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뭉클한 애국가..파독광부 만남 순간 생생히 증언
  • <이현표의 시간여행>

    [단독] 39세 퍼스트레이디 육영수의 방독소감

  •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가 수립된 것은 우리보다 약 1년이 늦은 1949년 9월 20일이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입은 전화(戰禍)는 6.25전쟁보다 훨씬 끔찍했으나,
    독일인들은 정부수립 15년 만에 흔히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일컬어지는 경제부흥을 이룩했다.
     
    1964년 12월,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분의 독일 국빈방문은 같은 분단국이지만
    단기간 내에 세계경제강국으로 우뚝 선 나라를 벤치마킹하기 위해서였다.
     두 분은 방문 후 방문소감을 각각 육필로 남겼다.
     대한민국 국가원수들 중에서 유일무이한 해외순방 소감이다.
     
    그리고 15년 만에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뉴데일리는 그 원동력이 된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소감을 소개한데 이어,
    당시 39세의 퍼스트레이디의 방독소감 전문을 공개한다.

    이 글은 <붕정칠만리-박정희 대통령 방독기>(1965년 동아출판사)에 수록되었음을 알려둔다.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전 워싱턴 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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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방독소감(訪獨所感)

    육영수 <박정희 대통령 부인>

    로렐라이의 전설을 꿈꾸며

    금번 대통령과 나의 서독방문을 전후하여
    국민학교 어린 학생들의 귀여운 축하편지로부터
     80노인의 정중한 격려편지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에서 보내주신 많은 서신과,
    또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전화나 전보로 우리의 7만리 여로가 무사함을 빌어주시고,
    바람이 찬 가두에까지 나와서 환송·환영해주시는 등 많은 성원을 보내주신
    국민여러분께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할지 모르겠다.

    국가의 중책을 맡은 분의 아내가 된 입장에서 갖는 여행이란
    결코 즐겁기 만 한 것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독일하면 먼저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하늘이 안 보이는 라인의 공장지대나 루르의 탄광지대가 아니라,
    소녀시절부터 즐겨 읽은 하이네의 시 속에 곱게 흐르는 라인강이며,
    고풍이 창연한 성벽과 신비로운 사원들, 낭만과 전설 속에 고요히 라인강을 굽어본다는
    로렐라이 절벽, 이런 것들이었고, 또 이런 것들을 실제로 답사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간절했다.

    더구나 떠나기 전 우리 아이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무리를 해서라도 꼭 명승지를 찾아봐야겠다는 혼자만의 속셈을 가지고 있었지만,
    철두철미하게 짜인 일정표의 진행은 두 번 다시 마음도 목 먹게끔 나를 붙들어 맸다.

  • “이번에 어머니는 먼 독일까지 여행을 가지만, 아마도 여러 가지 사정과 
    또 내가 생각하는 바가 있어서 너희들에게 선물을 사다주지 않을 거야.
    물론 너희들에게 좋은 선물을 사다주면 좋긴 하겠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선 여러 면으로 생각해 보아야 할 사정이 있기 때문이니,
    내 마음을 이해해주고 이번 여행에 선물을 기대하지 마라.”
     
    나의 간곡한 타이름에 선선히 응해 준 우리 세 꼬마들에게
    대신 흥미진진한 로렐라이의 전설이라든지 기타 이야깃거리들을 잔뜩 안겨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나는 그러한 여행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해 아이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지만,
    그곳 대통령부처께서 다행히도 세심하게 보내주신 꼬마들의 선물로써
    면목을 그럭저럭 세운 셈은 되었다. 
     
    어쨌든 나 개인으로서는 자유롭게 독일 사람들의 생활 속에 실제로 파묻혀보고 싶었던 것도,
    또 시간의 제한 없이 관광지를 둘러보고 싶었던 뜻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나의 입장이 결코 개인의 위치로 해석될 것이 못 된다는 자각으로써 스스로 위로를 하곤 했다.
     
