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5는 ‘한국전쟁’이 아니다. 한반도에서 전쟁했다고 다 ‘한국전쟁’인가. 
    일본이 침략한 청일전쟁도 러일전쟁도 한반도에서 싸웠지만 ‘한국전쟁’이 아니듯이, 소련이 침략한 6.25가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였다고 ‘한국전쟁’일 수가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스탈린이 기획하고 스탈린이 감독한 ‘스탈린의 전쟁’이다. 
  • ▲ 흑해 크림반도에 위치한 얄타(지도)에서 루즈벨트-처칠-스탈린 3국 정상회담이 열렸을때, 회담전 루즈벨트를 예방한 스탈린(왼쪽)
    ▲ 흑해 크림반도에 위치한 얄타(지도)에서 루즈벨트-처칠-스탈린 3국 정상회담이 열렸을때, 회담전 루즈벨트를 예방한 스탈린(왼쪽)
    ★스탈린은 언제부터 ‘한반도 탈환’을 기획하였는가.

    한민족의 운명을 좌우할 미-소의 흥정—얄타 밀약—스탈린을 한반도에 끌어들인 사람은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였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 거의 다 이긴 전쟁에 왜 루즈벨트는 소련의 참전을 재촉하였던가. “스탈린은 친구”라는 친소주의자 루즈벨트의 이상주의가 역사의 범인이다.

    ◉첫째, 1944년 2월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대일전(對日戰)에 참여해달라고 간청하던 순간 스탈린은 쾌재를 불렀다. 실지회복(失地回復)의 찬스,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롤라이 Ⅱ세(1868~1918)가 조선왕 고종을 공사관으로 끌어들여 차지했던 ‘부동(不凍)의 땅’ 한반도를 일본에게 빼앗겼는데 그 일본을 복수하며 되찾을 절호의 기회를 미국이 제공한 것이다.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루즈벨트에게 물었다.
    “미군이 한반도를 점령할 계획이 있습니까?”
    “아니오, 점령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탈린은 무릎을 쳤다. 루즈벨트가 한반도의 4대국 신탁통치까지 제안하지 않는가. 
    “신탁통치는 40년까지 필요 없고 될수록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요”
    아무 의심도 없이 참전 대가로 만주의 요충과 사할린까지 전리품을 약속해주는 루즈벨트, 스탈린의 머리 속에는 한반도의 아름다운 그림이 가득 찬다.
    ◉둘째, 참전을 질질 끌다가 미국의 원자탄이 투하되자 스탈린은 즉각 총진격을 명령한다.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기 일주일전 8월8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만주로 쇄도하는 한편, 동시에 두만강을 건너 한반도로 돌진한다. 대일전에 일본 본토를 공격할 이유가 없다. 한반도를 먼저 차지하는 자가 임자 아닌가. 8월15일 일본이 항복했을 때 소련군은 북한을 거의 점령하고 평양을 장악한 8월 24일엔 38선 봉쇄명령을 내렸다.
    ◉셋째, 서울까지 진격하려던 소련군은 미국이 제안한 38선 이북으로 후퇴, 원자탄을 가진 미국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 개성에서 스톱,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를 절단하고 남북한 통신과 교류를 차단, 국경선으로 봉쇄하였다. 동시에 스탈린은 9.20 지령으로 북한 소비에트화의구체적 실천방안까지 보낸다. “북한에 민주기지를 구축하여 남한까지 공산화하라.”
    ◉넷째, 북한 점령 3개월째 1945년 11월, 스탈린은 긴급명령을 발한다. “북한의 산업시설을 복원시키라”--그것은 동유럽에서처럼 일본이 설치한 최첨단 산업시설을 뜯어다가 본국에 보내는 행위를 중단하고, 이미 철거한 시설도 되돌려주라는 지시였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극히 예외적 지시였다. 그때부터 북한의 소련군정은 일본 기술자들의 본국행을 막았으며 중화학공장들과 무기 공장, 수풍 발전소등 전략 시설들의 복구와 확장에 돌입하였다. 북한 인민 경제를 위해서? 아니다. 바로 남침 전쟁준비 그것이다.

    ◉다섯째, 1946년 2월 북한 단독정권을 확립한 스탈린은 서울에서 시작된 미-소 공동위원회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6월 말경 김일성과 박헌영를 모스크바로 불렀다. 그 자리에서 박헌영의 불만을 잠재우고 김일성을 확실한 ‘두목’으로 지명한 뒤,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다.
    -조선공산당 지도자들의 정치적 군사적 준비태세를 전면 강화할 것.
    -김일성의 단독정권 무장을 위하여 경험 많은 군사고문관들을 대거 파견할 것.
    -북한의 군사적 원조와 기술 원조를 위한 구체적 방안을 조속히 마련 실시할 것.
    지시를 받은 소련군 총참모부는 물론, 소련 정치 지도부는 “극동의 위성국 북한이 강력하고 현대적인 군대를 가져야 할 때가 왔다”며 기뻐했다. (레베데프, 앞의 책. 김국후, 앞의 책)
    그에 따라 소련-북한의 임시 원조협정이 맺어지고, 소련의 군사전문가들과 무기들이 북한으로 줄을 이어 들어간다. 그로부터 3년여 동안 스탈린은 ‘시간 끌기’ 대미협상(미-소공위)과 병행, 북한군의 현대화 무장에 박차를 가한다.


