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세때 '독립정신' 제3항---약소국이 살길은 외교다

    당대는 물론 오늘날도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외교의 신’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이승만처럼 외교에 능한 인물도 없었고, 나라의 권리를 보호하고 강하게 하는 근본이 외교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꿰뚫은 인물도 없었다. 이승만은 고종폐위사건에 연루되어 한성감옥서에 수감 중이던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자『독립정신』을 썼다. 그때 그의 불과 29세였다.

    이승만은『독립정신』에서 독립을 떠받치기 위해 필요한 6개의 실천사항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세 번째 실천사항은 강대국 사이에 있는 약소국이 국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외교가 매우 중요하므로 외교를 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외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원칙과 법을 기준으로 모든 나라를 공평하게 대해야 하며, 외국과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그 나라들과 공통된 특성을 갖도록 노력해서 그들과 같은 그룹에 속하도록 노력하고, 진실함을 외교의 근본으로 삼으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법에 의해 심판을 받도록 하여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고 했다. 이승만이 독립정신에서 제시한 외교 철학은 건국 후 통치기에 이승만 특유의 소신(所信)있는 자주외교로 실천되었다.

    폴케네디의 지적 "한국의 살길은 외교다"

    8월 1일『강대국의 흥망』으로 유명한 폴 케네디 예일대 석좌교수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두 가지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며, 북의 ‘미친 정권’과 4대강국의 포위를 들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도전 때문에 한국은 특히 외교를 중시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우리나라 언론은 폴 케네디 교수의 충고가 새롭고 획기적인 국가 생존전략이라도 되는 듯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청년 이승만은 이미 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우리의 생존전략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외교로 독립운동 방략(方略)을 삼고, 미국의 유력한 정치인들과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국제사회의 냉엄함과 외교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체험했다.

    사람들은 이승만을 일컬어 미국의 정책결정 과정을 미국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것은 미국에서 교육받고 미국에서 오랜 망명생활을 하면서 정치·사회문제에 관해 미국적 사고를 하게 된 영향도 컸다. 그러나 우리의 독립은 전적으로 미국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때를 대비하여 미국 정부와 미국 여론을 확실하게 잡아두어야 한다는 외교독립론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체득한 것이다.

    미국에 한수 가르쳐준 외교전략들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분석·예견할 수 있는 이승만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적시에 외교적 노력을 펼침으로써 서구 열강들의 한국 독립에 관한 정책에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승만은 해방 후 독립정부 수립 과정에서 한국문제의 UN 이관을 위한 외교를 추진했다. 혹자는 이승만의 외교적 노력으로 미국이 한국문제를 UN에 이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미국이 이승만의 주장을 뒤따라오는 모습이 된 것이다. 오히려 이승만이 미국을 리드했다고 즉, 미국이 이승만의 정책을 받아들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기간과 건국운동 기간 그리고 건국 이후에도 끊임없이 미국에 극동정책의 방향을 제시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승만을 무시했고, 그 결과 미국은 6·25사변과 중국의 공산화, 월남전 등을 통해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러므로 미국을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했다는 친북좌익들의 주장은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

    지미(知美)였기에 용미(用美)가 능한 자주외교

    오늘날 우리나라에는 이승만의 뛰어난 외교 전략으로 말미암아 자유대한민국이 건국되고, 6·25사변을 극복하여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하도록 기초를 놓았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풍토가 만연(蔓延)해 있다. 친북좌익분자들과 그 아류(亞流)들은 이승만을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폄훼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대미외교는 철저하게 국익에 바탕을 둔 용미(用美)·지미(知美)의 자주외교였다.

    독립운동 기간 중 이승만 외교의 특징은 미국대통령들과 직접 담판하는 스타일의 '정상급' 외교였다. 이승만이 만났던 미국의 대통령은 데오도어 루즈벨트,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루즈벨트, 트루먼, 아이젠하워 등으로 이들은 모두가 이승만 박사의 교섭대상이었다. 이렇게 이승만은 고차원 외교를 펼쳤다.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전법

    건국 후 통치권자로서의 이승만 외교의 특징은 성동격서(聲東擊西)격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한 ‘반공포로 석방’과 일본 견제를 위한 ‘평화선 선포’ 등의 사례가 있다. 또한 국익을 위해서는 미국 대통령을 향해서도 할 말은 하는 소신과 배짱을 가졌다. 세계 최빈국(最貧國)이며 약소국(弱小國)의 대통령이었으나 국가의 자존심과 국익이 걸린 일에는 절대로 굴하지 않았다.

