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표씨, 이승만 1954년 미국 국빈방문 성과를 분석통일 기회 양보한 미국 비판, 의회연설에 미국민 감동
  •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은 1950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행정고시를 합격해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 독일과 미국에서 문화원장을 맡아 대한민국을 홍보하는 일을 도맡아 왔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은 1950년에 태어나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 행정고시를 합격해 공무원생활을 시작했다. 독일과 미국에서 문화원장을 맡아 대한민국을 홍보하는 일을 도맡아 왔다. 현재는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에서 열린 '뉴데일리-이승만연구소' 주최 <제 15회 이승만포럼> 강연자로 나서 "이승만 대통령을 바로 알기 위한 우리 사회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개탄하며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 미국 국빈방문때 직접 쓰고 발표한 연설문을 소개했다. 그해 7월28일부터 8월11일까지 이어진 방미중 이승만이 행한 연설문들은 20차례가 넘는다. 타고난 연설가, 선동가인 이승만 특유의 화법, 그리고 수준높은 영어 어휘 구사는 미국인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이현표씨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독일과 미국 대사관 문화원장을 지낸바 있다.

    이 원장은 "이승만 대통령만큼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인물을 찾기 힘들다"며 "한국 근대화의 선구자, 독립의 구심점, 자유민주국가의 건국 등 그의 업접은 경외스러울 정도로 대단하다"고 강조하면서, 가장 먼저 64년전 이승만 대통령의 취임사부터 소개했다.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이 내게 맡기는 직책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책임을 내가 감히 맡는 것은 나의 기술, 능력, 지혜를 믿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애국남녀 모두의 마음과 힘을 모아서 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민주정부는 백성이 자기주장을 하지 않으면, 정권이 결국 정객과 파당의 손에 떨어져서 나라가 위험한 데 빠지는 법입니다. 그러니 국민 모두가 자기 직책을 충실히 이행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국민이 주인이므로 민중이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명백히 구별해야 합니다."

    이 원장은 취임사를 통해서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에 설명하고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을 알렸다. 그리고 이 원장은 "이 대통령의 취임 연설문은 미국의 어떤 대통령의 연설문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수하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또 그는 1953년 6월 17일 이 대통령이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서신을 소개하며 "이 역시 취임사처럼 우리 역사에 기리 남을 명문장의 하나"라고 칭찬했다. 서한에는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는 약소국의 대통령으로는 보기드문 당당함이 담겨있다.
    이 편지를 보낸 다음날 이승만은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휴전을 반대하는 최후의 카드였다. 미국은 물론 휴전을 추진한 모든 나라들이 경악했음은 물론이다.

    이 대통령은 자유, 민주,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전쟁을 펼친 미국에게 휴전이 아닌 한국전쟁의 완전한 종결과 공산주의자로부터 중국의 해방을 당당히 요구했다.

  • ▲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이승만 대통령의 서신.
    ▲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이승만 대통령의 서신.

    "친애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귀하나 우리 우방들은 휴전 후로 예정된 정치회담에서 중국공산주의자들의 한반도 철수와 통일이 성취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에 미국과 유엔은 전쟁의 목표가 통일‧독립‧민주 한국의 건설과 침략자들에 대한 응징이라고 공언해왔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들리는 말들은 휴전에 관한 얘기뿐입니다. 경제원조와 한국군 증강에 관한 귀하의 후한 제안들은 우리에게 긴급히 필요하므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휴전을 수락하는 대가라면, 그다지 마음이 끌리지 않습니다."

    이현표 원장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아무리 미국의 신세를 졌다하더라도 국가지도자로서의 자존심과 인격에 손상을 입을 수는 없다는 당당함을 갖고 있었다"며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에게 휴전이 아닌 예방적 제한전쟁(a preventive limited war)을 과감히 제안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고 말했다.

    또 이 원장은 "평소 외신기자들과 만나서 미국의 여론을 움직이고 설득하기 위해서 강력하게 자신의 발언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아이젠하워에게는 완곡히 뜻을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과의 타협이란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타협이란 언제나 시간을 벌기 위한 수단이자, 상대가 의심하지 않도록 달래는 속임수인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당신들은 준비가 너무 늦어져 그들의 다음 번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공산주의는 언젠가 치료되는 감기가 아니라 치명적 바이러스."라고 외신기자들에게 말하곤 했다.

  • ▲ 아이젠하워에게 보낸 이승만 대통령의 서신.

    이현표 원장은 이어 1961년에 발간된 <Tail of Paper Tiger>(종이호랑이의 꼬리)라는 책을 소개했다. 6.25종군기자 킹(O.H.P King)이 쓴 이 책은 한 챕터가 모두 이승만 대통령을 다루고 있다. ‘Rock of the ROK’, 즉 ‘대한민국의 바위 같은 사나이’라는 제목아래 킹은 이 대통령을 아래와 같이 소개했다.

    "해방 후 한반도내의 정당들은 좌우를 떠나 모두 이승만을 당대표로 추대하려고 했다. 그의 엄청난 인기를 실감한 미 군정청의 하지 장군은 소련에서 훈련받은 공산주의자들도 포함하는 연립정부 구성 제안을 이승만이 받아들이기를 희망했다.

