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회 이승만 포럼/ 발표 요지>

    평양의 소련 군정: 북한 김일성 정권은 어떻게 탄생했나
                            김국후 (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비록] 평양의 소련군정 /도서출판 한울, 2008>저자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해방공간 3년간 미군정이 다스리던 남한에 대한민국이라는 단독정부가 수립된 과정은 이제 거의 밝혀졌다. 그러나 소련군정이 다스리던 북한정권의 창설과정은 지금까지 어둠의 베일 속에 가려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먼저 북한정권 창설의 주역이 소련이어서 해방공간 관련 문서들이 모스크바의 크렘린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방성, 외무성 등의 비밀문서 보관소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그 문서들은 우리 연구자들의 손에 미치지 못했다.  또 다른 이유는 남한 사람들보다는 소련의 비밀문서 등에 접근하기가 쉬었던 북한의 경우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주체적 건국신화를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굳이 소련의 시나리오대로 북한정권이 창성된 과정을 들춰낼 필요가 없었다는데 있다.

  • ▲ 해방전부터 한반도의 '위성국' 시나리오 <민주기지>구축 전략을 지령 내렸던 소련의 스탈린.(자료사진)ⓒ
    ▲ 해방전부터 한반도의 '위성국' 시나리오 <민주기지>구축 전략을 지령 내렸던 소련의 스탈린.(자료사진)ⓒ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면서부터 그동안 역사의 뒤안길에서 잠자던 소련군정의 일부 비밀문서들이 공개되기 시작하면서 해방공간의 북한지역 자락이 조명되고 있다. 필자는 모스크바에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방성, 외무성 등 비밀문서 보관소에서 북한주둔 소련군정의 문서들과 자료들을 발로 발굴했다. 또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북한정권 창설 의 주역을 맡았던 소련군 고위 장성들과 권력의 암투 과정에서 밀려나 타국으로 망명해야했던 북한의 전직 고위 장성과 장․차관들을 만나 북한정권 창출과 소련의 북한 소비에트화 과정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이들 비밀문서들과 증언들을 통해 붉은 군대 소련군은 어떤 계획을 갖고 대일전 참여로 북한에 진주했고, 3년여 동안 북한 주둔하면서 추진한 정책들은 무엇인가. 특히 소련은 왜 33세의 소련군 대위 김일성에게 한반도 반쪽을 맡겼는지 등 구멍 뚫린 우리 현대사의 베일 벗기기에 집중했다.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북한 역사를 보자.

    소련군, 평양 입성은 ‘식은 죽 먹기’
    1945년 8월9일 개시한 소련의 대일전은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최단기간에 벌인 전쟁이었다. 소련군은 전쟁 초기 웅기, 나진, 청진 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 뿐 나머지 북한 지역의 점령은 ‘식은 죽 먹기’였다. 특히 소련군은 일본군의 저항 없이 평양에 입성했다. 일본군은 제대로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무기를 반납하거나 무장해제를 당해 모든 지휘관이 포로 신세가 된다.
    소련군의 대일전 성적표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소련 국방성 비밀문서에 따르면 1945년 8월31일 현재 일본군 전사자(장교와 병사)는 모두 1만2295명, 포로병 13만8687명. 이에 반해 소련군 사망자는 1446명(장교143명, 하사관 527명, 병사 776명)으로 일본군 전사자의 12.9%밖에 되지 않는다. 소련군은 평양수비대 사령관 다케나토 중장 등 북한지역 주둔 일본군 장성 27명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들 고위 장성들을 포함한 일본군 포로병들은 대부분 시베리아 등지로 압송돼 소련의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받았거나 실형을 받아 형무소에 감금되거나 집단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일부만 일본으로 송환되고 대부분은 그곳에서 최후를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련군,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1945년 8월26일 밤. 평양인민위원회 위원장 조만식(曺晩植)은 김용범, 박정애, 최아립 등을 대동하고 이날 소련군 장성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에 도착한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의 숙소로 찾아가 회담을 했다. 통역은 박정애가 맡았다. 김용범의 부인 박정애는 유창한 소련말을 구사하며 오래전부터 지하에서 소련공산당 지령에 따라 조선 정세를 소련 정보기관에 보고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감옥생활을 하다 해방 후 풀려난 소련공산당의 ‘조선 내 핵심 세포’였다.

  • ▲ 소련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한 조만식.(자료사진)ⓒ
    ▲ 소련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한 조만식.(자료사진)ⓒ

    조만식은 치스차코프에게 “소련군대가 조선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라고 따졌다. 며칠 후 평양에 도착한 제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에게 “기본 정치노선은 민주주의여야 하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제도를 채택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인민을 깨우쳐야 하고, 피압박 민족의 한을 자주독립국가로 풀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 종교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문한다.