    가슴 뭉클한 애국가
     
    12월 7일 8시 5분 부슬비가 비행장의 아스팔트를 촉촉이 적시는 가운데
    손에 태극기를 들고 우리를 환영 나온 교포들의 따뜻함을 제일 먼저 느끼며,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려 그곳 인사들의 마중을 받았다. 
     
    29시간의 긴 비행에서 오는 피로를 감추며,
    검정 평복차림의 대통령과 황금색 한복차림을 한 나의 웃음이
     이역만리 먼 곳에 사는 우리 교포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김포공항의 몇 배가 되어 보이는 이 공항은 독일에서도 가장 중요한 항로의 요지라는 것과,
    매 2분마다 뜨는 비행기에 오르내리는 관광객들의 수효가 놀라운 숫자를 나타낸다하니
    이것만으로도 잘 정리된 살기 좋은 나라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기는 점차로 개어 저공비행을 하고 있는 기상에서 높은 산과,
    그리고 질서 정연히 뻗어있는 건물들이 그림같이 아름답게 내려다보이더니,
     같은 날 9시 40분, 이 나라의 임시 수도 본 비행장에 도착했다.
    공항에서는 독일연방공화국 대통령부처를 비롯하여 에르하르트 수상,
    기타 많은 인사들에 의해 환영식이 거행되었고,
    이역만리에서 그 나라 군악대에 의해 연주되는 애국가는
    새삼스럽게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었다. 
     
    흑의민족(黑衣民族)
     
    백발의 노구가 조금도 힘에 겨워 보이지 않는 대통령과,
    처음부터 친절과 다정함으로 동방의 손님을 따뜻이 맞이해주는 대통령부인에게서
     나는 마치 오래 사귄 친구를 대하는 듯한 친근감마저 느꼈다. 

  • 그 부인은 지금도 본(Bonn) 대학의 러시아과에서 젊은 학생들과 함께 
    현대문학 및 러시아어를 연구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열의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그분은 현재도 5-6개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을 백의민족이라고 한다면,
    독일인을 가리켜 흑의민족이라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들은 의식에나 행사에는 예복처럼 검은 옷을 즐겨 입는다더니,
    과연 남녀 모두 검은 복장을 단정히 입고 있거나,
    아니면 대부분 화려한 색을 피하고 검은 계통의 옷이나
    또는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러시아워가 지난 길거리엔 다니는 사람들이 드물어
    말로만 듣던 그 나라 국민의 검소·질박한 생활 태도와 안정된 사회생활질서를
    한꺼번에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 대통령 부인의 꾸밈없는 태도와 복장은 독일여성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우선 한 눈으로 그 나라 여성의 건전성을 보는 것 같았다.
     따라서 나 자신의 몸가짐과 태도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마음속에 느껴지는 것이었다. 
     
    오후에 우리나라 대사관에서 대사부인의 각별한 성의로 준비된 한식을 대했을 때는
     얼마나 반갑고 고마웠는지!
     
    높다란 건물 틈에 끼어 그래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기운차게 펄럭이고 있는 태극기 밑에
    우리 대사관이 점잖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이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국위를 선양하는 중심점이 되고 있다 생각하니,
    어쩐지 믿음직스럽고 대견한 반면, 남의 나라 공관 못지않게
    잘 가꾸고 꾸며져야 되겠다는 또 하나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그날 밤 늦게 그곳 대통령부처의 비공식 만찬 초청에서 돌아와
    비로소 이제는 쉴 수 있다는 즐거움을 느꼈다. 동시에 다음날의 계획표를 검토하고,
    또 앞으로 만날 사람들에 대한 예비지식을 갖기 위해
     머리를 정돈하며 참고자료 등을 들춰보았다.
     
    실리적인 생활
     
    호텔에서 독일 사람들이 지극히 절약하면서도, 반면에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쓰고 있는지를 실감나게 해주는 것을 많이 느꼈다.

