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8년 12월호 월간조선에 필자가 썼던 편집장의 글을 12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좌익들이 적용하였던 '그람시의 陣地戰' 전략이 그 동안 한국 사회를 본질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였음을 실감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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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오 그람시란 유령이 배회하고 있다
     
      
      이탈리아 공산당 전략가
     
      칼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란 유령이」 지금 우리나라의 지식인 사회에서도 한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란 이름의 유령이 그것입니다.
     
      그람시란 이름은 1980년대부터 우리 학생들과 지식인들을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전략론에 나오는 「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나 진지전(陣地戰)이란 개념은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 계급혁명을 꿈꾸던 사람들에게 하나의 전략(戰略)을 제공해주는 달콤한 단어였습니다. 1990년에 들어오면 그람시의 사회주의 혁명전략을 한국에 창조적으로 적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람시란 사람은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마흔여섯 살에 죽은 이 천재적인 이탈리아 공산당 전략가가 21세기를 앞둔 대한민국에 많은 추종자를 갖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일이기도 합니다. 사상이나 이론이란 것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람시는 1891년 이탈리아의 사르디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系와 알바니아系 부모 사이의 혼혈이었습니다. 그는 네 살 때 下女가 안고 있던 그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곱추가 되고 말았습니다. 후천성 불구였기 때문에 그는 박해를 받으면서 자랐고 이 체험이 그의 독창적인 사회주의 계급혁명론을 만들어내는 한 심리적 동기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는 튜린 대학에 들어가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회당 기관지에 글을 써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더욱 왕성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튜린 지역의 노동자들은 이탈리아가 1차 세계대전에 연합군 편에 서서 참전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그람시는 이탈리아 노동자들이 국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앞세워 국가에 대항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마르크스 계통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은 조국이 없으며 국제적인 연대를 우선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1917년 전쟁중의 이탈리아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선동하여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내란상태가 연출되었습니다. 그람시는 이런 폭동에 가담하여 「민중의 소리」란 사회당 기관지의 편집책임자로 뛰었습니다.
     
      1921년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이 창설되자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다음해 코민테른, 즉 국제공산당조직이 모스크바에서 창설되자 거기에 파견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파시스트인 무솔리니가 로마로 진격하여 정권을 잡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1924년 그람시는 이탈리아로 돌아와 지하로 잠적, 反파시스트 공산운동을 벌였습니다. 1926년 11월 이탈리아 공산당 지도자들이 투옥될 때 그람시도 거기에 포함되었습니다. 그람시는 2년 뒤 징역 20년 4개월 5일을 선고받았습니다.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
     
      검사는 「우리는 이 인간이 20년 동안 두뇌활동을 못하도록 해야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8년 동안 생활하면서 더욱 왕성한 두뇌활동을 보였습니다. 여기서 그가 쓴「옥중서한」이란 책은 최근 정치사상사의 고전이 될 만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는 감방에서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없었고 자료도 제대로 참고로 하지 못했는데도 독창적인 이론을 개발하였고 이 이론은 그 뒤 유럽 여러 나라의 공산주의 운동에 좋은 전략지침서가 되었습니다. 1934년에 가석방된 그람시는 1937년에 뇌출혈로 죽었습니다.
     
      옥중서한의 초판이 발행된 것은 그가 죽은 지 10년이 지난 1947년이었지만 검열로 삭제당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람시의 책이 완전한 형태로 출간된 것은 1965년이었습니다. 그람시의 사회주의 혁명이론과 전략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사회주의 혁명이론은 원래 난해한 관념적인 용어로써 설명되기 때문에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람시는 마르크스나 레닌의 전략과 이론을 무조건 추종하지 않으려고 했던 점에서 창조적인 전략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람시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에 직면하여 붕괴한 뒤에 역사의 필연으로서 저절로 등장할 것이란 마르크스의 낙관론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모순점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도래할 것이란 넓은 의미의 역사적 필연성을 배경으로 깔고서 혁명가들이 사회주의 건설이란 목적을 설정해 놓고 의지를 갖고서 행동할 때만 혁명은 달성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서 역사적 필연성보다는 인간의 주간성과 의지력을 더 강조한 것입니다.
     