    이승만은 이 제안을 거부함으로써 하지와 불화를 빚었다. 그러나 제안을 수용했더라면,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연립정부를 구성해야만 했을 것이고, 난처해졌을 것이다. 자기 원칙을 깨지 않는 이런 태도는 그를 설득하려는 사람들에게 못 말리는 고집불통의 늙은이로 비쳤고, 그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장점이고, 가치 있는 태도였다.

    수개월 동안 나는 매주 2시간이상씩 정례기자회견에서, 때로는 개인적으로도 그를 만났다. 그 사이에 그에 대한 첫인상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더 나은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즉, 부드러움에 가려진 강한 개성, 결단력, 일관성 등이 그것이다." 

    강한 개성과 결단력, 일관성 등은 장점이자 외교에서는 단점이 될 수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을 '외교의 달인'이라고 칭하는 이현표 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실제로 미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미국을 '겁쟁이'라고 비유하며 휴전을 반대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며 "하지만 해서는 안되는 자리와 해야하는 자리를 잘 구별하며 외교의 달인다운 모습을 보였다"고 부연설명했다.

    실제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을 국빈방문하는 동안 다양한 장소에서 연설을 했지만 연설하는 장소와 때에 따라 내용을 달리하며 자신의 뜻을 알리는데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특히 당시 아이젠하워로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주장하는 '제한전쟁'도 할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6.25전쟁 중에 약 194만 명의 유엔군 참전용사 중 미군이 92%였고 4만 5천 명이 사망자와 11만 명의 부상자 중 88%가 미군이었던 것. 피해가 극심해 아이젠하워로서는 전쟁을 계속하기보다는 불완전하지만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사이에는 서로 타협하기보다는 누군가 자기의 주장을 접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 대통령은 상황이 심각해 아이젠하워를 설득해 전쟁을 이어가려는 생각은 애시당초 없었다. 

    이 대통령은 미국정부를 설득하기 보다는 미국 국민의 여론을 변화시키기위해 연설을 구사하고 미국 정부 관계자나 아이젠하워를 만난 자리에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글, 사진 : 윤희성 기자 ndy@newdaily.co.kr

  • ▲ 대통령 관저 경무대 사무실에서 직접 타이프라이터로 연설문을 작성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4년 7월 국빈방문때 미국의회에서 행할 연설문은 독립투쟁때 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비밀에 붙였다. 이 타이프라이터는 미국 망명생활중 쓰던것을 가져왔는데, 이승만은 구한말 감옥에서 고문으로 손가락을 다쳐 평생 고생했다.ⓒ
    ▲ 대통령 관저 경무대 사무실에서 직접 타이프라이터로 연설문을 작성하는 이승만 대통령. 1954년 7월 국빈방문때 미국의회에서 행할 연설문은 독립투쟁때 고문 로버트 올리버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비밀에 붙였다. 이 타이프라이터는 미국 망명생활중 쓰던것을 가져왔는데, 이승만은 구한말 감옥에서 고문으로 손가락을 다쳐 평생 고생했다.ⓒ

    [발표문 전문]

    제15회 이승만포럼
    2012. 5. 10(목) 오후2:30~4:30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이승만 대통령, 자유와 정의를 말하다”
    - 1954년 미국 국빈방문 성과를 중심으로
                         

                  이현표(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들어가는 말>

     

    이승만 만큼 우리 현대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인물을 찾기 힘들다. 그는 한국 근대화의 선구자이자, 조국 독립의 구심점이며,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이라는 자유민주국가의 건국과 발전을 위해서 남달리 헌신했다. 그렇지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 때문에 결국 그는 1960년 4.19혁명의 단초를 제공했고, 많은 젊은이들을 피 흘리며 쓰러지게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다양하며, 국내외에서 그에 관한 수많은 저작물이 제작되었다. 이중에는 그를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이들의 증언이 담긴 저작물들도 있다. 반면, 그와는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제3자의 입이나 글을 통해서 얻은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첨단미디어를 이용하여 넓고 빠르게 확산시키고 있다. 

    이런 정보의 홍수 속에 이승만의 자유와 정의에 대한 신념, 한반도 통일과 대한민국의 미래에 관한 비전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책이 있다. 즉, 1954년 대한민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국빈방문(國賓訪問)한 이승만 대통령의 행적을 대한민국 공보처가 영문으로 기록해 놓은 책,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이승만 대통령 방미기)가 그것이다.

    외교란 “국가 간에 교섭을 통해서 갈등을 해결하거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라고 흔히 말한다. 외교의 형태 중에서 국빈방문은 가장 높은 격식의 의전행사가 따르는 정상외교의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21발의 예포 발사, 양국 국가 연주 등 공식 환영행사, 남자는 검정 혹은 흰색 나비넥타이와 연미복을 착용하는 국빈만찬, 의회방문 및 연설, 정상간 선물교환, 공연 등 문화교류 행사 등이 수반된다.

    대한민국 공보처는 대통령의 첫 미국 국빈방문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1955년에 영문과 국문으로 책자를 만들었다. 그런데 두 책을 비교하자면, 영문책자는 한국인과 미국인에게 두고두고 읽혀야 할 역사기록인 반면에, 국문책자는 당시 우리 공무원과 국민의 의식수준에 맞게 쓰여진 대국민홍보자료이다.