    예컨대 세면실에서 느낀 것이 있다.
    우리가 독일에 있을 동안 머물렀던 각 호텔들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 오는 원수들을 접대하는 곳이어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여 여러 가지 사치한 특수디자인을 해 놓았으리라는 상상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그들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쇠붙이 하나하나까지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는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게끔
    섬세하게 꾸며진 시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욕실 한가운데로 삥 둘러 멋지게 둘러진 굵은 철선이
    처음엔 단순히 수건걸이에 지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것 자체가 스팀 시설을 겸하고 있었다.
    또한 세면실에 손을 뻗으면 금방 닿을 수 있는 곳에 전화, 벨 장치가 되어 있었다.
    전등 하나, 쇠붙이 하나를 아끼고 쓸데없이 낭비하지 않으면서도,
    필수품은 적재적소에 놓는 등 독일인들은 정말로 문명의 이기를
    최대한으로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2월 8일 다음날 대통령 관저를 공식방문,
    대통령 부처에게 우리나라 측에서 주는 훈장수여와
    우리가 그 나라로부터 훈장을 받는 의식이 거행되었고,
    또 선물 교환과 환담이 있었다. 


  •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가지가지의 꽃들로 소담스럽게 꽃꽂이를 해 놓았는데,
     우아하고 청초한 맛과 줄기의 선을 살려서 꽂는 우리의 꽃꽂이와는 달리
    오브제를 사용치 않고 순전히 꽃 자체로써 담뿍 꽂아 무척 탐스럽고
    화려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본 시청과 쾰른 시청은 원래 옛날 궁전으로 쓰이던 곳들이어서
     그 규모라든가 실내의 조각들이 웅장하면서도 섬세했다.
    일반 시민 상대의 관청이라기보다는 옛 왕조 때의 위풍이 아직껏 풍기는 듯한 위압을 받았지만, 이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제도 하나하나가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 헌신적으로 처리되고 있다는 것은 건물의 면모와는 상반되는 것이어서 마음이 기뻤다.
     
    더구나 청사 내부의 곱게 다듬어 놓은 정성이 보이는 듯한 각색의 카네이션 꽃들은
    모두 향기롭고 탐스러워 이 안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의 마음을 황홀하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두 도시의 시장부처들의 겸손하고 부드러운 환대는 꽃의 매력에 못지않게
    찾는 사람의 마음에 깊이 남는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 일행이 탄 차가 시가를 지날 때 우리를 알아본 시민들은
    누구나 정중히 모자를 벗고 예의를 표하거나, 또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렇게 오고가는 개개인 모두의 행동이 꾸밈없고 가식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아 예절바른 국민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쾰른의 돔(사원)은 전통있고 유명한 곳으로
    지금부터 약 600년 전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 동안 많은 전란을 겪으면서도 신자들의 끊임없는 봉헌으로
    매번 증축 수리를 할 수 있었기에 지금까지도
    위풍당당하고 엄숙한 면모를 지니고 우뚝 서 있었다. 
     
    옛날 유럽에서 제왕이 되려면 누구든지 먼저 이 사원에 와서
    제왕이 된다는 예를 올려야 했다고 한다.
    이 유서 깊은 사원의 책임을 맡고 있는 대주교가
    우리 일행을 맞이해주고 또 우리를 위해 경건히 기도해주었다.
     
    그날 저녁 공식 만찬이 끝난 후, 독일대통령부처와 함께
    유명한 베토벤 할레에 가서 기대하던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38번 <The Prague>,
    일명 ‘메뉴엣도 없이’를 들었다.
    이 곡은 전체적으로 모차르트의 인간적인 주관성이 강한 곡으로 이름이 높다하며,
    끝없이 흐르는 풍부한 악상이 한없이 맑고 깨끗한 흐름을 이루어 나아가
     그 위에 화려한 꽃송이와 그 향기가 피어나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곡이다. 
     
    곡을 들으며 매번 유명한 음악인들의 방한공연이 있을 때마다
    시민회관을 꽉 채우며 성황을 이루는 우리 한국의 음악팬들의 생각이 간절해졌다.
    또 요즈음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생각도 떠올랐다.
     
