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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가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가 야권단일후보 선출 경선에서 저지른 여론조사 조작으로 4·11 총선을 앞둔 야권은 찬물을 끼얹은 분위기다.
정치권이 요동치는 것은 물론 이를 지켜보는 유권자들의 실망감은 극에 달하고 있다. 여론조사를 조작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보좌관이 한 일이며 경선결과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변명한 이 공동대표의 ‘표리부동’을 비꼬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고 있다.
나아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야권연대 과정에서 불만을 참아왔던 민주통합당에서는 통합진보당과의 동행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분위기다. 그동안 총선 승리와 정권교체에 필수라며 야권연대를 강행했던 한명숙 민주통합당 대표도 더 이상 반발 기류를 무마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렀다는 관측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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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2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야권단일후보를 위한 관악을 경선과 관련해 긴급 입장 발표를 끝마치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뉴시스
◆ “문자 200명 불과…” 큰 영향 없었다. 죽어도 사퇴 못해!
여론조사 조작 의혹이 보도된 이후 이 공동대표는 스스로 “별일 아니다. 승패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식의 ‘막말’로 더 큰 논란을 좌초했다.
“문자는 200여명 정도에게 보낸 것이라서…”
이 공동대표는 21일 오전 MBC ‘손석희의시선집중’에 출연해 이 같이 말하며 ‘사안의 중대성으로 볼 때 사퇴하는 게 맞다’는 의견에 대해 “그럴 수 없다”고 일축했다. 전날인 20일 의혹 보도 직후에는 “여론조사 변동에 영향을 준거라 확신할 수 없지만 김희철 후보가 원한다면 재경선을 받아들이겠다”고도 했다. 마치 선심 쓰는 듯 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라디오에서 “전체 표본이 1,200명인데 200명이 적은 숫자인가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는 진행자의 질문에, 전화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유권자의 수가 최대 12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200명이란 숫자가) 전체적으로는 적다”고 답했다.
손 교수는 “전화를 받아서 끝까지 응답한 사람이 몇 명이냐 하는 것을 표본 모수로 잡으면 지금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결과가 또 나오기 때문에…”라고 반박했지만, 이 공동대표는 끝까지 재경선만을 고집했다.
‘재경선’을 거부하며 사퇴를 촉구하고 있는 민주통합당 김희철 의원에 대해서는 “김희철 의원 쪽에서 이 문제가 불거지기 전부터 경선 불복을 선언한 상태였다”며 “이는 경선 결과에 대한 불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는 것이 기본 문제”라고 말을 돌렸다.
또 “(야권단일후보 경선에서)통합진보당 후보가 적은 표차로 탈락한 곳이 몇 군데 더 있지만 그런 곳에서 통합진보당 후보들이 이의를 제기한 바가 없다”는 엉뚱한 말도 이어갔다.
이 공동대표는 이날 오전 트위터를 통해서도 “좋지 못한 소식 죄송합니다. 책임진다는 것, 고심했습니다. 완전무결 순백으로 살고 싶은 생각 왜 없겠어요. 사퇴, 가장 편한 길입니다. 그러나 상처 입더라도 일어서려 합니다. 야권연대 완성되고 승리하도록 헌신해 용서 구하겠습니다”라며 사퇴 의사가 없음을 강조했다.
◆ 여론조사 조작, 정말 영향 없었나? 그럴리가…
‘여론조사 조작, 경선 결과에 큰 영향 미치지 못했다’는 이정희 공동대표의 주장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 공동대표가 나선 관악 을 야권단일후보 경선은 지난 17~18일(토·일) 이틀간 집전화 여론조사를 통해 진행됐다. 여론조사전문업체 2곳에서 각각 지역구 유권자 600명을 상대로 19~39세 276명, 40~59세 215명, 60세 이상 109명씩 할당해 지지 후보를 물었다. 응답방식은 면접원이 직접 전화를 걸어 물어보는 RDD(임의 전화 걸기) 방식과, 사전에 녹음된 질문에 응답자가 버튼을 눌러 대답하는 ARS(전화 자동응답) 방식이었다.
이 공동대표 측이 조작한 부분은 ARS 쪽이었다. 사람과 사람이 통화를 하는 RDD 방식은 나이를 속이기 어렵지만, 기계음을 듣고 전화 버튼을 누르는 ARS는 쉽게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했다.
이 공동대표는 “적은 수치”라고 했지만 양 측이 얻은 지지율의 변동을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RDD조사에서는 김희철 의원이 50%로 이정희 공동대표(49%)를 근소한 차로 따돌렸지만, ARS조사는 김희철 42%, 이정희 57%로 큰 차이로 벌어졌다.
