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 없는 발전은 오래가지 못한다.

  • 문(文)의 역사, 무(武)의 역사
     
    초중고는 물론 대학에서 가르치는 우리나라 역사교과서 어디에도 무예에 대한 언급이 없다. 임란 병란 두 전란을 연거푸 겪으면서 조선왕조가 국책사업으로 2백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완성시킨 국방무예 십팔기(十八技)에 대해 단 한 줄의 기술조차 없고, 겨우 왜군의 조총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산천이 유린당했다고만 한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신라와 관련된 무형의 문화유산으로는 처용무와 본국검이 전부이다. 하지만 처용무는 알아도 본국검의 연기에 대해선 아는 이가 별로 없다.
     
    제 나라에 국기(國技)가 있었는지, 언제 누가 왜 만들었는지, 어떻게 없어졌는지 우리의 역사는 알지 못한다. 해서 국사책을 펼치기만 하면 졸리는 이유도 모른 채, 남의 나라 전쟁사나 무기, 무예에 대해선 경외감으로 입을 다물 줄 모른다. 하기야 전쟁이나 난(亂)을 역사의 동력으로 보지 못하고 오직 역사서를 더럽히는 치욕스런 오점으로 여기는, 평화를 사랑하는 오매불망 고고한 선비의 나라에서 웬 뚱딴지같은 무예 타령이냐 할 것이다.
     
    그러니 국사 교육 소홀 내지는 각종 시험에서 국사 과목 배제를 두고 갑론을박한다지만, 기실 지금과 같은 맥 빠지는 국사 교육이라면 차라리 안 가르치는 게 백 번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무지 대한민국 국사교과서에선 이 민족의 역동성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고작 한다는 말이 이미 오래 전부터 남의 땅, 옛 고구려의 기상이 어쩌고저쩌고. 도대체 언제까지 고구려 타령이나 하고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현대 한국인들의 무예(무술, 무도) 상식이라고는 겨우 60년대 후반부터 불기 시작한 중국 무협지, 일본 사무라이 소설, 영화, 만화 붐을 통해서였다. 그러다 보니 무예인 자신들부터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더한 편협하고 왜곡된 무예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 그런 허황된 오락물을 보고 호협심에서 입예(入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밥벌이 도구로 삼았다. 여기서부터 한국현대무예사의 상식을 초월하는 비약적 진화(?)가 시작된다.
     
    무지가 허풍으로, 허풍이 전설로, 전설이 역사로 둔갑
     
    부끄러운 일이지만, 상당수의 현대무예계의 원로들, 그리고 무슨 건강수양법을 창시했다는 도주니 종사니 대종사니 하는 등등 온갖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사람들의 출신이나 학력을 알고 보면 차마 부끄러워 내놓고 밝힐 만한 것이 못된다. 절대무공을 지녔다는 둥, 신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둥, 그 스승의 스승은 몇백 살을 살았다는 둥, 신비화된 창시자나 무예고수일수록 오히려 그만큼 더 가식과 허풍으로 위장된 무예계의 반풍수라고 보면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 한 마디로, 무식하니까 그만큼 용감할 수 있었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어차피 제대로 투자하고 땀 흘려 공부한 것도 아니니 밑져야 본전인데 아무렴 어떠랴 하는 돌팔이, 장터에서 약 팔던 차력사, 무작정 상경한 시골 청년, 달리 하릴없어 동네 도장이나 들락거리던 룸펜, 개중에서도 배짱이 없어 그나마 깡패도 못 된 삼류 건달 출신들이 그 대부분이었다. 필자가 무예에 입문한 지 40여 년, 보고 들은 온갖 얘기들 대부분이 민망해서 차마 이런 지면에 올릴 수도 없겠기에 하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무예지도자이다 보니, 고작 자기 자랑한다는 것이 무협지나 무협만화, 전설의 고향 수준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서 역사니 고증이니 하는 문자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일 뿐, 도무지 무예인들 스스로가 비합리적이고 상식을 벗어난 얘기만 해대니 역사학계가 관심 가져줄 리 없지 않은가?
     
