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탄저균·성완종 리스트 은폐설 등..괴담 ‘음모론’으로 진화
  • ▲ 한 사립유치원이 메르스 의료진 자녀의 등원을 거부한 사실을 보도한 방송 뉴스. ⓒ SBS뉴스 화면 캡처
    ▲ 한 사립유치원이 메르스 의료진 자녀의 등원을 거부한 사실을 보도한 방송 뉴스. ⓒ SBS뉴스 화면 캡처

    한 달 가까이 지속되고 있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에 추가 감염된 확진자 수가 뚜렷한 감소경향을 보이면서, 확산세가 고비를 넘긴 것 아니냐는 조심스런 예측이 나오고 있다.

    메르스 확산세가 한 풀 꺾인 모습을 보이면서, 중동에서 들어온 이 신종 전염병이 몰고 온 한국사회의 혼란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석하려는 움직임도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학계에서는 메르스를 접한 한국사회가 지난 한 달간 보인 극도의 혼란과 공포에 주목하고 있다. 메르스가 괴담과 루머에 취약한 한국사회의 후진적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메르스의 전염력이 진정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대조적으로,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여전히 퍼지고 있는 악의적 괴담과 음모론, 국민들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근거 없는 루머의 존재는, 전문가들의 위와 같은 분석이 힘을 실어주고 있다.

    현재 진행형인 메르스 괴담과 루머의 특징들이 8년 전 한국사회를 극도의 혼란에 몰아넣은 ‘광우뻥 괴담’과 흡사하다는 지적도 많다.

    ‘메르스 괴담’이 ‘광우뻥 괴담’가 닮았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기본적인 인식 수준이 8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런 사실은 그동안 수많은 오피니언 리더와 언론이 입버릇처럼 말한 ‘성숙한 시민의식’과 ‘공동체 의식’이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메르스가 한국사회에 새로운 과제를 던졌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뉴데일리는 메르스 발생 한 달을 맞아, 지금까지 나온 메르스 괴담과 루머를 종합 정리했다.


    #의료진을 범죄자로 내몬 언론과 정치인의 후진성

    메르스 사태가 길어지면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대상은 바로 언론이다. 사태 초기부터 언론은 ‘비상’, ‘공포’, ‘뚫렸다’ 등의 자극적인 표현을 앞세워, 메르스 확산을 새로 출시된 온라인게임처럼 다뤘다.

    언론의 무책임하고 자극적인 보도행태가 국민들의 근거 없는 불안감을 확산시키고, 괴담을 확대·재생산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끼쳤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언론이 메르스 공포를 앞장서 확산시켰다면, 일부 정치인은 그 공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면서, 언론 못지않은 비난을 받았다.

    더 심각한 것은 언론과 정치인들의 선동적인 행태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이, 메르스 바이러스와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의료진과 그 가족이란 사실이다.

    "어디 가서 메르스를 진료하고 있다고 말도 못 꺼냅니다.

    환자를 보는 것은 우리 사명이기 때문에 어렵거나 힘들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주변의 편견과 싸우는 것이 제일 힘들어요."

       - 서울 동작구 소재 대형병원 감염내과 의사 A씨, 조선일보 기사 중 일부


    위에서 언급한 의사 A씨의 사례는, 국민들이 메르스와 싸우는 의료진을 대하는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메르스 확진자가 입원했거나, 확진자가 거쳐 간 병원의 의료진은 누구 할 것 없이 A씨와 같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메르스 환자를 진료했거나 진료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사람은 의사와 간호사에 한정되지 않는다. 메르스 환자를 병원으로 옮긴 소방관도 같은 고통을 당하고 있다.

  • ▲ 지난 3일 대전 건양대병원 의료진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36번 확진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모습. 빨간색 점선으로 표시된 사람이 이 과정에서 메르스에 감염된 간호사다. 건양대병원은 메르스 확산을 우려해 이날 응급실 등 병원의 일부 시설을 일시적으로 폐쇄했다. ⓒ 조선닷컴(건양대병원 제공)
    ▲ 지난 3일 대전 건양대병원 의료진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36번 확진 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모습. 빨간색 점선으로 표시된 사람이 이 과정에서 메르스에 감염된 간호사다. 건양대병원은 메르스 확산을 우려해 이날 응급실 등 병원의 일부 시설을 일시적으로 폐쇄했다. ⓒ 조선닷컴(건양대병원 제공)

    한술 더 떠 메르스 의료진이나 소방관 자녀들이 주민들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메르스 공포에 이성이 마비된 일부 국민들은, 사명감 하나로 버티고 있는 의료진과 그 가족을 돕고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이들에게 주홍글씨를 찍는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고 있다.

