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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경제 출발은

    대학 창업 활성화

     

  • ▲ ▲ 미래전략,지식재산,과학저널리즘 3개과정으로 구성된 2014년 미래전략대학원 신입생들 ⓒ카이스트
    ▲ ▲ 미래전략,지식재산,과학저널리즘 3개과정으로 구성된 2014년 미래전략대학원 신입생들 ⓒ카이스트

     

    카이스트의 새 도전 - 미래전략대학원

    카이스트는 지난 8일, 다소 특이한 3개 석사과정 대학원 입학식을 열었다. 과학저널리즘, 지식재산, 그리고 미래전략 과정을 한 데 묶은 [미래전략대학원]이다.

    이 세 과정은 카이스트가 단순히 연구 잘하는 이공계 대학에서,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과학저널리즘]은 언론인이 이해하는 수준 만큼 과학기술을 이해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시작했다.
    [지식재산]은 앞으로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제적인 특허분쟁을 다루는 고급과정이다.
    [미래전략]은 대한민국이 앞으로 미래를 어떻게 이끌고 가야 할 것인지를 심도 있게 공부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본격적인 미래학 교육과정이다.

    세 과정 모두 다 국가를 위하여 꼭 필요한 과정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주목을 끈다.

    세 과정에는 숨겨진 공통점이 있다.
    모두 다 이광형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가 설립했다는 공통점이다.

    이광형 교수는 전산학과 교수 시절에는 넥슨, 아이디스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산관련 기업을 창업한 제자를 길러낸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이 교수는 2001년에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으로부터 300억을 받아 융합학문인 바이오및뇌공학과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215억원을 더 받아 정문술 회장으로 부터 모두 515억원의 기부금을 받아 또 다시 깊은 관심을 끌었다. 이 교수는 이제 이들을 묶어 대한민국의 미래전략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벤처기업을 만들고 기부금을 받아내고 하는 일 만큼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는 없지만,
    학문적인 입장에서 보면 새로운 학문분야를 개척하는 일의 중요성이 결코 작지 않다.

    그렇다면 이 세 대학원이 공통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광형 교수는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학이 [창업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교육도 창업을 위한 교육, 연구도 창업을 위한 연구가 되야 한다.
    대학교육은 교육-연구-창업이 3위1체로 연결돼야 한다."

    고상한 상아탑에 대한 도발적인 말이다.
    이것이 이광형 교수가 국가를 위한 대학이 되기 위한 미래전략으로 제시한 것이다.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의 졸업생, 학생, 교수가 창업한 회사의 일년 매출액이 프랑스의 GDP와 맞먹는 규모다. 대학의 역할이 이처럼 중요하다.

    한국은 지금 위기다. 기존 주력산업의 전망이 밝지 않고, 성장잠재력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고용률이 낮아서 사회문제가 심각하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하다.

    이때 한국에 스탠포드 같은 대학이 하나라도 있어준다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얼마나 밝을까 하는 것이 이 교수의 고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 대학의 이념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기존의 <교육-연구>에서 <교육-연구-창업>의 삼위일체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저널리즘 과정의 탄생

    젊은 교수 시절부터 언론과 접촉이 많았던 이광형 교수는 글 솜씨 역시 대단히 뛰어나다.
    오랫동안 과학 기자들을 접촉하면서 이 교수는 과학저널리즘 과정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하는데,
    과학기술이 발전하려면 과학기술을 지지하는 국민이 있어야 한다.
    예전에 절대적인 리더십이 있을 때 몇 사람이 결정해서 시행하면 됐지만,
    지금은 모든 국민이 의식이 있어서 국민의 지지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런데 국민의 수준은 언론인 수준 이상으로 높아지지 않는다.
    언론이 없으면 국민을 깨울 수가 없다. 언론인 수준이 그 나라 국민 수준의 최대치이다.
    그러므로 국민들이 과학기술을 지지하려면 먼저 언론인을 깨우는 게 필요할 것 같았다.”

    이런 취지로 이광형 교수는 2006년에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으로
    언론인들에게 과학기술의 기본 개념을 교육하는 단기과정을 운영했다. 

    이때 카이스트 총장은 로버트 러플린이었다. 러플린은 이런 과정에 대하여 어떠한 생각을 가질까?
    평소에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 예측을 할 수가 없었다.
    동료들과 협의했다. 일단 안전하게 시작하자.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니, 총장에게 말하지 않고 시작하기로 했다.

    이때 뜻을 모의를 함께 한 교수가 정재승 교수, 김탁환 교수다.
    이 중에 김탁환 교수는 나중에 전업 작가의 길을 가기 위해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이 해 4월부터 9월까지 매주 토요일 언론인들이 대전에 와서 과학저널리즘을 교육하는 과정이 만들어졌다. 첫해에 기자, PD등 12명이 신청했다. 강의내용은 기술입문, 기술 동향 등이었다.

    기자들에게 이 같은 내용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참가자들은 강의내용을 매우 좋아했다. 기대 이상의 성공으로 마무리 됐다.  과학기술도 언론인으로 부터 관심을 끌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2006년 8월에 새 총장으로 서남표 총장이 부임했다.
    서남표 총장은 아주 좋은 일이라고 격려했다.
    그러면서 9월 수료식에는 직접 참석해서 축사를 해주었다.
    그 다음해인 2007년 2008년에도 좋은 평판 속에 계속 이어졌다.

    강의는 대전에서 토요일 아침 9시에 열린다.
    전국에서 강의실에 9시에 도착하려면 집에서 5시부터 기동을 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기자들의 힘든 일주일 후에 맞이하는 휴식의 시간이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3년째인 2008년에는 11명 전원이 개근을 했다.
    학생 전원이 모든 수업시간 100% 출석한 것이다..

    마지막 날 수업시간에 누군가가 말했다.

    “어? 다 왔네.”

    정말 100% 개근을 기록한 것을 보고 모두 다 즐겁게 놀랬다.

    그래서 과학저널리즘에 관한 석사과정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언론재단에서도 그들이 후원하는 과정이 성공하자 무척 좋아했다.
    석사과정을 만들면 후원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총장, 부총장과 함께 언론재단 이사장을 방문했다.

    2006년 6월 20일 이사장은 과학저널리즘의 취지에 공감하며 지원하겠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이때가 정권 교체기였다. 

    노무현 대통령을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언론재단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두가지가 겹쳤다. 하나는 새 정부가 언론재단과 방송광고재단을 통합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고 몇 달 동안 보류됐다.

    그러니 언론재단은 어떠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회에서 쟁점사안이 아닌 데도 법안 통과가 안돼 기다리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 가운데, 언론재단 집행부와 정부 사이에 다툼과 알력이 일어났다.
    정부측에서는 정권 바뀌었으니 재단 이사장을 교체하려고 시도했으나,
    이사장은 아직 임기가 남았다고 항의했다.

    처음에는 언론재단 직원들도 임기가 남은 이사장을 교체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정부가 언론재단 예산을 압박하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예산 압박이 당장 직원들에게 영향이 미치자  언론재단 내부에서도 이사장 퇴진 압력이 나타났다.
    복도에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붙는 등 언론재단 노조와 정부가 같은 편이 됐다.
     
    결국 언론재단에 새 집행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새 집행부는 예전 사업을 이어갈 것인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아마 앞 사람들이 하던 것을 이어 받아 하고 싶지 않았을지 모른다.
    긍정적인 반응은 보이는데, 결정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질질끌며 2009년이 흘러가고 있었다.
     
