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소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는 국군 최후의 전선 낙동강 방어선이다. 여기가 밀리면 부산! 부산이 밀리면 해운대 앞바다에 빠져 죽는 길 뿐이다. 후퇴는 없다! 후퇴하면 내 손에 죽는다.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에서 살아남는다.”

  • ▲ 다부동 전투 모습. ⓒ 뉴데일리
    ▲ 다부동 전투 모습. ⓒ 뉴데일리

    1950년 8월. 북한군은 5개 사단을 대구 방면에 집중 투입했다. 전차로 화력을 증강된 보병 3개 사단이 상주~다부동~대구 축선에 전개됐다.

    국군 제1사단은 낙정리와 청계동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다 8월 12일 대구 방어의 요충지인 다부동, 328고지, 유학산, 741고지를 잇는 선으로 이동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 유명한 다부동 전투의 시작이었다.

    제1사단 장병과 학도병, 경찰, 노무자들은 구국 일념으로 혈전을 반복했다. 1사단 단독으로 주 저항선을 사수하다 국군 제10연대와 미 제23, 27연대를 증원받아 북한군 3개 사단을 격멸, 일방적으로 밀리던 전황을 되돌렸다.

    백선엽 당시 사단장(전 육군 참모총장)은 “8월 3일부터 12일까지 1사단이 낙동강 연안 방어전투에서 거둔 전과는 적 사살 6867명이었고, 8월 13일부터 30일까지의 다부동 전투 때 또 5690명으로 기록됐으니 8월 한 달 동안에만 1만2000명이 넘는다. 노획한 적 장비는 소총 2297정, 기관총 354정이었다”고 회고했다.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국군 2016명, 미군 1282명, 경찰 111명 등 총 3409명 전사. 피로 지켜낸 낙동강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1사단 11연대 대전차포중대에서 싸웠던 손관호(79)씨는 “보병은 한번의 치열했던 전투를 치르고 나면 귀대하는 인원은 10%에 불과했을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 다부동 전적 기념관. ⓒ 뉴데일리
    ▲ 다부동 전적 기념관. ⓒ 뉴데일리

    7월6일 오전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전적기념관을 찾은 ‘6.25남침피해자유족회(회장 백한기)’ 6.25 낙동강 최후 보루 전적지 답사단원은 경건한 마음으로 순국 호국영령들에게 묵념을 올렸다.

    (사)6.25남침피해자유족회는 6.25 당시 소중한 가족을 적의 총칼에 잃은 이들의 모임이다. 이들 중엔 가족 14명이 한꺼번에 북한군 등의 죽창에 무참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다.

    “다부동에서 싸운 용사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나라도 자유도 잃었을 겁니다. 비록 우리는 소중한 가족을 잃었지만 나라를 지켜준 이 분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극성스런 더위에도 이들은 순례자처럼 경건한 발걸음이었다.

    주위를 둘러싼 산은 이제 초록을 회복했지만 그야말로 가파른 험산이었다. 저 고지들이 몇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던가.

    당시 제1사단 12연대장이었던 김점곤 중령은 수암산(519m)에서 유학산까지의 약 8km 지역 방어를 맡고 있었다.

    “왜관~다부동 전선은 대구를 점령하려는 적 4개 사단의 주공전선이었고 국군에게도 주저항선이며 최종 방어선이었어요. 유학산은 낙동강 남안에 넓게 퍼진 돌산인데 정상을 중심으로 바위틈에 양쪽 병력이 교착돼 주로 수류탄전이 벌어졌습니다. 수류탄을 하루 종일 던지는 끝없는 소모전에 사병들의 오른팔 어깨가 퉁퉁 부은 지경이었어요.”

    김점곤씨는 “신임 소위가 후방에서 보충돼 오면 유학산 꼭대기까지 자기 소대를 찾아 어떻게 올라가느냐가 문제였어요. 카빈을 메고 올라가다가 적 포탄에 많이 희생됐어요”라고 회고했다.

    “소대장과 분대장이 모자라 하사관을 현지 임명하고 연대본부요원 150명을 분대장 또는 소대장으로 임명, 전선으로 내보냈어요. 그 대신 150명의 여고생으로 후방요원을 충당했습니다.”

    이런 고비 끝에 결국 적 4개 사단은 이곳 다부동에서 전멸했다.

    전적비와 당시 쓰인 장비를 둘러보던 6.25남침피해자유족회 회원들은 “아직 밝은 빛을 보지 못한 미발굴 전사자 유골도 빨라 수습해야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한 회원은 “땅굴 견학도 중요하지만 우리 병사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은 이곳을 젊은이들이 찾아, 왜 이들이 여기 누워야 했는지 되새겨보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백한기 회장은 “6.25가 언제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젊은이가 태반이라는 말을 들으면 기가 막힌다”고 한탄하고 “낙동강 방어선 견학이 젊은이들의 안보투어로 정착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백 회장 역시 6.25전쟁에서 아버님을 적에게 잃었다. 당시 중학생으로써 백골유격대를 조직, 빨치산이 장악하고 있던 고창 일대를 수복한 혁혁한 무공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곳에 와보면 좌파 정권 10년 왜곡된 이념교육을 받았던 젊은이들 눈빛이 달라질 것”이라고 백 회장은 덧붙였다.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유학산 9부 능선,
    폐허가 되어 사라진 토담집처럼
    다 허물어간 참호 안에서
    살며시 고개 내민 나지막한 패랭이 꽃,
    그 아래 부서진 청석 돌 틈에서 귀뚜라미가 운다.
    살아서 건강하게 돌아오겠다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기고
    달빛 타고 하늘로 올라간
    어느 젊은 군인의 영혼이 내려앉은
    꽃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는 것처럼
    노을이 채 지지도 않는
    어스름한 초저녁부터
    귀뚜라미가 울고 있다.

    ---김용수 시 ‘그해 여름(유학산)’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