    12월 9일 지난밤 황홀하게 넘쳐흐르던 음악의 멜로디가 아직껏 그 여운으로 남아 어느 구석엔가 배어있을 것만 같은 그 베토벤 할레에서 이곳에 와 있는 우리나라 유학생들과 조찬을 가졌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나는 이 시간을 통하여 고국을 떠나와서 여러 가지 환경이
    남들보다 더 공부를 해야만 대결이 될 수 있는 입장에 있는 우리 학생들과 대면했다.
    이들과 되도록이면 친해지고 싶었고, 또 가까워져야 할 것 같았으며,
     일일이 따뜻한 정을 나눠주고 헤어져야 되겠는데,
    제한된 시간이 자꾸자꾸 지나가는 것이 몹시 초조하고 안타까웠다. 
     
    대통령께서 그곳 국회에 참석하시는 동안
     나는 본 시내에 있는 여자실업학교와 마리아 임 발데 고아원을 방문했다.
     
    독일 국민의 우수성은 이미 아는 사실이지만,
    그들은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정확하며 완전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자실업학교를 찾아
     
    내가 방문한 이 실업학교는 일반 국민학교 졸업생 중 가정 사정으로 진학이 어려운 학생들이
    다니는 곳이라는데 현대식 건물에 완전한 시설이 갖춰져 있었으며,
    각 반이 불과 20여 명씩으로 짜여져 실제로 기술 습득에 열중하고 있었다. 
     
    1년 과정과 2년 과정으로 나뉘어있는데 일반 중학에서 배우는 교양과정을 반드시 이수시킨 후
     전문기술을 가르친다고 한다. ‘요리반’, ‘재봉반’, ‘꽃꽂이반’, ‘육아반’, 그밖에도 약 10여 가지
    분야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 학교에서 철저한 교육과 훈련을 받고 졸업하면, 대부분 직업을 갖게 된다. 특히 보모학을 전공한 졸업자는 이 학교 부속 탁아소 및 유치원에 남게 된다고 한다.

  •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충실히 갖춰진 환경에서 용두사미 격이 되지 않는 철저한 교육을 실시하는 여자실업학교의 분위기는 서로가 개인지도를 주고받는 것 같았으며, 또 명랑하고 활발한 움직임은 어느 아늑한 살롱을 연상시켜주었다.
     
    어쨌든 적당히 슬슬 넘긴다는 식의 사고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 사회에선
     배우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모두가 한결같이 자기 전문분야에서는
    완전무결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은 부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우수한 두뇌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학생들도 이만한 조건하에서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들보다 못하란 법은 없지 않겠는가?
     
    마리아 임 발데 고아원
     
    다음은 본시에 있는 마리아 임 발데 고아원에 갔는데, 주위 환경도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는 현관에 발을 들여놓는 방문객을
     기쁘게 하는 첫 인사처럼 들렸다. 

  • 귀국 후 나는 어느 친지에게 다음과 같은 독일 고아원 방문소감을 써서 보낸 일이 있다.  
     
    “아이들이란 비록 남루한 옷을 입혀도 귀엽게 길러야만 귀여운 법이고,
    천하게 기르면 아무리 좋은 옷으로 단장을 해도 그 인상부터가 천하게 보이기 마련인가 봅니다. 내가 독일 고아원에 갔을 때, 그 아이들의 맑은 웃음과 눈동자는 조금도 낯선 방문객을 경계하는 것 같지 않았으며, 내 품에 안겼던 어떤 꼬마는 떠나올 때 내리려 하지 않아서 정말 발걸음이 돌아서질 않았습니다. 
     
    사리사욕을 떠나 오직 신에 영광을 돌리기 위해 봉사하는 수녀님들의 티없는 표정과 우정과
    자비심 속에서 곱게 자라는 그 아이들의 가슴 속에도 그 뜻이 심어질 것이라 생각하니
    무척 흐뭇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란 속에서 생겨진 무수한 고아들의 양육문제는 심각한 사회문제입니다.
     이곳 우리나라에서도 내가 고아원을 방문할 때마다 늘 느끼는 일입니다만
    진정 자신을 초월하고 구원받아야 할 인명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뜨겁고 감명 깊게 해주는지 모릅니다!”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곱게 이 고아원의 숲을 누빌 때 이들과 작별하며,
    나는 진심으로 이 고아들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또 하나 감명 깊었던 것은
    몸이 불편한데도 불구하고 나를 반갑게 영접해 준 에르하르트 수상부인의 인상이다.
    수상부인은 요즈음 건강치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혹시 만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막연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고맙게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사양치 않은
    그 부인의 친절에 나는 정말 기쁨을 금치 못했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
     
