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만난 그분은 민중을 수탈한 독재의 화신..북한 김일성은 절세의 애국자주체사상 만든 황장엽이 탈북한 이후 사상 전향..그리고 다시 만난 박정희 대통령
  • ▲ 미국 AP통신이 보도한 박정희 소장 (1961년 5월)  ⓒ 소장자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 미국 AP통신이 보도한 박정희 소장 (1961년 5월) ⓒ 소장자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편집자 주] = 2009년에 쓰여진 이 글은 전대협 연대사업국장을 지낸 이동호 미래한국 편집위원의 통렬한 '자기 고백'이자, 386 운동권 인사들이 전향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잘 서술한 글이다.

    필자는 대학 시절 박정희 전 대통령을 '민중의 수탈자'로 여기고 반미·반제국주의 운동에 전념했으나, 주체사상의 창시자 황장엽이 탈북하면서 모든 사상적 기반이 무너졌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놀아난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을 이끈 박정희 대통령의 '진면목'을 보게 됐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필자가 다시 만난 박정희 대통령은 민중의 수탈자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제3세계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으로 만든 선구자였다.

    10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에 서거한 날이다. 가난과 굶주림의 고리를 끊어버린 영웅이 사라진 날이건만, 아직도 사회주의의 망령(亡靈)을 벗어나지 못한 이들은 이 날을 '민주화의 시발'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고 있다.

    부디 "거짓의 가면을 벗고 자신이 이 사회에 끼쳤던 죄악을 참회하라"는 필자의 꾸짖음에 통회자복(痛悔自服)하는 이들이 늘어나길 바라는 마음에, 오래 전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보에 실렸던 필자의 옥고(玉稿)를 다시 전재한다.


    며칠 전 「민족문제연구소」 등 세칭 진보단체와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제시대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 그 명단 속에 돌아가신 朴正熙 대통령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이들의 명단 속에 당연히 포함되리라는 것은 사전에 충분히 예상되었던 일이다. 그들이 이 시점에 굳이 과거사 청산이라는 명분으로 그와 같은 일을 벌이는 이유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막상 공개적으로 돌아가신 분의 휘자가 함부로 폄하되는 현실을 접하면서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 죄스러운 맘을 금할 길 없다. 수천 년을 지속되어왔던 숙명과도 같았던 절대적 가난을 우리 운명 속에서 지우고자 평생을 노력하신 그 분이셨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대한민국에서 이토록 수모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主思派가 되다

    내가 그분을 알게 된 것은 대학입학 후이다. 물론 그 전에도 중·고등학교 시절 수업시간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분으로 배워서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그 분에 대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대학에 들어가 선배들과 책을 통해서 알게 된 그분은 이제까지 내가 알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대학에서 만난 그분은 독재의 화신이었다. 일제의 앞잡이었던 그는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 민중을 수탈하고,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서라면 무자비한 탄압을 일삼는 독재자의 전형이었다.

    그가 이룩한 산업혁명은 정부의 선전과는 달리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발전을 왜곡시키고 미국과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수탈을 원활하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식민지였고 미국의 식민지적 지배의 선봉에 선 사람이 다름 아닌 그였다.! 그가 이룩한 대한민국은 점점 외국의 노예로 가는 길이었다. 종국에는 외국자본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최악의 나락으로 빠져갈 기가 막힌 현실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 36년의 노예생활도 부족해서 이제는 미국의 노예에서 영원히 헤어 나올 길이 없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노예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혁명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어보였다. 그렇게 나의 사회주의자로서의 길이 시작되었다.

    나에게 朴正熙 대통령은 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길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민중의 수탈자였고 한줌도 안 되는 민족과 민중의 배반자들이었다. 반면 사회주의에는 민족낙원의 길이 보장되었다. 누구도 다른 사람이나 집단에 의한 강제적 지배나 억압이 없고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따라서 나누어 갖는 모두가 꿈꾸는 이상사회였다.

