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골의 고향 무덤을 찾아서  
     
     生歿연도만 쓰고 墓碑銘(묘비명)이 없다.  
     
     [愼鏞碩의 지구촌 이야기] 프랑스의 운명을 바꾼 드골의 고향 콜롱베  
     
    농촌마을 공동묘지 한구석에 쓸쓸하게 자리한 드골의 墓碑  
       
     공동묘지와 로렌의 십자가, 그리고 라 보아서리 저택과 기념관을 차례로 돌아보면서 드골이라는 한 인간과 콜롱베 마을과의 만남이 프랑스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세기만의 성지순례였다. 샤를 드골 대통령의 향리(鄕里) 콜롱베 레 되 제글리즈(Colombey-Les-Deux-Eglises)를 마지막으로 찾았던 것은 두 번째 파리 특파원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인 1985년 초봄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후 콜롱베를 다시 찾아가는 길도 달랐고, 프랑스와 대한민국의 위상도 과거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과거 콜롱베로 가는 길은 파리에서 국도 19번을 타고 트루아(Troyes)를 거쳐 쇼몽(Chaumont)으로 가는 4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여정(旅程)이었다. 이제는 파리에서 고속도로 5번을 이용해 클레르보(Clairvaux)를 거치면 2시간 반 정도면 도착하게 돼 있었다.
     
      드골 대통령이 스스로 권좌(權座)에서 물러나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난 오늘날, 프랑스 정치에서 골리즘은 퇴색한 지 오래다. 프랑스를 찾는 사람들은 오늘도 파리 샤를 드골(CDG) 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파리 개선문 드골 광장을 한 번쯤 경유하기는 하지만 골리즘은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난 것이다.
     
      드골 대통령이 집권하고 하야(下野)하는 11년 동안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퇴진과 군사정권의 집권으로 독재와 권위주의적 정권이 계속 집권하던 대한민국도 이제는 선진 민주국가로 태어났다. 이 같은 변화 때문인지 25년 만에 콜롱베를 다시 찾아가는 기분은 홀가분했다.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진퇴(進退)가 분명한 지도자를 부러워하면서 콜롱베를 찾았던 과거의 착잡한 심경 대신, 반세기 동안 콜롱베가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를 상상하면서 드골 대통령의 향리를 찾아갔다.   
      
      유언에 따라 '판테옹' 포기, 고향 공동묘지로  

      인구 678명에 불과한 콜롱베는 25년 전과 마찬가지의 모습이었다. 프랑스 동북부 샹파뉴 아르덴 지방의 오트마른 주에 위치한 콜롱베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드골 기념관이 개관하고, 호텔과 식당이 새로 문을 열고, 기념품 가게가 새로 들어선 것이 눈에 띄었지만, 시청과 우체국도 같은 자리에 있었고, 교회와 공동묘지 그리고 학교도 제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매년 10만명 이상의 사람이 이곳을 찾고 있지만, 겨울비가 내리던 2010년 2월 27일 콜롱베에는 10여 명의 방문객만 눈에 띄었다. 과거와 다른 것은 콜롱베 마을의 길거리가 모두 깨끗하게 포장돼 있었고, 이곳저곳에 방문객들을 위한 주차장이 마련돼 있었다.
     
      파리 특파원 시절, 가족과 또는 서울에서 찾아오는 친지와 함께 콜롱베를 찾을 때마다 맨처음 들른 곳은 항상 드골 대통령의 묘소가 있는 공동묘지였다.
    1952년에 작성된 유언장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국가 유공자들을 모시는 팡테옹을 포기하고 콜롱베 공동묘지에 구국(救國)의 영웅이자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을 모실 수밖에 없었다.

    "나의 묘비에 직책을 기록하지 말라"
     
      드골 대통령은 “나의 장례식은 콜롱베에서 가족과 마을 주민만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 주고, 정부 관료들과 정치인들은 참석하지 않았으면 한다”면서 “나의 묘비에는 내가 지녔던 직책(職責)은 기록하지 말고 단지 내 이름과 출생연도와 사망연도만 기록해 주기를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100여 개의 묘비(墓碑)가 있는 콜롱베 마을 공동묘지에서도 드골 대통령의 묘비는 구석자리에 위치해 있다.
     
      ‘샤를 드 골 1890~1970’이라는 비명 아래 ‘이본느 드 골(본명 벤드루 1900~ 1979)’이라는 간단한 드골 부부의 묘비 앞에서는 언제나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프랑스는 물론 20세기 현대사의 주역이었던 인물의 묘소치고는 너무나 단순하고 검소하며 지나치게 겸손하게 느껴지는 것이 오히려 큰 감동을 주는 것이다. 길 건너편에는 정복을 입은 프랑스 경찰관이 드골의 묘소를 지키고 있었다. 검소하고 단순하며 겸손한 묘비를 제복 입은 경찰관들이 지키고 있는 모습이 대조적으로 인상 깊게 보였다.   
      
