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이 워커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있다.ⓒ뉴데일리DB
    ▲ 전선을 시찰하는 이승만이 워커 장군과 대화를 나누고있다.ⓒ뉴데일리DB
    “38선이 사라졌다!” 이승만은 무릎을 쳤다.
    해방순간 난데없이 한반도의 허리를 끊은 38선, 미국이 긋고 소련이 봉쇄한 국경 아닌 국경! 이승만은 해방3년간 38선을 해소하는 방안에 골몰,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았다. 소련의 공산화 ‘꼼수’ 미-소공동위원회 협상이 예상대로 삐걱거리자 단호하게 나서 공개선언을 발표한다. 
    이른바 ‘정읍 발언’이다. “남한만이라도 과도정부를 세워 세계의 힘을 모아 38선 이북의 소련을 몰아내자.” 이것은 스탈린이 덮어씌우는 ‘분단의 원흉’ 발언이 아니다. 반민족적인 분단을 철폐하고 공산주의를 영구히 추방하겠다는 반공통일=자유통일의 원칙 천명, 필자는 그래서 ‘정읍 발언’을 ‘이승만 독트린’이라 이름 지어 부르고 있다.

    건국3년째 6.25 남침이 전면전임을 보고받은 순간, 이승만은 마침내 ‘통일의 찬스’가 왔음을 직감하였다. “38선 철폐”를 외치고 외쳤지만 미-소의 합의 없이는 불가능했던 일, 그 ‘철의 장막’을 소련이 스스로 허물고 침략하였으니, ‘분단해소’라는 통일의 명분까지 만들어주지 않았는가. 이승만은 미국의 즉각적인 참전을 소리 높이 요구하고 나섰다. . 
    미군 참전이 신속하게 진행되자 이승만은 쾌재를 불렀다. 철군을 고집하던 트루먼의 심경 변화---“그럴 줄 알았지” 진작 예감하고 경고해왔던 냉전의 폭발 이념전쟁,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열전(熱戰)은 마치 이승만이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경고한 직후 터진 태평양전쟁을 보는 듯하다. “미국과 유엔을 단단히 붙잡아 반드시 통일을 이루리라” 결심하면 실행하는 이승만의 결기는 이때 2가지를 결행한다.

    ◉하나는 전시작전지휘권(戰時作戰指揮權:약칭 전작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위임한 것.
    ◉둘은 트루먼에게 ‘6.25전쟁은 남북 통일전쟁’임을 선언하고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 일이다. 

    7월14일, 유엔의 결의에 따라 유엔군사령부가 설치되자 이승만은 기다렸다는 듯 한국군에 대한 전시작전권(Operational Command Authority)을 맥아더 유엔사령관에게 이양한다. 
    그리고 나흘 후 7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대사 무초를 경무대로 불러서 자신이 직접 작성한 편지를 즉시 백악관 트루먼에 전해달라고 요청한다. 
    이때 무초가 편지에서 ‘압록강-두만강까지 진격하여 한국의 원래 국경을 회복해야 한다’는 대목을 보자 시비를 걸어 앞장에서 본 것처럼 이틀이나 언쟁을 벌이게 된다. 왜냐하면 트루먼 정부의 한국 참전조건 ‘38선까지만 원상회복’과 이승만의 북진통일전쟁 요구는 정면 배치되기 때문이다. 
    그 언쟁은  한미 양국정부가 6.25전쟁성격을 싸고 처음 충돌한 장면이다. 
    먼저 이승만의 편지를 읽어보자. ‘시비의 대목‘은 삭제되었으나 북진통일 주장은 더 강해졌다.
  • ▲ 이승만대통령, 6.25침략 7월현재 전쟁지도, 트루먼 대통령.
    ▲ 이승만대통령, 6.25침략 7월현재 전쟁지도, 트루먼 대통령.
    ▶이승만이 트루먼에게 보내는 편지◀

