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은 명절이 아니라 휴가?"

    추석 명절을 쇠러 고향에 가지 않고 연휴에 휴식과 여가를 즐기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긴 연휴를 활용해 해외여행을 다녀오거나 성형수술을 받는 사례가 흔하고, 명절 음식을 힘들여 마련하는 대신 '제사대행업체'를 이용하거나 호텔 뷔페를 찾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가족과 친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송편을 빚으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명절이라는 전통 관념이 '스마트 시대'를 맞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국민 40%가 귀성, 60%는?

    올해 추석 연휴에도 3천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대이동이 예고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모두 귀성객은 아니다.

    전국의 도로, 철도역, 버스터미널이 미어터지는 것을 보고 늘 '추석=귀성'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귀성 행렬에 합류하는 이들은 국민의 절반도 안 된다.

    여론조사업체 한국갤럽이 전국 20세 이상 성인 남녀를 상대로 실시했던 조사에서는 1989년 34.2%, 1990년 32.7%, 1991년 30.7%만이 1박 이상 고향 방문 계획이 있다고 답했었다. 2003년까지도 귀향 계획이 있는 이들의 비율은 30%대였다.

    KTX 개통과 잇따른 고속도로 확충 등으로 귀성객 수송 용량이 커진 2000년대 후반 이후에도 귀향을 계획하는 이들의 비율은 40%대 초반에 머물렀다.

    한국갤럽의 2006년 조사에서는 귀성객 비율이 43.5%였으며, 시장조사업체 트렌드모니터와 이지서베이의 2011년 조사에서도 추석 연휴에 지방으로 이동하겠다는 국민은 40.3%에 불과했다.

    그러면 추석에 귀성하지 않는 나머지 인구는 도대체 무엇을 할까.

    물론 집이나 가까운 친척 집에서 차례를 지내는 경우가 아직도 가장 많지만, 일상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휴가를 즐기거나 '자기 투자'의 기회를 가지려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추석 전후(당일을 포함해 포함 5일간)로 인천공항 국제선의 이용객 수는 최근 수년간 급증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15.7% 늘어난 50만6천982명으로 사상 최초로 50만명선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여행업체 하나투어의 조일상 대리는 "작년에는 연휴가 길어 여행객이 고르게 분포된 반면 올해는 연휴 첫날인 10일 해외로 가시는 분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설명했다.

    대부분의 해외여행 패키지 상품이 3∼5일 일정임을 감안하면 연휴 전체를 해외에서 보내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주요 성형외과나 피부과에는 추석 연휴나 그 직전에 수술이나 치료를 받은 뒤 휴식을 취하며 상처가 치유되도록 관리하려는 환자들의 상담 문의와 예약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 강남구 그랜드 성형외과에서 일하는 이지영씨는 "회복 기간이 3∼4일에 불과한 코나 쌍꺼풀, 쁘띠성형(칼을 사용하지 않고 짧은 시간에 효과를 내는 주름제거, 보톡스, 필러, 레이저시술) 등은 추석 기간 환자 예약 수가 일반 휴일에 비해 30∼40% 늘어난다"며 "직장 다니는 20∼30대 미혼 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시부모나 친정부모에게 아이를 맡기고 연휴를 즐기겠다는 부부도 있다.

    3살 아이를 둔 박지은(33·여)씨는 "사당동에 사는 시부모님이 아이를 봐 주신다고 해서 추석날 남편이랑 드라이브를 하거나 영화를 볼 계획"이라며 "시간이 남으면 아이 때문에 못 보던 친구도 만나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호텔·뷔페 붐비고, 차례상은 대행업체에

    출장 고객 수가 급격히 줄어드는 추석 연휴에도 서울 시내 주요 호텔의 객실 예약률은 대부분 60∼70%에 달한다.

    비즈니스 손님이 줄어드는 대신 추석 패키지 할인 상품 판매가 늘기 때문이다.

    서울 서초구 JW메리어트호텔의 김하연 주임은 "추석 패키지를 신청하시는 분이 매우 많아 연휴 기간 예약 손님의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설명했다.

    추석 패키지 손님 중에는 연휴를 호텔에서 즐기며 보내려는 이들도 있지만, 서울로 역귀성한 부모가 자녀 집에 머물지 않고 호텔에 간다는 속칭 '시부모님 호텔' 고객도 적지 않다는 게 호텔업계 관계자들의 얘기다.

    서울 강남구 르네상스호텔의 황윤정 주임은 "정확한 숫자를 알 순 없지만 프런트에 물어보면 추석에 지방에서 올라온 50∼60대노인분들이 적지않게 눈에 띈다고 한다"고 말했다.