    본 강연은 영문책자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의 기록을 중심으로 그가 국빈방문 기간 중에 한반도, 나아가 동아시아의 미래를 위해 어떤 언행을 했으며, 성과는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 ▲ 1954년7월30일 워싱턴의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이승만. 이 대학은 이승만이 1907년 입학, 학사학위를 받은 모교이다. 그는 자신의 망명시절
    ▲ 1954년7월30일 워싱턴의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는 이승만. 이 대학은 이승만이 1907년 입학, 학사학위를 받은 모교이다. 그는 자신의 망명시절 "미국 독립의 아버지처럼 한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싶어서 이 대학에 입학했노라"고 말했다.

    미국 국빈방문 배경과 한‧미지도자 간의 이견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대한민국 제헌헌법의 전문(前文)은 대한민국 건국의 기본이념을 자유와 정의에 두고 있으며, 이는 8차례의 헌법 개정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이승만 초대대통령도 한반도에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통일국가를 꿈꾸었던 인물이었다. 비록 공산주의에 대한 지독한 혐오감을 갖고 있긴 했지만, 무력보다는 외교적인 노력으로 통일국가를 이룬다는 신념을 가졌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채 2년이 못돼 북한 공산군의 무력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으로 수백만 명이 생명과 재산을 잃었고, 국토 전체가 전화(戰禍)로 완전히 초토화되었다. 전쟁은 휴전협정으로 총성이 멎었다. 1년 후에는 한반도 통일문제를 다룬 제네바 국제회의가 개최됐지만, 아무런 성과 없이 말잔치로 끝나고 말았다.

    이승만은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외교와 국제사회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국내외에 역설했었다. 그러나 6·25전쟁은 그에게 무력으로 공산주의자들을 한반도에서 몰아낼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했다. 때문에 휴전에 철저히 반대했고, 아이젠하워 등 미국과 국제사회의 정치지도자들과 대립각(對立角)을 세웠다.

    적의 도발을 응징하고, 북진통일(北進統一)하겠다는 이러한 이승만의 집념은 당시 미국은 물론, 국제사회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는 이승만에게 큰 불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1954년 제네바 회담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자신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었다. 한편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취임한 후, 6·25전쟁 휴전을 성립시켰지만, 이승만의 불만을 잘 알고 있었고 어떻게든 그를 회유하고 싶었다.

    이런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서 이승만은 대한민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하게 되었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결코 호의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망명생활 중 그는 국권을 잃은 국민으로서의 푸대접을 받을 만큼 받았었다. 더구나 해방이후 정부수립, 6·25전쟁과 휴전에 이르기까지 그에 대한 미국의 괄시는 심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미국을 국빈방문하게 된 그는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미국인들을 다음과 같은 말로 설득하고 싶었다.

    “한반도에 ‘자유와 정의’라는 대의가 구현되는 통일국가가 필요하며, 이는 자유 아시아, 나아가 자유세계의 미래와 직결된다. 이를 위해서 한반도는 물론 중국대륙에서도 힘으로 공산집단을 몰아내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의 주장은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요구였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사주를 받은 철없는 북한 지도부가 저지른 6·25전쟁이란 불장난으로 한반도뿐만 아니라 미국과 자유세계의 피해도 엄청났기 때문이다. 이들의 물질적인 손실을 제외하고 인적 피해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약 194만 명의 16개국 유엔군 참전 장병 중에서 4만 5천 명이 목숨을 잃거나 실종되었고, 11만 명이 부상 혹은 전쟁포로로 고통을 당했다. 특히 유엔군 장병의 92%가 미군이었고, 전사·부상자의 88%가 미군이었다. 즉, 179만 명의 미군이 참전했고, 전사·부상 등 사상자 수가 13만 7천명에 달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자유와 정의’가 아무리 중요하다고해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서는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보다는, 불완전하지만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더 중요했다.

    따라서 이승만과 아이젠하워 사이에는 서로 만나 타협하기보다는 누군가 자기의 주장을 접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승만은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고, 아이젠하워를 설득하여 양보를 받아낼 마음이 없었다. 그가 설득하려는 대상은 아이젠하워가 아니라, 미국 여론이었다.

  • ▲ 1954년8월2일 미국상하양원회의에서 국빈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뒤에 닉슨 부통령이 보인다.(왼쪽끝).
    ▲ 1954년8월2일 미국상하양원회의에서 국빈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뒤에 닉슨 부통령이 보인다.(왼쪽끝).

    미 의회에서 예방적 제한전쟁(制限戰爭) 촉구

    이승만은 국빈방문 기간 중에 아이젠하워의 주장에 굴복하거나 화해를 통해서 실질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얄팍한 술수를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 여론에 한반도의 미래에 관한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호소하여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54년 7월 26일(미국 동부시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정부가 제공한 군용기편으로 워싱턴 공항에 도착하여 소감을 말했다.

    “만약에 우리가 조금만 더 용기가 있었다면, 압록강까지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우리는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이 조금 겁을 먹어 우리는 다 차려 놓은 밥상을 차지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가 한국, 미국과 유엔, 그리고 모든 자유국가들에게 최상의 기회였는데 놓친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은 확실한 승리를 위한 우리의 계획이 기필코 성취되도록 보살펴주실 것입니다.” 