    친애하는 대통령에게
    절망적인 위기를 맞은 한국에 신속하고 지속적인 원조를 제공해주신 각하에게, 본인은 물론, 대한민국 정부와 모든 국민들은 깊은 감사의 뜻을 무슨 말로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대의(大義), 즉 자유의 대의를 위한, 많은 자유 우방의 국제연합을 통한 지원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각하의 용감한 영도력이 이 난처한 위기에 발휘되지 않았던들 그러한 지지도  원조도 없었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본인은 한국전선에서 미군의 전사장자(戰死傷者)가 늘어난다는 사실을 보고 받을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고국에서 머나먼 이곳에 와서 자유를 위하여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생명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우리 군대는 우리의 국토 안에서 조국을 위하여 싸우고 있으니까 우리 군의 사상자 보고를 받는 것이 아무리 참혹하다고 해도 귀국(貴國)의 희생자보다는 그나마 낫겠지요.
     이곳 한국 땅에서 죽고 다친 미국 병사들의 모든 부모, 처자, 형제자매들에게 부족하나마 위로의 말을 전하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미국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아 약자를 지켜주려고 이 땅에 와서 잔인한 침략자들을 상대로 해방과 자유가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생명을 내걸고 싸우고 피 흘린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대통령 각하!
    위대한 귀국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공산-나치 집단(Comminazis)에 의하여 자유 국가의 독립이 유린되는 것을 방치한다는 것은 모든 나라들, 심지어는 미국 자신까지도 공격받는 길을 터주는 길이 됨을 알고 애국심의 한계를 초월하면서까지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각하도 아시다시피 한국인들은 그 누구도 참여하지 않은, '38도선에 관한 1945년의 군사 결정'의 결과로 자신들의 의사에 반하여 분단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분단은 북한에서 소련의 지령과 통제 아래 한국인의 전통이나 정서와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공산정권의 수립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이 북한 지역에서 군사, 경찰, 재정의 권력을 절대적으로 장악한 공산 분자들은 소련의 지령 하에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대다수 국제연합 회원 국가들에 대하여도 처참한 피해를 줄 수 있을 정도의 막강한 군사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소련이 지원하는 북한 정권이 6월25일 새벽, 한국군을 일제히 공격하였을 때, 그들은 38선을 자유 대한과 노예 북한 사이의 군사 분계선으로 유지할 수 있는 근거를 없애버렸습니다.

     원상(status quo ante)회복을 시도함으로써 적(敵)이 전열을 가다듬어 또 다시 공격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 될 것입니다. 세계 공산주의자들이 우리나라의 가슴 속에 심어서 키워온 제국주의적 침략의 악성 암세포들을 이번 기회에 영원히 도려내야 합니다. 북한 사람들은 남한 사람들과 차이가 없습니다. 외부 세력이 훈련시키고 조종하는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을 제외한 모든 남북한인들은 그들의 조국에 충성합니다. 이 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대결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의 반을 어쩌다 점거하게 된 소수의 공산주의자들과 압도적 다수의 한국 시민들(그들이 어디에 살든) 사이의 대결입니다.

     한국 정부와 국민들은 이제 한반도를 통일할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강력한 우방들이 치르는 막대한 희생을 딛고 통일도 이루지 못한다면 이는 언어도단입니다.

     대통령 각하, 각하께서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셨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이지만, 우리 정부의 입장을 각하께 분명히 밝히고자 합니다.

     한국 정부는 대한민국 정부의 동의나 승인 없이 한국에 관하여 장차 타국이나 국가 그룹에서 결정하는 어떠한 협정이나 양해 사항도 이를 구속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본인은, 각하께서 최근에 발표하신 성명서를 통하여  이것이 또한 미국 정부의 입장이라고 믿습니다.

     본인은 매일 기도합니다. 한-미군의 공동승리를 위하여, 날씨가 맑아져 미 공군 전투기가 적을 발견하고 파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충분한 병력과 물자가 최대한 빨리 도착하여 공세로 전환, 힘겨운 적진을 뚫고 승리의 북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본인은 우리의 대의가 궁극적인 승리를 거두리라는 데 추호의 의심도 없으며, 그 승리의 정당성(right)과 강력한 힘(might)이 우리 편에 있음을 믿습니다. 
    영원히 변함없는 친애의 마음을 담아서, 이승만 드림.

    ▶영문편지 원문◀
    Th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Rhee) to President Truman.
    RESTRICTED Taegu, July 19, 1950.

    Dear Mr. President
    I can not find words to express, for myself and for all the people and Government of Korea, our profound gratitude for your prompt and continued actions in bringing aid to Korea in these desperate days. While we deeply appreciate the support of so many free nations, through the United Nations, to the cause of Korea, which also is the cause of freedom, we know full well that without your courageous leadership in a time of bewildering crisis there would have been no support and no aid.

    I am deeply moved as I learn of increasing American battle casualties here. It is a tragic thing that so many men should have had to give their lives for liberty in this land so far from their own. It is easier for me to accept word of our own battle casualties than of yours, cruel as ours have been, since our forces are fighting in and for their native land. I wish I could convey to every mother and father and wife and child, and sister and brother of an American soldier killed or wounded here in Korea even some slight comfort through the knowledge that no Korean can ever forget the courage and sacrifice of these men who in the great tradition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have come to the defense of the weak against the cruel aggressor, and have fought and given their life’s blood that liberty and freedom should not perish from the earth. These soldiers of your great country, Mr. President, have lived and died as Americans, but they have given their lives even beyond love of country as citizens of the world, knowing that to permit the further destruction of the independence of free nations by the Comminazis is to clear the way to assault upon every nation, even the United States itself.