    ▶평양에 도착한 제25군 지휘부는 참모장 펜코프스키 중장을 중심으로 일본이 사용했던 평안남도 도청에 군정사령부를, 각·도·시·군에 위수사령부를 설치한다. 평양, 함흥, 신의주 등 주요 도시에는 대좌(대령)를, 중·소도시에는 중좌와 소좌를 위수사령관으로 배치했다. 지역 위수사령부에는 군사부 보안부 교육부, 산업부, 사회노동부, 농업부 등을 두었다. 지역사령관과 부장은 소련군 장교가 맡지만 부사령관은 88정찰여단 출신 조선인 ‘빨치산’들이, 각 부 차장은 재소 고려인들이 각각 맡는다. 결정 명령 지휘 책임은 소련군 장교가, 공산당 조직과 주민들의 동향 파악은 88여단의 빨치산이, 군과 주민 간 가교와 통역은 고려인이 맡는 삼각 구조였다. 지역위수사령부는 도·시·군 인민위원회와 조선공산당 시·도·군당과 행정 사법 경찰권의 지휘 감독권을 쥔 무소불위의 기관이었다.
    이 같은 소련군정과 지역위수사령부 설치 계획은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한 후 세운 것이 아니고, 대일전 개시 1개월 전인 1945년 7월6일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소련군 극동 총사령부(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가 사전에 준비해온 것이다. 이 계획은 제 88여단의 대대장 김일성 대위를 비롯, 빨치산 출신 조선 병사들을 북한 주둔 각 지역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으로 활용하기로 돼 있다. 제1대대장 대위 김일성을 평양시 부사령관, 제2정치부대장 대위 김책을 함흥시 부사령관, 제2 대대장 강건을 청진시 부사령관으로 각각 임명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소련 국방성의 이 비밀문건은 소련군정을 풀어갈 주목할 만한 대목들이 담겼다. 먼저, 지금까지의 역사와 달리 소련군의 대일 전투 지역이 북한 지역으로 국한돼 있음을 보여준다. 또 중요한 점은 소련군은 북한 지역에서 일본군을 몰아내 해방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점령군으로 남아 김일성을 비롯해 88정찰여단 소속 항일 빨치산 출신 조선인을 적극 활용해 이 지역을 소련의 위성국이자 ‘극동의 민주기지’로 건설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쉽게 읽을 수 있다. 특히 이 비밀문서는 뒤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1942년 6월 스탈린의 ‘조선의 정치 군사지도자 양성을 위한 88정찰여단 창설’지령과 1945년 9월 ‘북한에 민주정권을 창설하라’는 비밀지령과 그 맥을 같이하는 대목이다.  

    소련군 88여단, 위성국 조선의 정치 군사 전문가 양성소 
    1945년 8월24일. 소련군 제88정찰여단장 대좌 주보중은 직속상관 소련 극동군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장문의 보고서를 보낸다. 보고서는 “스탈린 대원수의 특별지령에 따라 창설된 제88정찰여단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 빨치산 부대들의 모범을 본 받아 중국과 조선을 강점하고 있는 일제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이들 지역에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고 정치 군사전문가를 양성한다.”고 창설 목적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될 매우 의미 있는 대목이다. 33세의 소련군 대위 김일성이 북한 지도자가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스탈린이 치밀하게 구상한 사전 계획에 따라 창설된 88정찰여단에서 장차 한반도(북한)의 정치·군사지도자로 김일성 등을 훈련시켰음이 이 문건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또 이 보고서는 1945년 8월9일 소련이 일제에 선전포고를 한 뒤 88정찰여단의 작전 계획이 모두 취소돼 88여단의 조선인 병사들은 대일전에 참전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오늘날 북한 역사가 자랑하고 있는 것과 달리 ‘김일성 부대가 있는 88여단이 대일전에서 총 한방 쏘지 못했음이 소련 국방성 문건으로 명확히 드러난다.
    또 1945년 9월2일 극동의 바실레프스키 사령부로부터 88여단의 김일성 부대 80명에 대한 입북명령이 공식으로 떨어진다. 김일성 부대는 이 명령이 떨어진지 16일 후인 그해 9월18일 원산항을 통해 입북해 소련군정의 지시대로 각 도시로 분산돼 지역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을 맡는다.

    ★<참고> 소련군 제88정찰 여단-1942년 6월 스탈린의 특별지령으로 하바로프스크 인근에 창설. 중국인 373명, 조선인 103명, 나나이족 316명, 로시안인 462명, 기타 100명 등 총 1,354명(장교 149명, 하사관 358명, 병사 847명).

    스탈린, 김일성 입북 전 직접 면접 후 낙점

  • ▲ 스탈린의 면접시험에 합격한 빨치산 군인 김일성, 옆엔 이론가라서 북합격된 남로당 당수 박헌영.(자료사진)ⓒ
    ▲ 스탈린의 면접시험에 합격한 빨치산 군인 김일성, 옆엔 이론가라서 북합격된 남로당 당수 박헌영.(자료사진)ⓒ


    스탈린은 김일성이 입북하기 전인 1945년 9월 초순, 김일성을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러 면담한 후 그를 북한의 최고 지도자 후보로 낙점했다(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부부부장 코바렌코 증언). 이에 앞서 제1극동전선사령부 제7호 정치국장 메크레르 중좌는 88정찰여단의 김일성에 대한 특별보고서를 상부에 보낸 후 평양에 들어가 김일성 입북에 따른 사전 준비 작업을 한다. 이는 1945년 9월 ‘북조선에 민주정권을 창설하라’는 스탈린의 비밀 지령과 맥락을 같이 하는 대목이다. 소련군정 고위 책임자는 “소련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정보기관과 군이 김일성에 대한 판단자료를 올리면 이를 분석하고 판단해 스탈린에게 추천하고 스탈린이 이를 중심으로 김일성을 직접 면담해 지도자 후보로 낙점하는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평양의 소련군정 레베데프 소장은 “북한 정권 창출 과정에서 어느 것 하나 군정이 단독으로 결정하거나 집행할 수 없었고 모두 하바로프스크 사령부를 거쳐 모스크바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령에 따라 진행됐다”고 밝혔다.

