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대북정책의 변화 여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미국 대북정책은 변화하고 있는가? 작년 10월 9일 북한 핵실험 이후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유연한 흐름을 보여 왔다. 이러한 흐름은 작년 11월 18일 하노이 한미정상회담에 이어 나온 백악관 대변인의 "북한의 핵 폐기시 한국전쟁 종료 선언 가능" 발언에 이어 금년 2월 13일에는 베이징(北京) 6자회담에서 어정쩡한 2.13 북핵합의로 나타났다. 또한 금년 3월 2일부터 시작된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미국 방문중에 뉴욕에서 열린 북미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회의, 6월 21∼22일 크리스토퍼 힐 미국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의 북한 방문, 9월 1∼2일 제네바에서 열린 북미관계 정상화 실무그룹 회의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모습이다.

    김계관 부상의 미국 방문중에는 헨리 키신저(Henry A. Kissinger) 전 미국 국무장관 면담이 특히 주목을 끌었다. 김계관 부상은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게 "최근 미국의 대북정책에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전략적 변화인가 아니면 전술적 변화인가"라고 물었고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미국은 보다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했다.(2007년 3월 8일, 조선일보) 이상의 대화는 미국과 북한이 상대방을 서로 전략적 입장에서 관찰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이와 같은 흐름은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줄곧 미국 외교정책을 주도하고 있던 딕 체니 부통령은 위시한 네오콘 그룹이 퇴조하고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위시한 현실주의 그룹이 등장하는 시기에 나왔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의 월간지 「중앙공론」 8월호는 미국 사회과학연구협회(SSRC)의 한반도 전문가인 리언 시걸 국장과의 인터뷰를 인용하여 당시 북미 협상은 당초 관측대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먼저 접근한 것이 아니라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휴대한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북한 핵실험 직후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하고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경유해 김 위원장에게 친서를 전달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라고 보도했다.(2007년 9월 4일, 조갑제닷컴) 이를 통해 볼 때 북한이 핵실험을 감행한 상황에서 부시 대통령은 "북한 핵을 폐기하려면 교섭 밖에는 다른 방안이 없는 게 현실"이라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의 조언에 따라 일찌감치 유연한 대북정책을 구사해 온 것으로 이해된다.

    키신저 전 국무장관은 국제사회의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으로서 외교를 가장 중시하는 현실주의 학자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외교를 "협상을 통한 이견의 조정"으로 정의하고 국제정치에서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가 개입되는 것을 강력히 거부하는 인물이다. 이와 같은 그의 성향은 미중관계 개선과 월남전 처리를 위한 협상 과정에서 단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그는 1971년 '핑퐁 외교'를 통해 미국과 중공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 결과 중공의 UN 가입과 대만 축출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어 월남전 처리를 위해 월맹과의 직접 협상에 나서 '파리 협정'을 체결하고 주월미군을 전격 철수시킨 결과 월남 패망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방식에 의해 1971년에는 대만이 1975년에는 월남이 희생되었다.

    이는 미국의 현실주의 정책이 동맹의 희생 여부나 이념 또는 이데올로기와는 상관없이 적과 우방의 경계를 넘어 변화하는 현실을 수용하고 그 바탕 위에서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한 새로운 전략을 만들어 가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제 키신저가 미국의 한반도 외교에 대한 막후 조정자로 등장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9월 7일 시드니 한미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의 발언은 우리에게 중요한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공동기자회견에서 "북한 지도자가 그들의 핵 프로그램을 전면 폐쇄(fully disclose)하고 핵 프로그램을 전면 해체(fully get rid of)할 경우 한반도의 새로운 안전보장체제(a new security arrangement)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바로 미국과 관계되는 종전선언, 평화협정, 평화체제, 북미관계 정상화 등은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다. 이 점은 작년 키신저 전 국무장관이 중국을 통해 북한에 전달한 친서에서도 북한과의 협상은 북한의 핵 폐기를 전제로 하고 있음이 시걸 박사의 인터뷰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사례로 보아 현단계에서 미국 대북정책의 변화 여부에 대한 결론은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현실주의 그룹의 등장은 적어도 향후 상황의 변화에 따라 미국의 대북정책에도 획기적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는 결국 미국이 남한의 대선(大選) 결과를 기다리면서 신중하게 북한을 다루고 있으며 향후의 상황 전개에 대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과 북한이 전략적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상황은 점차 조성되고 있는 중이다. 김정일 정권의 지상 과제는 미국으로부터 생존권을 보장받는 것이다. 김정일 정권은 이를 위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과도 협력할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은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 북한 지도부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는 중국과 자신보다 강한 남한을 견제하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 김계관 부상이 미국 방문중 키신저 전 국무장관에게 '전략적 관심'을 물은 것은 바로 이를 의미한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면 그 협력 대상이 남한이든 북한이든 상관이 없다. 과거 소련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미중 접근을 시도했던 미국에게 북한은 바로 자신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시키려 하고 있고 미국은 바로 그 전략적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노무현 좌파정부는 일관되게 반미친북친중 정책을 고수해 왔다. 좌파정부의 반미친북친중 정책은 미국이 남한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전략적 이익을 감소시켰다. 이는 남한에서 정권교체가 일어나 우파정권이 들어설 경우 미국은 남한으로부터 계속 전략적 이익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지만 또 다시 좌파정권이 들어설 경우 미국은 남한에서 확보해 왔던 전략적 이익을 북한과의 협력을 통해 얻으려 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키신저의 현실주의 노선은 현실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경우 한반도에서 제2의 베트남 사태가 재연(再演)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결국 향후 한반도 미래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미국 대북정책의 변화 여부는 남한의 대선 결과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