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左翼세력이 찬양하는 '김일성의 토지개혁'

    이승만 대통령 통치하에서 완결된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건국기에 이성계(李成桂)가 단행했던 과전법(科田法) 이래
    최대의 토지개혁으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

    정리/김필재  

    ■ 김일성의 실패한 토지개혁
     
     1946년 북한을 소련의 위성국가로 건설하겠다는 스탈린의 계획이 발표되면서 
    북한은 급속도로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에 편입됐다.
    1946년 2월 북한 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되면서 소련군 점령사령부는
     가장 먼저 토지개혁을 실시했다. 
     
같은 해 3월5일에는 토지개혁법이 공포되어 사원을 비롯한 개인소유의 농지를 모두 몰수해 과도적 조치에 따라 무상으로 소작인들에게 분배했다. 이러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김일성이 소련 점령군의 무장군인을 앞세워 불과 20일 만에 이뤄졌다. 
 
 당시 김일성의 명의로 발표된 토지개혁법령의 기본내용은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와 5정보 이상 소유한 조선인 지주들의 토지를 무상몰수하고 소작제를 철폐한 뒤, 몰수된 토지지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여(分與)하는 것이었다. 명목상으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토지개혁의 기본원칙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김일성의 일인독재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당대 북한의 소설가였던 이기영(李箕永)은 단편소설 ‘개벽’(1946)과 장편소설 ‘땅’(1949)을 통해 일제시기 땅이 없어 고생하던 북한의 농민들이 토지개혁법령을 통해 땅을 분배받고 자기 땅에서 농사짓게 된 기쁨과 그들의 삶을 소개했다. 
 
 그러나 1946년 토지개혁법령에 의해 실시되었던 북한에서의 토지의 개인소유화는 1954년부터 시작되어 1958년에 끝마친 농업협동화의 실현과 함께 종결되고 말았다. 
 
 개인 소유 땅은 없어지고 농민들은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인부 신분으로 전락했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농업 생산력 저하가 말해주듯이 북한도 명분은 공동소유 이었으나 철저하게 관료 중심으로 이익이 분배됐다. 
 
 토지개혁 법령 5조에 밝혔던 ‘무상 분배한 땅을 영원히 농민의 소유로 한다’는 김일성의 약속은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으로 끝났다. 자기 땅에서 마음껏 농사를 짓는 꿈이 이루어졌다던 북한 농민들의 소박한 기쁨도 영원히 끝나버리고 말았다. 1958년부터 오늘까지 반세기가 넘는 동안 북한에서 주장하는 중앙집권제원칙에 기초해 실시되고 있는 농업협동화방침의 그릇됨은 오늘날 북한 농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통해 재론의 여지없이 실패로 귀결됐다. 
 
 농민들은 수익 창출이 없는 협동농장에서 일하는 것보다 집 둘레에 있는 개인경작지나 산이나 등지에 만든 개간지를 통한 식량 해결에 나서고 있다. 실제 개인 경작지의 생산성은 협동농장의 몇 배에 달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땀을 흘린 만큼 노력의 대가를 보상해주는 소토지에는 온갖 정성을 쏟아 붓지만 아무리 일해도 빈궁만 차려지는 농장일은 하는 둥 마는 둥 시간만 채우면서 요령껏 일하는 시늉만 한다. 
 
 ‘고난의 행군’을 기점으로 해 시작된 이 ‘개인 소토지’문제로 북한 정부는 단속 기관들을 동원해 끊임없이 통제에 나서고 있지만 주민들의 땅에 대한 집착은 더 증가되고 있다. 북한 당국이 식량난을 해결하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땅을 농민에게 돌려주면 된다. 토지의 개인소유화를 장려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 대책이며 최고의 정책이라는 점을 북한 당국자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정책을 보류하고 있을 뿐이다. 
 
