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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맺힌 한(恨) 24년! 피해경찰에 뒤늦은 정부 보상

정부, '명예회복 보상비' 지급… 사망자 최고 1억2천여만원내달 3일 '부산 동의대 사건 24주기' 맞아 추모행사 열려

입력 2013-04-01 21:40 | 수정 2013-04-06 15:04

 

"최동문 경위님,
 박병환 경사님,
 정영환 경사님,
 조덕래 경사님,
 모성태 수경님,
 김명화 수경님,
 서원석 수경님!"

"님들의 명예를 지키지 못한 저희 탓에 님들은 지금 잠들지 못하고 계십니다."
          - 정유환 동의대 사태 순국 경찰관 유족 대표
             (2009년 20주기 추도식에서)


대전 현충원에 잠든 7명의 <부산 동의대 사건> 희생 경찰관들의 명예가 회복돼 정부 보상을 받았다.

경찰청이 1일 <부산 동의대 사건> 희생자인 순직경찰관 유족과 부상경찰관에게 명예회복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순직한 경찰관의 유족들은 1인당 1억 2,700여만원, 순직한 전투경찰의 유족들은 1억 1,400여만원을, 부상자들은 모두 2,0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받았다.

사건 발생 24년 만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동의대 희생경찰의 명예회복은 전체 경찰의 자긍심 회복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동의대 사건 희생경찰에 대한 명예회복은 당시 순직-부상경찰관들 뿐만 아니라 매 순간 불법행위와 맞서고 있는 모든 경찰관들에게도 큰 의미가 있다.

법질서와 국민의 안전수호를 위한 희생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가 그 명예를 지켜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 경찰청 관계자


경찰은 "향후 활발한 추모활동으로 동의대 희생경찰을 깊이 되새길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청은 내달 3일 '부산 동의대 사건 24주기'에 명예회복 선포 성격의 추모행사를 연다.

또한 경찰청은 부산지방경찰청과 중앙경찰학교의 기존 추모시설을 확대 보수하는 등 동의대 희생경찰에 대한 추모의 뜻을 모으는 사업을 활발히 진행해 나갈 계획이다.

 

▲ 부산 동의대 사태 추모비 ⓒ 뉴데일리

89년, 부산 동의대에서는…

#. 1989년 5월 1일

부산 동의대학교 학생들은,
전날인 4월 30일의 노동자대회 원천봉쇄에 항의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들은 학교 밖으로 진출해 인근 가야3파출소에 [화염병]을 투척했다.
쇠파이프도 등장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흩어지게 하기 위해 공포탄을 발사하고 주동자를 검거했다.

#. 1989년 5월 2일

학생들은 경찰의 총기난사 규탄대회를 열었다.
시위를 벌이며 교문 밖으로 진출했고 다시 화염병을 투척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시위에 참가한 8명을 추가로 검거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사복경찰 5명을 붙잡아 도서관에 감금했다.

#. 1989년 5월 3일

경찰은 오전 3시경 경찰을 구출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진입했다.
그러자 4층 및 7층 옥상 베란다에 집결해 있던 학생들이
화염병과 돌, 쇠파이프, 의자 등을 투척했다.

계단에는 시너와 석유가 뿌려져 있었다.
이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인해 도서관 7층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7명이 사망했다.
3명은 불에 타 숨졌다.
4명은 불길을 피해 창틀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했다.
이밖에 11명이 중화상을 입었다.

당시 이 사건으로 학생 77명이 구속돼
31명이 2년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46명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 2002년 4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만들어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동의대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자를 포함해 46명을 [민주화운동자]로 인정했다.
1인당 평균 2,500만원, 최대 6억원의 보상금도 지급했다.

# 2005년 10월

“가해자들에게 명예 보상을 해줌으로써 유족들의 명예가 훼손됐다.”
- 순직 경찰관 유족들 헌법소원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유족들이 위원회 결정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에 대해 각하 결정을 내렸다.