    스탈린, “북조선에 민주정권 창설하라”지령
    1945년 9월20일 스탈린은 “북조선에서 민주정당과 사회단체들의 광범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조아 민주정권을 창설하라”고 지령했다.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북조선에 위성정권을 세우겠다는 최고사령관의 확고한 의지를 주둔군 사령관에게 보낸 것이다. 이 지령은 지금까지의 우리 역사를 재해석해야 할 정도로 의미 있는 대목이다. 우리 역사는 소련이 서울의 미군정 동향을 위시해 한반도 정세를 살펴가면서 북한에 ‘민주기지’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점령 초기부터 북한만이라도 단독 정권을 세워 한반도의 ‘민주기지’로 키워가려 했다는 확고한 의지를 담은 ‘역사적인 지령’이라고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조선을 점령하고서 1개월가량을 보낸 평양의 소련군정 사령부는 나름대로 북조선 정세를 파악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준비해 온 프로그램에 따라 차례대로 시스템화해 군정의 가닥을 잡아 나갔다. 김일성의 입북을 전후해 평양의 소련군정 사령부는 급박하게 돌아간다. 무엇보다 급한 일은 북조선에 위성 정권을 창출한다는 큰 틀의 전략 속에서 장차 북조선 정권을 이끌고 갈 지도자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아울러 소련의 위성 정권과 지도자 양성의 토양이 될 정당과 사회단체를 조직하는 과제도 시급했다. 

    긴박했던 소련군정 초기 4개월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소련이 북한에 대해 실시할 정책은 다중 구도였다. 즉, 군사적 점령과 군정 실시라는 현실적 목표, 북한을 소비에트화해 한반도와 극동의 민주기지인 위성정권을 창출한다는 내면적 목표를 설정했다. 이 때문에 소련군정은 조만식과 같은 민족지도자들의 협력이 필요했고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주목하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과 직접 연계된 공산주의 조직이었다. 먼저 소련군정은 이북5도 열성자대회를 열어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조직했고 이어 지도자 부상을 위해 소련군 환영대회에서 김일성을 ‘전설의 김일성 장군’으로 띄우는 등 고도의 정치적 연출이 시작된다.
    이어 조만식을 설득하여 다당제 틀을 갖추기 위한 조선민주당 창당을 도운다. 이런 과정에서 소련군정 고위 장교들은 조만식을 데리고 ‘요정 정치’판까지 벌인다.

    ★<참고> ‘민주정권’ 창출을 위한 소련군정의 정치사령부에는 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을 비롯해 후르소프 소장, 25군 제7호 정치국장 그로모프 대좌, 25군 제7호 정치국 부국장 이그나치프 대좌, 특수 정보부대장 일리인스키 대좌 등 정치전문장교들이 포진해 있었고 제1극동전선사령부 제7호 정치국장 메크레르 중좌와 부국장 강미하일 소좌, 그리고 정보기관 소속 발라사노프 대좌와 샤브신 등 등 정치고문들이 별도의 팀이 K.G.B 하바로프스크본부의 지시를 받아 활동하고 있었다.

    ★북한 정권 창출 5인방-소련군 극동 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 제1극동전선 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 제1 극동전선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 제25군 사령부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 평양의 소련군정 정치고문 발라사노프 대좌.

    ★소련군 극동전선총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 제1 극동전선 사령관 메레츠코프 원수, 제2 극동전선 사령관 푸르카예프 대장, 제3극동(일명 바이칼호 사령부) 전선사령관 말리노프스키 원수

    ▶1945년 10월 체계 있는 소비에트화를 조기 실현하기 위해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소련군정내에 민정 담당 부사령관 신설, 로마넨코 소장을 임명한다. 그리고 소련군에서 경제의 모든 분야, 즉 공업 농업 수송 재정 통신 등의 전문가들과 교육 문화·보건·사법 분야 전문가들을 입북시켜 로마넨코가 지휘하는 민정관리국에 배치한다.
    이와 함께 외형상으로는 북한 인민대표들로 구성된 임시 인민위원회를 두어 행정총국을 관장하는 것처럼 하고 실질적으로는 임시인민위원회와 행정총국을 소련군정이 통제하도록 했다.
    소련군정도 인민위원회 체제에서 공산당이 인민위원회를 지배하는 소련식 스탈린 체제를 갖추고 있다. 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재무인민위원회와 소련 국립은행 대표들로 구성된 전문가들을 평양에 보내 조선중앙은행을 창설하고 이 은행에 차관을 제공하는 전권을 부여하도록 하고 있다.
     