    무예인들의 장점이자 단점은 대체로 성격이나 행동거지가 단순하다는 거다. 덕분에 처음 몸담은 무예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다. 맹목적이어서 스승이나 사범, 관장들의 과장되고 허황된 영웅전 신선전을 곧이곧대로 잘 믿는다. 그렇게 한번 세뇌되면 영영 신자가 되어 교주처럼 떠받들게 되어 있다. 바로 그 맛에 엉덩이에 뿔난 반풍수들이 희한한 무예를 만들어 창시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 밑에 제자들은 영원히 그 스승의 말이나 기예에 대해 의심을 가져 볼 꿈조차 꾸지 못한 채 평생을 충직하게 따르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앵벌이가 되어 건강상품 팔아 바치느라 청춘을 다 허비하기도 한다.
     
    해서 제 스승이 천하제일 고수이고, 그 비전무예야말로 천하무적이며, 따라서 자신이 그 천하무적의 절기를 익힌 수제자가 되어 무협지 주인공 같은 공명심에 불타게 된다. 동양판 소영웅 돈키호테인 것이다. 이 빛나는 21세기에 멀쩡한 인간들이 무협으로 소꿉놀이를 하고 있는 게다. 인간 본성인 약함에 대한 콤플렉스, 강함에 대한 욕구, 강한 척하고픈 과시가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게다. 의심부재의 단순무지가 이성적 사고를 막아 광신도 아니 맹신도로 만드는 것이다. 해서 이 땅에서 진즉에 용도 폐기된 전통무예산업이 영성산업과 함께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식민무예와 식민의식
     
    물론 현대인들이 즐기는 대부분의 체육, 스포츠가 올림픽 종목들로 주를 이루고 있고, 그것들이 모두 고대무예에서 나온 것임은 다 아는 사실. 그러니 동양이라고 전통무예를 응용한 새로운 스포츠를 만들어내지 말란 법은 없다. 이미 일본이 유도를, 한국이 태권도를, 그리고 중국이 우슈를 그렇게 해서 만들었다. 다만 그 과정에서 그 연원을 제대로 떳떳하게 밝혔느냐, 감추거나 꾸몄느냐가 문제가 된다.
     
    태권도가 지난날 한민족 고유의 무예라고 억지로 주장하지 않았던들 이제 와서 그 역사를 정정해야 하는 낯부끄러운 일은 없었을 것이다. 태권도나 검도와 같은 제도권 무예체육이 그러할진대, 후발 창시전통무예들은 아예 태어날 때부터 비장하고 신비스럽기 짝이 없는 족보를 달고 나올 것은 당연지사라 하겠다. 검증, 비판, 질정을 거부하는 재야 학문들이 그러하듯이. 애매하면 애매한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 역사에 대한 바른 태도라는 말에 콧방귀를 뀔 뿐이다. 그런 것을 두고 사이비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양궁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휩쓸고 있지만, 누구도 동이족 주몽의 활이 영국으로 전해져서 로빈 훗과 같은 영웅을 만들어내고 올림픽 종목에 올라 다시 한국에 전해졌으니, 양궁은 본래 우리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전 세계의 활쏘기는 모두 동이족이 전해준 것이라고 주장했다간 세계인의 비웃음을 살 것은 빤한 일. 그렇지만 우리에겐 따로 국궁이 있지 않은가. 하여 비록 양궁을 당길망정 동이(東夷)의 정신, 호연지기의 민족혼을 느끼고 기르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맹목적인 동화가 아니고 남의 것을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승화했다고 하는 것이다. 십팔기가 그렇게 만들어졌듯이 말이다. 자기 것을 잃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배당한 자의 자기모순
     
    헌데 유독 일제식민시대 들어온 일본 호신술들에 대해서만은 웃지 못할 황당한 역사 기술로 도배를 해왔다. 한 마디로 왜놈의 것이어서 쪽팔렸던 게다. 그나마 해방이 되었으니 그 같은 억지 주장이라도 하게 된 것이지, 만약 해방되지 못했더라면 아예 그런 기술조차 필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연원이라도 원래 한국의 것이었다고 조작하고 우겨서야 겨우 일본에 당했던 수모에 대한 변명, 약간의 앙갚음으로 위안을 대신할 수 있었던 게다. 원수의 나라 일본의 것이니 아무렇게나 짓밟고 뭉개고 조작해도 괜찮다는 복수 내지는 방관의 심리가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게다.
     
