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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의 고독

허문도 전 통일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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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11-20 18:46 수정 2014-11-20 19:35

유관순의 고독


허문도 /전 통일부 장관

영적 파워는, 가령 메달리스트 김수녕과 김연아의 경기를
타국 선수들과 비교해보면,
기량의 차원을 넘어서는 뭔가를 느끼게 된다.
그것이 바로 영적 파워이다.

유관순의 출중했던 영적 파워는 고난(苦難)을 통해
무한대로 단조(鍛造・달구어서 다루어 냄)되는 과정을 보게될 것이다.
유관순 그 이름, 두려운 마음으로 한번 불러 본다.
전신으로 느껴지는 그 영적 파워의 크기를 그릴 길 없어 망연함에 빠질 뿐이다.

유관순의 죽음은 고독했다.
그의 죽음은 어떤 누구의 지켜봄이나 관심 속에 있었던 흔적이 없다. 전해 오는 말도 없다.
마지막을 알려주는 유일한 기록은 그의 오빠 유우석이 호주로 되어 있는 호적에
‘대정 9년(大正 9년. 1920년) 9월28일 오전 8시20분 경기도 경성부 서대문 감옥에서 사망’이
있을 뿐이다.(이정은, 《유관순》)
9월 28일 감옥에서 사망을 확인했을 때, 일제당국은 시신을 인수해야 할 연고자를 찾지 못하여
가매장을 했다가, 보름이나 지난 10월 12일에야 그가 다니던 이화학당에다 통보하여
인수케 하였다.

10월 14일 정동교회의 장례식은 쓸쓸했다.
교사 한두 명, 김활란, 서명학 등의 이름이 보이지만,
일제는 참석을 엄격히 제한하여 같은 반 학생대표 몇 명,
뒤늦게 연락이 된 배재학당 재학의 오빠 유우석이 운구를 위해 데려온 친구 몇 사람이 전부였다.
수레에 실려 정동에서 이태원 공동묘지까지 갔다.
돌 하나, 표지판 하나 없이 유관순은 그렇게 묻혔다.
그러고 나서 해마다 3월이 오고 눈감은 9월이 왔어도 누가 그의 무덤을 찾았다는 얘기는 없다.
 잘난 사람들일수록 일제 앞에 뼈가 무더기로 녹아나는 ‘문화통치’의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제가 조선군 용산기지를 확장하려 들어, 
유관순이 묻혀 있는 이태원 공동묘지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게 되었다.
일제가 ‘이익선(利益線)’ 만주로 침략의 발길을 뻗던 1930년대쯤이 아닐까.
신문에 이장 공고가 났을 테지만, 3·1운동을 잊어야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유관순을 기억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가까운 피붙이들은 먹고살기에 고달파 신문을 구경할 형편이 못되었다.
유관순의 묘에 관심을 둔 누구도 그때의 조선 땅에는 없었다.
공동묘지 자리에는 일제의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이같이 유관순의 육신의 흔적은 모든 조선사람의 눈앞에서 완벽하게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유관순은 광복이 되어 민족 앞에 다시 나타난 유관순이다.
유관순이 다시 살아 나온 경로를 더듬어 본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이 지은 《유관순》은 고증이 철저하다.
이에 따르면 광복 후 우리 사회에 유관순의 행적이 알려지게 된 것은
인덕대학교 창설자 박인덕 여사와 이화여자고등학교 신봉조 교장에 의해서였다.
박인덕은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의 기하 교사였다.
3·1운동 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미결감에서는 유관순과 함께 있기도 했다.
박인덕 여사의 회상 속에 있는 유관순은 미국에서 1954년에 발간된 그의 자서전 속에 있다.

▲ 이화학당 여학생 유관순.


‘나의 뉘우침 속에 돌아온 유관순’

“한번은 재판정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전에 학생이었던 유관순을 만났다.
유관순은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여섯 살밖에 안 된 그 아이는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난 뒤
학교를 나와 남한의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아이는 고향 마을 사람들과 주변 지역 사람들을 분기시키고, 태극기를 만들었으며, 장날 시위운동을 조직했다. 그 아이는 독립운동을 하자는 전갈을 하기 위해, 몇십 리 길 걷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아이의 아버지, 어머니, 오빠도 다른 많은 사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인의 총탄에 맞았다. 결국 그 아이는 체포되었다. 그는 많은 고문을 당하고, 7년형을 받아 투옥되었다. 그 아이는 상급심에 항고하였기 때문에, 서대문감옥에 이감되었다. 나는 내 마음에서 큰 감동을 받아 이 어린아이를 위해 무엇인가 해 주고 싶었으나,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 아이가 처했던 곤경을 생각하면 마음 깊이 어떤 가책을 느낀다.”

어렸던 유관순의 추상 같은 독립투쟁 행적에 한없는 감동을 느끼지만,
유관순 하면 어떤 뉘우침이 따른다는 박인덕의 이 진실하고 솔직한 진술을 치부해 둘 것이다.
광복이 되고 만 2년이 지나서야, 1947년11월 27일 중앙의 명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처음 유관순기념사업회 이름으로 고향 병천에서 추모 기념식이 있었다.
김구, 이시영 등 정상급 인사들의 제문, 추도문이 더할 수 없는 찬사를 바쳤다.
그중에서 마음에 남는 것은 충청남도경찰청장 명의의 위령사 속에 있다.
그 대목을 옮긴다.