    12월 10일 고대하던 우리의 광부들과 간호학생을 만나는 날이었다.
    고되 노동에 시달리는 그들에게 좀 더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웃음을,
    포근한 인정을 나누어 줘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독일에서도 유명한 아우토반을 달리면서도 그 아름다운 경치에 흠뻑 도취되지 못했을 만큼
     나의 머릿속엔 우리 동포인 많은 광부들과 만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라가 부강하여 기운 있는 젊은이들의 노동력을 먼 나라에까지 보내지 않고도
    우리나라에서 흡수할 수 있고, 그들을 편안히 살게 해 줄 수 있는 나라를
    구름위에 집을 짓듯이 머릿속에 수없이 그려보는 감상에 얼마간 젖어 들다보니
    차는 어느 덧 루르지방의 탄광단지에 들어서고 있었다. 
     
    도로 연변으로 우뚝우뚝 서 있는 굴뚝과 검은 연기 밑에 묵직하게 늘어 선 많은 공장들이
     얼마나 길고 넓게 퍼져있는지, 이것이 말로만 듣던 그 공장지대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정유공장인 이곳 회사의 기술과 자재로 우리 한국 울산에도 정유공장이 세워졌다는데,
    그것은 이 규모의 몇 분의 일이나 되는 공장일까?
    또 그 공장이 세워짐으로써 얼마만한 혜택이 우리 국민들에게 베풀어질 것인가를
    머릿속에 헤아려보는 가운데 광부촌에 도착했다.

  • 그러나 웃음을 주고 위로를 주겠다고 그렇게도 마음속으로 단단히 생각했던 
    나의 계획은 엉뚱하게도 그들을 대하는 순간,
     검은 눈동자와 황색 피부의 낯익은 우리 젊은이들의 환성 속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프도록 가슴이 맺혀 오는 무엇인가 뭉클한 감정이 솟아오르며
    시야가 뽀얗게 흐려지는 것이었다.
     
    분별없이 마구 흘러내리는 눈물을 들킬세라 참고 또 참았으나
    걷잡을 수 없는 격정은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소리를 핑계 삼아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흐느끼게 하고 말았다.
    그곳에 모인 간호학생들을 눈이 벌겋게 울렸고,
    또 모든 사람의 가슴을 두드린 그 순간을 나는 지금도,
    또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숙소를 돌아보고 광산시찰을 마치고 돌아오며, 나는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렸다. 
     
    “지금 몸은 비록 여러분 곁을 떠나지만, 마음만은 항상 여기에 남아서
    여러분을 따뜻이 보살피고 위로하며 격려하고 싶습니다.” 
     
    한국과 독일, 그리고 먼 나라에까지 와서 일해야 하는 우리 젊은이들,
    본국의 수없이 많은 실업자와 영세민들, 우리가 기필코 이루어놓기 위해 해야만 할
    무수한 과제들, 이러한 모든 것이 거미줄처럼 머릿속에 엉켜
    그날 하루는 착잡한 심정 속에서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오후 베스트팔렌 주지사의 성의 어린 오찬 대접을 받고,
    그분들의 정중하고 따뜻한 영접을 감사하게 생각했다. 
     
    독일의 판문점, 베를린 장벽
     
    12월 11일 (베를린에서) 세계의 이목을 끄는 베를린.
    이곳의 시장은 독일의 야당 당수인 브란트씨.
     