    그러니 변명과 거짓, 비굴함이 무인(武人)의 최대 수치임을 알 턱이 없었다. 기예는 따라 흉내내되 그 정신인 무혼(武魂)은 싫었던 게다. 그게 뭔지도 몰랐던 게다. 그러면서도 한국을 두 번이나 침략하고 지배했으니 무예만은 일본 것이 우리 것에 비해 훨씬 강할 것이라는 단순무지한 생각에 이율배반적으로 왜놈의 것을 흠모하게 된 게다. 원수의 것이니 내다버려야 마땅하지만 이미 땀 흘려 몸에 밴 터여서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게다. 이를 두고 ‘역사의 강간, 그리고 그 흔적’이라 하는 게다. 해방 후 친일청산을 못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 ▲ 국립국악원에서 공연한 무예창작극 <창과 칼의 노래> 의 한 장면ⓒ
    ▲ 국립국악원에서 공연한 무예창작극 <창과 칼의 노래> 의 한 장면ⓒ
    덕분에 자신의 것이 있는지 알아볼 필요도 없고, 설사 있다 한들 일본 것보다 형편없이 약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만약 조선의 무예가 더 강했다면 일본한테 졌을 리가 없지 않았겠느냐는 단순무지한 논리, 나아가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약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자기비하 피지배식민근성이 그렇게 뿌리를 내린 것이다. 강한 것만이 최고의 선(善), 오직 일등, 무조건 최고만을 지향하는 심성도 여기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을사조약으로 조선군을 무장해제하면서 십팔기는 낡고 형편없는 것이니 미련없이 내다 버리고, 대신 일본의 신식 무도를 기꺼이 배웠던 것이다. 해서 군, 관, 경, 학교에 정식으로 유도와 검도가 보급되었으며, 이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마치 검도나 유도로써 일본을 제압하여 기어코 치욕의 역사에 대한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듯이 말이다. 이게 가상한 용기인가, 아니면 콤플렉스에 의한 자기모순인가?
     
    피지배식민근성에서 나온 뻔뻔함을 당당함인 양 착각
     
    비록 일본에서 들어온 체육무도에서 벌어진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이를 두고 보는  학계, 심지어 일반인들의 인식 또한 무예인(무도인)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한국인의 이런 심리상태를 뭐라 표현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만약 지난날 역사적 굴절로 인해 십팔기가 없어지지(절로 없어진 것인지 일제에 의해 말살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않았더라면, 식민통치정책에 의해 강제로 이 땅에 일본무도류가 이식되었다 하더라도, 우리 것의 바탕 위에 당당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다.
     
    더불어 구차하게 그 역사적 연원을 감추거나, 조작하거나, 억지로 둘러대지 않고, 다른 서양에서 들어온 온갖 체육, 스포츠들처럼 떳떳하게 즐겼을 것이다. 축구, 야구, 펜싱을 한다고 특별히 자랑스러울 것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것처럼, 중국무술이라 자랑스럽고 일본무술이라 쪽팔려 할 필요 없었다는 말이다. 올림픽의 수많은 스포츠 종목들이 있지만 일일이 그 역사와 종주국을 다 따지지 않고도 마냥 즐기고 있지 않은가. 물론 어느 것도 그 연원을 속이지는 않는다. 시장에서 저질 고춧가루를 물들여 상품으로 속이거나, 수입산을 국산으로 속이는 것이 문제이지, 저질을 저질로, 중국산을 중국산으로 파는 데야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비록 조선의 선비들이 사대하며 무(武)를 경시했다고는 하나, 그 역사적 사실을 구차하게 감추거나 조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예도보통지》 편집책임자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박제가, 이덕무였다. 이들이 통지를 만들 적에는 한중일 3국의 문헌 145종을 참고하였지만 단 한번도 쪽팔린다 하여 그 연원이나 출처를 감추거나 꾸민 일이 없다. 중국의 모원의조차도 자신의 나라에서 검법을 구하지 못해 변방의 소국 조선의 것을 실으면서 한탄스러워하고 자존심 상해했지만, 분명하게 조선에서 구했음을 밝히고, 이름까지 <조선세법>이라 명기하였다.
     
