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3일자 오피니언면에 대한변협 공보이사인 하창우 변호사가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법이란 형식적으로 걸치기 위해 만든 옷인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우리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북한이 우리의 재래식 무기를 일거에 무용지물로 만드는 핵폭탄을 개발해도 계속 그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정부의 대응을 두고 판단 착오라고 하자. 그렇지만 이번 386 세대 간첩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지금의 양상은 법치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일부 386 운동권 출신이 조직한 '일심회' 인사가 북한 노동당에 입당해 공작금을 받고 10여 년간 한국과 미국.중국.북한을 넘나들며 국내 기밀을 북측에 유출하는 간첩활동을 했다면 명백히 실정법을 위반한 중대 범죄다. 더구나 청와대와 여권의 핵심 인사들과 폭넓은 인맥을 맺고 있는 정당의 간부가 연루됐다면 국가의 고급 정보가 넘겨졌을 수도 있으니 더욱 섬뜩하다. 공안사건의 수사기관인 국가정보원이나 검찰은 마땅히 관련자들을 철저히 수사해 국민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전 직원이 직(職)을 걸고 간첩사건을 수사하고 있다"는 국정원장을 물러나게 하고, 간첩사건을 일부러 흘려서 조직을 위해 기획한 의혹이 있다고 몰아붙이는 것은 더 이상 간첩사건을 수사하지 말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이유가 386 전체가 매도되고 있는 '386 간첩단' 사건으로 불리는 불명예 때문이라니 386 실세의 위세를 알 만하다. 국정원 수사에 대한 반발은 국가 기밀이라는 국민 전체의 이익보다 '386 운동권'이라는 명예가 더 중요하다는 편협한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관련자를 철저히 가려내어 흑백을 규명하는 길만이 무고한 자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다.

    이 정권은 유독 공안사건만은 어느 정권보다 관대하다. 국가보안법을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야 한다고 하더니, 6.25를 통일전쟁이라고 말한 강정구 동국대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려 한 검찰총장에 대해 부당한 수사지휘권을 행사해 사퇴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간첩사건을 왜 수사했느냐고 수사 책임자를 경질했다는 말이 흘러나온다. 국가 기밀은 국가 안위에 관한 것으로 국민 전체의 이익과 관련돼 있다. 북한의 지령을 받고 이를 북한에 유출했다면 명백한 이적행위다. 국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은 대공수사에도 최고책임자다. 대통령으로서는 마땅히 이번 간첩사건이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과 관련돼 있으므로 '배신행위'로 단정하고 철저히 수사해 전모를 밝히라고 수사기관에 지시해야 한다. 이것이 취임 시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국민의 자유와 복리를 위해 직책을 수행하겠다고 국민 앞에 선서한 대통령의 책무다.

    동독은 망해가는 공산정권을 지키려고 정보기관 슈타지가 서독의 정계.경제계.학계.종교계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간첩을 침투시켜 동독 정권을 비판하는 세력을 교란하고 서독의 여론을 균열시켰다. 그러나 서독은 기본조약 체결 전후 일관되게 국가 안보와 관련된 범죄에 대해서만은 엄정하게 대처했고 통일 후에도 간첩행위를 한 자들을 끝까지 수사해 조국 배반행위에 대가를 치르게 했다. 여기에는 우리처럼 정치적 고려는 작용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당연한 조치였다.
    우리는 어떤가. 이 정권 들어 공안검사들이 승진에서 배제되고 공안기구들이 축소되고 있다. 공안이 거추장스럽게 여겨질수록 국가의 안전망에는 구멍이 뚫릴 수밖에 없다. 지금의 공안 정국은 그 연장선에 있지 않은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을 지키려는 법들이 지켜지지 않으면 나라의 법치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권력자가 그 법을 불편하게 느낀다면 국가의 체제와 질서는 유지될 수 없으며 국민은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 나라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권력자라고 디딜 땅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