    소련군정의 고문정치
    소련군정은 한마디로 ‘고문정치’였다. 평양의 군정사령부는 물론 각 지역의 위수사령부까지 소련으로부터 급파된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고문들이 포진했다. 군정사령부 군사회의(일명 정치사령부)에는 이른바 정치장교들로 짜여 있고 정치고문회의는 국방성 외무성 등 소속으로 위장한 정보기관 정치장교들로 구성됐다. 또 각 도의 위수사령부에는 민정사령부의 직속인 대좌급 고문들을 두어 이들이 지역 위수사령부를 지도하도록 했다. 이들 고문들은 대부분 소련군 군단과 사단 정치부장들이다. 전체 6개 도인민위원회는 외형상으로는 인민 자치기관이었으나 구성원인 위원은 선출된 것이 아니라 소련군정 사령부가 임명했고 인민위원회를 지도하는 소련군 고문이 배치됐다. 또 소련군정 산하에 설치된 10개의 행정국에도 외형상으로는 조선인들이 국장을 맡고 있으나 각 국장 곁에는 소련군 고문을 배치, 사실상 행정국을 끌고 가도록 했다. 
    특히 후일 조선인민군 창설의 모체가 된 보안대, 철도경비대, 평양학원, 중앙보안간부학교, 보안간부훈련대대본부, 인민집단군 총사령부 등 각 군사학교와 훈련소에 소련고문단을 배치, 조선인민군 창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평양에 급파된 ‘소련파’ 4백 명, 김일성 전위대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평양에 소련군정을 설치하면서 소련전역에 살고 있는 고려인 2-3세 가운데 대학 교육을 받은 정치 군사 경제 정보 교육 기술 문화 등 분야별 전문가 428명을 다섯 차례에 걸쳐 북한에 급파했다. 이들은 초기에 군정 사령부와 정치사령부 민정사령부 각 지역 위수사령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임시인민위원회 군간부학교 대학 언론 문화단체 등 각 분야에 파견, 북한정세 파악 소비에트화 전략 수행 등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케 한다. 그리고 소련은 북한정권을 창설하면서 이들을 당과 정부의 부책임자로 앉혀 소련을 대신해 사실상 위성정권을 관리토록 한다. 소련공산당의 명령으로 평양에 급파된 소련파는 북한에 소련의 공산주의를 이식하고 김일성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전위대 역할을 한다.

    ▶1945년 12월25일. ‘소련군의 막강 실세’인 소련군 총정치국장 쉬킨 대장은 “1945년 9월21일자 최고사령부(스탈린)가 지령에서 언급한 ‘북조선에서 민주정당 사회단체 등의 광범한 블록에 기반을 둔 부르조아 민주정권 창설을 겨냥한 노선이 대담하게 관철되지 못했다”는 내용의 특별보고서를 외무장관 몰로토프에게 보고한다. 이 보고서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거쳐 스탈린에게도 보고된다. 따라서 이 보고서의 결과는 평양의 소련군정 주도로 북한정권 창출을 위한 ’민주개혁 조치‘들이 숨 가쁘게 진행된다.

    소련공산당, 서울총영사에 “여운형에 대해 보고하라”긴급 지령 
    1945년 10월 5일 서울 주재 소련총영사 폴리안스키는 “여운형에 대해 긴급 보고하라”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긴급지령을 받고 평양의 소련군정을 통해 여운형의 신상정보와 정치적 성향 등을 상세히 보고한다. 이 보고서는 극동군총사령관을 비롯 소련군 고위지도부를 거친다.

  • ▲ 소련공산당과 긴밀히 협의했던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자료사진)ⓒ
    ▲ 소련공산당과 긴밀히 협의했던 여운형(오른쪽)과 박헌영.(자료사진)ⓒ

    평양에 소련군정 사령부를 설치한 지 불과 한 달여 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 모스크바 당에서 여운형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북한정권 창출의 주역 소련군 극동총사령부 제1 극동전선 군사위원 스티코프 상장이 미소공위가 열리고 있던 와중에 느닷없이(?) 여운형을 수상으로 하는 통일임시정부 내각명단을 작성, 모스크바의 당중앙위에 긴급 보고하는 등 북한 정권 창출과정에서 김일성과 소련군정이 여운형과 깊이 대화하고 있었던 사실 등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역사적 단초라고 생각된다.

    ▶1945년 12월17일. 소련군정은 북조선공산당 조직국 제3차 확대집행위원회를 열도록 해 김일성을 제1 비서로 선출시킨다. 이를 전후 해 소련군정은 북조선공산당의 조직을 재정비하고 당원들의 사상 정치교육을 실시하고 간부를 양성하며 공산당 주위에 ‘민주주의 단체’를 결속시키고 각 도 인민위원회를 강화하는 사업에 박차를 가한다.
    1945년 10월17일 오늘의 노동신문 전신인 북조선 공산당 조직국 기관지 ‘정로’가 창간되고 11월3일엔 조선민주당이 창당되며 11월11일엔 조소문화협회,18일엔 북조선 민주여성동맹이 결성된다.    