    아무튼 일본의 호신술이 이 땅에 심어져 반세기를 훌쩍 넘기고 있다. 다행이 가라테(空手道)는 일찍이 태권도로 개명까지 하고 한국화해서 세계인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발전했다. 다만 그간 그 연원을 감추고 꾸미는 바람에 국민이나 세계인들에게 당당하지 못했지만, 근자에 와서 그 잘못된 역사 기술을 반성하고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움직임이 있어 다행이다. 무예의 속성상 그 실기든 역사든 처음 배울 때 제대로 배우고 정직하게 연원을 밝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잘못된 동작, 잘못된 역사, 잘못된 선입견을 고쳐서 바로잡는 것은 몇 배나 힘들고 어렵다. 자기 부정이란 여간한 용기가 아니고선 못하는 일이다.
     
    문화란 향유하는 자의 것
     
    더하여 무예인들의 과도한 국수주의적인 사고도 버렸으면 싶다. 반드시 개명을 해야 하고, 반드시 우리 전통 혹은 고유한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문화란 처음부터 고유한 것이란 없다. 서로 주고받으며 습합, 소멸, 발전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제발이지 삼국시대 혹은 신라 때 일본에 전해준 것을 도로 찾아왔으니 원래는 우리 것이었다는 문화적 몰상식에서 나온 궁색한 변명은 그만했으면 한다. 그런 논리라면 사해가 다 동포인데 네것내것이 어디 있나? 일본의 왜검, 교전, 쌍수도를 받아들여 십팔기에 편입시키면서도 조상들은 그런 궁색한 변명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태권도가 전 세계적으로 보급되어 있으며, 심지어 대만과 중국에서도 태권도를 스포츠로 받아들여 즐기는 중이다. 하지만 그 어느 나라도 태권도가 원래 자기네 것이었다고 우기지 않는다. 태권도가 한국에서 만들어진 운동경기임에 이의를 달지 않는다. 가령 중국도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이 전해준 <권법>이 태권도는 물론 택견의 뿌리이니 둘 다 원래 중국의 것이었다고 하지 않는다. 일본 역시 태권도가 가라테를 변형시킨 것이니 태권도는 일본의 것이었다고 애써 주장하지 않는다. 한문(漢文)으로 쓰인 한시(漢詩)는 모두 중국 것이라 주장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문화를 바라보는 인식에 균형이 잡혀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게다.
     
    단순무지 몽매함을 추구하는 것이 무예가 아니지 않은가? 무예는 밝은 지혜를 추구하는 과학이지 않은가? 무예계가 신성하고 무예인이 반드시 존경받아야 할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용기 있고 당당하다는 소리는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정직해야 한다. 요즘은 모른다 하여 무식하다 하지 않는다. 억지 부리는 사람더러 무식하다고 한다. 무예인들이 더 이상 무식하단 소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 쉽게 말해서 원산지 속이지 말고, 부정 색소 사용치 말고, 저울 속이지 말고, 과대광고 과대포장하지 말고 당당하게 장사하자는 거다.
     
    강간의 역사, 그 흔적
     
    종주국? 자기 문화에 대한 우월감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민족일수록 그만큼의 열등감을 동시에 지닌다. 이는 식민 지배를 당한 민족에게서 보이는 공통된 현상이다.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유형무형의 그 어느 것도 열등하거나 우월한 것 없다는 문화인류학의 보편적 상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서 뭐든지 습관적으로 편 가르려 들고, 차별하길 좋아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차별당하면 절대 못 참는 이중성을 지닌다. 그러니 편 가르기가 가장 치사한 차별임을 알 턱이 없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기 학대, 자기 파괴임을 깨닫지 못한다. 때문에 한번 식민 지배를 당한 민족은 끊임없이 분열하게 마련이다.
     
    또한 이들은 힘의 논리에 무조건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힘에 대한 부정 혹은 항거가 곧 정의인 양 착각하게 된다. 그 힘이 강대국, 권력, 자본, 언론, 권위 등등 어디에서 나온 것이든 일단 부정하고 본다. 심지어 도움을 받을수록 그 때문에 더욱 자존심 상해한다. 강자니까 도와 줄 수 있는 것, 아무렴 약자가 도와주겠는가? 그런 당연한 이치에도 불구하고 강자에 대한 혐오감과 의심, 열등감, 수치심에서 그러한 이중적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대항했다는 이유만으로 북한의 독재정권을 두둔하기도 한다. 주체사상 어쩌구 하지만 결국 알량한 자존심 하나 지켰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게 이 나라 종북좌파의 본색이다. 모두 식민지배의 후유증이 만들어낸 변태적 현상이다.
     