    As you know, the Korean people were divided against their will: as a result of military decisions in 1945 regarding the 38th Parallel, to which no Korean was a party. This division permitted the development in the north, under Soviet direction and leadership, of a communist regime wholly alien to Korean traditions and feelings. With absolute control of the military, police and fiscal powers in that region of Korea, the communists, with Soviet direction, were able to create the formidable force which has caused such cruel damage not only to Korea but also to the United States and most members of the United Nations. When the Soviet sponsored regime in North Korea simultaneously attacked the defense forces of the Republic of Korea in the early morning of June 25, they ended any possible claim to the maintenance of the 38th Parallel as a political or military dividing line between free and slave Korea.

    It would be utter folly to attempt to restore the status quo ante, and then to await the enemy’s pleasure for further attack when he had had time to regroup, retrain and reequip. The time has come to cut out once and for all the cancer of imperialist aggression, the malignant growth artificially grown within the bosom of our country by the world communists.

    The people of North Korea are the same as the people of South Korea. All are loyal to the land of their birth with the very few minor exceptions of foreign trained and foreign directed communists. This war is not a conflict between North and South, it is a conflict between the few who are communists, who by an accident got control of half of our country, and the overwhelming mass of the citizens of Korea, wherever they may live.

    The Government and the people of the Republic of Korea consider this is the time to unify Korea, and for anything less than unification to come out of these great sacrifices of Koreans and their powerful allies would be unthinkable. I am sure, Mr. President, that you have come to the same conclusion yourself, but I wish to make clear to you the position of this Government. The Korean Government would consider as without binding effect any future agreement or understanding made regarding Korea by other states or groups of states without the consent and approval of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From statements which you have made recently I believe that this also is the position of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Daily I pray for the joint success of our arms, for clear skies so that the planes of the United States Airforce may search out and destroy the enemy, and for the earliest possible arrival of sufficient men and material so that we can turn to the offensive, break through the hard crust of enemy forces and start the victorious march north. I have no slightest doubt in the ultimate victory of our cause I know that both right and might are on our side.
    With ever continued warm personal regards,
    Sincerely yours,
    Syngman Rhee
  • ▲ 미CIA가 감청한 이승만의 6.27 연설 전문. 미국참전의 기쁜 소식을 전한 연설엔 '서울시민 피난가지 말라'는 식의 내용은 한마디도 없다.
    ▲ 미CIA가 감청한 이승만의 6.27 연설 전문. 미국참전의 기쁜 소식을 전한 연설엔 '서울시민 피난가지 말라'는 식의 내용은 한마디도 없다.
    ◆짧지만 긴 편지! ‘반공 전쟁’과 ‘북진 통일’ 명문화

    우리 말보다 함축미의 전달력이 효율적인 영어 원문으로 읽을 때 더욱 그 진의를 깊이 실감하게 되는 편지는 고도의 국제정치적이며 역사적 예언적 문학적이다. 동서학문에 뛰어난 문장가 이승만의 이처럼 화려하고도 매서운 압축적 언어 구사에서 미국 지도자들은 “미국인보다 품격 높은 고급영어를 잘하는 이승만”의 설득력에 감복하곤 했다 한다. 
    그것이 ‘악의 전쟁’에 대한 자유와 승리의 대의를 담은 굳센 신념과, 간절히 기도하는 영혼의 향기마저 풍기는 기독교적 명문(名文)임에랴!

    진지한 감사=편지는 미군 참전을 결단한 트루먼의 영도력을 찬탄하면서 미국 청년들을 보낸 가족들의 심장을 울리는 감사의 헌사들은 형식을 넘는 진정성이 종교적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표현들, 이렇게 마음을 사로잡아 놓고 해야 할 말을 다 하고 있다.
    ‘세계 시민’으로서의 희생=이 구절이야말로 이승만 특유의 국제정치 철학과 자유 세계관을 보여준다. “위대한 귀국의 병사들은 미국인으로서 살다가 죽었습니다만, 세계 시민으로서 그들의 생명을 바쳤습니다.” 철군을 고집하며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한국을 버린 트루먼이 ‘세계시민으로서의 생명’이란 의미를 과연 이해하였을까?
    공산-나치(Comminazis)팟쇼=영어의 공산주의자와 나치를 합성한 이 단어는 이승만이 만든 새로운 용어, 일찍이 자신의 저서 [JAPAN INSIDE OUT]에서 규정한 개념으로, 루즈벨트가 친구로 여겼던 스탈린의 국제공산주의는 히틀러 나치즘과 똑 같은 인류최악의 적, 또 다시 세계를 파괴할 전체주의라는 주장을 함축한 말이다. 사전에도 없는 단어 ‘Comminazis’로 묶어서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국대통령에게 반공교육을 하고 있다. “당신이 싸우는 적의 실체를 알아야 이길 수 있다”는 훈시였다.