■ 이승만의 성공한 농지개혁
 
 토지개혁은 이승만의 사회개혁 프로젝트 가운데 매우 구체적이고도 가시적인 사안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한국사회의 탈농-상공업화를 주장했다. 보다 직접적으로 ‘일제에 의해 몰수된 모든 토지를 소농에게 분배할 것’과 ‘대지주제를 혁파해 소농체제로 개편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R. Oliver,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pp. 365-367 인용)
 
 이승만은 농지개혁이라는 역사적 과업에 필생에 걸친 자신의 사상을 담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기존의 지주제 해체가 사회경제적 평등화에 기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승만이 볼 때 지주제 몰락이나 평등주의 실현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는 농지개혁을 통해 사회경제적 평등을 신장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자본주의 산업화를 위한 조건이나 계기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농지뿐만 아니라 토지 이용 전반에 걸쳐 경제적 합리성을 강조했다. 그는 토지절약을 위해 “국민이 싫어하더라도 아파트를 많이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토지소유자가 국가적 차원의 개발을 어렵게 할 경우 “국가가 할 수 있는 법이 개발을 보장하고 또 토지문제는 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향신문 1991년 1월26일자 인용)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승만의 입장은 좌익계 정치집단과도 달랐고, 지주제를 배경으로 한민당과도 같지 않았다. 특히 이승만은 5.10총선거를 앞두고 미군정 당국이 1948년 봄에 일방적으로 강행했던 귀속농지(歸屬農地) 불하(拂下)결정에 대해 대단히 불만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평등주의와 산업주의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쫓던 이승만의 생각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군정의 귀속농지 불하결정이 내려진 직후 이승만은 올리버(R. Oliver)에게 보낸 서신에서 “우리가 집권하게 되면 한국의 신생정부가 파시스트적, 반동적, 극우적일 것이라고 지껄이는 모든 사람들이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조국을 자유화하는지를 보고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착수하게 될 것은 바로 토지개혁”이라고 했다. (R. Oliver, Syngma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pp. 152-153 인용)
 
 그러면서 그는 “미군정 당국이 한국 국회의 동의 없이 귀속농지를 처분할 권리가 없는데다가, 총선거를 불과 6주 앞둔 시점에서 이를 급하게 서두르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여기서 이승만이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한 ‘자유화’의 구체적인 의미와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평등주의와 산업주의의 병행 추진이라는 이승만의 평소 지론을 감안할 경우 그는 토지개혁에 관해 자신만의 심산(心算)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이승만은 귀속농지(歸屬農地)를 국가주도 산업화를 위한 경제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또 일반농지에 대한 토지개혁 역시 지주들에 대한 확실한 전업대책을 마련함으로써 산업자본가 형성에 보다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시키려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승만의 구상이 현실화됐다면 농지개혁의 전 과정이 일제가 남긴 산업생산 및 기술수준과 결합되어 한국의 국가주도 자본주의 산업화가 정부수립과 함께 곧바로 시행됐을 것이다. 
 
 농지개혁에 관한 이승만의 초기구상은 차질을 빚었다. 미국이 군정 말기에 이승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귀속농지 분배를 일방적으로 단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 자체는 본격적이고도 전면적인 토지개혁의 예고편이 되었고, 이승만도 정부 수립 직후 농지개혁에 착수했다. 그가 당시 지주 계급을 배경으로 하고 있던 여당, 곧 한민당의 입장을 극복하고 농지개혁을 단행한 것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은 6.25전쟁 발발 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1951년 4월 ‘농지개혁법 시행규정’을 통해 재개되어 남한 전역에 실시됐다. 그 결과 총경지의 약 40%에 달하는 89만2천 정보의 땅이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에 따라 재분배됐다. 
 
 이승만 대통령이 실현한 농지개혁에 대해서는 삼림과 임야 등 비경지(非耕地)가 제외되고 농지만을 대상으로 한 문자 그대로의 ‘농지개혁’으로서 1946년3월에 북한에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원칙하에 실시된 토지개혁에 비해 농민에게 불리한 것이었다는 등의 비판이 있지만 이 개혁은 한국 역사상 여러 모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이승만 연구의 권위자인 유영익(柳永益) 연대 명예교수는 李대통령의 토지개혁의 성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첫째, 농지개혁은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한국 경제사상 중요한 의의가 있다. ▲둘째, 이 개혁은 한국의 전통사회를 지배했던 양반지배층의 몰락을 초래하며 지주배경의 한국민주당 세력을 약화시키는 사회․정치적 효과를 유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다. ▲셋째, 6.25 발발직전에 개시되어 전쟁 중에 완료된 이 개혁은 전쟁기간 남한 농민들이 북한군에 호응하는 것과 같은 내부동요를 예방하고 궁극적으로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 효과를 발휘한 것이었다. 
 
 유영익 교수는 “한마디로, 이승만 대통령 통치하에서 완결된 농지개혁은 조선왕조 건국기에 이성계(李成桂)가 단행했던 과전법(科田法) 이래 최대의 토지개혁으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다”고 밝히고 있다.
정리/조갑제닷컴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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