    때마침 어둠이 내려 덮이는 때여서 비행기 안에서는 동서베를린을 분별키 어려울 줄 알았다.
    그러나 수행원의 안내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더니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불빛에 덮인 서베를린과
     그렇지 못한 동베를린이 한 눈에 구별되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날 저녁엔 브란트 시장부처가 베풀어준 만찬회가 있었다.
    베를린 장벽을 통한 허다한 비극을 실제로 보아온 시장부부였지만,
     상냥함과 따뜻한 표정으로 많은 시민들의 가슴을 포근히 어루만졌을 것이라고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은 관광버스를 타고 베를린 장벽을 보러 나갔다.

    도시를 일직선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꾸불꾸불 꾸부러진 경계의 주위엔
    얼마 전에 헐었다는 건물들이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었다.
    쌓여있기도 하고 틈이 있는 데마다 뒹굴듯이 쳐놓은 가시철조망은
    자유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제지하기 위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초소마다 삼엄하게 서 있는 경비원들은 자유를 찾아 넘어오는 사람들에게
    사정없이 발포한다는 것이었다. 

  • 전망대 위에서 멀리 동베를린을 넘어다보며 나는 우리 한국의 판문점을 생각했다.
     내가 꼭 한 번 가보기를 원하고 있었으나, 현재 나의 위치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규칙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에도 이러한 전망대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며,
    거기에서 멀리 개성 쪽으로 향하는 곳에 하얀 다리가 놓여있는데,
    이 다리를 가리켜 그곳에 주둔하는 유엔군들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Bridge of No Return)’라고 이름 지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다리를 건너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를 포함해서 붙인 이름이라니
    얼마나 가슴을 쓸쓸하게 해 주는 말이며, 그 다리 건너에 있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애착을 갖게 해 주는 말인지 모른다.
    나는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지난날 신문지상을 통해 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오던
    무수한 사람들이 당한 갖가지 참상이 실제 눈에 보이는 듯하여 울적함에 젖었다. 
     
    그 옛날 하이네·릴케·괴테의 시 속이나, 모차르트·베토벤의 음악 속에는 이런 비극은 있지 않았다. 무한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인간들의 숨결과 그러한 인간만이 지니는 깨끗한 번뇌와 고달픔은 있었을지언정, 항상 아름다운 기풍이 흐르던 독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산세력은 인간의 한없이 평화로운 고장에, 생활에, 이토록 무거운 장벽을 드리움으로써 씻지 못할 오점을 남겨놓았다는 느낌을 가졌다. 또한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 쪽으로 향해있는
    건물의 유리창과 브란덴부르크 문까지 모두 굳게 닫히고, 또 보이지 않도록 막아놓은 것을
    실제로 보면서 분단된 세기의 비극을 한꺼번에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독국민들이 장벽이 막히기 전에 브란덴부르크 문의 형상을 딴 기념핀을 만들어 그것을 꽂고
    또 관광객들에게도 기념으로 팔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이 얼마나 통일을 갈망하고 있는가를
    느낄 수 있었다. 포츠담광장에서 장벽 너머로 동베를린을 내려다보며 느낀 여러 가지 가슴 아픈 일들은 나의 뇌리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베를린 장벽을 떠나며 한독 양국이 함께 처하고 있는 이 비극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야함을 절실히 느끼고, 두 나라가 공동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합심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뮌헨의 인상
     
    12월 12일 뮌헨은 바이에른주의 수도격이며, 신구(新舊)시대의 문명을 함께 보존하고 있는
     역사 깊은 도시이고, 또 현대의 중요한 예술도시이다. 
     
    이 바이에른주 사람들은 지금도 옛날 조상들의 문화, 풍속 및 습관을 철저히 지키는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들었다. 그러면서도 북부사람들보다 더 쾌활하고 명랑한 성격을 지닌
    사람들이기도 하다.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을 계획한 것이 바로 이 도시였다고 한다.
    우리에게 오찬 대접을 해 준 바이에른 주지사부부는 대단히 인상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분들이었다.
     
    우리 일행이 뮌헨에 도착한 날 저녁, 그곳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학생들 주최로 한국 춤, 민요, 가야금까지 동원된 다채로운 프로가 있었다. 외국학생 틈에서 남의 나라 말로 공부하기에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을 텐데 우리를 위해 준비하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고맙다못해 측은하도록 그 성의가 마음에 젖어들었다. 이렇게 귀한 자리에 대통령께서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치 못하신 것이 못내 애석했다.