    ‘통일전쟁 북진 승리’ 명문화=한국의 참여도 없이 미국 맘대로 정한 38선 분단을 아프게 지적, 소련이 38선을 고착화하고 북한을 공산화한 것이 미국의 책임이라는 역사적 죄악을 완곡하게 들이댄다. 소련이 38선을 스스로 없앴으므로 그 존재이유가 사라졌으며 특히 이 전쟁이 ‘남한과 북한의 싸움이 아님’을 강조한다. 극소수 북한의 공산당과 남북한의 자유인들의 전쟁, 즉 미국과 전세게에 ‘암 덩어리 공산주의를 추방하는 전쟁임을 명백히 주창하고 있다. 따라서 분단의 책임자 미국이 통일의무를 진 장본인임을 상기시키고, 미국의 ‘원상회복’(status quo ante) 방침은 적의 재무장 기회를 줄뿐, 전쟁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바보짓이기 때문에. 이번에 자유세계가 피 흘리고도 “통일조차 못한다면 언어도단”이라 단정한다. 군사원조를 재촉하며 ‘궁극적인 승리’가 보장된 정의의 전쟁이므로 ‘북진하자’고 명문화, 미국 대통령을 설득하고 있다. 
    트루먼은 설득되었을까? 뒷날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이승만이 국군의 38선 돌파를 명령하였을 때, 트루먼은 유엔 결의로 ‘북진’을 허용하게 된다.

    6.27 연설부터 ‘통일 전쟁’ 강조=앞에서 보았듯이 이승만이 6.25침략이 전면전쟁임을 확인한 순간 ‘통일전쟁’을 결심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빠른 증거는 6.27 연설이다. ‘런(run)승만’이라 모함하는 세력은 6.25 이틀 뒤 이승만이 저 혼자 도망치고서 “서울시민 안심하시오”라는 방송을 했다고 허위 선전하는 바로 그 연설문에 ‘서울시민 안심’ 따위 표현은 한마디도 없다.
    이승만이 연설한 핵심은 “맥아더의 참전결정 전보”를 받고 이 기쁜 소식을 국민에게 전하고 싶어서 방송한다“는 것이며 “세계의 지원을 받아 남북한 통일을 달성할 수 있으니 애국심을 발휘하자”고 결론을 맺는다. 
    즉, ‘남북통일 달성’ 그것이 공산당의 야욕을 자유통일로 뒤집겠다는 전략가 이승만의 6.25전쟁관이며 처음부터 미국대통령에게 ‘북진통일’을 촉구했던 것이다. 아래에 그 요지를 보자.

    “....오늘 오후에는 맥아더 장군이 내게 보낸 전보에서 중요한 언급을 하였기에, 이를 동포에게 급히 알리고자 그동안 침묵하고 있던 바를 모두 철파하고, 이 기쁜 소식을 방송하는 것입니다. 맥아더 장군의 전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깊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중대한 작전이 준비되고 있고, 충분한 원조가 가는 중입니다’」. 맥아더의 서명도 있습니다.
    또 다른 긴급한 정보 보고는 한국 원조가 해군과 공군 양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조는 오직 38선 이남을 방어하는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합니다」
    오늘 맥아더 장군이 전폭기를 보내서 침략자들을 격파하고, 전투기로는 탱크를 공격한다고 합니다. 또한 처치 (Church) 장군은 즉시 동경에서 서울로 와 우리 국방 사무에 고문으로 도울 것이며, 고급 참모들도 여럿이 오고, 군사 원조물자도 지금 오는 중이며, 또한 계속해서 올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상황에서 국민이 피난을 떠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보다 더 유력한 나라들도 공산당 세력 수중에 넘어갔고, 일부는 넘어가는 중입니다. 우리는 공산당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우리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조가 도착할 때까지 우리 군대가 강력하게 싸워야 합니다. 여기서 서쪽 옹진반도부터 동해까지 38선 모든 지역 그리고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전선에서 적과 힘차게 싸우고 있는 우리 군과 경찰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히, 의정부 지역에서 무기도 없이 용감히 싸우는 군인들에게는 더욱 고맙습니다.
    적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용기, 힘, 결단력을 가지고 있음을 세계에 보여주어야만 우리는 그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남북한의 통일을 달성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나는 모든 시민이 전쟁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용기와 애국심을 발휘하여 차분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6월27일 저녁 10시 방송)