    우연히 KT의 어느 간부를 만나 목적과 상황을 설명했다.
    이 간부는 좋은 내용이라며 기업들도 호응할 가능성이 있으니 기업체 후원을 뚫어보라 말했다.
    이미 언론기금을 가진 기업을 제외하고 접촉할 것을 제안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광화문의 KT 부사장실을 찾아갔다. 사업의 목적에 크게 공감했다.
    후원을 요청하니 예산 담당 임원을 소개해 줘 만났으나, 예산 담당 임원은 회사의 재정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SK 최고위층에도 요청해봤다. 검토해 본다더니 감감 무소식이었다.
    연속 퇴짜를 맞으니 사기도 떨어지고, 막막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2009년 10월 국정감사장에서 뜻 밖의 반전이 일어났다. 
    교무처장을 맡고 있던 이광형 교수는 10월말 국정감사장에서 카이스트 총장과 함께 참석했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정윤 이사장도 국정감사를 받으러 나와 있었다.
    국정감사가 거의 끝날 무렵 이 교수는 정윤 이사장과 인사를 나누었다.
    평소에 안면이 있는 정도이지,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이때 이광형 교수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한국과학창의재단의 임무 중에 하나가 과학문화 확산이지 않은가?'

    국정감사를 마치고 10월 30일 임춘택 교수와 함께 창의재단으로 정윤 이사장을 만나러 갔다. 
    카이스트의 과학저널리즘 구상을 설명했더니, 이런 거 해야 국가가 발전한다면서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연말 안에 지원해 달라고 하니, 연말에 창의재단에 남아있는 예산을 가지고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11월 25일, 카이스트 서남표 총장과 정윤 창의재단 이사장은 조선호텔에서 협력 양해각서를 맺었다.  

    이광형 교수는 서남표 총장 및 장순흥 부총장을 만나 내년으로 미뤄지면 안되니 금년에 바로 시작하자고 밀어 부쳤다. 이미 다른 학과의 입학시험은 끝난 다음이었다.

    학과를 신설하는 것이 아니고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것이어서, 학교 내에서 학사연구심의회와 학과장 회의 등 2단계만 거치면 바로 가능한 일이었다. 일부에서는 뜻은 좋지만 이렇게 서둘러야 하느냐는 의견을 보였다. 입학처 직원들은 또 벌리느냐면서 불만을 표시했다.

    25명을 선발하는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예상치 못한 문제가 터졌다.
    창의재단의 예산을 사용하려면 교과부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교과부에서는 예정에 없던 사업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이런 일은 원래 창의재단에서 해결해야 하지만, 교과부를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 같았다.
    이광형 교수도 직접 교과부를 찾아가 사무관, 과장, 실장을 만나 설명했다.
    앞에서는 부정하지 않았으나, 그 후에 실무 선에서는 움직이지를 않았다.

    다른 대학에서 견제가 들어와서 그런지, 사전에 교과부와 교감도 없는 상태에서 진행한 것에 흠이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창의재단 예산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 선발하는 과정이 진행됐다.
    아직 외부에 홍보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다가왔다.
    더 이상 늦추면 금년에 입시를  할 수 없고, 출발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완비된 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에 시작하지 못하면, 결국 못할 것이다. 일단 홍보를 시작하면서 사태를 수습한다.
    입시 광고를 시작했다.

    학생 모집 광고를 내고 보니 이번에는 과연 학생모집이 제대로 될 것인지 우려가 됐다.
    홍보기간이 겨우 3주간이다. 매일 홈 페이지를 들어가 몇 명 방문했는지 피를 말리면서 지켜봤다.

    그래도 결국 2:1을 기록하면서 2010년 1월 초에 입학원서 접수하고 1월 말에 입시발표를 한 뒤,
    3월에 개강했다. 그때까지도 창의재단 예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창의재단 지원금으로 장학금을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예산이 확정되지 않은 사정을 이야기할 수도 없었고, 학교에도 이 같은 사정을 털어놓지 못한 채 그냥 학생들을 뽑아 수업을 진행했다.

    이광형 교수는 또 다시 교과부를 쫓아다니면서 학생까지 왔다고 설득하면서 압박했다.
    세종로 정부청사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설명했다. 이때 장순흥 부총장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교과부는 4월에 가서야 승인을 해줬고, 창의재단의 돈이 들어왔다.
    2010년에 이렇게 어렵게 시작한 과학저널리즘 석사 과정은 지금은 5년째 잘 진행되고 있다.


    로스쿨 대신 시작한 지식재산 과정

    같은 시기에 지식재산 과정도 출발했다.
    지식재산 과정은 우연히 시작됐다. 2007년 로스쿨 제도가 시작되면서
    각 대학은 T/O를 더 많이 받기 위해 카이스트에 협조를 요청했다.
    로스쿨을 특성화 하기 위해서 카이스트와 공동보조를 취하기를 원했다.
    카이스트도 지식재산 쪽으로는 기여할 수 있겠다 싶어 2개 대학과 공동교육을 하기로 양해각서를 맺었다.

    그러나 2008년에 들어 2개 대학은 로스쿨 과정 설치대학으로 선정되자,
    입을 싹 씻고 카이스트와는 실제 협력을 하지 않았다.
    사정을 들여다보니 그들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학생들은 로스쿨 학생이 되면, 변호사시험 합격이 최고 목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험과목 중에서도 점수가 잘 나오는 과목 중심으로 공부한다.

    그런데 지식재산과목은 어렵고 시험 비중도 작다.
    대학 측에서도 지식재산 전문한다고 T/O를 많이 받았지만,
    운영하다 보니 합격율을 높이려면 쉬운 과목으로 집중할 수 밖에 없었다.

    지식재산은 쉬운 분야가 아니어서 수업에서 우선 순위가 밀려났다.
    점수는 잘 안 나오고 합격률은 안 오르다 보니 대학에서 기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지식재산의 보유 여부가 국가와 기업의 운명을 가르는 지식재산 전쟁의 시대가 오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전혀 준비를 하기 않고 있다. 로스쿨에서도 지식재산 과목은 천대받고 있다.

    이렇게 되어서는 국가의 미래가 없다.
    특히 이 분야는 기술과 법이 융합되는 분야라서, 로스쿨 시스템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변호사 시험에 무관한 카이스트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그리고 기술이 중요한 분야라서 카이스트가 아니면 잘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카이스트는 독자적으로 지식재산과정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단독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과정 만드는데 필요한 비용을 마련해야 했다.

    또 다시 임춘택 교수와 함께 2008년 7월 10일 특허청장을 방문해서 취지와 교육내용을 설명했다.
    고정식 청장은 금방 이해하고 동의했지만, 또 다른 기발한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미래에는 특허 세상이 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이 특허와 친해져야 한다.
    어려서 부터 특허를 출원하고 이를 이용하여 뭔가 만들어 보는 교육이 필요하다.
    이러한 교육을 카이스트에서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이광형 교수는 이때 과학영재교육연구원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고정식 청장은 이 교수에게 국민의 특허 인식을 바꾸어 보자는 제안을 했다.
    전국에서 중고등학생 100명씩을 선발하고, 원격으로 창의교육을 하고, 발명을 출원하여, 특허로 창업하는 교육을 한다. 고청장은 이것을 IP(지식재산) CEO과정이라 불렀다.