    이승만의 도착 일성(一聲)은 아이젠하워를 비롯하여 한반도의 통일을 막았던 바로 그 사람들과 싸움을 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공항에서 백악관으로 직행한 이 대통령은 아이젠하워가 주최한 국빈만찬에 참석했으며 이 자리에서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한미 양국의 우의(友誼)만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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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에서 공산당을 몰아내야 세계 평화가 온다"고 역설하는 이승만.(1954.8.2. 미국의회연설)

    이승만이 미국의 한반도와 아시아 정책에 대해 첫 포문(砲門)을 연 것은 7월 28일 미 의회 연설에서였으며, 요지는 아래와 같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한반도에서 대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승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전투는 아직도 승리를 쟁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선(韓國戰線)에서는 현명치 못한 휴전에 의해 포화가 잠시 중단되고 일시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적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무력을 증강시키고 있습니다. 제네바 회담도 예견된 바와 같이 하등의 성과 없이 끝났으니, 이제 휴전 종결을 선언할 적당한 시기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의 자유 국민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악의 힘에 유화적이 되거나 굽히지 말고, 세계의 세력균형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불리하도록 움직여서 설사 그들이 섬멸 무기를 소유하더라도 감히 그것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에 반대하는 150만 명을 학살했지만, 아직 수많은 자유중국 게릴라들이 투쟁하고 있습니다. 또한 중국의 경제 상태는 극도로 취약합니다. 미국 해군이 중국 해안을 봉쇄된다면 중국의 교통망은 큰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중국을 다시 찾지 못하는 한, 자유진영의 궁극적 승리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위태로워지면, 소련이 지상군과 공군을 투입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련의 개입은 오히려 자유진영을 위하여 아주 잘 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련이 수소폭탄을 대량생산하기 전에 그 제조 중심지들을 미 공군이 파괴하는 것을 정당화하여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주장이 강경정책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은 누구든 유화적이면 노예로 만들어버리는 힘든 세계, 끔찍한 세계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류 문명의 존립을 가늠할 운명이 바야흐로 우리의 최고결정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이상과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서 궐기합시다. 

    친구들이여, 우리는 반쪽짜리 공산주의, 반쪽짜리 민주주의 상태의 세계에서는 평화가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시아의 자유를 안정시키기 위한 여러분의 중대한 결정이 지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결정은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아메리카에서의 세계 공산주의 문제를 자동적으로 해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의 연설의 핵심은 인류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자유와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예방적 제한전쟁(豫防的 制限戰爭; a preventive limited war)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역사적으로 그 어느 외국 국가원수도 미 의회에서 감히 해 본적이 없는 도발적인 연설이었다. 이승만의 외교고문 로버트 올리버 교수는 그의 저서 <Syna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1978)에서 당시를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그것은 대단한 연설이었으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만일 개인이 그런 연설을 했다면, 나무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나라의 국가원수가 다른 나라의 의회에서 행할 연설은 아니었다. 이 대통령도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후에 내가 서울에 갔을 때, 그는 내게 말했다. ‘올리버 박사, 내가 미 의회에서 했던 연설은 일생 동안 저지른 최악의 실수였네.’”

  • ▲ 미국양원 의원들이 연설을 끝낸 이승만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1954.8.2)
    ▲ 미국양원 의원들이 연설을 끝낸 이승만에게 기립박수를 보내고 있다.(1954.8.2)

    이승만은 미 의회연설을‘최악의 실수’로 생각했을까?

    과연 올리버의 진술대로 이승만이 의회연설을 일생일대의 최대 실수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승만은 하고 싶은 말을 했고, 자기주장을 끝까지 관철시키고 싶어 했다. 미 의회에서 예방적 제한전쟁을 역설한 이승만은 국빈방문 기간 중 미국 어디를 가나 의회연설의 주장을 반복했고, 연설의 배경과 내용을 설명하고, 어떤 때는 아이젠하워의 미온적인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기까지 했다. 즉, 의회연설이 총론이고 주제였다면, 이후 이승만의 발언들은 각론이자 부연설명이었다.

    o 조지워싱턴대학 연설(7.30, 워싱턴): “우리는 공산주의를 불편하기는 하나 위험하지는 않은 감기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치명적인 바이러스로 여기고 퇴치를 위한 투쟁을 시작해야합니다. 여러분은 한적한 강의실에 앉아서 자유세계가 파멸의 비극으로 휩쓸려가도록 수수방관해서는 안 되며,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싸우는 모든 자유인들의 편에 서야합니다.”

    o 미국외교기자클럽 연설(7.30, 워싱턴): “내가 중국에 대한 강경하고 확고한 정책이 중국뿐 아니라, 한국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미국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나의 현실적인 평가에 근거한 것입니다. 언론인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여러분이 미국 정부는 물론, 위대한 미국의 힘의 원천인 미국 국민에게 호소해주기 바랍니다. 자유롭게 되기 위하여, 또는 자유를 보전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는 세계 도처의 민족들을 지원하자고 말입니다.”

    o 파운드리 감리교회 연설(8.1, 워싱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만약 우리가 북한에서 100만 명의 공산군을 몰아내려고 하면,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이 인류문명을 파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소폭탄보다 더 위력적인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모두 나를 비난하라고 하십시오. 하느님만이 나를 질책하지 않으신다면, 그뿐입니다.”