    휴전회담이 시작된 지 1년이 넘었으나 회담은 진전이 없고, 全전선(戰線)은 교착상태에 놓여있었다. 1952년 12월 2일, 미국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가 선거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의 방한 일정은 철저하게 비밀에 싸여 있었다. 아이젠하워 측의 연락을 기다리던 이승만은 3일 오후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을 대동하고 미8군에 있는 아이젠하워를 방문했다. 그리고 아이젠하워를 위한 환영행사를 마련하겠으니 참석해달라며 초대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로부터는 답방에 대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한국을 떠나는 날, 경무대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승만에게 아이젠하워로부터 시간 관계상 고별인사를 하지 못하고 떠난다는 연락이 왔다. 우방국을 대하는 아이젠하워의 이러한 행동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대단한 외교적 결례였다. 아무리 약소국일지라도 방문 당사국의 대통령과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이젠하워의 무례함도 고쳐주고

    이승만은 약소국의 처지에 비애(悲哀)를 절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평생을 투쟁해온 이승만으로서는 대한민국을 멸시하는 데는 참을 수 없었다. 아이젠하워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난 이승만은 즉각 아이젠하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귀하가 이곳에 오지 않는다면 본인은 곧 국무위원들을 집무실에 불러들여 직접 성명을 발표하겠다. 본인은 성명서를 통해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장군이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가면서 한국 원수에 대한 고별인사의 예의를 하지 않고 떠난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공표할 생각이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마지못해 잠시 경무대를 방문한 후 이한(離韓)했다.

    아이젠하워와의 불화는 1954년 7월에 있었던 이승만의 미국 방문 중 개최된 한미 2차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측 성명서 초안으로 말미암아 재발했다. 미국의 지역통합전략에 따라 한일 관계 정상화가 필요했던 미국으로써는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지나치게 일본에 치중되고 있다고 지적해왔던 이승만에게는 몹시 불쾌한 일이었다.

    하나의 카드로 두개의 문제 양면격파

    한표욱은『이승만과 한미외교』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결국 이 대통령은 회담예정시간보다 6~7분 정도 늦었다.…회의장에 앉자마자 두 정상은 시비를 벌이기 시작했다.…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어제 귀국의 헌병사령관인 원용덕 장군이 휴전협정에 따라 나와 있는 중립국감시위원단의 공산측인 체코와 폴란드 대표를 내쫓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이 대통령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되받았다. “도대체 그들은 스파이입니다. 우리 군사기밀을 정탐하는 데만 활동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서는 한층 톤을 높여 말하기를 “더군다나 걱정스런 것은 이들은 미국이 제공한 헬리콥터를 타고 우리나라의 방방곡곡을 다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8군 시설까지 정탐하고 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옆에 앉은 헐 사령관에게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헐 장군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잠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과의 2차 정상회담 직전에 서울에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의 공산측 대표단을 내쫓게 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치밀한 계획 하에 단행한 외교적 술수였다. 이 대통령은 틀림없이 미국측이 일본문제를 꺼낼 것을 예상하고 그에 대한 카운터펀치로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을 단행한 것이었다.

    1954년 7월 31일, 이승만은 아이젠하워와의 회담 후 한국전 휴전은 사문화(死文化)되었다고 선언하고, 중립국감시위원단 소속 2개 공산측 대표의 축출을 미국에 요청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15일에는 공산측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 의사를 언명(言明)했다. 1955년 8월 25일,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 시위운동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대해 발표한 담화문에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방위대책의 하나는 중립국감시위원단 그늘에 숨어서 그들의 활동을 은폐하고 있는 체코, 폴란드 그리고 소련의 밀정들을 제거하는 데 있다.” 라고 언급했다.

