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4·29 … 고비 때마다 원칙론, 8·23 복귀 뒤에도 文은 안 달라져
  • ▲ 20일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의에서 주승용 최고위원이 문재인 대표의 공개 사과를 촉구한 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고, 문재인 대표는 먼산을 바라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20일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의에서 주승용 최고위원이 문재인 대표의 공개 사과를 촉구한 뒤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고, 문재인 대표는 먼산을 바라보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구당(求黨)을 위한 고언(苦言)까지 모두 공천권을 노리는 것이라고 폄하하는 친노패권주의 세력과, 그래도 권역을 대표하는 수석최고위원으로서 쓴소리를 계속해주기를 바라는 호남 민심의 염원 사이에서 고뇌에 빠졌음일까.

    문재인 대표에게 공개 사과를 요구하겠다고 예고했던 새정치민주연합 주승용 최고위원은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 순서가 돼서 방송사의 와이어리스 마이크가 자신의 자리 앞으로 넘어온 뒤에도, 침통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주승용 최고위원은 "지도부의 한 사람으로서 내년 총선 승리를 위해서 최근 대여(對與) 투쟁에 집중하면서 당의 단합을 위해서 가급적 당내 관련 발언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면서도 "최근 문재인 대표의 (18일 광주 조선대 강연) 발언을 접하면서 말씀을 안 드릴 수가 없어서 어젯밤을 뒤척이며 날을 샜다"고 털어놨다.

    문재인 대표는 지난 18일 광주광역시를 방문해 조선대학교에서 실시한 강연에서 "나를 흔들고 끊임없이 당을 분란 상태로 보이게 하는 분들은 실제로는 공천권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이런 저런 낡은 행태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아주 광범위한 인적 청산이 필요하다"고 당내 비주류를 원색적으로 매도했었다.

    주승용 최고위원은 이에 대해 "당내에서는 공천권이나 요구하는 사람으로 매도당하면서, 당의 최고위원으로서 무력감과 자괴감이 커지고 있다"면서도 "고치고 또 고치고 몇 번을 고치며 자구 수정을 하고, (발언 원고를) 순화시키려 노력을 많이 했다"고 똑같은 모습으로 맞서지 않기로 했음을 내비쳤다.

    그는 이날 △지도부의 거취를 당대표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점 △당대표의 발언이 당을 분열시키는 편가르기라는 점 △문안박 지도체제에도 법적인 문제가 있다는 점 등을 들어 문재인 대표의 조선대 강연 발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 ▲ 20일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의에서 주승용 최고위원이 공개 모두발언을 마친 뒤 고뇌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20일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의에서 주승용 최고위원이 공개 모두발언을 마친 뒤 고뇌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그러면서 "최고위원으로서 대표와 다른 의견을 낼 때마다 번번이 무시당하는 처지에 무슨 기득권이 있는지 의문이고, 최고위원이 왜 됐을까 회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라면서도 "누가 뭐래도 총선 승리와 정권 교체를 염원하는 당원과 국민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함께 가야 하기 때문에 정말 고통스럽게 말씀드렸는데, 충정(忠情)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고 호소했다.

    평소 정치권에 '고지식한 원칙주의자' '정략과 술수를 모르는 정공법의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고, 대의(大義)를 강조하는 것으로 알려진 주승용 최고위원이 원칙론에 입각한 직언(直言)을 했다가 고초를 겪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주승용 최고위원은 2·8 전당대회를 불과 엿새 앞둔 지난 2월 2일, 전당대회준비위원회가 당대표 및 최고위원 경선을 위한 여론조사의 규칙을 '해석 변경'을 명목으로 바꾸자 "여론조사 실시를 목전에 두고, 어느 일방의 문제제기에 따라 룰을 바꾼 것은 전당대회를 공정하게 관리해야 할 주체로서 부적절한 처신"이라며 "당내 경선 사상 초유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어느 후보의 유불리를 떠나 원칙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면 될 일"이라며 "이런 식으로 경선 규칙을 바꿔버리면 경선이 끝난 뒤에도 후유증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당시 주승용 최고위원은 최고위원 경선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여론조사 룰 해석 변경에 영향을 받는 지위가 아니었다. 실제로도 여론조사 룰 해석이 변경됐음에도 무난히 최고위원 중 최다 득표로 수석최고위원이 되기도 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으면 대표가 될 사람 및 그를 옹위하는 계파·세력들과 척을 질 일이 없었다. 그러나 원칙주의자인 주승용 최고위원은 "원칙대로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라는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호남의 민심이고, 당원의 여론이었기 때문이다.