    처음에 이광형 교수는 이것을 잘 할 자신이 없었다.
    몇 주일을 망설였다.
    고등학생들을 데려다가 특허를 출원하고 회사를 시작하게 하는 교육을 잘 할 수 있을까?


    이민화 사장과 안철수 교수를 초빙하다

    이때 떠오른 인물이 이민화 전 메디슨 사장이었다.
    이민화 사장은 메디슨이 어려움에 처하여 퇴사하고, 기술거래 이사장을 하고 있었다.
    일부에서는 실패한 경영인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광형 교수는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경험해 본 사람이야 말로 값진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민화 사장의 회사가 잘 나갈 때, 주동이 되어 모금하여, 카이스트에 기증한 건물이 있었다.
    동문 창업관이라 부르는 건물이다.

    이광형 교수는 총장에게 건의했다.
    이민화를 초빙해서 창업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배우게 하자고. 
    이민화가 기증한 건물의 큰 강의실을 "이민화홀"이라 명명하자고 제안했다.

    총장도 적극 공감했다. 그래서 성대하게 "이민화홀" 명명식을 하고, 초빙교수로 모셨다.
    이민화 교수에게는 특허청에서 원하는 IP CEO 과정을 담당하여 성공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이 과정은 이민화 교수가 직접 설계하고 운영하여 성공적인 발명 창업 프로그램이 되었다.

    지금 창조경제에 가장 모범적인 교육 사례가 되고 있다.
    고정식 청장과 이민화 교수의 통찰력이 비범함을 알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안철수 교수의 영입도 있었다.
    이광형 교수와 안철수 사장은 1990년대 말부터 안면은 있었다.
    컴퓨터 분야에서 보안을 연구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안철수 사장이 사장직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공부하고 간다고 했다.
    그리고 귀국하면 대학에서 활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귀국하면 한번 봅시다 하는 말을 이멜로 주고 받았다.

    2007년이 되자 양태용 교수가 안철수 사장을 카이스트에 오게 하자고 말했다.
    그런 사람이 학교에서 창업과 기업가 정신을 가르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체로 모든 사람들이 찬성했다. 

    안철수를 오게 하려면, 테뉴어(정년까지 보장하는 영년직) 교수직을 주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남표 총장은 생각이 달랐다. 학문 업적이 없는데, 영년직 교수는 너무 과하다는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런 총장은 안철수 사장의 세미나를 듣고서 생각을 바꾸었다.
    강의 내용도 좋았지만, 세미나 후에 학생들이 사인 받으려고 줄을 서서 몇 십 분씩 기다렸다.

    강의 내용과 학생들의 반응을 보면서 석좌교수직을 주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문술 기금에서 석좌기금을 만들어서, 안철수 교수를 석좌교수로 임명했다.
    안철수 교수는 기술경영학과에, 부인 김미경 교수는 의과학대학원과 기술경영학과에
    겸임 임용했다.

    임용 후 김미경 교수가 중앙선데이에 인터뷰를 한 기사가 2008년 5월 25일자에 이렇게 나왔다. 

    "어떤 계기로 KAIST에 왔습니까?"
    “이광형 교무처장실에 TV가 거꾸로 놓여 있는 거 보셨어요?

    그걸 보고 반했어요. 서남표 총장과 면담하면서 시각이 넓고 자율적인 학풍을 느꼈죠.
    아무도 안 해 본 것을 시도하기에 좋은 학교라는 생각이 들어 흥분이 되더라고요.
    제 공부가 공대와 직접 관련은 없지만,
    과학 실험에서의 윤리의식은 앞으로 점점 중요해질 거예요.”

     

  • ▲ ▲ 2010년 5월 1일 지식재산대학원 현판식ⓒ카이스트
    ▲ ▲ 2010년 5월 1일 지식재산대학원 현판식ⓒ카이스트


    다시 특허청과의 지식재산 대학원 설립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온다.
    특허청은 지식재산대학원의 필요성은 충분히 공감하며, 공정성 시비를 없애기 위해서,
    전국 대학을 상대로 공개모집을 해서 지원 대학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2009년 지식재산과정 대학에 지원하겠다는 공개모집에는 13개 대학이 참여했다.
    결과는  1등 카이스트 등 2개 대학이 선발됐다. 매년 5억원씩 5년간 지원하는 계획이었다.

    이 해 9월 카이스트 총장과 특허청장 사이에 협약식을 맺고 지식재산과정 신입생 모집에 들어갔다. 이때는 과학저널리즘 과정도 신입생을 선발하는 시기였으니 결국 같은 해에 2개 과정 신입생을 함께 모집하는 절차를 진행한 것이었다. 입학처에서 불만이 나오는 것도 이해가 될만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2010년 3월에 2개 대학원 프로그램의 입학식이 열렸다.
    특허청 지원 받아 지식재산과정을 진행하다 보니 특허청 담당자는 성과를 내는데 크게 신경을 썼다. 몇 명을 뽑았는지 수시로 물어왔다. 카이스트 입장에서는 아무리 학생들이 많이 몰려도 기준에 안 맞으면 선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특허청 담당자 입장에서는 “선발예정인원 40명을 채우지 못하면 큰일납니다”면서 조바심을 내는 것이었다. 이광형 교수는 “그렇게 잘 아시면 직접 와서 해보세요”고 반발했다.

    지식재산과정을 만들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고급학위 과정을 만들어야 했다. 최고급 강사를 초청하기로 했다.
    학생들에 대한 지원도 최고급으로 높이기로 했다.

    특허청 공모에 함께 지정된 다른 대학과 차별화하기 위해 등록금도 비싸게 잡아 1년 1,800만원으로 책정했다. 이광형 교수는 2,000만원 정도 하는 MBA과정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들기로 했다.

    시간은 촉박한데 가슴 졸이는 학생 모집 과정이 시작됐다.
    혹시라도 미달이 되면 지식재산과정은 미끄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2:1 경쟁률을 기록하면서 40명의 첫 신입생을 모집했다.
    광고 기간이 3주 밖에 안돼 가슴졸였으나 입시설명회를 열고 노력하다 보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주말 토요일만 하는 강의였기에 직장인들도 참가할 수 있는 그런 강의였다.
    프리미엄 과정으로 학비는 높고 학사 관리도 충실하게 하기로 했다.
    토요일에 와서 강의를 해야 하는 만큼 강사들에게는 최고의 강사료를 매겼다.

    철저한 학사관리를 위해 학생들에게는 매일 출석을 부르고,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확인하기 위해 매일 퀴즈시험을 냈다.

    나이 먹은 학생들 사이에서, 우리를 초등학생 취급한다며, 너무 힘들게 한다고 불평이 나왔지만,
    좋은 전통을 만들기 위해서는 처음 단추를 잘 꿰어야 했다.

    강의장소는 서울 도곡동 캠퍼스와 대전 본교로 잡았다.
    그런데 도곡동 캠퍼스는 건물 시설이 좋지 않았다.
    정규 강의를 하기에는 많은 것이 부족하고 지저분했다.
    개강 전 시설을 바꾸려고 했으나 차질이 생기면서 학생들이 수업할 때 옆 방에서 공사소리가 들렸다. 먼지는 나지 망치소리는 들리지 그런 상황에서 수업을 진행했으니 학생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과정을 만들 때는 커리큘럼이 매우 중요하다.
    과학 저널리즘 과정을 만들 때 조사해보니 다른 나라에는 이런 과정이 없었다.
    하버드 대학에 리만펠로 과정이 있고, MIT에 나이트펠로 과정이 있지만. 이것들은 비학위과정이다.