    이 연설로부터 이승만의 전쟁목표는 오로지 ‘남북 자유통일’이다. 그리하여 공산군과 싸우는 3년 내내 미국과 또 하나의 전쟁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대미투쟁(對美鬪爭)은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성립하고 한미동맹이 체결되는 날까지, 아니 그 일년 후 한미동맹이 뱔효되는 1954년 11월까지, 아니 이승만이 1960년 4월26일 하야후 하와이에서 눈을 감는 1965년 그날까지 ‘통일 염원’은 그의 머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 ▲ 한미연합사령부 행사 사진. 이승만대통령이 유엔군에 이양한 전시작전통제권은 박정희 대통령때 창설된 한미연합사령부로 넘어가 양국이 공유하였다.
    ▲ 한미연합사령부 행사 사진. 이승만대통령이 유엔군에 이양한 전시작전통제권은 박정희 대통령때 창설된 한미연합사령부로 넘어가 양국이 공유하였다.
    ◆다목적 카드 ‘전작권 이양’...이승만의 ‘통일 방법론’ 묘수!

    소련과 북한의 침략 20일후 유엔이 유엔군참전과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했을 때 이승만이 즉각 맥아더 유엔사령관에게 전시작전지휘권(전작권)을 이양했음은 앞에서 보았다. 
    어느 나라든지 연합군이 싸울 때 약한 나라의 전작권을 전쟁주도 국가에 맡기는 것은 세계전쟁사의 상식, 국제법 박사 이승만의 결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국제법박사 이승만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도 국제전쟁사에서 분석해 본 미국의 힘이었다. 대한민국 건국에 발휘했던 “미국의 힘을 이용한 독립=용미술(用美術)‘을 이승만은 전쟁승리=남북통일을 위한 싸움터에서 더더욱 절박한 군사적 용미술을 구사한다. 그것이 국제전의 상식이면서도 이승만 특유의 전략이 숨어있는 다목적 카드 ’전작권 이양‘인 것이다. 그 노림수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남북통일도 미국(유엔)의 힘으로!
    독립동지 맥아더에게 전작권을 넘겨줌으로써 미국을 이용한 남북통일을 이루려는 이승만의 포석이다. 한국 지형을 모르는 미군의 길잡이가 되는 한국군, 찰떡같은 작전파트너로 미군을 꽁꽁 붙들어매는 용미(用美)전술, 70대 노구 이승만이 미군과 국군부대를 수시로 방문 격려한 까닭이다. ”미국이 분단시킨 한반도를 미국이 통일시켜라“ 이것이 이승만의 용미카드였다.
    이승만은 독립운동 때부터 ’미국의 한국 배신론‘을 주창하였다. 그것을 공개적으로 제기한 것이 1940년 8월 출간한 영문저서 [JAPAN INSIDE OUT]에서였다. 미국이 1882년 체결한 ’조-미우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파기하여 러일전쟁때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음으로써  일본에 한국을 넘겨준 것은 미국의 배신이요, 한국을 독립시켜야 할 국가적 의무를 가진다고 미국민을 향한 공개비판을 가했던 것이다. 미국무성을 드나들며 끈질긴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요구, 해방후 좌우합작을 거부하면서 미국의 반공 의무 촉구, 미-소공동위가 깨지자 미국에 유엔결의로 해결하라며 벌인 유엔 외교투쟁, 건국후 미군철수를 반대하며 조-미수호조약의 현대판 한미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요구 등등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역사적 죄악‘을 상기시켜 ’외교적 성공’을 거두곤 했다. 이번에야 말로 용미술의 결정판, 분단의 죄를 통일로 갚으라는 요구는 국가적 의무를 넘는 하나님의 명령, 기독교적 사명임을 주창하는 이승만이다. 

    한국을 유엔회원국과 대등한 나라로 격상
    1945년 4월 일본의 항복직전 루즈벨트가 유엔을 창립할 때, 이승만은 창설회원으로 가입하고자 무던히 애를 썼으나 루즈벨트 측근이자 소련 간첩 앨저 히스의 방해로 막히고 말았다. 유엔군에 한국군을 참여시키는 일은 한국의 유엔가입을 위한 전초작업의 하나이다. 그것은 20대 청년시절 옥중저서 [독립정신]에서 주장했듯이 미국-영국 등 기독교 선진강국들과 ‘대등한 한국’을 만들려는 꿈을 실현하는 출발점, 그리하여 미국과 함께 싸우고 공부했던 한국군 장교들이 한국 최고의 엘리트집단으로 급성장하였고, 그들은 ‘근대화 쿠데타’를 일으켜 ‘한국 성공신화’를 만들어내었고, 끝내 유엔에 가입하게 된다. 의무교육과 함께 이승만의 인간투자가 거둔 국가적성공이다. 