    ▶소련군 총정치국장 쉬킨 대장의 ‘소련군정 4개월 보고서’의 핵심은 북조선에 아직 소련의 진지 구축을 못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첫째 스탈린이 지령한 북조선의 민주개혁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고, 둘째 북조선에서 소련군대를 철수할 경우 소련의 국가적 이익을 보장할 수 있는 공고한 정치적 경제적 진지를 북조선에서 아직 쟁취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북조선을 소련의 정치적 경제적 ‘민주기지’, 즉 위성국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의미 있는 문건이다. 따라서 이 보고서는 빠른 기간 내에 임시인민위원회 창설과 토지개혁 등 이른바 ‘민주개혁’프로그램을 밀어 붙이라고 지령하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방성, 외무성 등의 비밀고문서와 각종자료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소련은 북한에서 소비에트화 혁명을 진행하면서 ‘일제청산’을 가장 핵심적인 정신 전략으로 삼고 있다. 즉 북조선에 ‘소련식 민주국가’를 건설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일본 군국주의 세력을 축출하고 일본 잔재사상과 친일 인물들을 각 분야에서 철저히 소탕해야 하며 이와 더불어 일제에 저항하며 희생적으로 혈투해 온 혁명 세력과 일제 착취 정책의 대상이었던 노동자 농민을 정치 일선에 내세우는 전략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신탁통치정국과 조만식-스티코프, “조만식(曺晩植)을 포기하지마라“
    1946년 1월5일 평양시내 산수국민학교 평안남도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긴급 소집된 평남인민위원회에서 조만식(曺晩植)이 남긴 최후 발언 요지. “신탁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모든 의사는 우리 조선인의 자유여야 한다. 신탁에 찬성만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아무리 군정이라도 언론이나 의사표시를 제한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칙에 벗어난다. 무슨 구실을 붙이더라도 신탁통치라는 것은 남의 나라 정치에 간섭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주권과 이익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같은 날 서울에서는 박헌영이 기자회견을 통해 “조선의 신탁을 반대하지 않는다. 또 조선의 사회주의 건설이나 소비에트화는 전연 문제되지 않는다”고 피력.

    미소공동위원회의 숨겨진 진실

    ▶ 몰로토프 소련외무성 장관은 미소공위 소련 측 대표단에게 다음과 같은 지령을 보낸다.
    (1)민주주의 임시정부는 민주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로 구성되도록 하고 정부를 구성할 때 각 부처 장관은 남북조선 민주정당 사회단체에서 추천한 후보자들 중 양측에 인원이 균등하게 배당되도록 하라. (2)조선민주주의 임시정부 각 부처 장관에는 조선 인민에게 충실하며 동맹국에 우호적이고 민주조선을 위해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남북조선 민주정당 사회단체 대표가 추천되도록 하라. (3)모스크바 결정, 즉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당이나 사회단체는 임시정부 수립은 물론 협의에도 참가할 수 없다. (4)조선 임시정부 활동은 정부나 지방정권기관을 막론하고 소미공위 자문기구에 의해 통제 받도록 하라.
    이 지령의 핵심인 위 3항대로라면 신탁을 찬성하는 좌익(일부 중도 포함)만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소련이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세우겠다는 확실한 의도가 숨어 있다. 또 위 4항대로라면 임시정부는 어디까지나 ‘허수아비 정부’여야 한다는 소련의 의도가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조선의 임시정부 구상에 따라 소련군 제1극동전선 군사위원이자 미소공위 소련측대표인 스티코프는 1946년 3월7일 남북임시정부 내각안 명단을 작성, 소련공산당 중앙위에 긴급 보고 한다. 소련공산당 중앙위는 외무성을 통해 이를 미소공위 대표단에게 지령한다. 내각 수상에 여운형, 부수상에 박헌영과 김규식, 사법상에 허헌, 내무상에 김일성, 산업상에 김무정, 교육사에 김두봉, 선전상에 오기섭, 노동상에 홍남표, 계획경제위원장에 최창익, 그리고 농림상, 재정상, 교통상, 체신상, 보건상, 상업상 등은 미국 측이 추천하기로 돼 있다. 김일성을 내무상에 앉힌 것이 눈에 띈다. 그러나 이 내각정부 조직 안에는 알맹이가 빠져있다. 국가를 대표하고 지키는 외무성과 국방성을 두지 말라고 지령한다. 소련의 의도가 드러난다.
     
