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3일자 오피니언면 '중앙시평'란에 칼럼니스트 변상근씨가 쓴 '대한민국 대통령 맞습니까?'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북핵 6자회담 재개를 앞둔 민감한 시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또다시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대통령의 외국방문 일정을 짤 때 동포간담회는 의례적으로 꼭 끼워넣는다. 해외동포들에게 덕담을 건네고 이국생활의 고충이나 본국에 대한 건의사항을 듣는 자리다.

    노 대통령 취임 이후 이 동포간담회가 어느새 '문제 발언'의 한 출구가 돼버렸다.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나라가 조용해지기는커녕 이번에는 어디서 무슨 말을 쏟아내나 하고 나라 안이 도리어 긴장하게끔 됐다. 대통령 스스로 '국내에서 인기도 없는 양반이 나와서 골치 아픈 소리 하면 또 인기 떨어진다고 하지 말래요'하는 부인 권양숙 여사의 말을 자조적으로 전할 정도니 이 다변(多辯) 또한 병이련가.

    북한의 핵포기 결단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관련국들의 공조가 절박하고 특히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구사하는 한국의 슬기가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일련의 동포간담회에서 "일단 6자회담이 열리긴 열릴 모양" "공이 북한에 넘어갔다"고 남의 나라 일 언급하듯 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더라도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를 이기지는 못한다"며 "북한이 이길 수도 없고, 점령도 못하고, 지배도 못하는 전쟁을 왜 일으키겠느냐"고 반문했다. 남북 군사력 관계는 한국이 충분히 우월적 균형을 이루고 있고, 핵 억지력은 미국이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이 막다른 골목에서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도록 우리가 같이 가주는 것이 한국 정부의 중요한 전략이라고 밝혔다.

    북핵의 최대 당사자인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북핵 폐기를 촉구하는 결단과 의지는 뒷전이다. '협상용' ' 방어용' 발언에 이어 북핵을 용인하려는 저의로 의심받을 만도 하다. 게다가 북한이 핵으로 '치명적 상처'를 입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이것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이 입에 담을 말인가. 현재의 대치상태에서 북한이 전쟁을 도발하는 경우 첫 24시간, 아마도 48시간까지는 수도권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게 미국 국방 정보당국의 솔직한 고백이다. 인구 2000만의 수도권이 '치명적 상처'를 받는다면 전쟁에 이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더구나 미국의 핵우산 약속은 한미 동맹이 굳건하고 한미연합사 전력이 확고하게 작동할 때 보장받을 수 있다. 한미 동맹이 삐걱거리고, 북한의 핵 보유가 기정사실화될 경우 한반도 위기관리의 주도권은 북한이 쥘 수밖에 없다. 남북 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북핵을 의도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다면 외교적 고립은 물론이고 한국이 매번 김정일 집단에 끌려다니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잖아도 대통령은 캄보디아 방문 때에 이어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자리에서도 6.25를 '내전'으로 표현해 물의를 빚었다. 우발적인 말실수가 아니고 기본적 역사인식이 그러함을 짙게 시사해준다. 6.25는 남침,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역사인식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분열정권의 수립', 한국의 근현대사는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라는 과거의 발언들과 맥을 같이한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와도 문제가 안 될 정도로 한국사회는 포용의 햇살에 눈과 판단력이 멀어 있다. 북한체제나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은 곧 반통일 반민족으로 매도되는 판이다.

    대통령의 부적절한 표현은 중국과 일본의 '분탕질'발언에서 극에 달한 느낌이다. 뉴질랜드 동포간담회에서 "옛날에는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중국과 일본의 가운데 끼어 있었다. 일본이 통일되면 한국에 와서 짓밟고, 힘센 국가만 생기면 꼭 한국에 와서 분탕질했다. 중국에서 새로운 왕조가 일어났다 하면 꼭 한국에 와서 분탕질 쳤다. 이제는 이것은 안 할 만한 국력을 우리가 갖고 있다"고 했다. 말의 품격부터가 그렇고, 중국과 일본 등 동북아 인접국과의 '포괄적 동반자관계'를 외치는 21세기 대한민국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어지지가 않는다. 정말 대한민국 대통령 맞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