“유 열사의 성혼(聖魂)이여…
이제 이 땅은 새로워지고, 이 겨레 자유를 얻었으니 부디 고요히 눈을 감으소서….
지금 이 산천은 백설에 묻히고 초목이 뜻이 있어 그 눈을 녹이도다.
유 열사의 영혼 앞에 산천초목도 눈물짓고, 더러운 몸 아직 살아 있어,
민족을 위하여 일한 바 없는 이 백성도 참회의 눈물 흘리며,
백의동포의 영원한 자유 회복할 때까지….”(독립기념관 자료)

박인덕의 회상에서도 그렇고, 이들 인용에서 알게 되는 것은,
광복공간을 사는 진실하려는 사람들의 회상 속에, 어떤 뉘우침과 참회와 함께
유관순은 부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관순의 영적 파워

참회의 원효(元曉)적 의미는 육근<六根: 眼(안), 耳(이), 鼻(비), 舌(설), 身(신), 意(의)의 육적·현세적 욕구의 6가지 근원>의 방일(放逸)을 뉘우치는 것이다. 하루하루 숨 쉬고 산다는 것은 육근을 방일하고 산다는 것이고, 일제하에 조선땅에 산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내 속에 하루하루 친일을 쌓아 가는 삶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황국신민 서사(일제가 조선 학생이나 일반인에게 빠짐없이 천황의 신민임을 맹세케 한 구호로, 조례·집회에서 암송, 제창하게 했다)라도 읊어대고 동방요배(조선사람들에게 일본천황이 있는 동쪽을 보고 절하도록 한 것)라도 해야 하루를 넘길 수 있었던 것, 누구는 아니었던가.
일제에 세금 안 내고 산 사람이 누가 있었던가.

유관순은 해방된 3000만의 ‘내 속의 친일’을 씻어내는 정화력으로
하늘이 예비했을 것 같기도 하다. 민족의 광복공간에 부활한 유관순이 할 일은 많았다.
1947년 9월에 구성된 ‘순국처녀 유관순 기념사업회’에는 당시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건국운동
속에 있던 민족의 모든 지도자의 이름이 보인다.
명예회장에 유관순과 같은 동네, 병천 지령리 출신의 조병옥, 회장에 군정 문교부장 오천석,
고문에 서재필, 이승만, 김구, 오세창, 이시영, 김규식, 각종 임원에 정인보, 신익희, 이범석,
장택상, 최현배, 백낙준, 김병노, 이인, 김활란, 임영신 … 이만 하겠다.

27년 전에 18세 처녀로 죽은 유관순의 기념사업에 왜 이렇게 전 민족의 지도자들이
서로 이름을 넣으려고 든 것인가. 민족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지도자들이 3·1운동에서 감지했던
조선인의 영적 파워를 일신에 모아 가진 존재가 유관순임을 알아본 것 같다.
유관순의 영적파워의 정화력으로 3000만 모두의 ‘내 속의 친일’을 씻어내고, 새 나라의 네이션 빌딩의 전열에 모두를 내세워 그 에너지를 점지받게 하려 한 것이 아닌가.
음력 3월1일(4월1일) 3000명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의 주동자로 하나의 공판정에 남은 세 사람 조인원(56·유석 조병옥의 부), 유중무(45·유관순의 숙부), 유관순(17). 판결문에서는 이 중에서 유관순이 나이가 어린데도 첫번째 제1항으로 판시되었다.

▲ 옥중 독립투사 유관순.

창천에 빗긴 ‘동지섯달 나르는 매서운 새’

간략히 하면, 공주서의 5년형(이정은 고증, 그동안 7년으로 알려져 옴)이 서울의 공판에서는
세 사람 모두 3년형으로 줄었다. 조인원, 유중무는 고등법원으로 상고했고, 유관순은 빠졌다.
숙부를 위시하여 우러러보던 동네 어른들의 강력한 권유를 유관순은 물리쳤다.
유관순의 상고 거부의 변은 “삼천리 강산이 어디면 감옥이 아니겠습니까”였다.
유관순은 일제에 애걸하기를 거부했다.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이나 감형이나 구명으로 통하는 어떠한 수단에의 접근도
이미 거부하기로 작심했던 것 같다. 감옥에서 눈을 뜨고 있는 모든 순간,
의식과 운신이 가능한 모든 시간을 독립만세를 외치는 데 바치고자 하였다.
폭력이 쏟아지는 터널로 들어가는 좁은 문을 의지로써 열었다.
감옥 안의 유관순의 모든 독립만세는 간수들의 구타와 린치의 소나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유관순은 끝이 없는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아우내 시위 날 총칼에 찔린 옆구리에서 계속 고름이 났고,
옥내 만세투쟁으로 가격당해 방광이 부서졌는지,
냄새가 나고 피멍이 든 전신이 짓물러 고통이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의료는 눈을 감았다.

육(肉)의 초탈은 어려웠다. 그러나 유관순의 정신은 내려오지 않았다.
그 정신은 ‘동지섯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되어 창천을 차고 오르고 있었을 것이다.
유관순은 그의 삶이 죽음에 밀려나기를 거부했다.
유관순의 삶이 역으로 죽음을 거머잡아 그 위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족독립의 등대불을 켜고자 했다.
“Die and become”의 세계가 있다 한 에릭 에릭슨의 말은 맞다.
유관순은 죽어서 살아났다. 민족의 영적 카리스마로 부활했다.
유관순은 민족을 향한 영적 파워의 구원의 발신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 글은 지난 10월13일 발간된 필자의 저서 [죄 많은 일본...통일까지 방해할 건가]
제2장 '빼앗긴 들의 초인, 한민족의 영정 파워'에 실려있습니다. p164~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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