    다른 나라에 없는 석사 과정이니 만큼 독특하게 해야 했다.
    주로 기자들을 상대로 하는 만큼 일반적인 저널리즘 내용은 줄이고
    과학, 엔지니어링, 미래학에 중점을 뒀다.

    지식재산 과정 커리큘럼을 만들 땐 잘 모르는 분야이다 보니 여러 사람들의 조언을 구했다.
    삼성전자 임원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니 이렇게 조언했다.

    “지식재산 관련 해외기업과 분쟁이 많이 발생하는 만큼
    국제법 중심으로 해야 한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외국대학과 협력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경영대 김철호 교수의 도움을 받아 미국 법과대학 10위권에 들어가는 노스 웨스턴 대학과 협력을 하기로 했다. 카이스트와 노스웨스턴 법대와 공동학위 과정을 만들었다.

    지식재산 과정 커리큘럼은 세가지 분야로 짜여졌다. 기술, 법, 경영이었다.
    경영을 넣은 것은 지식재산을 사고 파는 그런 일이 국제특허분야에서는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300만 달러 짜리 보험을 들어달라"

    그런데 예기지 못한 장애가 나타났다.
    노스 웨스턴 대학 교수들은 카이스트 경영대와 협력관계를 맺고 왕래가 있었는데,
    계약서를 보니 한국에 오는 교수들에게 300만 달러 보험을 들어준다는 조항이 있었다.
    이런 조건이 있는 것을 두 대학교수들은 서로 알고 있었지만, 우리나라 사정상 실제로는 보험을 들지 않은 상태인 것을 발견했다.

    계약내용을 충실히 준수하기 위해 국내 보험회사에 물어보니 우리나라에는 300만달러 짜리 보험상품은 없었다. 최대 10억짜리였다. 결국 계약내용을 이행할 수 없는 형편인 것을 확인한 이광형 교수는 노스 웨스턴 대학에 보험을 들 수 없다고 통보했다.

    2주 뒤에는 강의를 하러 노스 웨스턴 대학 교수들이 와야 하는 다급한 시점이었다.
    지금까지는 계약서에 들어있는 조항을 이행하지 않은 채 관행대로 해 왔고, 
    노스 웨스턴 대학 교수들도 그 같은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광형 교수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안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계약 내용을 이행하지 않은 상태에서 혹시 사고가 터지면
    카이스트는 국제 사기를 친 것이 된다.”

    당시 이노베이션학부장 보직을 맡고 있던 이광형 교수는 결국 노스 웨스턴 대학 교수들에게 보험을 가입할 수 없으니, 오지 말라고 통보했다. 입학식을 하고 강의가 시작된 2010년 5월의 일이다.
    이미 비행기표까지 준비하고 있던 그들도 매우 난감해했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학생들 편에 있었다. 지식재산과정을 열면서 카이스트는 학생들에게 노스 웨스턴 대학과 복수 학위를 주는 과정도 세웠고, 복수 전공 과정을 신청한 학생도 5명이었다.

    추가학비를 내기로 되어 있는 이들은 일정기간 미국 시카고에 있는 노스 웨스턴 대학에 가서 강의도 듣기로 한 상태였다. 결국 카이스트는 학생들에게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것이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시설도 미비하고 수업은 강행군으로 진행되면서 불만이 있던 학생들은
    미국 교수들마저 오지 못하게 되자 술렁이기 시작했다.
    학생들 끼리 만나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는 소문이 들여왔다.

    이광형 교수는 사무원에게 말해서 학생들과의 면담을 시작했다.
    시간이 되는 대로 약속을 잡아 4일 동안 매일 저녁 학생들과 식당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학생들의 불만과 요구사항을 빽빽하게 받아 적었다.

    두번째 날부터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줄어들었다.
    며칠 뒤 수업시간에 들어간 이광형 교수는 학생들이 요구한 내용을 스크린으로 보여주면서 하나씩 하나씩 설명했다. 할 수 있는 일, 할 수 없는 일 이런 식으로 A4용지 10쪽을 설명하면서 같이 만들어가자고 요청했다. 할 수 없는 일 중에는 미국 교수들이 요구한 300만달러 짜리 보험도 들어있었다. 

    동요하던 학생들의 분위기는 잦아들었다.
    2학기 여름 되면서 학생들도 기대치를 낮추고 이광형 교수와 김철호 교수도 분발하면서 안정이 됐다. 커리큘럼도 수강생들 의견을 받아들여 수정했다.

    원칙대로 하니 노스 웨스턴 대학 교수들도 난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으로 강의하러 간다고 다 준비를 해놓고 비행기표 예약도 해 놓은 상태에서
    갑자기 한국방문이 취소됐으니 교수들도 대학당국에 설명해야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설명하느라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노스 웨스턴 대학쪽에서 “300만달러 짜리 보험 계약은 없던 것으로 하자”고 제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 해에 그 조항은 없어졌고, 노스 웨스턴 교수들의 강의는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식재산과정 등록 학생 중 추가 수강료를 납부한 수강생은 매년 시카고 노스 웨스턴 대학으로 가서 강의를 듣는다.

    현재 지식재산과정 수강생은 정원이 50명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의 분포를 보면 회사 법무팀 직원이 대략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판사 검사 변호사 등 법조계에 있는 인물들이다.
    과학저널리즘 정원 30명중에서 기자들이 대략 20명 정도이고 회사원이 6,7명이다.


    특허청 지원금 5억원을 거절하다

    2011년 4월이 되자 애플이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소송을 시작했다.
    특허 침해의 배상액수도 1조원 수준의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이 소송은 전세계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알고 미리 지식재산대학원을 만들었냐고.

    이제 지식재산대학원에 입학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줄을 서고 있다.

    카이스트가 수업을 진행하면서 절대 양보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
    배운 것을 복습하는 퀴즈 시험을 출제하고, 출석을 부를 뿐 아니라,
    학생들의 점수와 출석률도 홈페이지에 공개한다.

    처음에는 적응이 안 됐지만, 지금은 으레 그렇게 하는 것으로 정착됐다.
    학사관리는 매우 철저해서 학점이 3.0 미만이면 모든 장학금을 하나도 받지 못하게 된다.

    논문심사 불합격률은 대체로 20%에 달한다.
    논문심사에서 탈락하면 6개월을 더 다니고 논문을 다시 쓰고,
    또 떨어지면 또 6개월을 연장하지만, 수업료는 15%만 내도록 했다.
    심지어  3번 연속 논문심사에서 탈락한 학생도 있다.

    이렇게 어렵게 가르치다 보니 졸업하고 나면 학생들은 자부심을 갖는다.
    자기들이 어렵게 공부한 만큼 후배들에게 추천하는 것도 특징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추천 받고 온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경쟁률도 높아지는 선순환 구조로 바뀌었다. 면접 때 물어보면 선배들이 권해서 힘들어도 왔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미 밝혔듯이 지식재산대학원은 특허청 지원을 받아 시작한 과정이다.
    특허청에서 매년 5억원씩 5년을 지원받기로 한 데다,
    처음부터 학비를 높게 책정하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여유가 생겨났다.
    3년이 지나고 나니 지원받은 금액이 남아돌기 시작했다.