    이와 같은 몇 가지 기록을 근거로 봤을 때 한표욱의 해석보다는, 이승만에게는 우리나라의 안전을 위협하는 공산측 중립국감시위원단을 나라 밖으로 내쫓으려는 의도가 더 강했다고 유추(類推)할 수 있다. 즉 성동격서격(聲東擊西)의 외교전략으로 애초에 목적했던 중립국감시위원단 축출의 근거를 마련하고, 미국 측의 일본관련 대한(對韓)정책에도 제동을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의 정치고문이었던 올리버(Robert T. Oliver) 박사는 그의 책『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에서 “인간 이승만은 새로운 한국의 창설자, 아시아 민주주의의 매개자, 때로는 미국의 의지에 반(反)하면서까지 미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 수호를 위해 온 힘을 다한 인물로 정의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휴전이후 세계 여론은 이승만에게 더 이상 얻어낼 것이 없는, 자기의 목적 달성에 실패한 ‘고집 센 노인’으로 여겼다.

    중동-아프리카 신생국에 "공산화 막는 방법 가르쳐주자"

    하지만, 철저한 반공투사로 자유진영의 최전방에서 투쟁했던 약소국 대통령 이승만에게는 새로운 외교적 비전(vision)이 있었다. 2차대전 이후 독립한 중동·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는 것이었다.

    약소국(弱小國)의 대통령으로서 공산주의 확산을 저지하는 세계적인 자유투사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일화를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 후 57년 초 무렵이다. 경무대에서 급히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나는 이 박사 덕분에 육군 제2사단장, 연합참모회의 본부장, 국방부 동원차관보를 거쳐 육군본부 관리부장을 지내고 있었다.

    이 박사는 나를 보자마자 “중동하고 아프리카에 대통령 특사로 다녀오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평소부터 대통령 특사로 외국에 나가려면 아무래도 참모총장과 국방장관 등을 지낸 인물이 적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나이도 어리고 선배님들도 계신데…”라며 머뭇거리자, 이 박사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할 일이 있고, 자네는 자네대로 거기에 다녀오면 돼”라고 못을 박았다.

    …이 박사는 내 앞에서 일사천리로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특사로 바깥에 다녀올 마음의 준비를 하게. 이제부터는 공산당과 싸운 경험을 세계와 나누는 일이 중요해. 중동지역 국가들은 알라신이 공산주의를 막아준다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들에게 공산당과 싸운 경험을 전해 주고, 조언해 주는 것이 한국 외교에서 아주 중요하다네. 자네처럼 젊은 군인이 적임자야. 그리고 가는 길에 오키나와에 들러 따끔하게 독립정신을 일깨워줄 필요가 있네. 오키나와가 원래 대한민국과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 사람들이 또 일본 치하에서 살려고 그러는 모양일세(당시는 미군정). 그들에게 우리의 예를 들면서 독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주게.”

    이를 계기로 나는 이 박사를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서 별 영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박사의 생각은 달랐다. 어떤 정치인과 관료들도 엄두를 내지 못할 때 그분은 자유민주주의를 세계에 전파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생각이 넓고 깊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전쟁을 치러본 젊은 장군을 ‘특사’로 내보내려고 마음먹은 것도 남달랐다. 요즘 젊은이들이 이 박사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면서 저평가하고 그러는데, 내가 아는 이승만은 요즘 우리 젊은 세대들보다 민족의 장래를 훨씬 멀리 내다보고, 깊게 생각하는 분이었다."

     전세계가 공산주의를 모를때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국익 우선의 자주외교를 펼쳤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은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대공유화정책(對共宥和政策)을 펼쳤고, 오히려 이승만의 강력한 반공주의를 비난했다.

    1953년 5월 30일, 이승만은 UN의 대공유화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국제연합의 新제안은 유화적이며 굴복적인 것이니 이는 필경 全자유세계에 심각한 불행을 초래할 것이며 우리는 여기에 실망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한국국민을 실망시킨다는 것은 全세계의 반공주의자들을 실망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미국은 장차 공산주의사막(砂漠)에서 홀로 자기는 민주주의적 오아시스라고 자처할 것인가?”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공산주의자들과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로부터 적으로 낙인이 찍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대로 이 땅에 자유민주국가를 건설했다. 그리고 6·25사변이라는 자유세계와 공산주의와의 극한투쟁의 현장에서 용감하게 투쟁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 이러한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약소국 대통령으로 머물지 않고,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선도(先導)하는 외교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또한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모르는 중동·아프리카 지역에 자유민주주의를 전파하려고 한 외교적 노력은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