  • 쯔빙거 궁전에 들렀을 때 천정과 벽이 온통 벽화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몇 백년 전의 색채 그대로인 듯 선명하다. 또 그림 자체가 그 넓은 벽과 천정을 덮고 있으면서도 우아한 멋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림들은 모두가 명화로서 벽마다 이곳저곳에 걸려있었는데,
    갓 열린 포도송이처럼 그 자리에서 따 먹으면 달콤하고 신맛이 우러날 것 같은 포도 그림은
     수 세기 전 그림 같지가 않았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모차르트의 유명한 가극 <피가로의 결혼>을 보게 된
    뮌헨 국립오페라 극장은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으로
     그 옛날 왕족만을 위해 건립되었다고 한다.

     전쟁 중에 극장 내부의 아름다운 조각품들을 시민들이 모두 스스로 가져다
    정성껏 보관, 또는 지방에 피란시켜 두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도로 그 자리에 가져다 놓아
    옛날의 면모를 그대로 지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뮌헨 시민들의 아름다운 정성이 깃든 곳이라는 것이 나의 마음을 얼마나 벅차게 했는지 모른다. 인명이 왔다갔다 하는 전쟁 중에 공공건물의 손실을 염려하고 피란시키는 그 정성과 인정은
    정말 귀하고 값진 것이 아닌가? 

    <피가로의 결혼>에서 이발사인 피가로가 머슴인 케루비노를 상대로 격려조로 부르는
     “이제 우리는 못 날으리”라는 유명한 아리아와 제2막의 케루비노가 백작부인을 연모하며 부르는 “그대는 아는 가 사랑의 괴로움을”이라는 노래는 얼마나 절묘하고 아름다웠는지,
     나로 하여금 또 한번 우리 한국의 수많은 음악팬들의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고국에 돌아가면 우리 꼬마들에게 <피가로의 결혼>이 얼마나 좋은 작품인지,
    또한 피가로와 케루비노가 얼마나 멋진 성대(聲帶)로 관중을 매혹시켰으며,
    또 영특한 여자 수잔나는 얼마나 요염한 음량으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는지를
    들려주리라고 마음먹었다.
     
    방독일정을 마치고
     
    이것으로 나의 방독일정은 끝난 셈이다. 
     
    금번 독일 방문은 나로서 여러 가지 느낀 점도 많았지만,
    같은 전란을 겪은 나라로서의 한국과 독일을 비교해볼 때
    사실 부럽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허다했다. 
     
    전쟁 직후 패전국으로서 1인당 한 달 식량의 40%밖에는 생산하지 못하던 실정에 놓여있었고,
    그 외의 생산품은 열거할 가치도 없이 미미하던 독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3세대 당 1대씩의 자가용과 TV를 지니고 있으며,
     누구나 힘껏 노력하고 일하면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생활환경을 지닌 나라가 되었다.

    이는 독일인들이 10년 먹을 것을 벌어놓지 않으면 쓰지 않는다는 정신 아래
     무서운 절약과 피나는 내핍으로 이룩한 것이다.
     남의 나라 것을 무조건 본받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우리도 잘 살기 위해서 배워둬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의 방독일정이 끝나기까지 시종 곁에서 많은 수고를 해주시고 여러 모로 도와주신 주한서독대사부부를 비롯하여 그곳 의전특사로서 헤어질 때 공항에서 결별의 아쉬움을 눈물로 표현해준 홀레벤 부인, 주서독한국대사부부외 여러분들의 성의와 친절어린 협조를 깊이깊이 감사하고 싶다. 나의 방독 여행의 무사함은 모두 그분들께 힘입은 바 컸기 때문이라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땅에서 그분들과 더불어 즐거운 재회가 있기를, 또 그때의 노고에 보답할 수 기회가 오기를 나는 진정으로 희망하며, 이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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