    북한의 김일성을 알게 된 것도 그 시기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절세의 애국자였다. 어린 시절부터 조국 독립의 꿈을 안고 만주에 건너가 평생을 광복을 위해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영웅이었다. 이미 20세 정도의 나이에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해서 조선 공산당의 효시가 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북한에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한 것이다. 남쪽의 식민지 나라와 북쪽 자주의 나라는 더 이상 비교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억울한 것은 6·25민족해방전쟁이 미제국주의자들의 개입으로 좌절된 일이었다. 남쪽에서도 민중이 주인 되는 이상사회를 건설할 절호의 기회가 좌절된 것이다.

  • ▲ 케네디 대통령과 첫 대면하는 박정희 의장 (1961.11.14일)   ⓒ 소장자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 케네디 대통령과 첫 대면하는 박정희 의장 (1961.11.14일) ⓒ 소장자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환상이 무너지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그 후로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나에게 이데올로기는 매우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가끔씩 사회주의에 대한 다른 증거가 제시되고 대한민국에 대한 긍정적 요소가 눈에 띄어도 이는 나의 철저하지 못한 혁명의지 때문이었다.

    나의 사회주의와 북한에 대한 환상이 깨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였다. 소련에 연이어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졌다. 외부의 침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낙원에 살던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영원한 사회주의의 낙원이고 고향인 소련과 사회주의 나라는 우리가 꿈꾸었던 그런 사회가 아니었다. 반대자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진행되고 인간의 존엄과 생명이 가장 억압받는 인류 최악의 사회였다. 소수의 지배자들의 천국이었다. 민중이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민중이 가장 억압받는 그런 곳이었다.

    그때까지 내가 믿었던 사상은 의심받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틀렸단 말인가. 근본부터 흔들렸다.

    그러나 도피처가 있었다. 북한은 소련과 동구권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건재했다. “소련과 동구권의 물질중심주의적 철학의 실패이지 인간을 중시하는 주체철학의 실패는 아닐 거야.” 당시의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 생각도 오래 가지 못했다. 연이어 탈북자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그래도 버텼다.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죄를 짓고 그 사회에 살 수 없어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고향을 저주하는 거라고. 그런! 나의 생각이 결정타를 맞았다. 주체사상의 창시자로 알려진 황장엽(黃長燁 ) 선생이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온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졌다. 탈북자들의 증언은 이제 사실로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북한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악(惡)의 나라’였다. 300만을 굶주려 죽이고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그토록 소리 높여 외치던 인류의 낙원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경애하는 어버이 수령은 어디 가고 최악의 독재자가 그 자리에 있단 말인가. 자신의 백성이 그토록 굶주려 죽어 가는데 호화로운 궁전에 앉아 최고의 호사를 누리는 후안무치(厚顔無恥)가 그 자리에 있단 말인가.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에 놀아난 지적 저능아였다. 거짓을 사실로 알고 있었고 이를 소리 높여 외쳤던 판단 능력이 상실된 문제아였다. 다시 원점에서 검토해야 했다. 그동안 내가 그토록 확신했던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다시 만난 朴正熙 대통령

    朴正熙 대통령을 다시 만난 것은 그때였다. 그분에 대한 것을 다시 보아야만 했다. 어느덧 나이가 들어 다시 만난 朴正熙 대통령은 또 다른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우선 그분이 이룩한 산업혁명을 다시 보았다. 분명히 사회주의를 동경하던 당시 책들과 선배들의 판단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제국주의자들의 침략과 수탈에 망해 있어야 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분이 이룩한 터전 위에 대한민국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세계10대 무역국으로 진입해 있었다. 모든 제3세계 나라들의 선망의 대상이 대한민국이었다.

    제3세계나라가 산업혁명을 이루는 거의 유일한 성공사례가 대한민국의 산업혁명이었다. 오랜 기간 우리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이 오히려 우리를 배우고 우리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국 개혁개방의 기수 등소평(鄧小平)이 가장 본받고자한 것이 朴正熙 대통령의 산업혁명이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 오늘 중국의 경제성장의 배후에는 대통령의 산업혁명 전략에 대한 벤치마킹이 있었던 것이다.

