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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김대중 고문이 27일 이 신문 오피니언면 '김대중 칼럼'에 쓴 '노 대통령에게 정치란 무엇인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항상 상대를 만들어 상대를 제압하려는 전투성, 상대방과 자신을 다르게 부각시키려는 차별화 전략, 자신은 옳은데 잘못된 것은 누구의 탓이라는 식의 책임전가, 자신의 설득력에 심취한 듯한 불필요하고 장황한 설명, 그리고 원칙을 얘기하는 듯하다가 “다만” 하면서 원칙에 어긋나는 쪽에 비중을 두는 어법―이런 것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장기(長技)이면서 동시에 고칠 수 없는 병(病)이라는 것을 그의 신년연설과 뒤이은 기자회견을 보면서 새삼 느낀다.
그에게 정치란 무엇인가? 통치인가, 기술인가, 게임인가? 그가 지난 3년간 국민들에게 보여준 것으로 풀이할 때 그에게 정치는 그가 엊그제 말했듯이 ‘한 시대의 조류와 그 조류에 역행하는 파도 사이에서의 선택’으로 인식되는 듯하다. 또 정치란 ‘역사와의 독대’에서 ‘여론과 일치하지 않는 선택’을 취하는 기술을 뜻하는 그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그런 선택을 이벤트화하고 특유의 화법으로 포장해서 적절한 타이밍에 전달하는 전략을 구사해왔다고 생각한다. 연설시간을 축구경기 직전인 밤 10시에 한다든지 장소를 백범기념관으로 선택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한·미 간에 이견은 없다”면서 대통령이 상대국의 불특정 견해를 가정해서 ‘동의’ 운운하는 것도 상식 밖의 화법이다. 노 대통령은 때와 장소에 따라 적당히 말을 바꾸기도 하고 정치적 효과를 노려 말을 던지기도 하는 재주를 지녔다. 열린우리당 의원이 “대통령이 국민을 속였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때로 마키아벨리스틱한 면이 있다.
노 대통령은 연설에서 ‘양극화 해소’를 임기 말년의 정치적 화두로 내세웠다. 그는 그러나 그것을 둘러싼 쟁점을 유발하면서 국민을 헷갈리게 하는 전술을 썼다. 그는 “양극화 해소의 재원이 절대 부족하다”면서 “근본적인 해결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이미 재정의 효율성을 높이고 지출구조를 개선하고서도 어렵다고 한 만큼 그가 암시한 근본책은 증세(增稅)밖에 없다. 그러나 일주일 뒤 회견에서는 자신이 증세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을 내세워 증세논쟁을 정략적 공세에 이용한다면서 야당과 비판세력을 비난했다.
그는 애당초부터 증세의 불가능성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증세는 법으로 해야한다. 1·2 개각으로 당과 마찰을 빚어 국회에서 증세논의가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의 정권 말기 지도력이 약화되는 상황에다가 5월 지방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증세를 거론하는 것은 정치적 바보의 짓이며 ‘머리회전’이 빠른 노 대통령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그는 일주일 만에 증세에서 한발 물러서는 척했다.
결국 그는 “나는 양극화 해소를 제의했는데 저들 때문에 증세가 안 돼 실행이 어렵게 됐다”는 식으로 양극화 해소는 따먹고 증세는 ‘남의 탓’으로 돌린 셈이다. 게다가 선거 후 증세 가능성은 여전히 열어 놓고 있다. 양극화의 거론 자체가 선거용이라는 해석이 그래서 나온다. 잘 짜인 한 편의 시나리오와 능숙한 연출력을 보는 것 같다.
이것은 대통령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대통령은 국민 앞에 정직해야 한다. 게임하면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생각한 그대로를 국민 앞에 제시하고 대통령으로서의 선택에 국민의 동의를 구하는 진솔함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는 피해 가면서 “대통령이 먼저 답을 내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라든지 국민적으로 논의해 보자는 식으로 넘어가는 수법을 쓰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180도 회전해서 “국민여론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쩌면 그에게는 때로 국민여론이라는 것을 ‘시대에 역행하는 조류’로 보는 반항아의 기질이 있는 것 같다. 문제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그 기질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데 있다. 그는 90년 3당 합당 때 김영삼씨를 따라가지 않은 것, 지난번 대통령선거 막바지 때 타협을 거부한 것 등에서 대세를 좇지 않은 자신의 선택이 옳아 오늘날 대통령까지 됐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의 생각이나 고집이 옳은 점도 있다. 시기에 편승하지 않으려는 고민은 때로 귀중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 난 후의 선택은 엄연히 달라야 한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편법도 쓰고 탈법·위법행위도 한다. 지키지 못할 약속도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고 나면 그는 정직해야 한다. 술수를 멀리하고 정도를 걸어야 한다.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국민이 원하면 자신의 생각과 달라도 타협할 줄 알아야 한다. 여론의 향배를 살피고 국민의 아픈 곳을 쓰다듬어줘야 한다. 대통령에게는 ‘국민여론’이 제일차적 준칙이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