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 김일영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쓴 '선생님, 우리들의 선생님'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가대하며 소개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때 선생님은 대통령보다도 더 존경의 뜻이 듬뿍 담긴 호칭이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란 호칭이 근자 들어 존경의 뜻보다는 ‘어려운 숙제를 계속 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격하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난제다. 수학이나 과학에도 수백 년 동안 풀지 못한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하지만 한국 정치가 수십 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김대중 문제가 그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다. 그 이유는 수학·과학 문제는 고정되어 있는 반면 김대중 문제는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수학·과학의 난제는 한번 출제되면 문제 자체가 변하는 법은 없다. 그러나 김대중 문제는 당사자가 살아 있다 보니 문제의 내용이 그때그때 달라져서 해법을 찾는 이들을 당혹시키고 있다.

    전·현직 정치인 중 김대중 전 대통령만큼 권위주의하에서 고생을 많이 한 사람도 없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도 몇 번 오갈 정도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따라서 국민 대부분은 한국의 민주화와 관련하여 그에게 마음의 빚을 크게 지고 있었다. 이런 빚은 1980년 ‘광주 사태’를 겪으면서 더 커졌고, 민주화 이후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함으로써 해소되지 못했었다.

    1997년 12월 마침내 국민들은 김대중을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이로써 국민들은 그에게 졌던 마음의 부채를 대부분 청산했고, 한국 정치의 오랜 숙제도 상당 부분 해결되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숙제를 계속 안겨주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 중 햇볕정책을 추진해 남북관계를 크게 개선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는 조급한 성과주의에 집착해 투명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남한 내부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도 소홀히 했다. 그 결과 그는 ‘남남갈등’이란 새로운 숙제를 우리에게 남겼다.

    퇴임 후에도 김 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추가적인 숙제를 내주기 위해 분주했다. 남남갈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그 위에 ‘지역주의’라는 낡은 숙제까지 다시 꺼내서 부과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퇴임 직후 대북 불법송금이나 국정원 불법도청 문제가 터지자 그는 병실이나 응접실에서의 ‘접견정치’를 통해 자신은 무관함을 강조했다. 그러다가 햇볕정책이 북한 핵실험으로 위기에 빠지고 자신의 정책을 이어받을 세력에 의한 정권 재창출이 어려워 보이자 작년 11월경부터 ‘강연정치’를 통해 지역주의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사실 한국 정치의 고질병인 지역주의는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해소될 조건이 어느 정도 마련되었었다. 국민들은 마음의 빚을 갚았고 그는 한을 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퇴임 후 햇볕정책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다시 지역주의에 기대는 발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는 다시 불거져 국민들에게 숙제로 던져지고 말았다.

    게다가 최근에는 아들인 김홍업씨가 재·보선에 출마하여 이 숙제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뜻대로 안 되는 게 자식문제임을 키워본 사람은 다 안다. 하지만 적어도 아니다 싶으면 막지는 못해도 노골적으로 거들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도 김 전 대통령은 부인과 측근까지 동원해 선거운동에 나서고 있다.

    이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일부 사람들만이 아니라 전체 국민들에게 선생님이 되었다. 온 국민은 선생님이 계속 내주는 어려운 숙제를 푸느라 끙끙대야 할 판이다. 국민들은 이제 선생님의 학생 노릇 하기에 지쳤다. 따라서 하루빨리 그가 선생님이 아니라 전직 대통령의 자리로 돌아가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낸 숙제를 국민이 아니라 스스로 해결하길 갈망하고 있다. 이 난제를 풀 수 있는 해법을 쥔 사람은 그 자신밖에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