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준 열사 돕고 항일무장투쟁에 자금 대며 항거경술국치 소식 듣고 유산을 독립자금으로 기부한 뒤 자결
  •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하자 명령까지 거역하며 목숨을 걸고 투쟁한 ‘진짜 외교관’이 우리나라에도 있었다. 8월의 독립운동가 이범진 선생(1852년 9월 3일 ~ 1911년 1월)이 그랬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8월의 독립운동가로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대한제국 駐러시아 공사로서 을사늑약에 항거하고 헤이그특사를 후원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다 경술국치를 보고서 자결한 이범진 선생을 선정하였다.

  • 이범진 선생은 대한제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다. 1879년 문과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로 공직을 시작했다. 1896년 주미공사가 되었으며, 1899년 주러시아 공사로 전임되어 오스트리아·프랑스까지 3개국 공사를 겸임하였다. 주러시아 공사 시절 러시아의 용암포 조차(租借) 요구에 강하게 반대하고 이 공문을 러시아 정부에 전달하지 않아 파면되기도 하는 등 침몰하던 대한제국을 마지막까지 구해보고자 노력했던 분이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한다는 명령이 떨어지자 선생은 이에 불응하고 당시 러시아 수도였던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1907년 6월 당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때 대한제국 특사들을 도운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이범진 선생은 이상설과 이준이 고종 황제의 특사로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함께 평화회의에 제출할 문서를 작성하고, 아들 이위종을 통역으로 동반케 했다. 특사들이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호를 요청하였으며, 각국 기자들을 모아놓고 한국 특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마련하는 등 헤이그 특사의 활약 뒤에는 그의 숨은 노력과 헌신이 있었다.

    이범진 선생은 1908년 4월 연해주에서 최재형, 이범윤 선생 등이 의병단체인 ‘동의회’를 만들 때 아들 이위종을 보내 군자금으로 1만 루블을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이범진 선생의 노력에도 1910년 대한제국은 무너졌다.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경술국치 소식을 들은 선생은 모든 유산을 미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제공하고, 1911년 1월 권총으로 자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