    소련군정, 1946년 2월 북조선에 ‘민주정권틀’ 세워

    ▶신탁통치 문제로 조만식을 잃은 소련군정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조만식이 이끄는 조선민주당도 빨치산 출신 최용건을 당수로 내세워 북조선 공산당의 제2중대로 전락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할까. 소련군정은 조만식이 없는 북한에서 김두봉을 얼굴마담으로 부상시킨다. 그를 1946년 2월8일에 출범시킨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앉힌다. 그리고 2월16일 그가 이끌고 있는 연안파를 중심으로 독립동맹의 기초위에서 신민당이라는 제2정당을 창당케 한다. 김두봉은 하루아침에 오른손에 조선신민당 당수, 왼손에는 최고 행정권 2인자란 명함을 쥐게 된다.
    소련군정은 1945년 12월17일에 북조선공산당 제3차 확대회의를 열어 김일성을 제1 비서에 앉혔고,1946년 2월8일에는 사실상의 정권기관인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를 창설하여 김일성을 위원장에 앉혔다. 김일성의 양손에 당과 행정권을 쥐어준 셈이다.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 등은 “이 같은 일련의 정치 일정은 모두 소련공산당 중앙위 지령에 따라 군정이 주도한 것으로 외형상 북조선 공산당과 인민위원회 이름으로 발표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모스크바에서 발굴한 비밀문서와 자료에서도 이를 그대로 뒷받침하고 있다.
     

    소련군정, 소련에서 준비해간 ‘민주개혁’프로그램 진행  
     
    ▶‘민주개혁’프로그램이 아직 실현되지 않는 등 위성국 정권 창설 기반이 북조선에 아직 갖춰지지 않고 있다는 소련군 총정치국장 쉬킨 대장의 지적에 따라 소련군정은 신탁통치 회오리 속에서도 이들 과제들을 실천에 옮기기에 안간힘을 쏟는다.
    때문에 소련군정의 1946년은 그야말로 위성정권과 ‘민주기지’창설을 위한 탄탄한 기초공사를 마친 해였다. 정권기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창설하고, 천도교 청우당에 이어 조선신민당을 창당하여 외형상 다당제 형태를 갖춘다. 이어 6개월 만에 북조선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을 합당해 북조선노동당을 만들었다. 이 와중에도 토지개혁법령 등을 발표해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굵직굵직한 공산주의 혁명이 진행된다.
    소련공산당 중앙위는 1945년 10월 소련의 토지개혁법령과 노동법령, 남녀평등에 관한 법령, 산업 운수 통신 은행국유화 법령, 각 도 시 군 면 리 인민위원회 선거에 관한 법령 등을 소련군정 사령부에 내려 보내 빠른 기간 내에 이들 법령이 북조선에서 시행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소련군정 정치사령부 이그나치프 대좌팀이 이를 소련파 고려인들에게 번역하게 한다. 그리고 이를 북한 현실에 맞게 재가공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이름으로 이른바 ‘민주개혁 5대 법령’을 발표케 하고 실행해 간다. 당시 북조선 공산당에는 민주개혁 프로그램을 만들 만한 능력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소련 방식대로 하면 법령들 모두 형식상 인민대표기관의 비준 승인 절차가 있어야 하지만 당시로는 인민대표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우선 시행하게 한다. 그리고 1946년 11월3일 실시된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를 통해 창설된 인민회의에서 비준을 받는 모양새를 갖춘다.
    이와 같은 민주개혁을 추진하는 동시에 신문 방송 잡지 창간과 경제 사회 문화단체와 기관을 결성하는 데 박차를 가한다.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 부총영사 샤브신은 ‘빨치산 수첩’에 “소련군정이 북조선에 이식한 소련의 민주개혁 프로그램은 북조선을 한반도의 인민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기지로 발전시켰다”고 강조하고 있다.
    ‘절대 비밀’이라는 도장이 찍힌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결정집에는 김일성이 1946년 9월25일 열린 북로당 중앙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지난 1년 동안 붉은 군대가 준비하고 추진한 민주개혁의 성과를 보고 북조선인민들은 붉은 군대에 대한 인식을 깊게 했다. 우리 인민들은 진정한 해방자인 붉은 군대에 대한 감사의 뜻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개혁 프로그램 등 지난 1년 동안 북조선에서 진행된 모든 정치프로그램이 모두 소련군정에 의해 기획되고 추진됐음을 명쾌하게 밝히는 문건이다.
     
    ■ ‘9월 총 파업’은 박헌영과 소련군정 북로당의 공동전선
    ‘박헌영의 9월 총파업’에 대해 소련군정과 북로당이 질책했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오류다. 북로당은 1946년 9월27일 북로당 중앙상부위원회 제6차 회의에서 이 총파업을 지지할 뿐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결의했다.
    특히 서울주재 소련총영사관 부총영사를 지내 소련군정 사령부내에서 남한 사정에 밝은 샤브신은 ‘빨치산 수첩’에서 ‘9월 총파업’과 ‘10월 인민항쟁’을 동학혁명과 3.1독립운동, 그리고 러시아의 10월 혁명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하고 평가하고 있다. 스티코프의 일기 등에서도 소련군정이 9월 총파업에 직 간접적으로 관여한 정황을 발견할 수 있고 레베데프 소장도 당시 9월 총파업에 대한 소련군정의 입장을 묻는 질문에 답을 피했다.

    스탈린, 김일성과 박헌영 모스크바로 불러 비밀 면접 
    1946년 7월 하순,스탈린은 모스크바에서 서울의 박헌영과 평양의 김일성 두 사람을 면접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군정의 협력을 받아 북조선의 소비에트화 정책을 조기에 실현시키도록 투쟁하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박헌영에게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분투하는 그대의 혁명 투쟁을 높이 평가한다”라며 격려했다.
    이 같은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문건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를 뒷받침할만한 소련군정의 고위 관계자 등의 증언과 정황들을 찾아냈다.