      그람시는 정치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즉, 정치가 가지고 있는 변혁의 사령탑으로서의 잠재력을 높게 평가한 것입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하부구조, 즉 경제적 생산양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상부구조인 정치나 문화를 경시한 것과는 달랐습니다. 그람시는 또 이론과 실천을 통합한 논리를 개발했습니다. 그는 학문을 위한 학문, 분석을 위한 분석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그는 실천을 위한 전략으로서의 학문을 탐구한 것입니다. 열정적인 헌신과 냉철한 전략론이 합쳐진 곳에 그람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옥중 편지에서 이런 요지의 글을 썼습니다.
     
      〈나의 모든 知的 형성과정은 논쟁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나는 중립적이고 방관자적 입장에서 연구 그 자체만을 위해서 연구하지는 않는다. 나는 어떤 사유(思惟)체계에 빠져서 그 사유의 內在的인 관심때문에 문제를 분석하는 경우는 없다. 나는 어둠 속으로 돌을 던져버리는 것과 같은 의미 없는 행동을 싫어한다〉
     
      그람시는 폭력혁명적 투쟁에 못지 않게 이데올로기적 투쟁에 커다란 비중을 두었습니다. 그는「이데올로기적인 헤게모니」란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람시의 견해로는, 교육, 언론매체, 법, 대중문화 따위가 중요한 역할을 떠맡는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국가기구에 의한 물리적 강제력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시민사회 내에서 획득되는「대중의 同意」를 통해서 계급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신념, 가치, 문화적 전통, 神話 등과 같은 상부구조적 현상이 일반대중 속에 깊게 파고들어가서 기존의 권력체계를 영속시키는 한, 이에 대한 계급해방투쟁은 그런 기존 가치관에 도전하는 대항(對抗) 헤게모니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창출해내어야만 그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유연하고 개방적
     
      그람시는 사회주의 계급혁명은 하나의 사건, 혹은 일련의 사건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변해가는 하나의 유기적인 과정으로서 파악되어야 하고 사람들의 의식변혁은 사회의 구조개혁과는 결코 분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것으로서 하부구조인 경제를 중요시했는데 그람시는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의식, 관습, 가치관, 그리고 이런 것들을 유지하고 표현하는 언론, 교육, 대중문화 같은 것을 중시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자본주의 체제는 법률이나 군대와 같은 물리적 힘에 의해서 유지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가 정당하다는 가치관과 의식이 국민들 사이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유지되는 측면도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계급혁명을 성공시키려면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런 이념적 헤게모니를 국가로부터 빼앗아 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 언론, 학계, 예술, 문화 등 광범한 분야에 陣地를 구축하여 對抗 헤게모니를 전파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런 그람시의 혁명전략을 우리나라에 적용하여 체제를 변혁시키려면 대한민국이 딛고 있는 헌법적 질서와 대한민국을 뒷받침하는 애국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파괴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존재하지도 태어나지도 않았어야 했다는 역사관을 확산시키고 한국전쟁 때 대한민국을 지켜낸 국군의 역할을 용병 수준으로 격하하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는 논리를 확산시켜 재벌의 강제해체라든지, 地主타도, 재산몰수 같은 무시무시한 용어가 바로 정의로운 행동을 표현하는 것처럼 가치관을 거꾸로 돌려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일부 학자들은 해방 후 남한에서 있었던 李承晩의 농지개혁은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사실은 세계적 성공사례). 왜냐하면 地主들에게 보상을 해주고 그들의 농토를 소작인들에게 넘겨주도록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또 북한에서는 地主로부터 강제로 농토를 몰수하여 국가 소유로 했기 때문에 반동 地主계급을 청산하는데 성공했다는 논리를 폅니다. 이런 논리가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즉 사유재산을 국가가 자의로 빼앗는 것이 당연시되면 이것은 사회주의 계급혁명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란 게 바로 그람시의 전략인 것입니다.
     
      「현대의 君主」 대중정당
     
      그람시는 혁명적 변혁은 단순히 경제적 생산양식이 변해야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재의 모든 자원들을 포괄하여 총체적으로 변혁이 진행되어야만 진정한 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
      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전의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개의 경우 경제적 측면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에 그람시는 경제를 포함하면서 동시에 정치, 문화, 사회적 관계, 이데올로기 등을 연결짓는 「관계의 앙상블」이란 개념을 창안했습니다.
     