    서울 양천구의 한 중학교는 메르스 확진자가 나온 이대목동병원 의료진 자녀들을 귀가 조치했다. 일부 학부모와 학생들 사이에서 “메르스 병원 자녀가 학교에 다닌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서울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는 “우리 아파트에 소방관이 살고 있으니 주민들은 조심하라”는 어이없는 방송을 내보내 물의를 빚었다. 소방관이라면 메르스 (의심)환자를 이송하는 업무를 맡았거나, 앞으로 그런 업무에 투입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추측이 방송을 내보낸 이유였다.

    대구에서는 메르스 확진자의 이름과 직업, 자녀의 학교 이름 등이 담긴 자료가 유출돼, 네이버 ‘지식IN’ 서비스에 올라오기도 했다.

    서울에선 박원순 시장이 삼성서울병원 의사인 35번 확진자와 관련된 정보를 ‘불안감 해소’라는 이유로 공개했으며, 경기 성남에서는 이재명 시장이 페이스북을 통해, 메르스 의심환자의 직업과 거주 아파트, 자녀가 다니는 학교 이름을 올려 거센 논란을 일으켰다.

  • ▲ 지난 4일 밤, 박원순 서울시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삼성서울병원 의사인 35번 확진자가 이동한 동선을 설명하고 있다. ⓒ 뉴데일리DB
    ▲ 지난 4일 밤, 박원순 서울시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삼성서울병원 의사인 35번 확진자가 이동한 동선을 설명하고 있다. ⓒ 뉴데일리DB
     
  • ▲ 이재명 성남시장이 페이스북을 통해 관내 메르스 의심환자와 그 가족의 정보를 공개해 논란을 빚었다. ⓒ TV조선 화면 캡처
    ▲ 이재명 성남시장이 페이스북을 통해 관내 메르스 의심환자와 그 가족의 정보를 공개해 논란을 빚었다. ⓒ TV조선 화면 캡처

    의료진과 그 가족에 대한 낙인찍기는, 8년 전 광우병 파동 당시 촛불집회 현장에 모습을 드러낸 ‘유모차 부대’를 떠올리게 한다.

    미국산 소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송송 뚫린다며 초코파이 구매까지 기피한 ‘유모차 부대’는 광우병 촛불집회 현장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지금도 사정은 비슷하다. 다만, 눈에 보이는 소고기보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심이 더한 때문인지, 8년 전과 같은 ‘유모차 부대’ 행렬은 볼 수 없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의료진과 그 가족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일부 국민들의 저급한 현실인식은, 8년 전 ‘유모차 부대’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 ▲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거리행진을 하는 유모차부대의 모습. ⓒ 조선닷컴DB
    ▲ 2008년 광우병 파동 당시, 거리행진을 하는 유모차부대의 모습. ⓒ 조선닷컴DB



    #농산물이 무슨 죄? 메르스 발생지역 생산품도 기피

    메르스 발생지역에서 생산된 상품의 구입을 기피하는 현실은, 부분별한 공포심이 경제활동에 해악을 끼치고 있는 단적인 예다. 메르스 발생지역에서 생산된 농축수산물에 대한 기피현상은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지만, 국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 메르스 발생지역 생산품에 대한 구입을 멀리하고 있다.

  • ▲ 전북지방경찰청 직원들이 11일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발생으로 출입이 통제돼 일손이 부족한 순창군 장덕마을을 찾아 봉사활동을 펼쳤다. ⓒ 사진 연합뉴스
    ▲ 전북지방경찰청 직원들이 11일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발생으로 출입이 통제돼 일손이 부족한 순창군 장덕마을을 찾아 봉사활동을 펼쳤다. ⓒ 사진 연합뉴스
     
  • ▲ 2009년 광우병 파동 당시, 인터넷에 올라온 광우병 위험 식품 목록. ⓒ 블로그 화면 캡처
    ▲ 2009년 광우병 파동 당시, 인터넷에 올라온 광우병 위험 식품 목록. ⓒ 블로그 화면 캡처

    이런 현상 역시 8년 전 ‘광우병 파동’ 당시와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차이가 있다면, 8년 전에는 미국산 소고기는 물론 소고기 성분이 들어갔거나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제품이 피해를 입었다면, 지금은 메르스 발생지역 생산물로 한정돼 있다는 정도다.