    집에서 번거롭게 음식을 만들지 않고 호텔 뷔페에서 오찬이나 만찬을 즐기려는 이들도 많다.

    서울 광진구 워커힐 호텔 포시즌 뷔페에 캐셔로 근무하는 황혜진씨는 "매년 추석 연휴에 300석이나 되는 테이블이 다 차는데 가족 단위로 식사하러 오시는 손님이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서울 강남구 임페리얼 팰리스 호텔에 있는 패밀리아 뷔페의 김현수 실장은 "추석 당일이나 그 다음 날 가족 단위로 손님들이 많이 온다. 좌석 회전율도 빨라 손님 수가 평일의 2배 이상이고 보통 휴일보다 15% 정도 많다"고 했다.

    명절이 괴로운 싱글족들을 위한 호텔 1인용 추석 패키지가 등장했고, 편의점 진열대에는 혼자 명절 분위기를 낼 수 있는 추석 도시락도 눈에 띈다.

    언제부턴가 차례상도 바뀌고 있다.

    전화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음식이 차려진 차례상을 배달해 주는 업체들은 최근 10여년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집에 차례상을 차리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제사 대행업체와 제휴한 사찰 등에서 차례를 지내도록 해 주는 상품도 있다.

    심지어 해외 여행을 떠난 고객을 위해 인터넷을 통해 제사 화면을 생중계해 주거나 온라인 공간에 '가상 제사상'을 차려 고객이 화면을 보면서 제사나 차례를 지내도록 해 주는 업체도 생겼다.

    작년에는 신주(神主)나 지방(紙榜) 대신 아이패드를 올려놓은 제사상 사진이 인터넷 게시판 등에 올라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직접 제사상을 차릴 경우에도 전통적인 방식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감, 대추, 밤, 배, 사과뿐 아니라 요즘에는 수입 과일인 바나나, 키위 등도 제사상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탕(湯)도 예전에 생선(魚), 고기(肉), 소(蔬) 등 3탕을 올렸으나, 요즘은 이들 재료를 혼합한 두부탕으로 갈음한다.

    성균관 석전교육원 이흥섭 원장은 "홍동백서(紅東白西)라는 기본에 맞춰 올라가는 과일이나 탕은 종류나 수가 바뀔 수 있다"며 "조상을 기린다는 의식이 중요하지 제사상에 올려야 할 음식 종류를 제한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 도시화·핵가족화로 추석 '휴가·축제화'

    일가친척이 모이는 전통 명절 풍습이 점차 자취를 감춰가는 상황에서 추석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농경문화의 산물인 전통 추석 습속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며, 그 공백을 핵가족 중심의 추석 문화와 '명절의 축제화'가 채우게 되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통적인 명절 개념이 퇴색하고 귀성 비율이 줄어드는 핵심 요인으로 핵가족화를 꼽았다.

    옛날의 가족 관념은 조부모에서 손자에 이르는 3세대 대가족이 기본이었으나, 이제는 부모와 자식 2세대에 걸친 핵가족 중심으로 사회 풍습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근로 시간이 길고 휴가가 짧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추석이나 설 외에는 그리 많지 않은 점도 이유로 꼽힌다.

    핵가족의 유대 강화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면 제사, 성묘, 귀성 등 전통 명절 풍습을 고스란히 지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 교수는 "명절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건 여성인데 부부 중심의 핵가족 체계에서는 여성의 발언권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명절 풍습도 여자가 바라는 대로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만약 전통적인 추석의 의미를 현대에도 이어가고 싶다면 일부 시간은 차례를 지내며 부모와 함께, 일부 시간은 부부가 자녀와 함께, 나머지는 개인적으로 쓰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상현 안동대 민속학과 교수는 동창회나 문중모임 같은 행사를 추석과 연계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추석 연휴에 개인행사를 같이 잡게 되면 귀향하면서도 고생스럽다는 생각보다 지인과 즐기러 간다는 생각이 앞서게 된다"며 "지역에서 추석 때 초등학교 동문 운동회를 여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종대 중앙대 민속학과 교수는 도시화와 함께 조상 숭배 풍습이 사라져 가는 것이 명절 쇠퇴의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져 자기 자식과 배우자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친척 만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구 문화가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명절이 아니라 마치 서양의 크리스마스나 추수감사절처럼 휴가나 쉬는 날이라는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오래 못 만난 친척이 명절에 모인다는 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모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한때 아이 하나 낳기 운동을 하면서 삼촌과 이모가 사라졌다"고 진단했다.

    그는 "농촌 사회로 회귀하지 않는 한 과거로 가기는 어렵다"며 "정월 대보름을 축제화한 경기도 광주의 예처럼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명절의 축제화' 현상이 지속될 수는 있겠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