    자립의 시점이 일찍 왔다. 지식재산대학원은 특허청에 지원을 더 이상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특허청에서는 이미 책정된 예산을 처리하기 곤란한 문제가 있었다.
    여러 가지 협의 끝에 4년차 부터 중단했다.
    주는 돈도 안 받느냐고 하지만 이광형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지원을 받는 만큼 자립이 늦어진다.”

    이렇게 이광형 교수는 카이스트에 하나씩 하나씩 암탉이 아침마다 달걀을 낳듯이 우리나라에 필요한 교육과정을 계속 만들어나갔다. 꼭 필요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탄생이 된 것이다.


    결정판 - 미래전략 대학원의 탄생

    미래전략프로그램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포대갈이’란 말이 있다.
    농산물의 내용은 같은데 겉포장만 바꾸어 시장에 내놓는 수법을 말한다.
    정책에도 포대갈이가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 정부의 입맛에 맞는 정책을 내놓으라니,
    일부 공무원이 기존 아이디어를 포장만 바꾸어 내놓는 방법을 말한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 국가의 주요 정책은 녹색성장에 모아져 있었다.
    그 앞의 노무현 대통령시절에는 혁신이 대세였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자 혁신이란 말을 쓰면, 돈이 안 나온다.
    앞 정권의 단어는 금기시 되어 버린다.
    그러니 공무원들은 매 5년마다 정권에 맞게 다시 고쳐 생각해야 한다.

    일부 공무원들은 이런 과정을 머리를 새로 포맷팅 한다고 말한다.
    컴퓨터의 기억장소를 청소하고 새롭게 모든 프로그램을 까는 것을 말한다.
    또 어떤 공무원은 새정부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라고 하니,
    기존의 아이디어에 포장을 살짝 바꾸어 내놓은 방법을 포대갈이라 부른다고 한다.

    정부 정책이 ‘갈지 자(之)’로 가는 셈이다. 일관성이 없다.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일을 언제까지 하고 있을 것인가.
    이것은 국가가 나아 갈 장기 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세종시 건설 계획이 발표되면서 정부에서는 카이스트에 세종시 활성화 방안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카이스트도 세종시에 진출하는 방안이 마련됐는데 아무래도 세종시에 공무원 타운이 형성될 예정이니,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을 세우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시간이 지나 노무현 대통령이 물러나고 이명박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세종시 계획이 한 때 무산될 위기에 빠져 있다가, 다시 행정복합도시로 확정되면서 카이스트도 제안을 수정했다.
    단순한 과학기술정책대학원을 세우기 보다는 과학기술 중심의 미래전략대학원을 만들자는 제안으로 변경했다. 국가가 더 이상 갈 지(之)자 행보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미래전략 전문가의 양성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했다.

    박희경 카이스트 기획처장 시절인 2011년 8월 미래전략대학원 설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10여명의 교수들이 만나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제안서를 만들어 12월 22일 학교에 제출했다.
    이중 한 사람이 현재 미래부 장관으로 있는 최문기교수이다.

    제안서를 만들고 나니 자연스럽게 이 일을 누가 맡아서 책임지고 추진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이광형 교수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광형 교수는 책임자 후보자도 추천해서 대학본부에 올리고 외부인사도 만나 부탁해보고 했지만, 아무런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때 심정이 어땠는지는 이광형 교수가 중앙일보에 기고한 글에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메이지유신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료마는 교토로 향하는 배 위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혁명 이후의 세상을 글로 써나갔다. ‘선상팔책(船上八策)’이라 불리는 미래전략이다. 그러면서 동료들에게 혁명 후의 정치를 부탁했다.
    동료들의 놀라는 반응에 료마가 말했다.

    “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막부 정권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오.”

    얼마 후 료마는 자객의 칼에 쓰러졌지만, 그가 그렸던 미래는 동료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 시바 료타로의 소설 『료마가 간다』 중에서(필요에 의해 원문을 축약했음)

    어느 새 10년이 넘게 지났다. 2001년 정문술(전 미래산업 회장) 전 KAIST 이사장은 300억원을 맡기며 “새 융합학문을 개척해 보라”고 했다. 나는 그 뜻을 받아 학교에 바이오기술과 정보기술을 융합한 바이오및뇌공학과 설립을 제안했다.

    생소한 융합학과를 만들자고 하자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 “생물과 컴퓨터를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 공부를 한 학생이 졸업하면 취직할 곳이나 있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난 몇몇 동료와 힘을 합쳐 학과 설립을 관철시켰다. 이전까지 난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살았다. 늘 내가 우선이었고, 내 연구가 먼저였다. 그때 처음 동료들과 ‘새 일’을 도모했다. 학과장을 선임해야 할 순간이 되자 그들은 나를 바라봤다. 그때 떠올랐던 게 이 문장이다.

    “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막부 정권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오.”

    일본 메이지유신의 설계자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 『료마가 간다』(원제 『龍馬がゆく』)의 핵심 문장이다.

    나는 1980년대 프랑스에서 유학을 했다. 그 시절 서양인들은 동양인을 만나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바라봤다. 유일한 예외가 일본인이었다. 같은 동양인이지만 일본인들은 특별 대접을 받았다. 개개인을 보면 한국인보다 더 나아 보이지 않는데도 그랬다. 궁금했다.

    ‘일본은 어떻게 선진국이 됐을까. 중국과 조선이 문을 닫고 있을 때 어떻게 먼저 문을 열고 외국과 통상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준 것이 귀국해 읽은 『료마가 간다』였다.

    료마는 태어난 지방에서 평생 살아야 하는 봉건시대의 악습에 대항해 열아홉 살에 고향을 탈출했다. 떠돌이 무사로 살아가며 서양의 힘을 알게 됐고, 이대로 가다가는 일본이 서양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내다봤다.

    료마는 그때부터 썩어빠진 막부 정권을 무너뜨리고 평화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룰 방법을 고심했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막부에 대항하는 세력들을 설득해 하나로 묶어냈다. 막부 정권은 그 기세에 눌려 무릎을 꿇었고, 천황과 내각이 권력을 분점 통치하는 입헌군주제가 들어서게 됐다. 바로 료마가 꿈꾸던 세상이다.

    인류 역사 속에는 숱한 영웅호걸이 등장한다. 그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고 그 열매를 차지했다. 하지만 열매를 노린 혁명은 또 다른 혁명을 낳았고, 그 가운데 죄 없는 이들이 수없이 피를 흘렸다.

    료마는 달랐다. 메이지유신은 무혈혁명이었다. 혁명 후에 나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그 혁명을 설계하고 조종하고 성공시킨 료마는 혁명의 열매를 탐하지 않았다. 세상에 한 점 혈육조차 남기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그래서 지금도 그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료마는 33세의 짧은 삶을 살았지만 영생(永生)의 길을 걷고 있다. 세상을 떠난 지금도 그가 그렸던 미래 속에 살고 있다.