      그람시에게는 브르주아 사회의 어떤 영역도 절대로 계급투쟁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를 변혁하려는 투쟁은 모든 것을 변혁하려는 투쟁과 연결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람시는 폭력적으로 권력기관을 장악하기 위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전위조직으로서의 엘리트 黨보다는 광범위한 지배계층 및 시민들의 일상적 사회현실과 연결되어 있는 대중정당을 더 重視 했습니다.
     
      그람시는 또 혁명이 대중적으로 확산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족적인 성향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마르크스 이론의 맹목적 추종보다는 이탈리아의 현실에 맞고 이탈리아 시민들의 열망과 관습, 그리고 욕구를 드러내는 언어전술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국제 공산주의를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스탈린이 소련에 앉아서 이탈리아의 혁명전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지시를 내리는 따위의 혁명 모델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람시 전략의 특징은 非당파성과 개방성으로 설명될 만큼 아주 유연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창조물이라고 해서 무조건 경멸하거나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태도였습니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닫힌 세계 속에 자신을 가두고 소아병적인 좌익교조주의를 추구하면 그들 스스로를 대중으로부터 유리시키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처럼 그람시의 혁명론은 마르크스 - 레닌의 혁명이론보다도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종합적이고 과학적이기 때문에 유럽 같은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혁명이론으로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그람시의 전략은 계급투쟁을, 단순히 계급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민중적 이익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위장함으로써 광범위한 지지계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런 운동을 지도하는 대중 정당은 자본주의적 가치관과 문화현상에 대한 對抗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전파를 핵심적인 활동으로 삼게 됩니다. 그람시가 말하는 대중 정당은 「현대의 군주」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중세 시대의 권력을 상징하는 군주처럼 현대국가에서 그런 군주의 권력이 정당을 통해서 발휘된다는 뜻입니다.
     
      진지전과 기동전
     
      그람시의 전략론에서 핵심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기동전과 진지전입니다. 그람시의 용어사전에 따르면 기동전이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같은 정면 대결을 말합니다. 쉽게 피아(彼我)를 구분할 수 있는 두 세력이 바리케이드를 사이에 두고 격돌하다가 한쪽이 명백하게 승리하는 식의 혁명을 말합니다. 그람시는 이런 기동전이 먹힐 수 있는 사회는 후진된 사회라고 보았습니다. 국가와 시민사회의 발달이 미숙하고 정치권력이 취약하며 노동조합과 압력단체나 정당조직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단계에서는 이런 폭력적 대결로 승부를 명쾌하게 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국가가 대중적 지지 기반 위에 서 있고 대중조직들이 발달해 있으며 정부가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상황의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이런 기동전은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즉 폭력적 계급혁명 전략은 먹혀들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숙한 선진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동전이나 극적인 대결보다는 점진적이고 전면적인 陣地戰이 적합하고 기동전은 그런 진지전의 일부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기동전, 즉 War of Movement 혹은 War of Maneuver에 대비되는 진지전, 즉 War of Position은 어떤 개념을 가진 것인지 살펴봅니다. 진지전은 광범위한 전선에서 전개되는 혁명투쟁을 말합니다. 일종의 정치적 참호전입니다. 행정부, 입법부에 침투하여 진지를 만들고 그 진지를 중심으로 하여 사회주의 혁명이념 같은 對抗 헤게모니를 확산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노조, 학계, 언론계, 예술계, 종교계 등 그 사회의 모든 분야에 침투, 참호를 만든 다음에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이념을 확산시켜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람시는 이런 진지전이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유일한 교전 방식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언론, 교육 등 모든 분야에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분위기, 가치관, 학설, 예술형태, 논리, 그리고 용어를 확산시킴으로써 진지 하나 하나를 확보해가는 식으로 장기적인 투쟁을 하다가 대세가 유리하게 기울었다고 판단되면 진지에서 뛰쳐나와 기동전으로 이전하여 결정적으로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사회주의 계급 혁명을 성공시킨다는 것이 진지전 이론의 핵심입니다.
     