    o 외국전참전용사회 연설(8.1, 필라델피아): “6.25전쟁에서 산화한 미국과 한국의 장병들은 힘이 정의를 만들지 않는다는 위대한 원칙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분들입니다. 여러분이 치렀던 전투의 목적이었던 자유라는 대의는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타협의 산물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위업과 희생이라는 감동적인 행위는 옳은 것과 정의가 승리하는 길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o 한미재단 연설(8.2, 뉴욕): “한국전쟁은 제한전쟁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원하지 않는 한 한국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소련이 바랐다면, 제3차 세계대전이 벌써 지구를 휩싸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의 목표는 제한적입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면 무적입니다. 정의라는 대의명분을 가진 갑옷을 입고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미국 국민 여론의 뜻에 따라야만 합니다. 미국 국민인 여러분이, 미국 여론과 세계 여론의 위대한 지도층인 여러분이 공산주의자들의 팽창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빨리 할수록 상황은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스스로 무엇을 해야 할지를 훨씬 수월하게 깨닫게 될 것으로 이 사람은 굳게 믿습니다.”

    o LA 시의회 연설(8.6): 전쟁은 악(惡)입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전쟁의 공포보다 더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자유가 없는 나라는 더 이상 국가가 아니며, 죽음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o 세계정세협회 연설(8.6, LA) : “우리의 공동목표는 어떤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뤄야하는 평화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패배와 자유의 종말을 초래할 뿐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표상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하는 정의이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가진 것 모두를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바쳐야합니다.”

    이러한 이승만의 발언들을 보면, 의회연설은 실수가 아니라,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의지와 진심이 담긴 것이었다. 그는 미국이 제한전쟁을 해서라도 대한민국과 자유중국 정부가 한반도와 중국을 각기 통치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하며, 이것이 아시아의 자유, 정의, 평화를 실현하는 첩경임을 역설했던 것이다.

    둘째, 의회연설이 실수가 아니라 진심이었다는 사실은 국빈방문 후 발간된 당시 우리 정부간행물의 내용으로도 증명된다. 당시 정부는 이 대통령의 의회연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방미 이승만 대통령 연설집>(1954, 국방부), <이대통령각하 방미수행기>(1955), <President Syngman Rhee’s Journey to America>(1955), <Handbook of Korea>(1958, 이상 공보처) 등이 그것이다. 이 대통령이 의회연설을 실수라고 후회했다면, 정부가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었을까? 

  • ▲ 뉴욕을 방문,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이승만. 1백만 시민이 한국전쟁의 영웅을 환영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1954.7.28)
    ▲ 뉴욕을 방문,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이승만. 1백만 시민이 한국전쟁의 영웅을 환영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1954.7.28)

    외교와 홍보의 달인의 면모

    이승만은 외교, 특히 홍보에 있어서 대한민국은 물론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달인이었다. 망명시절의 외교와 홍보활동은 접어두고라도, 1948년 7월, 그의 초대 대통령 취임사는 달인으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과거 40년간 우리가 국제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세계가 일본인들의 선전만 듣고 우리를 판단해왔지만, 이제 우리가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우리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부와 민중은 해외선전을 중요히 여겨서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에게 우리의 올바른 사정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가 서로 통하여 교제가 친밀해질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 국빈방문 기간 중에 자신이 늘 강조해왔던 해외선전을 직접 수행했는데, 2가지 사례를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반일외교(反日外交)에 관한 사례이다. 이승만은 미국 측이 한일관계를 이슈화할 것에 대비한 비장의 카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예상대로 7월 29일 미국 측이 우리 측과 협의 없이 공동성명의 초안에 한일우호에 관한 문구를 집어넣은 것을 알자, 이승만은 즉시 원용덕 헌병사령관에게 중립국감시위원단 공산 측 대표의 철수를 경고하는 담화를 발표토록 했다. 

    정상회담에서 이 문제로 아이젠하워와 논쟁을 벌이던 이승만은 “내가 대통령에 재임하는 동안, 일본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하고 회의장을 나와 버렸다. 이틀 후(7.31) 그는 워싱턴에서 자신이 직접 중립국감시위원단 철수요구에 대한 성명을 발표함과 동시에 휴전협정 공문화(空文化)를 선언하는 중대발표를 했다. 결국 공동성명에는 한일관계가 언급되지 않음으로써 이승만의 의도대로 되었다.

    둘째, 독도 영유권 홍보에 관한 사례다. 우리 정부는 이 대통령이 국빈방문의 마지막 기착지인 하와이에 체류하던 때인 1954년 8월 10일 정오, 독도 무인등대에 점등(點燈)하고 세계 각국에 이를 통보했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대한민국 인접해양에 대한 대통령 선언을 통해 소위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설정하고 독도를 이 라인 안에 포함시킨바 있다. 그리고 그는 방미기간을 이용해서 독도 등대를 점등함으로써 대한민국의 독도영유권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참고로 뉴욕타임스는 독도 등대가 점등되기 열흘전인 7월 31일, ‘한국이 섬들을 점령하고 있다고 일본이 주장’이란 제목아래 이승만 정부가 추진한 은밀한 행동에 대해서 1면과 2면에 걸쳐 상세히 보도한 바 있다. 독도를 ‘Takeshima’로만 표기한 이 기사는 일본 해상보안청의 정보를 근거로 독도에서의 우리 인부들의 작업 사실과 독도에 관한 일본 측의 주장만을 소개한 악의적인 보도였다.