    한국군 전쟁능력 제고와 군사력증강의 지름길
    탱크는커녕 총알도 모자란 한국군이 최첨단 미국의 전술을 배우고 미국무기로 무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승만은 끊임없이 ”한국군에 총알을 달라, 무기를 달라. 미군보다 더 잘 싸울 것이다“ 외치며 미국 정부를 닥달한다. 동시에 미군 장성들과 장교들에게 애정과 신뢰를 베풀고 기발한 전술을 제시하며 미군 지휘부를 심리적으로 장악한 이승만이다. 예컨대 밴플리트 장군은 이승만을 ‘아버지’라 부르며 ”이승만은 자기 몸무게만큼의 다이어먼드“라고 미의회에서 증언할 정도였다. 밴플리느는 국군 교육을 도맡아 ‘육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에 요구에 따라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 현대무기로 무장시킨다.

    미국의 ’38선 원상회복‘ 전쟁을 깨트리다
    전작권을 이양했다해서 국군통수권을 포기한 대통령이 아니다. 거의 날마다 국군수뇌회의를 거듭하며 전쟁지도를 쉬지 않는 이승만은 ’박사선비‘가 아니라 미군장성까지 좌우하는 덕장(德將), 지장(智將)이었다. 트루먼이 유엔결의로 규정한 ’북진 금지-38선 원상회복‘ 원칙은 이승만이 보기 좋게 깨버렸다. 인천상륙작전후 서울로 진격하는 국군에게 ”중앙청엔 국군이 먼저 태극기를 꽂아라“지시하였고, 북진하는 미군이 38선에서 멈추자 정일권 참모총장을 불러 명령한다. ”이 계급장은 어느 나라 군대 것이냐?“ 묻는 이승만, 전작권 때문에 더 이상 북진은 유엔군사령관 명령을 받아야 한다는 정일권에게 ”내 나라 내 땅은 국군이 먼저 38선을 넘어 통일시켜라“ 호통을 쳤다. 트루먼인들 어쩌겠는가, 미국은 다시금 유엔 결의로 유엔군의 북진을 허용하고 국군의 뒤를 따라 북한 땅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통일전쟁‘ 지휘자 이승만의 힘이다.

    강대국들의 일방적 휴전을 가로막은 ’전작권 회수, 단독북진 통일”
    압록강까지 국군이 먼저 진격했을 때 중공군이 대거 참전했다. 안 그래도 ’조기 휴전‘을 주장하던 영국 처칠이 트루먼에게 즉각 휴전을 재촉한다. 1951년 미군사령관 클라크가 휴전협상을 발표하자 이승만은 궐기한다.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일방적 휴전은 한민족에 사형선고”라며 전국민을 동원하여 “휴전 결사 반대” 캠페인을 벌인다.  미국이 압력을 가하자 “전작권을 회수한다. 한국군이 단독 북진하여 통일 하겠다” 무기한 결사반대 투쟁에 돌입하였다.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라”는 군사작전 ’Ever-ready Operation’을 수립하지만 “이승만의 대안이 없다”며 이승만 이용작전으로 선회하며 휴전협상을 계속한다. 이때 터진 것이 이승만의 유명한 벼랑끝 전술 ‘반공포로 전격석방’ 작전이다. 결국 굴복한 미국은 이승만에게 매달리고 그 결과는 ‘한미상호안보조약’ 즉 ‘한미동맹’ 체결로 열매를 맺는다. 

    ★좌파 정권들, 전작권 회수 소동...친북반미 선동

    자칭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 3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다. 그런데 위기감에 불안한 국민 앞에 나선 김영삼 대통령은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며 ’평화선언‘을 발표한다. 뜻밖의 반가운 말에 놀란 김일성은 이 구절을 여러 번 읽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 김영삼 정부가 ’자주국방‘을 내세우며 전작권 회수를 들고 나와, 결국 ’평시 작전통제권‘만 한국군 합참으로 가져온다. 이승만이 이양한지 44년만이다. 
    그후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한술 더 떠서 “자기나라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없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면서 “전작권은 주권국가의 꽃”이라는 감성적 선동으로 ’반미 쟁점‘을 만들었는데, 이는 김정일과의 평양회담을 성사시키려는 부채질임이 드러났다. 이를 이어받은 문재인 정권도 김정일과 평화협상 한다며 전작권 회수를 거듭 주장하였다. 그 목적이 한미동맹의 근본을 뒤흔드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노무현-문재인의 공세는 ’표적을 잃은 허공‘에 쏘아댄 화살이었다. 왜냐하면, ’평시전작권‘은 이미 김영삼 정부가 회수하였고, 남아있는 ’전시(戰時) 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부의 양국이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전쟁이 발발할 경우, 전작권은 미국이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 양국대통령이 합의해야만 발동되는 것으로서, 이미 10년 넘게 한국의 국군통수권자 대통령이 가지고 있는 권한이다. 다시 말하면 노무현-문재인의 ’전작권 회수‘ 발언은 자신의 권한도 모르는 채(또는 알면서 모르는 체) ’친북반미‘의 정치적 선전선동에 부화뇌동했음을 대통령 스스로 폭로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 ▲ 무초 미국대사(왼쪽)에게 들이댄 이승만 대통령(오른쪽)의 모젤권총(가운데), 이승만은 전쟁기간 이 권총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
    ▲ 무초 미국대사(왼쪽)에게 들이댄 이승만 대통령(오른쪽)의 모젤권총(가운데), 이승만은 전쟁기간 이 권총을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다.
    ◆’망명‘제의 미국대사에 권총 뽑다 ”한반도 밖으로 안나간다“