    스탈린은 왜 33세의 김일성에게 한반도 반쪽을 맡겼을까 
    이 물음에 대해 명쾌하게 답할 수 있는 문건 역시 나오지 않고 있다. 학자들의 여러 분석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평양에서 북한정권 창출의 주역을 맡았던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의 주장이다.
    “당 중앙 스탈린 원수는 동구에서 소련의 위성국 정권을 창출할 때도 그랬듯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가보다 군 출신을 선호했습니다. 김일성은 1942년부터 1945년까지 3년간 소련군 제88정찰여단에서 대대장으로 복무하면서 소련의 명령에 충실했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군인으로 판단했다고 봅니다. 특히 김은 스탈린이 싫어하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활동 전력이 없고 빨치산 운동만 했기 때문에 다른 종파에도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장점이 됐을 겁니다. 또 김일성이라는 그의 이름(본명은 김성주였지만)이 북한 인민들에게 ‘항일투쟁 민족영웅’으로 널리 알려져 지도자로 부상시키기에 용이했던 점도 큰 영향을 줬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일성이 선택된 것은 그가 비록 학식과 공산주의 이론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정치적 소질과 신념이 강한 항일 빨치산 출신이었으며 소련에 충성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울러 레베데프는 스탈린이 박헌영을 지명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론적으로 준비된 인텔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찍부터 코민테른에 깊이 관여했고 1928년 종파싸움으로 해체된 조선공산당원으로 종파활동(화요파)의 경험이 많습니다. 또 일제치하에서 항일투쟁으로 세 차례 10년 동안 형무소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에 항복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입니다. 또 북한 인민들에게 그의 지명도가 낮은 점도 약점이 됐을 것입니다.”
    스탈린은 이 자리에서 북조선공산당과 연안파 인텔리 중심의 신민당을 합당해 북한정권의 엔진 역할을 할 강력한 정당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피력, 소련군정은 이 지령을 받은 즉시 두 당을 합쳐 오늘의 노동당 전신인 북조선로당을 창당했다.

    *<참고> 북로당 창당대회 때 발표된 14개항의 강령 중 눈길을 끄는 것은 민족군 창군과 이를 위한 군 복무제를 실시한다는 조항이다.

    ‘빨치산 양성소’ 강동정치학원은 소련군정이 설치
    1948년 1월부터 1950년 6월25일까지 2년7개월 동안 빨치산 4000명을 양성했던 평남 강동군 송호면 대성리 강동정치학원(일명 박헌영학교)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소련군정이 설치. 남한에서 좌익이 불법화돼 혁명간부를 양성하기 어려우니 북쪽에 혁명간부 양성소를 세우기로 결정.(원장 소련파 박병률, 빨치산 제1군단장 이효재, 제2군단장(지리산 특수공작반장 이현상, 제3군단장 김달삼) 

     ■ 북조선 헌법초안은 소련공산당 작품  
    소련군정은 1947년 말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받는다.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즉시 법률전문가들을 평양의 소련군정에 급파한다. 이들은 동유럽 위성국들의 헌법을 참고해 한반도 실정에 맞는 북조선 헌법 초안을 작성해 모스크바에 보고한다. 당 중앙위는 이 헌법 초안의 각 조문을 하나하나 검토해 소련군정으로 보낸다. 그리고 이 헌법 초안이 북조선의 최종 헌법으로 확정된다.
     

  • ▲ 미국과 소련의 좌우합작을 강력 반대하고 북한정권이 사실상 수립된것을 알자 자유민주정권 수립에 나선 이승만.(자료사진)ⓒ
    ▲ 미국과 소련의 좌우합작을 강력 반대하고 북한정권이 사실상 수립된것을 알자 자유민주정권 수립에 나선 이승만.(자료사진)ⓒ

    평양의 남북 연석회의, 소련군정이 연출 맡아
    1948년 4월19일부터 3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545명이 참가한 가운데 일련의 정치회담인 남북연석회의가 열렸다. 우리 역사는 이 회의와 회담은 김일성과 북조선 노동당이 주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당시 소련군정 정치사령관과 민정사령관을 겸임했던 레베데프 소장의 비망록에는 남북 지도자 연석회의에 대한 소련 측의 의도와 역할, 소련군정의 북한정권 수립과정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이 비망록은  모든 과정에서  소련군정이 모스크바로의 명령(승인)능 받아 기획 연출을 맡고 김일성과 북조선노동당 이름으로 행동하고 발표됐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 ▲ 소련 군정이 연출한 남북합작회의에 참석한 김구(오른쪽)가 평양에 도착하여 김일성(왼쪽)을 따라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있다.(자료사진)ⓒ
    ▲ 소련 군정이 연출한 남북합작회의에 참석한 김구(오른쪽)가 평양에 도착하여 김일성(왼쪽)을 따라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있다.(자료사진)ⓒ