    국빈방문에 대한 이승만 자신의 평가

    o 하와이에서의 공식성명

    이승만은 8월 11(수요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내외신 고별기자회견을 열고, 아래 요지의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헤어지면서 나는 미국의 모든 친구들에게 미국과 앞으로 올 세대의 안전과 복지를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촉구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들이 전 세계의 안전과 평화도 생각해보기를 희망합니다. 철의 장막 뒤에서 공산주의자의 함정에 빠진 러시아, 중국, 북한, 그리고 다른 위성국가 국민들은 구조해달라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미국은 인간의 자유를 포함한 민주주의 원칙의 챔피언이자 옹호자입니다. 나는 미국이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실망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시적인 평화는 절대로 평화가 아닙니다. 항구적인 평화를 표방하는 사람들은 그를 위한 확고한 토대를 구축할 것을 주장해야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국가들만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의 평화의 원칙도 포함해야만합니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은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는 적에 대항하여 적절한 때에 투쟁을 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일부는 자유라는 축복을 여전히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자신의 소중한 생명과 가진 것 모두를 희생하여 얻어낸 사람들의 유산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초석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들의 위업을 지키는 것은 산 사람들의 과제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자유가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자 영속적인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것을 확립시킨 분들에게 보답해야합니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가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을 패퇴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생명과 우리에게 귀중한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한다면, 미국 독립의 아버지들이 했듯이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시기에 해야만 합니다. 결정을 길게 미루면 더 크고 더 끔찍한 재앙을 초래할 뿐입니다. 5년 전에 투쟁을 시작했다면, 상황은 이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며, 전망도 이렇게 불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는 오늘 투쟁하는 것이 내일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도 훨씬 낫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적은 무자비하며, 문명사회의 국가나 국민들이 소중히 생각하는 품격을 갖추지 않은 존재들입니다. 적의 유일한 목표는 모든 자유 국가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재산과 주민들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국가입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큰 전리품을 얻을 수 있는 부자나라 미국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둔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실로 비참하고 심지어 비극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미국에게 한국을 구하기 위해서 오늘이나 내일 선전포고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조국 하나라면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사실 미국 국민이 공산주의 침략의 희생물이 된 모든 다른 국가들을 구하기 위한 단호한 성전(聖戰)의 시발점으로서 한국을 구제하는 결정을 하지 않는 한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미국이 한국이나 다른 곳에서 행동을 시작하면, 세계의 반공세력들은 엄청난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조만간 그들은 한국인들이 오늘 하고 있듯이 그들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 분발할 것입니다.

    나는 아주 겸허하게 미국에 촉구합니다. 도움을 갈구하는 6억 중국인들과 아시아 및 그 이외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나의 가장 절실한 호소이며, 나의 진심어린 기도입니다. 이는 한국, 중국 그리고 노예화의 위협을 받고 있는 국민들과 국가들만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미국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자유 미국, 투쟁하는 미국이 없이는 자유세계의 희망이 없습니다. 나의 기도는 미국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적시에 결정을 내리고, 그로 인해 나머지 우리 모두를 구해 주십사하는 것입니다.”

  • ▲ 망명생활 30여년간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미국땅,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이 되어 국빈방문한 이승만은 정든 하와이에 들러 친구들을 만난 뒤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1954.8.11)
    ▲ 망명생활 30여년간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미국땅,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통령이 되어 국빈방문한 이승만은 정든 하와이에 들러 친구들을 만난 뒤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1954.8.11)


    o귀국소감

    이승만은 8.13(금요일) 김포공항에서 귀국소감을 발표했다.

    “미국으로 출발할 때 나는 경제원조나 기타 물질적인 원조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내가 가졌던 가장 중요한 희망 중의 하나는 유엔군이 우리 국군과 똑같이 조치를 취하든지, 혹은 우리가 독자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게끔 우리의 정책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미 최고위층에 요구하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우리나라에 대한 원조문제와 방위문제에 관해서는 책임 있는 미국 관리, 상하원의원, 미국 국민들이 매우 공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때문에 나의 방문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믿습니다. 경제 및 국방 관련 협의가 계속 중입니다. 우리 국방부장관과 경제조정관 등이 미국의 고위 관리들과 이 문제에 대해서 회담을 갖고 있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내외는 나와 아내에게 호의와 친절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잊혀지지 않을 매우 유쾌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닉슨 부통령 내외도 큰 친절을 베풀어주었습니다. 미국 의회의원들, 특히 상원 다수당 대표 윌리엄 노울랜드, 하원의장 조셉 마틴, 포스터 덜레스 국무부 장관 등에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미국의 모든 다른 공무원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많은 미국 국민들은 어디를 가나 따뜻한 환영과 공감을 표시해주었는데, 이는 나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환대들─그들 중 일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음─은 한국 국민들과 군인들의 자유를 위한 용감하고 영웅적인 투쟁에 대한 칭찬과 격려가 분출된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승만 국빈방문의 역사적인 재조명