    국군과 유엔군이 허덕허덕 공산군에 밀려 낙동강 전선에서 대치하던 때 일이다. 
    대구까지 위험해지자 이승만은 프란체스카에게 ”도쿄 맥아더 사령부를 찾아가 피신하라“고 권한다. 프란체스카는 "짐이 되지 않겠으니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거부한다. 그러자 이승만은 "죽어도 같이 죽자"며 눈물로 기도를 올렸다. 그 무렵 무초 미국대사의 망명 제의를 받은 이승만이 권총을 뽑아 거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대목은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를 그대로 읽어봐야 실감이 난다.
    「대통령(이승만)은 기회 있을 때마다 미군들에게 한국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미국인들은 한국인둘을 과소평가했음이 분명하다. 게다가 미군은 공산게릴라들을 격퇴하는데 공중폭격만 하고 있다. 한국 지형을 잘 아는 우리 보병이 더욱 효과적임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밀리기만 하는 미군이 낙동강까지 밀리고 대구가 적의 공격권에 들어갔을 때 무초 대사가 왔다. 그는 뜻밖에도 정부를 제주도로 옮길 것을 건의했다. 그의 주장은 그곳이 적의 굥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고, 최악의 경우 남한전체가 공산군에게 점령된다 해도 망명정부를 지속시며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무초가 한참 열을 올려 이야기하고 있을 때, 대통령이 허리에 찬 모젤권총을 꺼내 들었다. 순간 무초는 입이 굳어버리고 얼굴색이 하얗게 질렸다. 나도 깜짝 놀랐다. 미국서 살 때 고속순찰 오토바이를 따돌리고 과속으로 달릴 때 가슴이 떨린 이후 그렇게 놀란 적이 없다.
    대통령은 권총을 아래위로 흔들면서 말했다.
    ”이 총으로 공산당이 내 앞까지 왔을 때, 내 처를 쏘고 적을 죽이고 나머지 한 알로 나를 쏠 것이오. 우리는 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옮길 생각이 없소. 모두 총궐기하여 싸울 것이오. 결코 도망가지 않겠소“라고 단호하게 외쳤다.
    대통령이 권총으로 어쩔 것은 아니지만, 긴장한 무초 대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돌아갔다....」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 8월14일자, 원문 인용)
    그날 밤 악몽에 시달리던 프란체스카가 잠들었을 때 무서운 꿈을 꾼다. 
    「대통령이 나를 쏘았다. 그런데도 죽지는 않고 피만 흘렸다. 나는 공산당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소스라쳐 눈을 뜨니 온몸이 식은 땀에 젖어 있었다. 나눈 두 손을 모아 이 전쟁과 죽음의 공포를 물리쳐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다...」
  • ▲ 거의 날마다 국군과 미군을 찾아가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헬기에 혼자 타고있다.ⓒ뉴데일리DB
    ▲ 거의 날마다 국군과 미군을 찾아가 격려하는 이승만 대통령이 헬기에 혼자 타고있다.ⓒ뉴데일리DB
    ◙ 어이없는 날조극 소동...KBS 등 좌파언론 ”이승만이 일본망명 신청“ 허위보도

    이승만 정부를 망명시키려던 미국은 이승만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6.25로부터 65년이 지난 2015년 KBS가 난데없이 ‘이승만의 일본망명 신청설’을 방송했다. ‘6.25 이틀뒤 6월27일에 이승만정부가 일본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는 요지였다. 그러자 YTN, 오마이뉴스 등 좌파언론들이 일제히 이를 받아 떠들어댔다.

