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1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구속됐을 때의 일입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면회 와서 '당신이 그렇게 아꼈던 측근 아무개가 배신했다'며 흥분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자리든 돈이든 내게 기대한 게 있어서 왔는데 충족시켜줄 수 없게 됐으니 내가 그 사람을 배신한 것'이라고 말해줬습니다." 기획부동산 업자로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최근 구속된 김상현 전 의원의 말이다. 김 전 의원에게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가 따라다닌다. "'저 김상현입니다'라는 말과 숨 쉬는 것 빼고는 모두 거짓말"이라는 말을 듣는가 하면, 군사정권에 저항하고 환경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구시대 정치인의 전형인 인물이지만, 등에 비수를 들이댄 사람과 다음날 마주쳐도 '형님, 아우님'하고 모른 척 지나갔다. 그런 김 전 의원의 '배신관'을 듣고 감탄한 적이 있다.

    정치의 세계에서는 배신은 숙명처럼 따라다닌다. 어제의 적이 오늘은 같은 당의 동지가 되고 내일은 또다시 갈라서는 일이 허다했다. 수많은 배신에 분노하고 속앓이를 하다가는 자신을 지탱할 수 없기에 김 전 의원과 같은 생각으로 스스로 화를 삭였는지 모른다.

    역대 대통령은 임기 말에 모두 배신을 겪었다. 난파선에서는 쥐가 먼저 알고 뛰어내린다고 했다.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노태우 대통령과 담판할 때 가져갔던 누런 봉투에 담긴 자료도, 이회창 신한국당 대선 후보가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의 정치자금 내역을 공개했던 자료도 제공자는 당시 청와대 비서였다고 한다. 끝나는 권력보다는 새 권력에 줄을 서는 게 세상 인심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쳐도 노무현 정권에서는 정도가 심하다. 시기가 당겨졌고, 숫자도 유난히 많다.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은 노 대통령의 임기 말 역점사업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반대하는 선봉에 서 있다. 대통령 정책특보인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마저 한.미 FTA 추진에 부정적이다. 노 대통령이 "지금 당장 환수해도 문제없다"고 말하는 주한미군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해 김희상 전 국방보좌관은 "실익이 없고 안보체제의 기축을 흔드는 것"이라며 반대한다. 윤영관 전 외교부 장관은 "자주를 아무리 많이 구가해도 외교적으로 고립되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비판했다. 서동만 전 국정원 기조실장은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예스맨들로 채워졌다"고 했고, 최근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이 청와대 386 비서관들의 인사전횡을 폭로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유교 문화권 국가에서 배신은 부덕이었다. 조조의 끈질긴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은 관우는 영웅의 표상이었다. 5.31 대전시장 선거에서의 일이다. 한나라당 공천으로 두 번 시장에 당선됐다가 2005년 여당에 입당한 염홍철 후보의 행적이 논란이 됐다. 그런데 공교롭게 박성효 한나라당 후보는 염 시장 밑에서 부시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그런 박 후보가 염 후보의 '정치적 배신'을 비난하는 것은 염 후보에 대한 '인간적 배신'으로 여겨졌다. 결국 강창희 전 의원이 나섰다. 강 전 의원은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오랜 친구인 염 후보와 맞붙을 수 없다며 후보직을 고사했다. 강 전 의원이 염 후보의 배신을 거론하자 그때서야 조금씩 표가 움직였다고 한다.

    강 전 의원 본인이 직접 출마했더라면 과연 그의 말이 설득력을 가졌을까. 자신의 이익을 위한 배신행위에 대해 우리 국민은 상당히 엄격하다.

    과거 대통령 임기 말에 발생한 배신은 개인적 출세를 목표로 은밀하게 진행됐다. 그런데 지금 나타나고 있는 배신은 공익을 앞세우며 공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노 대통령에 대한 의리보다는 국가가 잘못 가는 것을 막는 게 우선"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아무리 명분으로 포장해도 '자신이 먹었던 샘물에 침을 뱉는 행위'가 아름다울 수는 없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도 '내가 저들의 기대를 저버린 게 아닌지' 돌이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