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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국무총리로 발탁된 지난 9·3개각 당시 한나라당은 크게 들떠 있었다. 특히 친이계가 그랬다.
"(이명박 대통령이) 작품 하나를 만들었다", "이 대통령이 이번에는 정치를 잘 한 것 같다", "이번에 한 건 했다" 는 등의 목소리가 컸다.
서울대 총장을 지내며 쌓은 인지도, 진보 경제학자로서의 이미지, 충청 출신이며 개혁성향 인사란 점 등이 그를 대선주자 반열에까지 올려놨다. 여기에 노무현 정권의 계속된 러브콜도 그의 주가를 높였다. 총리가 되기까지 '정운찬'이란 인물은 야권의 대선후보군으로 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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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연합뉴스
그런 정 총리를 영입한 여권 주류 입장에선 크게 한 건 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해 4월 재보선 참패로 크게 흔들리던 여권 주류 입장에선 돌파구가 마련된 셈이다. 이때도 정운찬 총리 카드가 '박근혜 대항마'란 말이 흘러나왔고, 정 총리가 박 전 대표의 독주체제인 여권의 차기 대선구도를 흔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정 총리 영입을 크게 반기던 친이계였지만 정작 '박근혜 대항마'란 전망에는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당시 친이계의 한 재선 의원은 "그 분이 그렇게 정치력이 있는 분은 아니다. 당내 세력을 만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고 말했고, 다른 의원들도 정 총리의 정치력에는 의문부호를 달았다. 한 친이계 의원은 정 총리를 '박근혜 대항마'로 보는 시각에 "택도 없는 소리"라고 까지 말했다.
이런 전망을 대하는 친박계 분위기도 매우 침착했다. 정 총리란 다크호스의 등장에 다소 긴장하는 듯 했지만 대부분 친박계 의원들은 오히려 "건전한 경쟁관계는 (박 전 대표에게) 플러스가 될 수 있다", "지금과 같은 독주체제 보다 경쟁자가 생기면 더 좋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는 박 전 대표의 경쟁력에 자신감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정 총리의 정치력이 검증되지 않았고, 당내 세력이 없는 만큼 지레 겁먹고 우려할 게 없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었다.
이번 8·8 개각을 통해선 '김태호 총리'카드가 등장했다. 이번에도 '박근혜 대항마'란 분석과 박 전 대표 독주체제인 차기 대선구도에 적잖은 변화가 있을 것이란 같은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정 총리 때와 달리 친박계의 시선은 크게 달라졌다.
"독주체제 보다 경쟁자가 생기면 더 좋다"는 이전과 달리 '박근혜 죽이기'카드라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부 친박계 의원들은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의 대권 행을 막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란 격앙된 목소리까지 낸다.
이런 주변의 반응과 달리 박 전 대표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고 한다. 서병수 최고위원은 "박 전 대표는 일희일비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온 대로 페이스를 지켜나갈 것"이라고 했고,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도 대권행보가 빨라질 것이란 전망에 "가능성이 털끝만큼도 없다"고 했다.
대신 박 전 대표 보다 주변 인사들이 불안해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한 친박 의원은 "박 전 대표 본인은 대권행보를 빨리 가져갈 생각이 없지만, 잠룡들의 등장에 불안해하는 주변 인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정 총리 때와 확연히 달라진 친박계의 반응은 자칫 이전 보다 박 전 대표 경쟁력에 대한 자신감이 줄어들었다는 것으로 해석될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 이는 지난 당 대표 경선 때의 표결결과를 두고 친박계가 많이 위축됐다는 분석과도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는 여전히 부동의 1위 차기 대선주자다. 아직 그에게 견줄 만한 후보도 없다. 이제야 경쟁후보군이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박 전 대표는 지난 대선후보 경선을 치른 경험을 갖고 있고 혹독한 '검증대'도 거쳤다.
친박계는 경쟁 후보 출현에 지레 겁먹을 게 아니라 11개월 전 처럼 "독주체제 보다 경쟁자가 생기면 더 좋다"며 박 전 대표의 대선 경쟁력을 더 높일 방안을 고민하는 게 현명한 처사일 듯싶다. 설사 이 대통령이 박 전 대표의 대권행을 막으려 한다 해도 국민이 박 전 대표를 원한다면 이 대통령도 이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