      그람시는 또 혁명을 어느 날 갑자기 극적으로 찾아오는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는 과정으로서의 혁명 (Revolution as Process)이란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혁명이란 것은 어떤 급격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舊사회 내부에서 시작되어 극적인 변화의 시기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사회 변화의 全과정이 혁명이란 뜻입니다. 舊사회의 질서는 혁명에 의하여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新질서가 건설된 다음에 비로소 파괴된다는 것입니다. 「과정으로서의 혁명」은 소수 엘리트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그 주체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람시의 사회주의 혁명 전략이 바로 대한민국에 지금 적용되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람시의 한국적 적용
     
      1980년대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람시의 진지전 방식의 사회주의 혁명이론은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러시아 혁명식으로 어느 날을 잡아서 폭력적으로, 또 극적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는 선진 자본주의 단계에 있으므로 사회 곳곳에 진지와 참호를 파고 침투하여 그 진지와 참호 하나하나에서 사회주의 계급혁명 이론을 전파시켜 그 분야의 이념적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투쟁을 한다. 그리하여 反대한민국적인 對抗 헤게모니가 대세를 이룰 때는 참호에서 뛰쳐나와서 기동전으로써 결정적인 승부를 건다는 식으로 그람시의 전략을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요사이 상황을 살펴볼 것 같으면 좌익 또는 좌파들이 이념적 주도권을 잡은 곳이 많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일부 언론, 학계, 학원, 사회단체에서는 지금 반공, 보수, 우익이란 말을 나쁜 뜻으로 쓰고 있고 실제로도 많은 보수세력들이 말조심을 해야 할 만큼 기가 죽어 있습니다. 반면, 일부 좌익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민주, 민족, 진보란 이름으로 위장합니다. 대다수 민족, 민주, 진보세력은 순수하지만 소수 좌익들이 들어와서 이런 좋은 말들을 악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공, 보수, 우익은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말합니다. 우리 헌법이 주장하는 기본 질서를 지키자는 것이 보수요 우익입니다. 좌익이 민주나 진보로 위장하여 대한민국을 지탱하는 세력인 보수와 우익의 기를 죽이는 데 성공하고 있다는 것은 체제를 뒷받침하는 이념적 헤게모니가 그들 손에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李承晩 대통령의 대한민국 건국과 한국전쟁 때 국국에 의한 대한민국 수호를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눈치보이고 북한편에 서서 건국을 경멸하고 국군의 역할을 미군의 괴뢰식으로 격하시키는 주장이 오히려 힘을 얻어 진보니 양심적이니 하는 평가를 받는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어느 새, 북한주민들이 당하는 인권침해나, 대한민국이 북한으로부터 당하는 수모를 거론하여 문제로 삼는 애국적인 사람들이 주눅이 들고 대한민국을 경멸하고 부정하는 목소리가 큰 흐름을 이루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현상이 일부 사회단체나 정치권, 그리고 언론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좌익들이 진지전, 참호전에서 속속 이기고 있는 결과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주변에서 지금 그람시가 말한 바의 「과정으로서의 혁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눈을 크게 뜨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국가건설기에 있는 대한민국은 지금 특정 계급이 아닌 국민 전체의 공동선(共同善)을 모색하면서 계층간의 갈등을 國益이란 보다 큰 가치 아래에서 통합하고 조정해가야 하는 역사적 단계에 있습니다.
     
      이런 국가건설단계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국가에 대한 저항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역할에 대한 정당한 평가에 바탕을 둔 애국심입니다. 일부 지식인들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국가를 비판하는 데만 열을 올립니까. 대한민국이 그동안 망나니짓만 했습니까. 歷代 정권이 밉다는 이유로 정권보다 더 큰 개념인 국가를 증오·저주합니까.
     
      지난 달 인터뷰에서 소설가 이인화씨가 말한 대로 저도 국가가 고맙습니다. 북한동포들처럼 굶어죽지 않고, 보스니아 사람들처럼 총맞아 죽지 않고, 그래도 성실한 사람이면 누구나 안전하게 살면서 행복을 추구하도록 해주는 공동체로서의 국가가 고마운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이 특정 계급을 위한 억압장치였다는 계급론적 국가관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우리는 민족사의 큰 흐름 속에서 존재하는 대한민국을 우리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19세기 유럽을 배회했던 유령의 눈을 빌어와서 조국의 현실과 고민을 분석하게 되면 한국인의 숨결, 한국사의 정신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외제(外製) 유령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오로지 사실에 근거하여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국가의 이익을 추구하는 實事求是의 정신, 이것이 바로 主體의 철학일 것입니다.  <1998년 12월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