특히 오전부터 투표를 독려한 60대 이상 연령대에서 이 공동대표는 RDD 방식에서는 23%를 얻은 반면 ARS에서는 무려 34%를 얻었다. 문자 메시지 독려가 경선 결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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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터넷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개된 이정희 공동대표의 조영래 보좌관이 보낸 문자메시지 ⓒ 캡쳐화면
더 큰 문제는 이 공동대표 측이 여론조사 진행 과정을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조영래 보좌관이 여론조사가 시작된 지 50분 만인 17일 오전 10시49분 “ARS 60대는 끝났습니다. 전화 오면 50대로”와 11시22분 “지금 ARS 60대로 응답하면 전부 버려짐. 다른 나이대로 답변해야 함”는 식의 확신인 담긴 문자메시지를 보면 어떻게 시간대별 조사상황을 알았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 과정에서 누군가 이 대표 측에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알려줬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이 공동대표 측은 “전화조사 당시 고연령대부터 할당 몫이 채워졌다는 안내가 나왔기 때문에 그걸 듣고 당원들에게 알린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다.
◆ 민주통합 불만 폭발, 야권연대 전체 ‘휘청’
이정희 공동대표를 비롯한 통합진보당측의 뻔뻔한 변명에 민주통합당은 그동안 참고 참았던 불만을 폭발시키고 있다.
야권연대를 무기로 끝없이 양보만을 강요했던 통합진보당에 쌓인 것(?)이 많았던 터였다.
박영선 최고위원은 <연합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이 대표도 억울한 부분이 있겠지만 큰 정치인이 되려면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며 후보직 사퇴를 압박했다.
김유정 민주통합당 대변인도 브리핑을 통해 “통합진보당과 여론조사 기관 등은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며 이 공동대표의 사퇴를 촉구했다.
김 대변인은 “야권연대 후보 단일화 경선 과정에서 불거진 사태는 결코 있어서는 안될 충격적인 사태”라며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브리핑 직후 그는 “(관악을에서) 재경선을 하자는 것인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재경선은 무슨! 알아서 해석하라”며 신경질적인 답변으로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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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김희철 민주통합당 의원이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야권단일화후보 경선 조작사건 의혹과 관련해 이 공동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뉴시스
다만 김 대변인은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고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한 야권연대는 유효하지만”이라는 단서는 분명히 했다.
당내에 일고 있는 야권연대 무용론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민주통합당 내부에는 통합진보당과의 결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통합과정에서 양보한 지역구가 너무 많은데다, 경선에서도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둬 피해가 심각하다는 의견이다. 자칫 이번 여론조사 조작 논란이 민주통합당까지 옮겨 붙을까 하는 우려도 존재한다.
민주통합당 후보가 패배한 수도권 일부 지역에서는 통합진보당 후보 지원에 나서지 않겠다는 여론도 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통합당 한 중진의원은 “정권 교체라는 미명하에 야권연대에 너무 많은 피해를 보고 있다. 이는 양보가 아닌 일방적인 피해다.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요구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방법으로 이를 이루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일침을 놨다.
◆ 남 티끌에는 ‘죽일 듯’ 하더니…
“재경선이 아니라 이정희가 사퇴했다면 난 무식한 이정희지만, 순수성만은 믿어줬을것 같다.” - 아이디 이상윤
이번 여론조사 조작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에는 이정희 공동대표가 그동안 해왔던 ‘깨끗한 척’에 대한 실망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해 10.26 서울시장 재보선에서 터진 디도스 사건에 대해 “한나라당 최구식 의원 비서가 혼자했을리 없다”며 정권 개입 의혹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었다.
“오싹한 기분. 재집권 위해 무엇도 서슴지 않고 돈 쏟아 붓는 사람들이었어. 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기대해선 안 돼”라며 정치권 전체를 '나쁜 집단'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본인이 연루된 이번 여론조사 조작 사건에 대해서는 “(보좌관의)과욕으로 일어난 일”이라며 자신의 연루 의혹을 일축했다.
‘표리부동’, ‘내가 하면 스캔들 네가 하면 로맨스냐’는 비아냥거리는 조소가 나올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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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여론조사 조작 기사에 달린 댓글들 ⓒ 캡쳐화면
자신만은 깨끗한 척 틈날 때마다 정치 개혁을 강조하며 깨끗한 이미지를 구축한 것도 사실이다. “2012년은 무능하고 부패한 구태정치 세력이 몰락하고 참신하고 유능한 진보정치 세력이 한국 사회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그의 말에서 희망을 봤던 유권자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큰 실망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유권자들이 “공당의 대표가 부정선거를 스스로 시인했음에도 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재경선을 운운한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는 김희철 민주통합당 의원의 주장에 지지를 보낼지 아니면 “정권교체를 위해 이번만 봐달라”고 감정에 호소하는 이 공동대표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