    식민 지배의 첫 작업인 무장해제가 그저 단순히 저항을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인 줄로만 아는 단순무지한 학자들. 하긴 언제 우리가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지배해 본 적이 있었어야지. 한민족의 사고인식엔 부정적 피해의식만 있고 공격, 침략, 지배에 관한 긍정적 의식(학습)이 없어 지배자(힘, 강자)의 논리를 이해하지도 못할 뿐더러 무조건 반감부터 드러낸다. 해서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는 적으로 간주하여 경계하고 기어이 이기려 들며, 반드시 금메달을 따야 직성이 풀리는 버릇을 지닌다. 그러니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련 없이 내다버리든지 아니면 조작을 해서라도 우월하다고 우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질이 강하다. 결국 스스로 조잡해지고 비굴해져 그 열등감의 굴레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한다.
     
    지고는 못 사는 민족? 한국인들의 지나친 교육열도 이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조금만 자존심 상하면 반드시 앙갚음을 하고야 말겠다는 한(恨) 많은 민족? 반대로 조금만 잘해 주면 간 쓸개 다 내놓는 정(情) 많은 민족? 풀지 못한 한(恨) 때문에 매사에 감정을 앞세우다 매번 또 당하는 민족. 그건 곧 식민 지배, 즉 ‘강간당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는 의미다. 아마도 이 콤플렉스로 인한 반작용이 첨단의 21세기에 온갖 전통무예가 이 땅에서 각광받는 이유일 것이다.
     
    무혼(武魂)으로 식민 콤플렉스 벗어던져야
     
    역사의 단절은 곧 무예사의 단절. ‘장군의 아들’만도 못한 한국현대전통무예사. 그런 뒷골목 주먹다짐이 세월을 타고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깡패들의 무용담보다 못한 허풍과 구라로 무예사를 기술할 수밖에 없을 지경이다. 이게 모두 역사에서 무예를 잃어버린 탓이다. 문(文)과 무(武)는 역사를 이끌어가는 수레의 두 바퀴. 무(武)가 빠진 역사, 절름발이 역사가 이런 기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난 수 세기를 생존에 급급한 나머지 한쪽 바퀴가 떨어져나간 채로 앞만 보고 달려온 게다.
     
    역사를 모르는, 역사를 가볍게 아는, 역사를 멋대로 꾸미는, 해서 결과적으로 역사를 조롱하는 전통무예? 기실 ‘전통’이란 역사를 존중한다는 의미가 아닌가? 헌데 그 ‘전통’이란 단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통무예. 이 무슨 비극적 역설인가? 역사를 지키는 것이 무예의 의무이자 존재 이유라는 건 만고의 진리. 제발이지 무예인들부터 역사를 바로 알고, 역사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역사가 무예를 안아줄 것 아닌가?
     
    작금의 우리 사회는 정직함과 당당함이 이 시대 최고의 무기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게 부족해서 대한민국이 선진국 진입문턱에서 헤매는 것 아닌가. 이젠 이 지긋지긋한 구태, 역사에 대한 열등감을 ‘툭’하고 털어내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 바탕 위에 뿌리 깊은 성장 발전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예가 더 이상 체육관 지붕 아래에서 땀 냄새만으로 얘기될 순 없다. 전통이란 수식어로 박제가 되어서도 안 된다. 전통무예가 더 이상 역사와 문화의 변방이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살아 용틀임하며 문화를 선도해 나가는 첨병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그 외연을 넓혀 역사적, 문화적, 과학적, 철학적 담론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잃어버린 역사(歷史), 잊어버린 무혼(武魂), 내다버린 무예(武藝)에 대한 반성적 성찰. 정직과 용기. 포용과 배려. 신(新)무협시대는 그렇게 열어가야 한다. 통일의 시대는 그렇게 맞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