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모도 없고 군번도 없다.
    그리고 선 자리, 누구 하나 오라고 부른 이도 없다.
    적의 총구 앞에 선 그들은, 책가방만 안 든 교복 차림이었다. 
    언제 이 무거운 M1 소총을 구경이나 하였던가?
    교복 단추 구멍의 수류탄은 옷을 찢을 듯 무겁기만 하다.
    어둠은 무섭다. 그리고 소리 없이 다가오는 적은 더 두렵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여기를 지켜야 한다.
    포항을 잃으면 부산도 잃는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가 갈 곳은 바다 밖에 없다. 나라를 자유를 잃는다.
    차마 그럴 수 없어 여기를 지켜야 한다.
    무섭고 두렵지만, 나를 버려서라도 지켜야할 내 나라,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5일 오후.

  • ▲ 포항지구 전전비 ⓒ 뉴데일리
    ▲ 포항지구 전전비 ⓒ 뉴데일리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가파른 경사의 254 계단. 그리고 동해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그들은 무궁화 꽃에 둘러싸여 있었다.

    포항 전몰학도 충혼탑. 국가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처했던 1950년 8월, 그들은 자원입대를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부르며 장렬하게 산화했다. 전몰학도 충혼탑은 포항에서 산화한 1349위의 영혼을 모신 곳이다.

    1950년 8월 초 국군 3사단(사단장 김석원)은 포항을 노리는 북한 5사단과 이곳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지금 포항여고 자리에 있던 포항여중은 3사단의 후방 지휘소였다. 3사단에 배속된 학도병 71명이 후방지휘소를 지키고 있었다.

    8월11일 후방으로 잠입한 북한군이 후방지휘소를 급습했다. 소총도 제대로 못 다루던 학도병들은 이들과 백병전으로 맞섰다. 적의 1차 공세를 물리친 군번 없는 병사들은, 그 새벽 장갑차까지 동원한 적의 공세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리고 김충식 등 47명이 희생됐다. 단일 전투로는 가장 큰 희생이었다. 부상 13명. 포로가 된 10여 명은 적에게 끌려가다 탈출해 다시 총을 들었다.

    당시 학도병이던 이우근 역시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가 남긴 수첩에선 부치지 못한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가 발견됐다.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어머니.
    적은 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팔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중략>

    저는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듯
    적이 덤벼들 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 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이제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어제 저는 내복을 손수 빨아 입었습니다.
    그런데 청결한 내복을 갈아입으며
    왜 수의(壽衣)를 생각해냈는지 모릅니다.
    죽은 사람에게 갈아입히는
    수의 말입니다.
     
    어머니
    어쩌면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어머님도 형제들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중략>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6-25 전쟁 중 최악의 전황이던 1950년 8월 자원입대를 시작한 학도의용군은 모두 5만여 명. 조국의 위기를 구하고자 달려온 재일 유학생도 641명이었다. 이들 재일 유학생들은 인천상륙잔전에 전원 참가했다.

    학도의용군 중엔 전장 일선에 나선 이도 있었고 후방에서 잔당을 소탕한 이들도 있었다. 1951년 2월 해산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이 땅에 7000여 명이 붉은 꽃잎으로 떨어졌다.

    이번 6-25 낙동강 최후 보루 전적지 답사를 이끄는 백한기 6-25남침피해유족회 회장은 “이분들의 숭고한 희생으로 오늘 이 나라가 존재하는 것”이라며 “이 분들이 목숨과 맞바꾼 조국, 그리고 자유의 의미를 오늘의 젊은이들이 깊게 생각하고 고민해야 한다”고 충혼탑 앞에서 머리를 숙였다.

    탐사에 참가한 이민영(세종대 3년)씨는 “선배들의 고귀한 희생에 한없이 지금 우리 모습이 부끄러워진다”며 “이 분들이 지켜준 이 나라에 사는 젊은이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 ▲ 북괴군의 침략으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교복차림으로 군문을 찾은 학도병들. 이들은 교복 차림 그대로 소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갔다가 7000여명이 조국의 산하에 붉은 꽃으로 떨여져 갔다. ⓒ 뉴데일리
    ▲ 북괴군의 침략으로 조국이 누란의 위기에 처하자 교복차림으로 군문을 찾은 학도병들. 이들은 교복 차림 그대로 소총을 들고 전선으로 나갔다가 7000여명이 조국의 산하에 붉은 꽃으로 떨여져 갔다. ⓒ 뉴데일리

    포항시가 지난 2002년 지은 이곳 학도의용군전승기념관엔 학도의용군 유품, 활약상 사진 등 각종 자료를 전시해 놓고 있다. 하지만 이곳의 공식 기록인 71명 외에도 학도병들은 또 다른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그리고 전사한 것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억울한 학도병도 많다. ‘포항시사’에는 ‘포항 북쪽 양덕동 무당골에만 까만 교복을 입은 학도의용군 100여 명이 전사, 그 골짜기를 새까맣게 물들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학도의용군에 대한 국방부의 정확한 기록 정리 역시 내년 6-25 60주년을 앞두고 시급한 실정이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이용석 중령은 “유해 발굴 과정에서 교복 모표나 단추가 발견되면 너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현역병의 희생도 안타깝지만 학도병들의 유해를 보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는 것이다.

    가진 것은 의로운 기백 뿐, 그대로 육탄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섰던 학도병들은 푸른 동해 물결을 바라보며 누워있다. 그들이 꽃잎으로 떨어질 때, 그 나이 누구에게나 사랑스러울 열일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