    이승만의 미국 국빈방문 기간 중의 발언은 6·25전쟁이 그의 사고를 어떻게 변화시켜 놓았는지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이승만은 합리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다. 심지어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압통치 아래에서 신음했을 때에도 우리의 억울함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려서 국권을 찾아야 한다는 어느 면에서 보면 이상주의자였다. 이런 면에서 그는 안중근 장군이나 무장투쟁을 통해서 국권을 회복해야한다는 애국지사들과 달랐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 있는 사실을 하나 지적하고 싶다. 1950년대 중반에 전남 장흥에 안중근 장군 사당 해동사가 건립되었다. 그곳 현판에는 ‘海東明月(해동명월)’이란 이승만의 친필이 새겨져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안중근 장군의 이토 저격과 순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후, 이승만의 마음에는 안중근 장군이 ‘우리나라의 밝은 달’로 자리 잡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무튼 이승만은 6·25전쟁을 겪고 나서는 어제의 순진한 평화주의자, 합리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북쪽의 공산정권을 반드시 힘으로 무너뜨리겠다는 반공투사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국빈방문을 통해서 미국이 더 이상의 확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휴전이 성립된 지 1년 후에야 비로소 미국 등 국제사회의 지원을 통한 북진정책을 사실상 포기했다. 

    반면에 아이젠하워와 미국 정치지도자들은 6·25전쟁의 휴전과 제네바회의 실패이후 한반도의 불안이 세계전쟁으로 비화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승만의 강경노선을 단념시키려고 했으며, 군사 및 경제원조의 확대를 통해서 그것이 가능하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 한복판에서 경제원조나 군사지원을 구걸하기는커녕, 공산주의자들과의 전쟁을 다시 시작해야한다고 촉구하자 아이젠하원 등 미국 정치지도부는 충격에 빠졌다. 이들은 이승만이 골치 아픈 정치지도자인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결코 이승만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이승만이 아이젠하워와 미국 정치지도자들에게 한국 국민의 자긍심에 관한 새로운 것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1954년 8월 2일 미국전역에 TV와 라디오로 실황 중계되는 가운데 한미재단이 주최한 만찬에서 말했다.

    “워싱턴 DC의 몇몇 미국 기자들이 내게 방미에 대해서 만족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미 당국자들과 어떤 일을 해냈고, 얼마나 받아냈으며, 고무되었는지 혹은 낙담했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나는 공적인 차원에서 그다지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말하고자합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더 많은 원조, 더 많은 자금, 기타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얻고자 하는 것이 부족하다거나, 굶어 죽겠다는 등등의 불평을 말하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이 난관에 처해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울면서 도움을 갈구하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은 눈물을 감추고 조용한 결의와 용감한 미소로 기아와 파괴를 이겨내는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구걸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구걸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가슴이 너무 벅차서 이번 미국방문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를 말할 수 없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듭니다. 우리를 구해주고, 결국은 승리하리라는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켜 준 미국 국민에게 감사합니다. 

    미국이여, 그대는 지난 며칠 동안 그대의 위대함을 내게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들이 결코 우리를 패퇴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대와 함께 서있으며, 항상 그대의 편입니다. 나의 영혼은 미국 국민의 넘치는 후의와 지지에 의해서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우리가 힘을 합하면 무적입니다. 정의라는 대의(大義)의 갑옷을 입고 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미국 국빈방문을 통하여 한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힘으로 완전히 몰아내고, 자유와 정의가 꽃피는 통일한국의 꿈을 실현하고자했던 이승만의 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서 미국과 함께 세계 최초로 공산주의자들과 피를 흘리며 싸웠고 앞으로도 계속 투쟁할 의지가 있는 민족은 다름 아닌 한국인이라는 점을 미국 정치지도자들과 국민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승만의 미국 국빈방문은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인 절묘한 국가홍보 이벤트였다.

    <끝>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원조에 관한 대한민국과 미합중국간의 합의의사록

    1954년11월17일 서울에서 서명
    1954년11월17일 발효
    1955년 8월12일 워싱턴에서 수정
    1955년 8월12일 수정발효

    대한민국과 미합중국의 공동이익은 긴밀한 협조를 계속 유지하는데 있는바 이는 상호 유익함을 입증하였으며 자유세계가 공산침략에 대하여 투쟁하며 자유로운 생존을 계속하고자 하는 결의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다음 사항을 이행할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를 그의 정책으로 삼는다.

    1. 한국은 국제연합을 통한 가능한 노력을 포함하는 국토통일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미국과 협조한다.
    2. 국제연합사령부가 대한민국의 방위를 위한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대한민국국군을 국제연합사령부의 작전지휘권 하에 둔다. 그러나 양국의 상호적 및 개별적 이익이 변경에 의하여 가장 잘 성취될 것이라고 협의 후 합의되는 경우에는 이를 변경할 수 있다.
    3. 경제적 안정에 배치하지 않고 이용할 수 있는 자원 내에서 효과적인 군사계획의 유지를 가능케 하는 부록 B에 규정된 바의 국군병력기준과 원칙을 수락한다.
    4. 투자기업의 사유제도를 계속 장려한다.
    5. 미국의 법률과 원조계획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관행에 부합하는 미국정부의 원조자금의 관리를 위한 절차에 협조한다.
    6. 부록 A에 제시된 것을 포함하여 경제계획을 유효히 실시함에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대한민국이 실현하겠다고 선언한 조건에 기하여 미합중국은 다음 사항을 이행할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를 그의 정책으로 삼는다.