    『료마가 간다』를 읽고 나자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의문이 풀렸다. 19세기 일본에는 료마가 있었고 우리에겐 그런 인물이 없었다. 료마는 바람 앞에 흔들리는 국가의 운명을 내다보고, 국가의 미래전략을 수립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가 자신을 버리자 사람이 모였고, 사람이 모이자 지혜와 힘이 생겼다. 차이는 거기서 비롯됐다. 료마의 차이가 일본을 선진국, 한국을 후발국으로 만들었다.

    료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세상 사람은 모두 나만큼 똑똑하다고. 그들은 타인의 이익을 위해 힘을 보태지 않는다. 내가 사심(私心)을 품으면 곧바로 알아차린다. 오직 대의를 위해서만 손을 내민다. 그래서 료마는 미래 비전을 제시해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자신은 뒤로 빠졌다.

    나도 료마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총장을 만나 “신설 학과의 첫 학과장으로 A교수를 추천한다”고 말했다. 총장을 포함해 많은 이가 의아해했다. “기부금을 끌어와 학과 신설을 주도한 주역이 왜 학과장을 다른 교수에게 맡기겠다는 거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학과장 자리를 양보하고 나자 오히려 일이 잘 풀렸다. 융합학과 설립에 반대하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정부가 지원을 해줬고 주위 교수와 학생들도 도움을 줬다. 신생 학과에서 세계적인 연구 성과가 잇따라 나왔다. 다른 대학에도 비슷한 학과가 여럿 생겼다. 기부금을 줬던 정문술 전 이사장은 최근 또다시 215억원을 맡겼다.

    료마는 그 뒤로도 종종 내게 찾아왔다. 나는 3년 전 학교에 미래전략대학원 설립을 제안했다. 국가의 장기 미래전략을 연구하고 료마와 같은 인재를 기르는 대학원이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정책 기조가 바뀌어 정부가 갈지자 행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총장은 “제안자가 책임지고 추진해보라”고 했다.
    그때 다시 료마가 말했다.
    “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막부를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오”라고.

    이번에도 료마의 말을 따랐다. 총장에게 여러 명의 후보를 추천했다. 하지만 총장이 받아들이지 않아 6개월을 씨름했다. 그러다 입학시험을 치러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고, 더 이상 미루면 학생 선발을 못할 상황까지 몰렸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짐을 지기로 했다.

    그렇게 대학원이 설립됐고 ‘또 하나의 미래’가 출발했다.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뀌어도 흔들림 없이 한 방향으로 전진하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게 목표다. 국가의 미래를 논하는 강의실의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내가 짐을 진 것에 대한 료마의 답은 아직 듣지 못했다. 그는 어떤 답을 갖고 있을까.


    책임자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원의 취지에 대해서 누구나 공감을 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반응은 2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첫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힘든 일을 맡아서 하기를 싫어했다. 두번째 경우는 위상이 어떠냐고, 예우를 물어왔다.

    모든 것을 백지상태에서 만들어서 해야 하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부담을 느꼈다. 만들어주면 들어와서 대우받으며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것을 발견했다.

    책임자 선정은 자꾸 미뤄져 2012년 상반기 6개월이 그냥 흘러갔다.
    학생들을 선발할 시기는 가까워오는데 책임자는 안 정해지고, 이광형 교수는 결국 마지막에 몰리게 됐다. 아무도 나서지 안으면 결국 무산되고 말 것이다.

    누군가가 맡아야 한다면 그 누군가는 누가 될 것인가?
    이렇게 죽일 수는 없다는 절박한 가슴을 가진 사람에게 떨어질 것이다.

  • ▲ ▲ 미래전략대학원 설립제안서
    ▲ ▲ 미래전략대학원 설립제안서


    이런 상황에 몰리니 솔로몬의 아기 비유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어느 날 솔로몬 왕 앞에서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이라고 하면서 한 아이를 두고 다투는 것이었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두 여인들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솔로몬 왕은 지혜를 발휘했다.
    서로 자기 아이라고 하니, 그 아이를 둘로 나눠 가지라면서 칼을 가져오라고 소리쳤다.
    이 때 한 여인은 나눠갖자고 했지만, 한 여인은 마음이 찢어지는 아픔과 안타까움에 상대방 여인에게 아이를 양보했다.

    누가 그 아이의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지, 아이의 생명이 없어질 것 같은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어느 여인의 마음이 더 간절하게 안타까워하는 지가 드러나면서 솔로몬 왕은 아이의 진짜 어머니를 가려낼 수 있었다.

    미래전략대학원 설립도 이광형 교수가 책임을 맡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미래전략대학원이 무산될 위기에 빠지니까 결국 가장 아끼는 사람이 맡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광형 교수는 또 다시 카이스트의 암탉이 됐다.

  • ▲ ▲ 미래전략대학원 설립제안서


    돌이켜보면 이광형은 전산학과 교수 시절에는 벤처기업을 일으킨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는 역할을 했다. 그 뒤를 이어서는 정문술 회장과의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바탕으로 IT+BT를 융합하는 새로운 학과를 탄생시켰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고 다시 과학저널리즘 과정을 세우고, 지식재산 과정이 태어나게 했다.
    이제는 끝인가 싶은데 이광형 교수는 미래전략대학원을 만드는 중요한 일에 또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

    이광형 교수가 미래전략대학원장을 맡을 때 카이스트는 내부적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다.
    서남표 총장이 교수들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리더십이 발휘되지 않았다.
    어렵게 시작한 과정이 어긋나지 않도록 서둘렀지만,
    시간에 쫓기다 보니 입시 광고 시간이 불과 3주밖에 안 남았다.
    첫 입학생 21명을 선발하고 후기에 4명을 더 뽑아 첫해에는 25명으로 시작한 이 과정은 현재 정원 30명으로 늘었다.

    새로운 조직을 여럿 만드는 과정에서 언제나 고비를 만나면 돕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도와주는 것을 아까워하는 것을 느끼곤 한다.
    자기가 가진 결재 권한을 사용해서 도장을 찍어주는 것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텔리비전을 거꾸로 보는 이유

    흔히 하는 말처럼 행정의 권한은 "부정"에서 나온다.
    허가나 승인이나 같은 일을 할 때 NO 하고 거부하는 순간,
    그 권한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권한을 실감할 수 있다.
    거절당한 사람의 경우는 그 거절에서 나오는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체감할 수 있다.

    이렇게 권한을 가진 사람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특히 규정을 내세워 거부함으로 해서,
    자기가 가진 권한이, 혹은 권력이 얼마나 큰 힘을 가졌는지를 즐기곤 한다.

    사람들은 거기까지만 안다. 권한을 가졌을 때 그때가 바로 사람들이 "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돈 있고 권력 있을 때 덕을 쌓고 주변 사람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도장 찍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그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도와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보직을 맡은 사람들은 특히 규정을 내세워서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광형 교수는 “행정의 목적은 일이 잘 되게 하는 것이며,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규정을 들이대면서 이것 때문에 안되고, 저것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것은 행정하는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뜻이 좋으면 이뤄지게 하는 것이 좋다.

    이광형 교수가 텔레비전을 거꾸로 보기 시작한 것도 이 같은 행정 목적과 인간 심리 사이의 모순에 대해서 고민할 즈음이다. 그가 오랫동안 대학 내부 행정을 하다 보니, 역지사지 상대방의 마음을 순수하게 헤아리고 이해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행정을 할 때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체로 규정대로만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가 첫 행정 보직을 할 때 보니 대체로 뭔가 안 되는 일을 가지고 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교수도 규정을 들이대면서 안 된다고 거절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행정의 모순에 빠져드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부정"하는 자신을 바꾸어, 거꾸로 생각하기 위하여, 텔레비전을 거꾸로 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을 거꾸로 보면서 그는 생각을 바꿔서,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찾아오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거꾸로 생각해봤다.

