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석영 논란'이 확대일로다. 대표적 진보 지식인인 황석영씨가 이명박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에 동행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현지 기자회견에서 황씨는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한국 진보의 퇴행성을 꼬집고 현 정권을 "중도실용정부"로 규정한 뒤 "큰 틀에서 동참해서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했다. "광주사태 같은 사건은 우리에게만 있는 줄 알았더니 영국도 있었고 프랑스도 있었으며, 때가 되면 다 있는 것이더라"는 말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진보 진영은 분노했다. 황씨의 돌출행동이 일종의 '코미디이며 술 취했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고 노망든 것'이라는 힐난은 차라리 점잖은 편이다. '기억력이 2초인 금붕어도 아니고 호모사피엔스'라는 황석영이 바로 얼마 전까지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던 스스로의 삶을 부인하는 싸구려 개그를 하고 있다는 비난이 이어졌다. "작가 한 사람의 변절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민노당은 "갈 테면 가라"고 선언했다.

    보수 진영에서도 황당하다는 평가가 많다. 오랫동안 민중운동의 문화 전사(戰士)로 싸우다가 북한까지 가서 김일성에게 환대받은 황석영의 변화가 '일종의 훼절'이라는 것이다. '노벨상을 받는 데 필수적인 정부의 협조를 얻기 위한 퍼포먼스'로 보는 논자도 있다. 시민의 반응도 대부분 부정적이다. 우리 역사에서 낯익은 변절과 배신의 계보에 황씨가 새롭게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카자흐스탄 간담회에서 "욕먹을 각오가 돼 있다"며 기염을 토하던 '천하의 황구라'도 폭포수 같은 비판 앞에 위축된 모습이다.

    그렇다면 황석영 논란은 하나의 '노이지 마케팅'인 것일까? '몽골+두 코리아' 구상을 바탕으로 동북중앙아시아 연합을 외치는 작가의 꿈은 스스로 인정하듯이 '메시아 콤플렉스'에 빠진 전직 민주투사의 광상곡(狂想曲)인가? 유럽과 러시아를 거쳐 중앙아시아와 중국대륙을 관통해 평양과 서울로까지 이어질 평화열차 세계작가포럼을 성사시켜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는 데 일조하려는 그의 바람은 과대망상에 지나지 않는가?

    거두절미된 황석영씨의 행보에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다. 민감한 시기에 정제되지 않은 발언이 설화(舌禍)를 불렀다. 좌우를 불문하고 쏟아지는 비난의 십자포화는 상당 부분 자업자득인 것이다. 그러나 황씨의 말과 문제의식에는 경청할 부분도 적지 않다. 예컨대 한국 진보와 보수의 낙후성에 대한 지적은 통렬한 바 있다. 세계사의 흐름에 뒤처진 구닥다리 이념대결의 불모성에 대한 반성도 마찬가지다.

    황석영 논란의 배경에는 한국사회의 고질병인 편 가르기와 당파성의 관습이 작동한다. 피아(彼我)를 갈라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다. 나의 반대편에 서 있으면 적으로 낙인찍고 중간에서 어른거리면 기회주의자로 간주한다. 물론 싸움의 당사자들은 아름답게 치장한 명분과 정의를 앞세운다. 이때 이해관계와 권력의지의 발톱은 최대한 은폐된다. 이는 익숙한 세상풍경일 수도 있다. 문제는 습관화된 진영논리가 입체적 사유와 자유로운 상상력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우리 편'이라 믿었던 황석영이 '적에게 투항했다'는 극렬한 반응이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황석영씨는 "현 정부가 성공하는 게 국가·사회적으로 나쁜 일인가"를 물었다. 이명박 정부를 척결해야 할 적이나 악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이는 성가신 질문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선출된 모든 정부는 성공해야 할 정치적 책임윤리를 갖는다. 정권의 실패는 곧 보통사람들의 고난과 고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황씨는 현 정부의 성향을 중도실용이라고 한 데 대해 립서비스가 개입했음을 시인했다. '가진 자' 위주의 정책을 펴온 이 정부가 국민의 여망과 다른 길로 치닫고 있음을 여권에서조차 인정하는 상황에서 당연한 고백이다.

    그러나 이번 논란이 "막힌 남북관계를 풀려는" 뜻에서 비롯됐다는 황석영씨의 충정은 존중할 수 있다. 이벤트성 사업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지만, 고 정주영 현대회장의 999마리 소 떼 방북처럼 현상을 타개하는 이벤트가 필요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내년 상반기까지 대북문제를 풀려는 노력이 없을 때" 현 정권에 대한 기대를 접겠다고 그는 공언했다. 탤런트 기질이 다분한 황씨에게 '놀고 있네'라고 매도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모두에게 비난받는, "백척간두에 선 광대의 심정"을 토로한 그를 '놀게 놔두는' 것도 의미가 있다. 봉산탈춤의 창시자로 그려진 장길산처럼 광대에게는 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