  • ▲ 새정치민주연합 주승용 최고위원이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공개 모두발언을 통해 문재인 대표의 공개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주승용 최고위원이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공개 모두발언을 통해 문재인 대표의 공개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4·29 재·보궐선거에서 당이 '심장부'라 부르는 광주 서을 보궐선거를 포함해 네 곳 모두에서 전패했을 때도 그랬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 하는 분위기 속에서 본인 또한 묻어갔으면 그만이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거머쥔 수석최고위원의 자리를, 선출된지 불과 3개월도 되지 않아 던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승용 최고위원은 책임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것이 당을 향해 호남이 던진 경고였기 때문이다. 그는 5월 4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지난 주말동안 지역에서 많은 분들 만나고 들은, 호남의 민심을 그대로 전해드리겠다"며 "선거 참패도 문제지만 다음날 선거 결과에 굴하지 않겠다는 대표의 발언에 많은 국민들이 실망했다고 한다"고 전했다.

    호남 유일의 최고위원으로서, 2·8 전대에서 최다 득표를 한 수석최고위원으로서, 혹여나 민심을 모를 수 있는 당대표에게 들은대로 전달해야겠다는 뜻에서 나온 충언이었지만,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낸 댓가는 가혹했다.

    친노(親盧)로 분류되는 한 최고위원으로부터 "사퇴하지도 않을 것이면서 사퇴한다고 공갈하는 게 더 문제"라는 말을 들으며 1991년 전남도의원에 당선되면서부터 시작했던 원칙의 정치 행로 24년을 송두리째 부정당했다. "나는 세상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말을 남긴 채 '책임'을 촉구하며 동료 지도부를 등졌고, 이후 8월 23일 지도부에 복귀하는 결단을 내릴 때까지 구당(求黨)의 길을 고심하는 시간을 보냈다.

    친노패권주의 청산, 투명하고 공개적인 당무 운영… 그야말로 당을 살리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만을 내걸고 있던 주승용 최고위원과 문재인 대표 사이를 중재하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누가 생각해도 당연한 요구가 조율되는 데 왜 3개월 이상이나 걸렸을까 싶지만, 패권주의와 싸우는 과정은 그렇게도 지난했다.

    문재인 대표는 8월 23일 주승용 최고위원과의 오찬 회동에서 "계파패권주의 청산이 최고의 혁신"이라는 점과 "4월 재보선 패배 이후 추진된 혁신이 당원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점에 공감한다며 최고위 복귀를 요청했고, 주승용 최고위원은 '사퇴 입장 번복'이라는 오명을 무릅쓰고 이를 수락했다. 문재인 대표가 달라지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고, 이것이 당을 위한 대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 ▲ 새정치민주연합 주승용 최고위원이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공개 모두발언을 마친 뒤 전병헌 최고위원의 발언 순서에 눈을 질끈 감고 고뇌에 잠겨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 새정치민주연합 주승용 최고위원이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공개 모두발언을 마친 뒤 전병헌 최고위원의 발언 순서에 눈을 질끈 감고 고뇌에 잠겨 있다. ⓒ뉴데일리 이종현 기자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주승용 최고위원의 기대를 배신했다. '당원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던 혁신안은 우격다짐과 밀어붙이기 식으로 당무위와 중앙위를 번번이 통과했다. 최고위원들의 반대는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대표 재신임'과 같은 무리수들이 최고위원들과 일언반구의 협의도 없이 마구 던져졌다.

    안회(顔回)는 다른 사람도 나같겠거니 하고 남들을 바라보고, 도척(盜跖)도 다른 사람을 나같겠거니 하고 바라본다고 했던가. 모두를 "당과 나라를 위해서 뜻을 같이 하는 동지"로 생각하며, 내뱉은 말은 지키고, 정치인으로서 책임을 지며, 원칙의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문재인 대표를 바라본 것이 주승용 최고위원의 오산이었을까.

    20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을 이어간 주승용 최고위원의 '충정'도 문재인 대표에 의해 간단히 무시당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선출직 최고위를 대표 혼자 맘대로 문닫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이런 당이 어디에 있느냐"는 절절한 호소만 메아리 없이 울려퍼진 셈이다.

    주승용 최고위원 스스로도 최고위원회의 직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오늘 말한 부분에 대해서 문재인 대표가) 아무런 말씀이 없다"며 "사전 최고위 때도, 비공개 (최고위) 때도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최고위에 복귀할 때도 '패권주의를 청산하는 데 같이 노력하자'고 해서 복귀했었고, 당내 발언을 하면 혹시나 분열을 불러오지 않을까 해서 많은 조심을 했었다"며 "오늘 공개적인 발언을 한 것은, 당연히 최고위원으로서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공개적인 사과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요구를 했던 것"이라고 털어놨다.

    나아가 "(문안박 연대가 제안되기까지) 절차나 방법에 있어서 많은 문제가 있었고, 광주에 가서 하지 않아도 될 발언을 한 게 아닌가 싶어 유감스럽다"며 "문재인 대표가 잘못된 부분에 있어서는 솔직히 사과하는 게 당의 단합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