    이광형 교수는 카이스트 안에서 행정 보직을 맡은 햇수가 10년이 넘는다.
    국제협력처장 3년, 이노베이션학부장 5년, 영재교육원장 6년, 교무처장 4년을 맡았다.
    두 보직을 겸직한 기간을 감안해도 햇수로 10년이 더 된다.

    미래전략대학원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봐도 처음 보직을 맡은 사람일수록 인색한 행정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경험이 적을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면도칼 만한 작은 권한을 행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권한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보직자들은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언젠가 주변에서 까다롭게 굴자 송지나 작가에게 하소연 한 적이 있다.
    송 작가와는 드라마 카이스트 때문에 잘 아는 사이다. 그녀가 말해주었다.

    "그것은 교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좋지 않으면 반대하거나 시비 걸지 않아요."

    평범한 말 같지만, 힘을 주는 말이었다. .

    미래전략대학원의 커리큘럼은 미래변화요소를 적극 반영했다.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대체로 기술분야 3분의 1, 미래학분야 3분의 1, 정책분야 3분의 1로 편성했다.



    존경스러운 미래학자
    데이터 교수

    여러 사람들이 미래학분야의 대가인 데이터 교수를 초빙교수로 추천했다.
    원로 미래학자인 짐 데이터 교수는 올해 나이가 80세나 된다.
    2013년에 학생을 처음 선발하면서 이광형 교수는 짐 데이터 교수에게 이메일로 연락했다.
    한국에 와서 강의를 할 수 있는지.
    데이터 교수는 지난해 3주 동안 한국을 방문해서 한 과목을 담당했다.

    이 교수는 데이터 교수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겸손하죠, 성실하죠, 강의도 너무 열심히 하죠.
    저절로 존경심이 우러 나와요.”

    더구나 그의 나이가 얼마인가? 그 고령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한국에 와서 강의하는 미래학자의 모습은 학생들에게 깊은 감명을 줬다.

  • ▲ ▲ 미래전략대학원 설립제안서


    데이터 교수는 미래전략대학원 홈페이지에  이렇게 간략하게 썼다.

    “한국은 새로운 미래학 연구에 도전해야 하며 카이스트가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카이스트가 본격적으로 미래전략을 교육•연구 하는 것은
    한국의 미래를 위해 중요한 시작입니다.”

    석사과정 2학년 학생들은 올해 논문을 써야 한다.
    학생 중 데이터 교수를 논문지도교수로 모시고 싶다는 학생이 3명이 나왔다.
    논문지도라는 것이 보통 힘들고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연 데이터 교수가 그 같은 요청을 수락할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이메일을 보냈더니 “논문지도를 하게 돼서 영광”이라는 답장이 왔다.
    논문지도의 대가로 어떤 예우를 해 줄 것인지도 묻지 않았다.
    그의 이 같은 태도를 보면서 이광형 교수는 “더 존경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대학에 있어 본 사람은 논문지도가 얼마나 큰 부담인지 잘 안다.
    학생 논문지도를 맡은 것은 큰 혹 하나를 머리에 달고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
    자신이 논문 지도한 학생이 논문심사에서 떨어지면, 지도교수도 함께 심사에서 떨어진 셈이다.
    지도교수도 같은 책임을 지게 된다.

    교수에게 있어서 논문지도가 얼마나 큰 부담이면서 책임이고 동료 교수들에게 간접적인 평가를 받는 것인지는 이광형 교수의 사례에서도 잘 나타난다.
    과학저널리즘 과정에서 논문심사에서 3번 떨어진 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의 지도교수는 얼마나 마음으로 부담을 느꼈을까?

    놀라운 것은 바로 그 학생을 지도한 교수가 바로 이광형 교수였다는 점이다.
    1차적으로 학생에게 책임이 돌아가겠지만,
    이광형 교수는 자기 학생이 3번 연속 논문심사에서 탈락하는 고통을 맛보았다.

    비교적 원로에 속하고 과학저널리즘을 탄생시킨 교수의 제자라고 해도,
    기준에 미달했을 때, 논문심사에서 고배를 들게 하는 것이 바로 카이스트의 또 다른 저력일 것이다. 이광형 교수는 그렇게 떨어뜨려 준 심사위원들이 고마운 분들이라 말한다.

    카이스트 미래전략대학원 학생은 공무원, 회사 기획실 직원 등이 주로 온다.
    카이스트가 이런 과정을 만들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국회의원들이 관심을 가졌다.
    민주당 최재성 의원이 이광형 교수에게 국회에 와서 미래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래학에 대한 스터디 그룹을 만들고 싶다고도 했다.

    2012년 봄 이광형 교수와 정재승 교수가 국회의원 3명과 조찬모임을 하면서 각각 20분씩 미래학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 당시 예결위 민주당 간사를 맡고 있는 최재성 의원은 정부예산으로 돕고 싶다면서 국회 예산 획득 절차를 자세히 일러줬다.

    그러면서 여당과 야당 의원들을 추천해주며, 이분들에게 찾아가 부탁하면 공감을 얻을 것이라고 일러줬다. 국회의원 중에는 최재성 의원 외에 이상민 의원, 이군현 의원, 김세연 의원 등이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의원들의 협조로 2013년 5억원의 예산을 시드머니로 확보했다.

    이광형 교수를 보고 있으면 시골 알짜배기로 실속 있는 농가의 '알 잘 낳는 암탉'이 생각난다.
    이른 아침, 집주인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 줄 신선한 달걀을 한 알 한 알 낳는 암탉은 사람들을 흐믓하게 한다.

    포도나무 같다는 생각도 든다. 겉으로 보면 나무 중에 포도나무처럼 소박한 나무도 드물다.
    키가 크지도 않고, 우람하게 자라지도 않고, 무성한 가지로 위용을 뽐내지도 않는다.
    그러나 포도나무는 어느 나무 못지 않게 풍성한 포도송이를 주렁주렁 달리게 한다.

    이렇게 해서 이광형 교수가 최근 몇 년간 카이스트에 낳아준 유정란은 모두 3개 이다.
    지난 3월 8일 열린 2014년 입학식에는 지식재산과정에 45명, 과학저널리즘에 28명,
    미래전략에 16명이 신입생 선서를 했다.


    미래전략의 핵심, 대학교 창업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자, 미래전략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청와대에 미래전략수석실이 생기고 미래창조과학부가 생겼다.
    회사나 공공기관에서도 미래전략실이 앞다투어 생겼다.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알아 맞췄어요?"

    이광형 교수는 이런 질문에 별로 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답이 있다고 한다.

    "The best way to predict the future is to invent."
    (미래를 가장 잘 예측하는 방법은 미래를 만들면 된다.)

    그렇다. 미리 준비하고 만들어 나가면, 사람들이 따라온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미래를 예측했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사실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광형 교수는 대학교의 미래와 사명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하고 있다.

    나라가 발전하려면 대학교가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미래지표가 어두워요. GDP성장률은 낮아지고, 고용률도 좋지 않아요.
    제철산업, 석유산업, 조선, 휴대폰 등 어느 하나 미래가 밝은 분야가 없습니다.
    그래도 앞으로 5년간 괜찮게 느껴지는 분야는 반도체, 디스플레이 정도입니다.”