[유족은 위원회의 결정으로 인격권이나 명예권을 침해당한 직접 당사자로 볼 수 없다]는 게 판결이유였고, 재판관 5 대 4로 내린 결정이었다.

소수의견을 낸 4명의 재판관만이 "민주화운동 인정 결정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반대 의견을 개진한다. (민주화 보상심의위원회의) 결정은 취소돼야 마땅하다고 판결문에 밝혔다.


지난 해인 2012년 2월  <동의대 사건 희생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마침내 통과됐다.

같은 해 9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동의대 사건 희생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구성돼 보상금 지급 등 명예회복 추진 방안을 심의해왔다.

그리고 2013년 2월 보상금 최종 의결을 마무리했다.

 


"그저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달라는 겁니다"


- 2009.05.03 온종림 기자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찬 흙 속이 아닌 가슴에 묻는다.
그리고 가슴에 묻은 자식은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부모 가슴을 찌르고 또 찌른다.
가슴에 묻어둔 그 아픔은 20년 세월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는다.

살아있었으면 올해 마흔이 됐을 둘째였다.
고등학교 다니는 손자나 손녀를 안겨줬을 것이었다.
유독 활달한 성격이니 사업을 해 성공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둘째는 지금, 일흔을 넘긴 부모의 발밑에 누웠다.
어머니 최정자씨는 둘째의 비석을 닦고 또 닦는다.
그러면서 울부짖는다.

“둘째야, 이놈아.
어서 일어나. 날 두고 너 혼자 어디로 갔니.”


△ 5월 3일 대전 현충원 경찰관 묘역에서 동의대 사태로 순직한 고 모성태 수경의 어머니 최정자씨가 모 수경의 묘비를 붙잡고 통곡하고 있다. ⓒ 뉴데일리


20년을 흘리고도 어머니 눈물샘엔 아직 흘릴 눈물이 남아 있다.

1989년 5월3일 부산경찰국 기동 3중대 모성태 수경(육군의 병장과 동일한 전투경찰 계급)은 동의대 사태 당시 출동했다가 순직했다.

“제대를 두 달 남겼을 때였어요.
휴가 나왔을 때 제대하면 본격적으로 대학 입시를 준비하겠다고 했었는데…”

 


△ 동의대 사태로 순직한 고 모성태 수경의 아버지 모종칠씨. ⓒ 뉴데일리

 

고 모 수경의 아버지 모종철씨는 올해 73세를 맞았다.
모 수경은 3남3녀 중 둘째.
유독 성격이 밝아 가족들의 믿음과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였다.

“그때는 서울에서 살았는데 어쩌다보니 부산경찰청으로 발령이 났어요.
모두 성태의 운명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무 힘들 때는 부산 발령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전투경찰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연고지 배치가 원칙이다.

“하지만 우리 성태가 안갔더라도 다른 누군가 희생됐을 것 아닙니까. 남을 위해 대신 저세상에 갔다고 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집니다.”


모종철씨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살며시 내리감았다.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내게 한 이들도 아들과 같은 또래인 대학생들이었다.

“원망했습니다.
어떻게 무고한 생명을 해칠 수 있냐고.
전쟁도 아니고, 민주화투쟁도 아니고, 학내분규로 생긴 일로 일곱 명이나 해칠 수 있냐고.”


하지만 가해 학생 부모들이 찾아와 사죄하며 탄원서에 서명을 부탁했을 때, 모씨는 ‘같은 부모의 마음으로’ 원망을 접고 탄원서에 서명을 해줬단다.

“용서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우리 아들이, 아들의 동료가 [민주화의 역적]이라니요?”