    베트남을 취재차 방문했던 후배가 그곳에서 만난 기자와의 대화 가운데 들었다는 한마디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베트남과 대한민국의 현재의 엄청난 격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느냐. 대한민국은 朴正熙 같은 지도자를 가졌고 베트남은 그런 지도자가 없었다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이유다.”

    그 후배도 과거 한때 사회주의에 물들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타국에서 만난 외국사람이 朴正熙!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들으며 자부심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 ▲ 귀국 비행기에 탑승, 환송객들에게 답례하는 박 대통령 내외 (1964.12.14)   ⓒ 소장자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 귀국 비행기에 탑승, 환송객들에게 답례하는 박 대통령 내외 (1964.12.14) ⓒ 소장자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朴正熙 대통령은 가난을 숙명처럼 여겼던 우리 민족에게 ‘하면 된다’는 불굴의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세간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역사가 그에게 부여한 시대적 사명을 안고 그의 길을 간 선구자였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일구는데 무엇 하나 기여한 적이 없는 이들이 과거사 청산이라는 거짓명분으로 돌아가신 대통령을 헐뜯고 있다.

    그들은 답해야 한다. 그들이 그토록 찬양하던 사회주의는 왜 실패했고 그들이 꿈꾸던 나라는 어디에 있는지. 그들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최악의 독재자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을 헌납하려 했던 그들의 죄악을 먼저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 인간의 도리이다. 거짓과 위선의 가면을 벗고 자신이 이 사회에 끼쳤던 죄악을 참회하는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위대한 대통령을 헐뜯는 그들을 역사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과거에는 朴正熙 대통령을 비난하고, 그분이 일군 대한민국을 잘못된 길로 이끌려 했던 죄인이다. 그렇기에 좌익들에 의해 잘못되어 가고 있는 조국의 현실이 더욱 견디기 어렵다. 朴正熙 대통령의 뜻을 기리고, 계승하는 것이 지난날 내가 저질렀던 과오를 씻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머리 숙여 朴正熙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이동호(李東湖) 미래한국 편집위원·前 전대협 연대사업국장




    ‘친일인명사전’ 무엇이 문제인가?

    친일인명사전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그 기초가 된 자료의 편향성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국민공청회 기조발제문’은, 이곳 구성원들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의심케 할 만큼 충분히 ‘친북’적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위 발제문을 통해 밝힌,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기준 자료를 보면, ▲<조선인민공화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 소집요강>(1946)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친일파 규정>(1946)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지방선거 행동강령 중 친일파 규정>(1947)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의 미소공위 공동결의 6호 답신안>(1947) ▲<북조선노동당의 미소공위 공동결의6호 답신안>(1947) 등, 북한과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이 만든 문건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유독 눈에 많이 띄는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은, 박헌영이 주도한 <조선공산당>, 연안파의 지도를 받은 백남훈의 <조선신민당 남한지부>, 여운형 주도의 <조선인민당> 등 40여개의 남한 내 좌익세력이 우파진영에 대항해 만든, 범 좌파 단체다.

  • ▲ 김일성과 함께 한 박헌영(왼쪽).  ⓒ 사진 뉴데일리DB
    ▲ 김일성과 함께 한 박헌영(왼쪽). ⓒ 사진 뉴데일리DB

    이런 자료들의 존재는, 친일민족사전이 그 태생부터 ‘친북적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치명적 한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친일인명사전’의 두 번째 문제는, 이 책자가 안고 있는 불공정성이다.

    친일인명사전을 편찬한 이들은 좌익인사들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반면, 우파인사들의 친일행적은 크게 부각시키는 행태를 보였다.