    메르스 발생지역 생산물 구매 기피현상은 가뜩이나 가뭄으로 고통 받는 농가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

    각 지방자체단체가 나서 이들 지역 농축산물을 구매해 주고 있으나, 국민들의 막연한 불신이 장기적인 구매 기피로 이어지지는 않을지 농민들의 시름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마트는 썰렁, 온라인 쇼핑은 대박..영세 음식점은 폐업 위기

    메르스를 둘러싼 괴담과 루머가 무차별적으로 확산되면서, 출퇴근 버스와 지하철은 눈에 띄게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주말 극장가와 야구장은 한산하다 못해 썰렁하다. 전통시장의 사정도 비슷하다. 특히 영세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소규모 음식점은 생계를 걱정할 만큼 매출이 크게 줄었다. 모두 메르스 공포에 사로잡힌 국민들이 외출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 탓이다.

    감염내과 및 예방의학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지역사회감염 가능성은 매우 낮다며, 지나친 과잉대응은 결코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만, 괴담과 루머에 갇혀있는 국민들의 공포를 완전히 털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메르스 여파로 외출을 삼가면서 반사이익을 누리는 업종도 있다. 온라인 쇼핑은 메르스 발생 전보다 매출이 크게 올랐으며, 배달업종도 반짝 특수를 누리고 있다. 반면 택배기사들은 갑자기 늘어난 물량을 소화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다.

    메르스가 사람들의 소비행태까지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 탄저균 배달·성완종 리스트 덮기 위해 메르스 확산 방치했다?


    “당분간 아침저녁으로 따듯하고 진한 소금물로, 소금기가 목젖에 닿도록 깊게 가글 하세요. 바이러스는 소금에 약해요. 소금이 바이러스와 접촉, 바이러스가 살균 효과가 있는 소금기를 견디지 못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 합니다.

    소금가글하고 켁켁 여러 번 반복해서 목에 있는 가래를 뱉어내면, 혹 모를 메르스 감염을 이겨낼 가능성이 훨씬 높아집니다.“


    위 글은 최근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을 떠도는 메르스 관련 문자 중 하나다. 메르스 발생 초기 바셀린을 코 점막에 바르면 감염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 루머의 발전형인 셈이다.

    소금물 루머는 그나마 애교라고 할 수 있다. 메르스가 낙타에서 사람에게 옮겨졌다는 이유로, 개나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이 메르스의 숙주가 될 수 있다는 루머도 있다.

    문제는 메르스 괴담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이다.

  • ▲ 메르스 괴담을 소개한 방송뉴스. ⓒ TV조선 화면 캡처
    ▲ 메르스 괴담을 소개한 방송뉴스. ⓒ TV조선 화면 캡처

    메르스 괴담과 관련돼 정치적 목적의 의심되는 대표적 사례가 미군의 탄저균 배달 사고를 은폐하기 위해, 정부가 의도적으로 메르스 초기 대응을 부실하게 했다는 음모론이다.

    미군의 탄저균 관련 괴담은 이 밖에도 더 있다. 메르스 감염 국가가 미군이 탄저균을 배달한 국가와 일치한다는 괴담이 그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성완종 리스트를 덮기 위해 메르스 확산을 방치했다는 기상천외한 괴담까지 있다.

    대검찰청은 지난 5일 전국 검찰청에 메르스 괴담을 유포하는 이들을 엄중 처벌할 것을 지시했지만, 검경의 단속이 괴담을 근절시킬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많지 않다.

    국민들을 전염시킨 공포 바이러스가 사라지지 않는 한, 괴담은 어딘가에 정체를 감추고 잠복기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내 예방의학 최고의 전문가 중 한 명인 OO대병원 B교수는, “메르스의 실질적인 위험성보다 사람들 심리 속의 ‘공포 바이러스’가 더 큰 위력을 떨치고 있는 것 같다”며 현재 상황을 진단했다.

    B교수는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행태가 ‘메르스 공포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있다며, 언론의 역할을 강조했다.

    “언론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메르스와 관련된 자극적인 보도를 내보내며, 적극적으로 ‘메르스 공포 바이러스’를 퍼트리고 있다.”

    “WHO에서 아무리 공기 전염 안 된다고 발표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전문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말을 믿고 맡겨야 한다. 그런데 국민들의 비난여론이 워낙 거세다보니 전문가들이 다 숨어버렸다.”

       - OO대병원 내과학 교실 B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