    1. 1955회계년도에 총액 7억불에 달하는 계획적인 경제원조 및 직접적 군사원조로써 대한민국이 정치적, 경제적 및 군사적으로 강화되도록 원조하는 미국의 계획을 계속한다. 이 금액은 1955회계년도의 한국에 대한 원조액으로 기왕에 미국이 상상하였던 액보다 1억불 이상을 초과하는 것이다. 이 총액 중 한국민간구호계획의 이월금과 국제연합 한국재건단에 대한 미국의 거출금을 포함하는 1955회계년도의 계획적인 경제원조금액은 약2억8천만불에 달한다(1955회계년도의 실제지출은 약 2억5천만불로 예상된다).
    2. 양국정부의 적당한 군사대표들에 의하여 작성될 절차에 따라 부록 B에 약술한 바와 같이 예비군제도를 포함한 증강된 대한민국의 군비를 지원한다.
    3. 대한민국의 군비를 지원하기 위한 계획을 실시함에 있어서 대한민국의 적당한 군사대표들과 충분히 협의한다.
    4. 대한민국에 대한 도발에 의하지 않는 침공이 있을 경우에는 미국의 헌법절차에 의거하여 침략자에 대하여 그 군사력을 사용한다.
    5. 필요한 국회의 승인을 조건으로 하여 한국의 재건을 위한 경제계획을 계속 추진한다.

    1954년11월17일 대한민국 서울에

    대한민국외무부장관                       대한민국주재미합중국대사
    변 영 태                                 에리스. 오. 브릭스

    한미합의의사록부록 A
    효과적인 경제계획을 위한 조치

    대한민국은 경제계획을 효과적인 것으로 하기 위하여 다음 사항을 포함하는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1. 환율에 관하여는, 대한민국정부의 공정환율과 대충자금환율을 180대1로 하고, 한국은행을 통하여 불화를 공매함으로써 조달되는 미국군의 환화 차출금에 충당하기 위하여 공정환율과 상이한 현실적인 환율로 교환되는 불화교환에 관하여 미국이 제의한 절차에 동의하며, 일반적으로 원조물자도 유사한 환율에 의한 가격으로 한국경제에 도입함으로써 그러한 재원의 사용으로부터 한국경제와 한국예산에 대한 최대한도의 공헌을 얻도록 한다. 미국에 의한 환화차출에 관한 현존협정들의 운영은 전기한 조치가 실제에 있어서 양국정부에게 다 같이 만족하게 실시되는 한 이를 정지한다.
    2. 미국이 현물로 공여하지 않은 원조계획을 위한 물자는 어떠한 비공산주의국가에서 든지 소요의 품질의 물자를 최저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는 곳에서 구매하는데 동의 한다(이는 세계적인 경제가격에 의한 가능한 최대한의 구매를 한국에서 행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
    3. 한국자신의 보유외화의 사용을 위한 계획에 관한 적절한 정보를 관계 미국대표들에게 제공한다.
    4. 한국예산을 균형화하고 계속하여 "인프레"를 억제하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을 행한다(양국 정부의 목적하는 바는 한국예산을 "인프레"를 억제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발전시키는데 있다).

    1954년11월17일자 합의의사록에 대한 수정

    1954년11월17일에 서명된 대한민국정부와 미합중국정부간의 합의의사록 부록 A의 제1항은 1955년8월15일자로 다음과 같이 수정된다.

    대한민국정부 및 그 기관의 모든 외환거래를 위한 환율로써 1955년 8월 15일자로 대한민국에 의하여 제정될 미화 1불대 5백환의 공정환율은 한국으로 물자 및 역무를 도입하기 위하여 공여되는 미국의 원조에 대하여 다음 것을 제외하고 적용된다.

    (가) 미국원산인 석탄은 1956년6월30일에 종료될 회계연도기간 중 공정환율의 40% 이상에 해당하는 환율로 가격을 정할 수 있다.

    (나) 비료는 즉시 공정환율의 50%이상에 해당하는 환율로 가격을 정할 수 있으나 1956년1월1일 이후에는 공정환율로 인상하여야 한다.

    (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사업을 위한 투자형의 물품

    (라) 구호물자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을 위한 투자형 물품에 대하여는 합동경제위원회가 차등환율 또는 보조금의 형식을 통하여 감율을 건의하지 않는 한 공정환율로 가격을 정한다.

    공정환율은 미국군에 의한 환화구입에 적용된다.

    미합중국정부는 한국의 안정된 경제상태를 발전시키기 위한 대한민국정부의 노력에 대하여 이 목적을 위하여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의 범위 내에서 협조한다. 이 점에 관하여 양국정부는 신속한 행동에 의하여 원조계획을 조속히 완성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목적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경주한다.

    1954년11월17일자의 합의의사록 부록 A에 대한 이 개정의 효력발생일자 이전에 존재하였던 미국에 의한 환화취득에 관한 협정들은 원합의의사록 부록 A의 제1항에서 원래 승인하였던 협정을 포함하여 전기한 조치가 실제에 있어서 양국정부에게 다 같이 만족하게 실시되는 한 이를 정지한다.

    1955년8월12일 미국 워싱턴에서

    대한민국정부를 위하여:                           미합중국정부를 위하여:
    양 유 찬                                        월터 에스 로버트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