      드골의 ‘라 보아서리’ 저택
     
      드골 자신이 “이곳은 나의 집”이라고 했던 콜롱베 저택 라 보아서리(La Boisserie)는 36년에 걸쳐 군인 드골을 프랑스의 지도자 드골로 키워낸 산실(産室)이기도 하다. 드골 대통령은 이곳에 살면서 서재에서 전쟁회고록을 집필했고, 프랑스의 미래를 구상하면서 숲속을 걸었고, 창밖을 통해 펼쳐지는 대지를 바라보면서 독일과의 화해와 유럽 통합의 꿈을 키워나갔다.
     
      5000여 평에 달하는 라 보아서리 정원과 숲은 가족과의 일상생활은 물론 드골 자신이 걷고 사색(思索)하면서 위대한 프랑스를 설계한 무대였던 것이다. 드골 대통령의 아들 필립 제독의 결심에 따라 1980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 라 보아서리는 1934년 우연한 기회로 드골이 레코 드 파리라는 신문의 안내광고를 보고 구입하게 됐다.
     
      군인 신분으로는 벅찬 저택이었지만 소유주였던 나이든 부인이 비아제(Viager·소유주에게 종신 연금 형식으로 매년 일정금액을 생활비와 부동산 대금으로 분할 지불하고, 사후에 소유권을 이전받는 프랑스의 전통 방식) 조건을 제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드골은 파리 시내나 교외에 저택을 마련할 형편이 아니었고, 막내딸 안느가 선천적 치매병(몽골리안병)을 지니고 태어나 공기 맑고 넓은 정원이 있는 라 보아서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더구나 보병장교로서 동부전선 근무가 잦았던 당시 상황에서 콜롱베는 파리와 동부전선의 중간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드골 가족에게는 안성맞춤의 저택이었다.
     
      1810년경에 건축된 부르조아 양식의 라 보아서리는 초기에는 맥주 제조 공장이었다가 12개의 방이 있는 2층짜리 저택으로 개조됐다. 아래층에 있는 3개의 큰방은 드골의 거실과 집필실 그리고 집무실로 사용됐다.
     
      25년 만에 다시 찾아온 라 보아서리는 과거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감회는 확실히 달랐다.
    외견상으로 다른 것은 드골 대통령이 회고록을 집필하다가 1970년 11월 9일 심장마비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던 탁자가 집필실 입구에 전시되어 있을 뿐이었는데도 느낌이 달랐던 것이다.
     
      양쪽 서가(書架)를 채우고 있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서적들과 프랑스 대통령으로 11년간을 집권하면서 격동의 20세기 중반에 각국의 지도자들과 만나는 사진들이 저택 주인의 위상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라 보아서리가 의미하는 또 다른 측면이 새롭게 연상됐다.  
      
      특파원 시절 인상 깊었던 드골 대통령의 落鄕 모습
       
      정치인 드골은 콜롱베에 저택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위대한 프랑스를 설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곳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직후 영국으로 건너가 자유 프랑스 운동을 벌이고 1944년 연합군과 함께 파리에 입성했던 드골은 프랑스 해방의 영웅이 되었지만, 2년 후 정쟁(政爭)의 소용돌이를 뒤로 하고 콜롱베로 은퇴했다. 1957년 알제리 전쟁으로 조국 프랑스가 그에게 대권(大權)을 맡길 때까지 11년 동안 드골은 콜롱베에서 대부분이 농부인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살았다.
     
      크고 작은 마을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 동네의 관혼상제(冠婚喪祭) 행사에도 앞장섰고, 주민들에게는 라 보아서리 대문을 항상 열어놓았다. 부인 이본느 여사도 콜롱베의 여인, 어린이들과 항상 함께 지냈다. 프랑스의 영웅 드골 가족이 콜롱베라는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소시민들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11년 동안 지켜본 프랑스 사람들은 인간 드골에 대해 신뢰를 갖게 되었고, 존경하게 되었던 것이다. 콜롱베에서 칩거하던 11년 동안 드골은 프랑스국민연합(RPF)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파리를 찾았고 지방여행도 했지만, 콜롱베의 라 보아서리에서는 정치인들을 만나지 않았다.
     
    국민투표 부결되자 다음 날 대통령 궁 떠나 

    필자는 파리 특파원 임무를 막 시작할 당시 드골 대통령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상원과 지방 조직 개편을 묻는 국민 투표가 근소한 차이로 부결되자 TV생중계 연설을 통해 “프랑스 국민들의 (국민투표에 대한) 반응이 나의 운명을 결정하게 만들었다”면서 “내일 12시를 기해서 공화국 대통령 권한을 중지한다”고 선언했다.
     