    보다 못한 [월간조선]이 자료검증에 들어갔다. 
    그 자료들이 ”몽땅 허위“라는 걸 확인하는데 ”10분도 안 걸렸다“고 담당기자는 기사로 썼다. ([월간조선] 2015년 7월호)
    KBS가 인용했다는 자료는 일본 야마구치현사(縣史)에 나오는 6.25당시 지사(知事) 다나카 다쓰오의 회고담이었다. 내용인즉 ”북한군이 부산의 북쪽, 낙동강까지 진격해 들어왔어요. 그래서 이대로 가면 부산은 ‘제2의 됭케르크’(注: 프랑스 해안 도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포위당한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영국으로 탈출한 곳)가 되는 거예요.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인데, 외무성 사람으로부터 전보(電報)가 와서, 한국 정부가 6만명의 망명정권을 야마구치현에 만들길 희망한다고...“
    ‘날조의 증거’는 금방 나왔다. 공산군이 낙동강까지 진격한 것은 8월 하순이다. 그런데 KBS는 6월27일에 일본망명을 신청했다고 보도하였다. 원문에 없는 날짜를 이승만이 서울을 떠난 6월27일로 조작 삽입하여 ‘도망자 이승만’을 부각시키려 한 짓이었다. 이러니 좌파언론들은 너도나도 이승만을 ”임진왜란 때 선조와 같은 ‘줄행랑 런(run)승만“으로 조롱하는 보도와 사설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야마구치 지사의 회고 중에 외무성 전보가 말했다는 ’6만명 망명정부‘설도 원문에는 없는 것을 누군가 가필한 내용이다. 전보는 단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라는 ’비상조치‘ 지시문에 불과하였다.

    KBS의 방송이 얼마나 거짓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이승만 자료는 차고 넘친다. 참고로 1950년 가을, 한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을 때 이승만의 대일관(對日觀)을 보여주는 증거로써 ‘왜관발언’을 보자. 
      「이승만 박사는 부산 육군병원의 장병들을 위문 갔다가 한국말을 못하는 부상병을 발견한다. ‘일본에서 온 군인들이라 그렇다’는 설명을 듣고는 미국이 자신도 모르게 일본 군인을 참전시킨 것이라고 오해, 유명한 ‘왜관성명’을 발표한다. “미국이 일본인을 미군에 넣어 참전시켰는데, 우리는 공산군과 싸우던 총부리를 일본으로 돌려 싸우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한국일보 기자출신 박실(朴實) 지음 [벼랑 끝 외교의 승리] 청미디어, 2010)
     
    이런 반일주의자 이승만 대통령이 하필이면 일본에, 그것도 한일병탄의 주역 이토 히로부미의 출생지 야마구치로 망명하려 신청했다니, 사실의 진위에 관계없이 ‘이승만 죽이기’에 무엇이든 조작하여 써먹는 스탈린-김일성의 공산화전술 복사판이다. 동유럽을 집어삼킨 ‘역사날조-체제전복’의 붉은 혁명 방법론, 그 악령이 21세기 대한민국을 삼키려 100년 넘기까지 ‘체제전쟁’을 벌여 왔음을 [백년전쟁] 제목이 말해준다. 
    이승만이 진정 일본으로 망명하고자 했다면 일본정부가 아닌 맥아더 유엔사령관에게 요청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의 통치자는 맥아더, 피지배 일본정부는 그 심부름꾼일 뿐이다. 어불성설의 중상모략을 감행하는 좌파의 속내는 그들 스스로 드러내 보인다. 
    2008년 대선에서 500만표 차로 대승한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이승만 죽이기’에 발 벗고 나서서 자유보수 세력에 대한 보복의 무기를 마구잡이로 휘두른 것, 진실보도를 생명으로 삼는 언론이 사실 확인도 없이 공산당식 허위선전을 방송한 KBS는 이명박에 이어 집권한 박근혜 보수정권을 공격하는 좌파를 대변해준 셈이다. 그들이 미국 자료라며 들이댄 문서도 미국정부 파일엔 존재하지 않는 가짜로 판명되었다. 
    왜 이럴까?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 이후 노골화된 남북한 ‘신판 통일전선’이 그 배후일 가능성이 높다는 진단이 당시 전문가들의 관찰이었다.
    그 KBS는 [월간조선]의 반증 앞에서 ‘6.27’ 날짜만 철회했을 뿐, 초점인 ‘망명신청’ 허위내용보도에 관한 사과나 가짜자료 삭제 여부에는 침묵하였다. 반복하면 진실 되는 거짓말의 기정사실화 수법이다. 언제 또 허위자료를 방송할는지 예측 불가능한 역사왜곡의 화약고, 그것이 대한민국의 대표 공영방송이라니, 언론 정상화, 국가정상화는 아직도 까마득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