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느 외교관의 이야기 ⓒ 뉴데일리
    ▲ 어느 외교관의 이야기 ⓒ 뉴데일리

    이 책의 매력은 우리 현대 외교 역사의 현장에서 저자가 직접 겪은 사실들을 꾸밈없이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1990년 9월 소련과의 수교를 앞두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났던 때를 저자는 이렇게 회상한다.

    몇 년에 걸친 우리의 끈기 있고 성의에 찬 접촉이 결국은 크렘린을 움직여서 소련으로부터 한․소 정상회담에 동의한다는 통보가 온 것은 5월 22일이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다음 달 워싱턴 방문 후 귀국하는 길에 6월 4일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기로 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노 대통령과 만나서 양국관계 발전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자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온 것이다. 외교관계가 없는 국가 간의 정상회담인데다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가 확정되지 않았고 의제나 순서 등 의전 절차도 미정인 상태에서 노 대통령은 관계 참모들만을 대동하고 6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서 고르바초프가 묵게 되어 있는 페어먼트 호텔에 투숙했다.
    “전화가 왔습니다. 곧 만나자고 합니다.”
    우리는 본관 7층에 있었는데 신관 23층으로 오라고 한다기에 부리나케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로비에는 미․소 양측 경호원, 행사 요원, 취재 기자들, 구경나온 호텔 투숙객들로 시장판같이 북적대고 있었다. 우리는 미국 측 경호원의 안내로 신관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소련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수행하는 우리들의 머릿수를 하나씩 세더니 “다섯 명만!” 하면서 막아섰는데 그들의 태도가 어찌나 투박하고 거친지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결국 회의에는 참석치 않기로 되어 있는 비서실장, 경호실장 등이 밀려나서 다음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긴 복도를 지나 맨 끝 쪽에 있는 큰 방으로 안내되었다. 방에 들어가니 소련 경호원 몇 명만 서성거릴 뿐 우리를 영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심 불쾌해서 아무도 말이 없고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옆에 가만히 서 있는 대통령이 보기에 민망해서 “좀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했더니 “어… 괜찮아” 하며 간단히 대꾸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 상태로 한 5분쯤 지나니까, 도브리닌이 헐레벌떡 나타나서 너스레를 떨었다.
    “누가 여기로 안내했나! 회담장은 바로 위층인데….”
    어찌 되었던 양국 정상은 역사적인 회담을 가졌다. 약 40분간 진행된 회담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개최되었고 조속한 시일 내의 한․소 수교를 기정사실화하는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그 후 한․소 수교는 급진전되었다. 가을에 유엔 총회에 참석한 최호중 외무부장관은 9월 30일에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상과 만나 그를 설득해서 그 날짜로 양국 간 수교를 천명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따라 서울과 모스크바에는 양국의 대사관이 개설되고 한국과 러시아는 한말 을사년 이후 외교관계가 단절된 지 85년 만에 정식 국교를 재개하게 되었다. 

    책의 쪽들마다 숨 가쁜 외교의 비사들이 가득 펼쳐진다.

    기파랑 펴냄, 365쪽, 1만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