      다음날 엘리제 궁을 떠난 드골의 승용차가 콜롱베를 향해 달리는 전(全) 과정을 프랑스 TV들은 생중계했고, 파리시내 카페에서 이를 지켜보는 프랑스 사람들의 표정과 눈물을 닦던 여성들의 모습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더구나 군사정권의 장기 집권이 국제적인 비판을 받고 있던 한국의 젊은 언론인으로서 대통령직을 던진 후 콜롱베 마을에 도착해 주민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는 모습을 보고 부러움과 감동을 함께 느꼈던 기억도 생생하다.
     
      때로는 오만하고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던 정치인 드골을 하나의 촌로(村老)이자 항상 향리로 돌아가는 순수한 자연인으로 만들어준 것은 라 보아서리였던 것이다.
     
      방문객도 뜸한 라 보아서리의 서재와 집필실을 둘러보고 정원으로 나와서 평소 드골 대통령이 산책과 사색의 시간을 보냈던 숲속을 걸으면서 이제는 민주국가 대열에 합류한 한국인으로서 열등감 없는 편안한 느낌이었다.  
      
      기념관에는 정치인 드골의 11년 업적이 ‘가득’
       
      2008년 10월 11일에 개관한 드골 기념관은 로렌 십자가가 있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500평이 넘는 전시실에는 드골의 탄생부터 군인시절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드골의 역할과 업적이 방대한 자료들과 함께 최신기법으로 실감나게 전시돼 있었다. 수많은 자료와 전시물 가운데 인상적이었던 것은 군인 출신 정치인 드골이 11년 동안 집권하면서 프랑스를 경쟁력 있는 현대산업국가로 변모시켰다는 대목이었다.
     
      원자력 기술과 우주항공 산업의 미래를 일찌감치 간파하고 고속전철과 통신 산업에 중점 투자했던 대목을 통해서 안목 있는 지도자의 면모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1957년 5공화국 새 헌법에 따라 대통령에 취임한 후 앙드레 말로를 문화성 장관으로 임명하고 줄곧 문화성을 프랑스 정부의 수석 부처(部處)로 우대하면서 ‘문화 대국(大國)’의 기반을 닦았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위대한 프랑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문화, 예술이 함께해야 한다는 드골 대통령의 신념에 따라 앙드레 말로 장관은 수많은 예술가와 함께하면서 프랑스를 문화대국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던 기록과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었다. 특히 생전(生前)의 마크 샤갈과 파블로 피카소와 자주 만났던 앙드레 말로 장관은 그들과의 특별협약으로 사후(死後)에 상속세를 면제하는 조건으로 미술관을 만들어낸 일도 사진과 자료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다.
     
      드골 대통령의 또 다른 업적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고 있는 불·독 화해와 유럽 연합 구상 역시 기념관 전시의 주요 주제로 되어 있었다.
    드골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 1958년 9월 14일 당시 서독 수상 콘라드 아데나워와 역사적인 불·독(佛獨)정상회담을 열고 근 2세기에 걸쳐 전쟁으로 상처 입은 두 나라가 화해를 모색하고 우호협력관계를 설정해 나가자는 데 합의하기에 이른다.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프랑스가 해방된 지 14년 만의 일이었다.
     
      ‘불·독 우호 협력 조약’의 체결에 따라 프랑스와 독일은 과거의 적대관계를 우호·협력 관계로 승화시키고 유럽연합의 모태가 된 유럽공동체(EEC)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드골과 아데나워의 공통된 역사관과 가치관이 없었다면,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연합(EU)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시장에 크게 확대돼 걸려 있는 두 나라 지도자의 사진을 보면서 유럽통합의 길을 만들어낸 노(老)정치인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콜롱베를 찾는 독일 사람들 
       
      근 3시간에 걸친 드골 기념관 관람을 끝내고 콜롱베 마을로 돌아와 오스테러리 라 몽태인 식당에서 저녁을 들었다. 공동묘지와 로렌의 십자가, 그리고 라 보아서리 저택과 기념관을 차례로 찾아보면서 드골이라는 한 인간과 콜롱베 마을과의 만남이 프랑스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6년 정계에서 은퇴했던 드골이 콜롱베에 돌아와 11년간을 칩거(蟄居)하지 않고 파리에서 지냈다면 과연 1957년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까? 프랑스의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서민과 같이 살면서 위대한 프랑스의 설계도를 그리고, 깊은 사색과 사려 깊은 행동이 없었다면 프랑스 국민들은 드골에게 또다시 정권을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식사를 끝내고 주인 장 밥티스트 나탈리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매년 콜롱베를 찾는 사람들이 10만명이 넘는다는 것, 그리고 독일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찾아와서 드골 대통령에게 경의(敬意)를 표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탈리 씨는 “콜롱베에서 태어나서 어렸을 때부터 드골 대통령을 가까이 그리고 자주 보았다”고 말하면서 “이곳을 성지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식사를 제공하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25년 만에 다시 찾은 콜롱베를 떠날 때는 밤 9시가 넘었을 때였다. 로렌의 십자가 아래 위치한 드골 기념관을 뒤로하면서 우리도 이승만 기념관, 박정희(朴正熙) 기념관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