    이 비망록에는 레베데프 소장이 상부로부터 김구(金九)와 김규식(金奎植)을 평양으로 불러 들여 ▶남한의 총선 반대와 봉쇄▶조선에서 유엔 한국 임시위원회 추방 요청▶소련군과 미군 출수▶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남북총선거는 외국군 철수 후 실시하는 등 한반도의 소비에트화를 위한 4가지 지침을 관철하라는 지령을 받아 이를 김일성과 북로당에 지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이 비망록에는 연석회의와 관련해 처음부터 끝까지 김일성과 북로당에 지침을 시달하고 그 결과를 보고 받았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여러 차례 회의를 연기하면서 두 김을 기다리는 문제, 남한의 두 지도자에게 직위를 주고 헌법을 채택한 후 범민족정부를 세우는 문제 등 두 김 씨를 회유한 제 문제들을 김일성과 북로당에 지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북한 정권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두 김 씨를 회유하려 했음이 드러난 대목이다.
    또 이 비망록에는 북조선 노동당 초대 위원장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의장 등을 지내다 1958년 연안파 숙청 때 사라진 김두봉을 일찍부터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녔으므로 특별 감시하라’고 지시한 기록이 있다. 이 비망록의 역사적 가치를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이밖에 이 비망록에는 연석회의 와중에도 레베데프 소장이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김일성에게 인공기와 인민군기 등을 제작해 승인을 받으라고 지시하는 등 인민생활의 시시콜콜한 문제까지 간섭하고 지시했다고 기록돼 있다.

    북조선 초대 내각과 인민회의 의장단도 소련이 결정
    소련군정은 북조선 정부를 수립하기 두 달 전, 김일성이 수상과 민족보위상을 겸하고 박헌영은 외무상만 맡는 등 초대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명단을 작성, 모스크바 중앙(스탈린)에 상신했다. 그러나 중앙이 남한인사들이 소외됐다며 김일성은 수상만 맡고 박헌영을 제1부수상에 겸 외무상, 남로당 출신 이승엽을 사법상, 조선인민공화당 당수 김원봉을 검열위원장으로 각각 추가하라고 지시한다. 아울러 내각의 주요 부상(副相)에는 소련파를 집중 배치하라고 지령하고 있다. 이는 외형상으로 상(相)이 해당 부처를 대표하지만 실질적으로 부상(副相)을 통해 내각을 감시하고 지휘하겠다는 소련의 ‘위성국 전략’이 그대로 숨어 있다.

    제2차 남북연석회의도 소련군정의 각본과 연출
    1948년 6월29일부터 7월5일까지 북에 주저앉은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연석회의는 소련군정이 준비한 각본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된 ‘고무도장’이었다.
    이 회의는 남한 총선거에 대한 평가에 이어 김일성의 ‘임시헌법 시행으로 남북독립국가 창설’이라는 제목의 연설이 있었고 토론자 20명중 남한 출신이 13명이었다. 남한 출신으로 ‘남조선 지하선거 추진 지도위원회’를 조직하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보내는 지하선거(7월 중순부터 8월 초까지) 호소문을 채택했다.

    “조선 인민의 친근한 벗 스탈린 대원수와 붉은 군대 반세”
    3년간에 걸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평양주둔 소련군정의 기획과 연출에 따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닻을 올린다. 이 과정의 중요 대목마다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는 소련공산당과 소련군대의 ‘원조’에 감사와 충성을 맹세하는 결정서를 채택한다. 이는 북한정권이 소련의 각본과 연출 속에서 창출됐고, 북한정권이 소련의 위성국임을 말해주는 역사적인 자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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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제9회 이승만포럼 안내

     일시 : 2011년 11월 9일(수요일) 오후3:00-5:00장소 :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
    ■ 장소가 변경되었습니다.
    (종래 프레스센터19층에서 정동제일교회
    로 임시이전)
    ♣지하철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 50미터 고려삼계탕 우회전 배재빌딩 지나 러시아대사관 정문 옆
    ♣지하철 1호선 시청역 1번 출구 덕수궁돌담 끼고 이화여고 방향 150미터 

     주 제 : 평양의 소련 군정 : 북한정권 탄생 비화
    발표자 : 김국후(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비화: 평양의 소련 군정> 저자)

    * 발표자는 해방 후 김일성 정권이 탄생되기까지 북한과 소련에서 있었던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5년 동안 러시아 땅을 현장취재한 언론인이다.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소련 문서들, 그리고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 직접 간여했던 소련 군정책임자들과 북한인들의 면담을 통해 수집한 생생한 증언을 모아 북한역사의 진실을 복원한 기록이 <비화: 평양의 소련 군정>이다.  이승만 포럼은 김국후 선생의 연구발표와 함께, 김일성 정권이 왜곡 조작하고 한국의 종북세력들이 추종하는 주사파사관을 탈피하고, 우리 현대사의 진상을 복원함으로써 올바른 남북관계와 미래의 통일을 이루는 국가에너지에 보탬이 되고자한다. 

                       2011년 10월  25일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 저희 연구소에서 개최하는 소식과 뉴스레터를 받아보시기를 원하시는 분 께서는 mijinco@hanmail.net으로 e-mail 주소를 보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