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진 열사 순국 100주년 추모행사12일 오전 10시 30분, 백범김구기념관에서
  • 최근 회자되는 친일파와 친미파는 자기나라보다 일본이나 미국편을 드는 사람을 의미한다. 친러파였지만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를 이용하려 한 ‘열사’도 있었다. 바로 이범진 선생이다.

    12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는 대한제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이범진 열사 순국 100주년 추모식’이 광복회(회장 박유철)와 이범진열사기념사업회(회장 이원갑) 공동주관으로 열렸다.

  • 이범진(1852∼1911) 선생은 1879년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를 따라 친러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명성황후 시해 후 사임하였다. 1895년 10월 춘생문사건을 일으키는 데 주역이 되었다가 실패하자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키는 데 참여하여 김홍집 등을 몰아내고 아관파천 내각의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1897년 선생은 자원하여 주미공사가 되어 쓰러져 가던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00년에는 주러시아 공사로 전임되어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4개국 공사를 겸임했다. ‘친러파’로 알려져 있던 이범진 열사가 주러시아 공사를 맡았지만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는 강경하게 반대했다. 대한제국이 ‘용암포 조차’를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선생은 여기에 반발하여 이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다가 파면되기도 했다. 서리공사 김인석이 이 공문을 러시아에 전달한 뒤에 다시 복직됐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뒤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선생은 이에 불응하고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남아 국권회복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릴 때 선생은 이상설·이준 등 대한제국 특사를 돕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상설과 이준 특사가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함께 평화회의에 제출할 문서를 만들고, 아들 이위종을 통역으로 함께 가도록 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요청해 특사들이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보호하기도 했다. 러시아 대표는 이범진 선생을 위해 각국 기자들을 모아놓고 한국 특사들이 연설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1908년 4월 연해주에서 최재형, 이범윤 등이 의병단체인 동의회(同義會)를 편성할 때, 선생은 아들 이위종을 파견하여 의병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때 선생은 1만 루블을 군자금으로 보냈다.

    하지만 1910년 결국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선생은 모든 재산을 미주와 연해주지역의 독립운동조직으로 보낸 뒤 1911년 1월 페테르스부르크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12일 열린 추모식은 최완근 서울지방보훈청장, 박유철 광복회장, 독립운동관련단체장 및 광복회원, 기념사업회원, 유족, 학생 및 시민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범진 열사의 생애 영상 상영, 이달의 독립운동가 기념패 봉정, 서울지방보훈청장·광복회장의 추모사 후, 성악가 장숙희·장동일의 추모공연(독립군가, 내 나라 내 겨레) 순으로 거행됐다.

    또한 추모식에 이어 ‘대한제국 최후의 러시아 공사 이범진 선생’이라는 주제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박민영 교수의 학술강연회가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