    대한민국이 계속 발전하려면 어떤 목표와 방향을 가져야 할까?

    “새로운 기업이 생겨야 합니다. 창업이 활성화되어야 해요.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주장하는 창조경제의 꽃은 창업입니다.
    사회를 바꾸는데 대학이 중요합니다.
    대학이 적극적으로 창업에 나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서 신산업의 불을 지필 곳이 없어요.

    그래도 정부와 함께 선도해 나갈 수 있는 대학이 카이스트 아닙니까?
    지식과 기술을 가진 대학에서 젊은이들이 도전해서 창업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대학이 창업 중심으로 바뀌려면 카이스트가 앞장서야죠.”

    지금까지 대학은 가르치고 연구하는 곳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이광형 교수는 가르치고, 연구하며, 창업하는 곳으로 바꿔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선두주자로 카이스트가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카이스트가 창업하는 쪽으로 바뀌면 다른 대학도 뒤따라 올 것이다.
    서울대학도 이렇게 가르치고 연구하고 창업하는 곳으로 변신에 성공하면,
    그 때 자연스럽게 중고등학교 교과 과정도 변화가 생길 것이다.

    이광형 교수는 이를 한 마디로 줄여 대학이 ‘교육 연구 창업 3위1체가 되야 한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교육과 연구의 목적은 창업이 되어야 한다.

    교육도 창업에 기여하는 교육
    연구도 창업에 기여하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미국 스탠포드 대학을 예로 들었다. 스탠포드 대학에서는 잘나가는 학생도 창업하고, 잘 나가는 교수도 창업한다. 스탠포드 대학 학생과 교수들이 창업한 기업에서 기록한 매출액은 얼마나 될까?

    무려 2조7천억 달러나 된다. 이는 프랑스 GDP와 맞먹는 규모이다.
    스탠포드 대학 하나의 역량이 프랑스 전체 역량과 비슷해졌다. `
    대한민국에서는 카이스트가 바로 스탠포드 대학 역할을 해야 한다.

    이광형 교수는 “창조경제의 핵심은 창업이고, 대통령이 창조경제를 이야기하는데, 국가가 대한민국을 위해 설립한 카이스트 대학은 국가의 위기에 대하여 어떻게 기여할 것인지를 더욱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대학에서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이광형 교수는 “창업부전공제도를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공 공부를 하면서 창업을 하는데 필요한 공부도 같이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2년 전에 이민화 교수와 함께 제안했는데, 아직도 무소식이라 말한다.


    국제 특허 분쟁 시장을 유치해야

    이광형 교수는 대한민국을 특허 허브국가로 만들자는 국가미래전략 구상도 내세웠다.
    삼성과 애플의 특허전쟁은 미국 산호세에서 벌어진다.
    유럽의 경우 독일 만하임과 뒤셀도르프에서 특허관련 소송이 먼저 열리는 편이다.
    왜냐하면 이 지역 판사들이 국제특허전쟁 재판을 잘 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벌어진 재판의 결과를 가지고 기업들은 프랑스와 영국으로 간다.
    이처럼 특허 소송이 많이 열리는 곳은 지역 겅제가 살아난다.

    아시아에서는 그런 지역이 아직 없다.
    그런데 거대한 중국시장을 옆에 두고 있는 한국이 바로 특허전쟁의 허브역할을 할 수 있다.
    쉽게 말해 아시아에서 특허전쟁이 벌어지면, 먼저 한국에 와서 재판을 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특허소송은 1,2년 넘게 걸리기도 하고 수십년 걸리기도 하는데 그 소송비용이 매우 많이 들어간다. 그 비용의 대부분이 특허 재판하는 곳에 떨어진다. 법과 제도를 고쳐서 특허소송산업을 대한민국에 유치하면 큰 비용 들이지 않고 경제적인 효과를 낼 수 있다.
     

  • ▲ ▲ 미래전략대학원 설립제안서


    지난 2013년 여름에 국회에서 "제1회 국가미래전략 최고위과정"을 개설했다.
    미래전략을 국회의원들도 배우게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5월부터 9월말까지 매주 목요일 아침에 미래학과 전략에  대한 강의가 있었다.
    국회의원 46명, 국회 국장급 이상 고위공무원 43명이 수강했다.

    오랜만에 국회에서 열리는 미래학 강의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강창희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박병석 부의장과 많은 의원들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고 끝에 나온 칭찬 중에 가장 마음에 남는 희망적인 평가가 있었다.

    "새로운 시야를 갖게 해주었다."

    국회의원들 대상으로 강의가 진행되다 보니, 일반 공무원에 대한 배려가 너무 적은 것을 알게 되었다. 국회 사무처, 예산정책처, 국회도서관, 연수원 등의 주무관, 사무관, 서기관 등은 소외되었던 것이다.

    국회 사무처에서는 또 다른 강좌를 요청해 왔다. 일반 공무원 대상의 강좌가 병행 진행되었다.
    이것은 편의상 "국가미래전략 일반과정"이라고 불렀다. 140명이 수강했다.

    이러한 강의 중에 임춘택 교수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대한민국이 특허 소송 허브 국가가 되면, 변호사 판사, 변리사 등이 많이 필요하게 되고,
    음식점과 관광산업이 일어나고, 호텔과 비행기가 꽉꽉 차게 된다."

    이 말에 필이 꽂힌 사람이 민주당 원혜영 의원과 새누리당 정갑윤 의원이었다. 
    큰 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제도를 바꾸기만 하면, 외국 사람들이 몰려와서,
    특허 소송을 벌이고, 우리는 새로운 "특허 소송" 산업을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이에 뜻을 함께한 의원들이 모여서 모임을 만들었다.
    ‘대한민국 특허(IP)허브국가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강창희 의장 등 국회의원 43명이 가입했다.

    2013년 9월 26일 국회에서 추진위원회의 출범식을 열었다.
    강창희 국회의장도 참석하여 축사를 하는 등 관심이 매우 뜨거웠다.
    특히 여야 의원들이 싸우는 상황에서 여야가 공동으로 미래전략을 추진하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추진위원회 공동대표는 3인을 뽑았다.
    정갑윤 새누리당 의원, 원혜영 민주당 의원, 이광형 KAIST 교수이다.
    이것을 보고 누가 말했다.

    "어어, 이광형 교수는 4선 의원의 반열에 올랐네...".

    2014년에는 더욱 적극적으로 국가의 미래전략에 대한 토론이 벌어질 것이다.
    이미 시작한  특허허브국가 미래전략, 창업대학 미래전략 외에 새로운 전략이 발굴될 것이다.

    카이스트는 이를 위해 매월 첫째 금요일에 "2025 미래전략 포럼"이 열고 있다.
    여기서 정치 경제 사회 국방 외교 기술 산업 교육 특허 등 모든 분야에 걸쳐서 국가가 나아갈 길을 찾고 토론을 벌인다.

  • ▲ ▲ (왼쪽부터) 임춘택 교수, 데이터 교수, 이광형 교수 ⓒ카이스트
    ▲ ▲ (왼쪽부터) 임춘택 교수, 데이터 교수, 이광형 교수 ⓒ카이스트

     

    [사진출처=카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