    예를 들어, 일제 말 징병을 권유하는 글을 썼던 여운형은 친일파 명단에서 빠진 반면,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잘 알려진 장지연에 대해서는, 일본총독 부임을 축하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친일파로 매도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주육군훈련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 보병중위로 복무한 전력 때문에 친일파로 매도된 반면, 고종의 손자로 일본 육군 중장에까지 오른 이우는 친일파 명단에서 빠졌다.

    영화 국제시장의 소재가 되기도 한 ‘흥남철수작전’ 당시, 미 10군단장 에드워드 알몬드 장군을 설득해 10만명에 이르는 피란민의 생명을 구한 김백일 장군 역시 일제 때, 간도특설대에 몸담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

    세 번째 문제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현재 진행 중이란 사실이다.

    근현대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제 걸음마 단계에 있는 ‘대한민국 현대사 연구’가, 자료사의 한계를 뛰어넘어 ‘통사(通史)’로서의 지위를 얻을 때 반영해도 늦지 않다는 점에서, ‘친일인명사전’은 친북적 사관에 매몰된 일부 인사들에 의한 ‘무자비한 인격살인’이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드리운 ‘박헌영’의 그늘

    파문이 확산되면서, 친일인명사전을 발행한 민족문제연구소와 이곳 소장을 맡고 있는 임헌영(75) 소장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우리 역사학계와 교육계에 깊숙이 침투한 이른바 ‘민중사관’의 본산과 같은 곳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반면, 북한 정권을 민족의 ‘적통’을 계승한 ‘국가’로 여기는 ‘민중사관’은, “통일만 된다면 적화통일도 상관없다”는 ‘통일지상주의’와 맞물려, 뚜렷한 친북·반국가 성향을 나타낸다.

    ‘민중사관’ 학자들의 주의 주장이, 북한의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의 그것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 ▲ 2013년 5월 9일, 동영상 백년전쟁이 이승만 대통령을 악의적으로 폄훼했다는 비판이 고조되자, 이 동영상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는 반박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은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취재진들에게 배포한 자료의 표지.   ⓒ 사진 뉴데일리DB
    ▲ 2013년 5월 9일, 동영상 백년전쟁이 이승만 대통령을 악의적으로 폄훼했다는 비판이 고조되자, 이 동영상을 제작한 민족문제연구소는 반박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은 당시 민족문제연구소가 취재진들에게 배포한 자료의 표지. ⓒ 사진 뉴데일리DB



    ‘민중사관’은 <전교조>와 <전국역사교사모임>을 통해 현재의 좌편향 역사교과서 발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민중사관’을 이식받은 젊은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국사학계 역시, 좌파교육계 인사들과 함께,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치욕의 역사’로, 이승만 박사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국부(國父)들을 친일 부역자로 매도하는데 앞장섰다.

    이런 비뚤어진 민중사관의 편향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동영상 ‘백년전쟁’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배포한 동영상 ‘백년전쟁’은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하면서,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친일 반민족 사대주의자로 폄훼해 큰 물의를 빚었다.

    2003년 10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임헌영씨의 행적은, 왜 민족문제연구소가 좌 편향적 ‘민중사관’의 본향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 임헌영 소장   ⓒ 사진 뉴데일리DB
    ▲ 임헌영 소장 ⓒ 사진 뉴데일리DB

    임헌영 소장의 본명은 임준열. 그러나 해방정국에서 극단적인 종북 활동을 벌이면서 남한 사회 혼란을 주도한 남로당 총책 박헌영을 존경해, 이름을 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헌영씨는 1979년 적발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임씨가 연루된 남민전의 조직원들은 검거 당시, 남한 내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할 경우 게양할 전선기(戰線旗)를 소지하는 등 노골적인 종북 성향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임헌영 소장은 당시 ‘북한 김일성에게 바치는 서신’과 보고문의 초안을 수차례 작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실제로 1980년대 중반부터 이곳은, ‘민중사관’ 학습의 장이자, ‘민중사관’을 전파한 터전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