 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 좀 살아보겠다고 함께 했던 동료들을 배신하고, 더 나아가 내 스스로를 부정할 수는 없다.” 결국 파업에 합류한 그들은 은전 30닢에 스승을 배신한 유다의 길을 택한 것이다.

    비단 기자뿐만이 아니었다. 파업 중인 선배들의 권유(압박이라 하는 편이 나을지 모르겠다)에 뉴스데스크 제작 업무를 보조하던 AD 5명이 9월 11일 동시에 일에서 손을 뗐고, 날씨와 교통 정보를 전하던 라디오 리포터 12명도 제작 거부에 동참했다. 뉴스투데이 스태프와 리포터들도 파업에 동참한 진행PD 모 차장의 “누구랑 더 오래 일할 것 같냐”라는 전화를 받고 제작 현장에 나가기 어렵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오디오맨으로 입사한 뒤 뉴스투데이 편집부에서 오래 근무해온 그 진행PD는 뉴스를 사유화한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제일 윗선부터 말단 조직까지 그들의 손에 완벽하게 장악당해 갔고, 결국 정상적인 뉴스를 진행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도달했다.

    지역민의 재난마저 외면한 지역MBC

    그들은 본사에서 제작된 뉴스가 지역민들에게 전달되는 경로조차 틀어막았다. 부산MBC를 제외한 모든 지역사가 자체 제작한 5분 정도 뉴스만 메인뉴스 시간에 송출하거나 아예 TV뉴스 자체를 내보내지 않았다. 주말이나 아침뉴스가 지역민들에게 전달되는 길은 완전히 틀어막혔다. 그러던 와중에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2017년 11월 15일, 경북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재난이었으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역의 심각한 상황과 지역민의 목소리를 전해야 할 포항MBC는 팔짱만 낀 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영상 촬영만이라도, 아니 지역 주민들을 통해 얻은 제보 영상이라도 보내달라는 전국부장의 읍소는 “안타깝지만 도움을 줄 수 없다”라는 당시 포항 취재부장의 차가운 답변에 가로막혔다. 부장 1명, 데스크 1명, 취재기자 2명뿐이던 전국부의 인력으론 재난 상황을 발 빠르게 대처하기에 역부족이었다. 해당 지역 출신 일부 기자들이 지인을 통해 얻은 시민 촬영 영상을 몇 개 전달받아 겨우겨우 시청자들에게 체면치레만 할 수준의 리포트를 만들었을 뿐 현장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는 중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속사정을 알지 못한, 또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던 시민사회단체에선 MBC가 공영방송의 책무를 저버렸다는 비판을 하기에 바빴다.  

    사건 발생 이틀 뒤 언론노조의 파업에 참가하지 않은 포항 출신 기자 후배가 자원해서 현장 취재를 내려갔고, 2~3일 단위로 2명의 기자가 차례로 현장에서 기사를 보내왔으나 타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한 취재팀이었다. 지역민들의 재난을 파업이란 이유로 외면한 그들은 주인을 위기에서 구한 충견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주인의 목덜미를 물어뜯은 광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정권과 언론노조, 언론장악 위해 합심

    회사 내의 분위기를 장악한 이들은 정권과 합심해 방문진 이사진과 사장, 경영진 무너뜨리기에 돌입했다. 가장 먼저 9월 7일 유의선 이사가 자진 사퇴했다. 사장 면접에서 ‘노조 배제’를 암시하는 질문을 했다는 혐의(부당노동행위·방송법 위반 등)로 고소당했던 유 이사는 좌파 성향의 학생들과 졸업생들로부터 무차별적인 모욕을 당했다. 당시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그에게 모욕을 주는 데 앞장섰던 이들 중에는 이대 출신 MBC 기자도 있었다(물론 이 기자도 이후 앵커와 워싱턴 특파원 등 꽃길만 걸었다).

    한편 유의선 이사 사퇴 이튿날, 민주당의 이른바 ‘방송장악’ 문건 유출 사실이 조선일보 보도를 통해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민주당이 KBS, MBC 등 공영방송을 '언론 적폐'로 규정하고 사장·이사진 퇴진을 위한 촛불집회 등을 추진하자는 '로드맵'이 담긴 내부 문건을 만들었다고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민주당은 ▲구성원 중심의 사장·이사장 퇴진운동 전개 필요성 ▲방송사 노조, 시민단체·학계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식의 우회적 방법 활용 ▲언론적폐청산촛불시민연대회의 구성 및 촛불집회 개최 ▲방송통신위원회 활용 방안 등에 대한 내용을 문건에 담았다고 했다. 민주당은 ‘티타임에서 잠시 나왔던 말을 부풀려 보도했다’, ‘향후 전개될 상황을 마음대로 예측해 썼다’는 등의 주장을 하며 강력히 반발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후 전개된 상황은 바로 이 로드맵과 어긋나지 않았다.

    10월 18일 또 다른 여권 방문진 인사였던 김원배 이사가 전방위적 압박을 못 이기고 사퇴한 데 이어, 11월 2일에는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에 대한 해임 결의안, 11월 13일에는 김장겸 MBC 사장에 대한 해임안이 잇따라 가결되면서 비로소 언론 장악 시나리오를 완성한 것이다.

    전광석화... 점령군 입성


    사장까지 몰아낸 언론노조원들에게 더이상 거칠 것은 없었다. ‘섀도 캐비닛’이라면서 국장은 누구, 각 부서 부장과 부원들은 누구 하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명기된 사내 지라시가 돌아다녔다. 특파원들도 다 소환한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그 당시엔 거의 믿지 않는 분위기였다. ‘설마’가 얼마 안 가 현실이 되긴 했지만. 그 와중에 이뤄진 방콕 특파원 공모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돼 봐야 갈 수나 있겠느냐. 돌아오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이 역시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아무튼 사장 해임 이후 급격히 사기가 떨어진 보도국에는 몇 안 남은 기자들이 퇴근 후 통음하며 이들이 어떤 식으로 보도국을 접수할지, 비파업자들을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등에 대해 다양한 추측을 내놨다. 하지만 이들의 점령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12월 8일. 오전부터 분위기가 심상찮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보도국 내부는 어수선한 가운데 일부는 ‘더러운 꼴 보기 싫다’며 자리를 피했고, 일부는 결의를 다지며 다가오는 상황에 상황에 대비했다. 출입처에 나가 있는 기자들도 보도국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소식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물론 그 와중에도 저녁뉴스용 기사를 쓰고 송고를 했다.

    점심시간 직후, 전체 게시판에 민병우 신임 편집1센터장이 올린 임시뉴스 편성안이 올라왔다. 토요일 뉴스투데이 20분, 토·일 뉴스데스크 35분 편성 등 임시뉴스 체제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오후 4시가 넘어설 무렵, 언론노조원들이 일제히 보도국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각 부서로 가서 일하고 있던 기자들에게 내 자리니 일어나라고 요구했다. 비파업 기자들은 쫓겨나듯 그 길로 짐을 싸고 나와야만 했다. 송고한 기사들은 모두 폐기 처분됐고, 당일 뉴스데스크는 언론노조원들이 대충 기존 기사를 바탕으로 이름만 바꿔 쓴 리포트로 제작돼 나갔다.

    바로 이 순간부터 언론노조 소속이 아닌 비파업 기자들은 투명인간이 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