2002년 동의대 학생들을 민주화 유공자로 인정했다는 보도를 듣고, 모씨는 기가 막혔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불길 속을 뛰어들었는데, 불 질러 사람 죽인 것이 정의이고 불길에 뛰어 들어간 사람은 불의라는 얘기는 아무리 이해를 하려고 해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아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헌법소원이 기각되고, 모씨는 마음의 병을 얻었다.
전여옥 의원이 민주화운동 재심의법안을 관철하겠다는 말에 조금 위안을 얻었지만 마음의 병은 차도가 없다.

“보상을 바라지도, 국가가 뭘 해주지도 않습니다.
단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정해달라는 겁니다.”


모씨는 추도식이 열릴 장소로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머니는 아직 묘비 옆에서 울고 있었다.[=대전에서]



"좌파정권은 순직 경찰을 두번 죽였다"


- 2009.05.03 온종림 기자


“최동문 경위님, 박병환 경사님, 정영환 경사님, 조덕래 경사님, 모성태 수경님, 김명화 수경님, 서원석 수경님!
님들의 명예를 지키지 못한 저희 탓에 님들은 지금 잠들지 못하고 계십니다.”


3일 동의대 사태 순국 경찰관 20주기 추도식이 열리던 대전 현충원.
추도사 말미에 통곡으로 말을 잇지 못하던 정유환 동의대 사태 순국 경찰관 유족 대표는 간신히 추도사를 마치고 무겁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 정영환 경사는 그가 가장 아끼는 동생이었다.

유족 대표를 맡아 온갖 일을 도맡아하면서도 힘든 줄을 모르던 그는. 고인들의 20주기를 맞은 이날 유달리 피곤해보였다.

△ 정유환 동의대 사태 순국 경찰관 유족 대표 ⓒ 뉴데일리


“혼자 싸우다가 동지들이 함께 하니까 긴장이 풀리나 봅니다.”


하지만 그는 추도식에 처음 경찰총수와 전여옥 국회의원이 참석하고 이명박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준 것에 대해 피곤 속에서도 다소 고무된 표정이었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YS정부 이후 대통령이 추도의 뜻을 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고맙지요.”


그는 누구하나 유족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던 좌파 정권 10년의 악몽을 떠올리며 어금니를 굳게 물었다.

“역사 왜곡이 아닙니다.
역사 날조입니다.
2002년 동의대 가해자 학생들이 민주열사가 됐을 때, 저희 유족들은 모두 매스컴을 통해 사실을 알았습니다.
심사를 한다는 위원회에서 우리에게 진상을 묻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경찰관들에게도 확인을 안했다는 거예요.
이런 심사가 어디 있습니까?”


△ 정유환 동의대 사태 순국 경찰관 유족 대표가 전여옥 의원에게 전여옥법안 관철을 읍소하고 있다. ⓒ 뉴데일리


정유환씨의 이 같은 주장은 기자가 지난 4월 인터뷰한 유병은 부산진경찰서 경우회장의 증언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당시 동의대 사태를 직접 수사했던 유병은 회장은 “수사 담당자였던 내게도 한마디 사실 확인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2002년 이 발표로 고인의 큰 형이자 정유환 대표의 형은 화병을 얻어 세상을 등졌다.

“죽은 사람 시체 꺼내 매질하고 멀쩡한 사람을 다시 죽인 살인 판결이었습니다.”


정 대표는 말을 이었다.

“명예회복을 위해 헌법소원을 냈을 때 기각 사유는 더 기가 막힙니다.
유족은 당사자가 아니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유족이 나서지 사망한 당사자가 나섭니까?”


정씨는 “억지로 민주열사 만들어 희생자며 유족들 가슴에 박은 대못은 영원히 빠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전여옥 법안’이 입법돼 고인들 명예가 회복될 때까지 여기 묻힌 고인들의 영령은 잠들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정 대표로부터 전화가 왔다.

“먼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힘이 되어주세요.”


세상에 배신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세상을 못 믿는다.
정 대표나 유족들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외로운가보다.
하긴 얘기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 10년을 살았으니….
[=대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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