  • ▲ 워싱턴 구미위원부의 임정대통령 이승만과,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기 4개원전 출간한 영문 저서 [JAPAN INSIDE OUT] 표지.
    ▲ 워싱턴 구미위원부의 임정대통령 이승만과,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기 4개원전 출간한 영문 저서 [JAPAN INSIDE OUT] 표지.
    ◆ 역사상 최초의 ‘이념전쟁’...미국은 몰랐다. 이승만은 진작부터 알았다

    6.25는 ‘한국전쟁’이 아니다. 그것은 ‘스탈린의 전쟁’--스탈린이 코민테른의 ‘공산주의 세계화’란 이념의 장막을 내세워 동유럽과 아시아를 집어 삼키는 영토약탈, 새로운 식민전쟁이었다. 
    미국 루즈벨트는 얄타회담 때까지도 아무것도 몰랐다. 그는 공산주의 실체를 몰랐기에 스탈린의 요구를 얄타에서 다 들어주었고, 미국은 2차대전 말기 소련이 동유럽과 아시아를 점령할 때까지도 스탈린의 ‘선의’만 믿고 있었다. 루즈벨트를 이어받은 트루먼도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서도 국제공산주의 전략을 모른채 국내 경제문제와 선거 대책에 갇혀버렸다. 

    이승만은 달랐다. 일찍이 1920년대 초, 상하이 임정대통령으로서 겪은 국제공산당의 공산화 공세를 몸으로 체험하면서 ‘공산당의 당부당’이란 세계최초의 ‘반공’ 논문을 발표(1923), 자유세계에 공산주의라는 전체주의 악령이 침범했음을 가장 먼저 경고한다.
    또한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해야 일본이 멸망한다는 비전을 가지고 [JAPAN INSIDE OUT]을 영문으로 저술, “일본과 소련, 히틀러의 전체주의가 산불처럼 미국을 삼키려 한다”며 미국의 평화주의를 일깨우고, 소련공산주의가 일본-나치독일과 똑같은 ‘인간의 적’임을 계몽하였다.
    이승만은 말했다. “무작정 평화주의자는 제5열(간첩)과 같다”고.

    그의 예고대로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자 이승만은 외친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물러가면 소련이 내려와 공산화 시킬 것”이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빨리 승인해서 ‘자유의 방파제’를 만들라고 촉구한다. 그러나 미 국무성의 소련 간첩들이 가로막고 이승만의 요구를 짓밟아버렸다.
    이승만은 “얄타에서 미국이 한반도를 소련에 팔아먹었다”며 밀실의 흥정을 폭로, 미국으로 하여금 한반도에 눈을 돌리게 하여, 한반도를 방치했던 미국은 부랴부랴 38선을 그어 남쪽 절반이라도 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해방후 3년간 미국은 소련의 ‘야욕’을 모르는 듯 ‘좌우합작’에 매달려 우왕좌왕한다. 
    마침내 이승만이 유엔외교를 통하여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해결책을 제시, 고민하던 미국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대한민국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이승만은 일찌감치 ‘세계의 냉전’ 기류를 통찰, 코민테른의 공산블록과 자유블럭으로 재편된 세계가 정면충돌로 폭발할 것이라는 경고를 되풀이 주장한다. “미군이 한국을 떠나면 미국전체가 피를 흘리는 날이 닥칠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주한미군 철수를 한사코 반대한 까닭이다. 그러나 트루먼은 세계를 보는 눈이 없다. 단지 “한반도는 비용만큼 얻을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군부의 잇따른 보고에 안주한다. 그저 전후 피폐해진 국가 예산 복구, 국방비를 대폭 줄이고 미군을 줄였고, 1948년 대통령선거에 올인하여 당선된 트루먼은 세계평화를 외치며 주한미군을 이듬해 6월까지 완전히 철수 시켰다. 
  • ▲ 애치슨 미국무장관(왼쪽)이 미국의 동북아 방어선을 발표한 '애치슨 라인' 지도.
    ▲ 애치슨 미국무장관(왼쪽)이 미국의 동북아 방어선을 발표한 '애치슨 라인' 지도.
    ★미국은 왜 6.25를 막지 못했나

    6.25가 터진 해 1950년초 1월12일 미국무장관 애치슨(Dean G. Acheson, 1893~1971)은 6.25발발에 결정적 도화선이 된 ‘애치슨 선언’을 터트린다.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클럽에서 행한 ‘아시아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소련과 중국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앨라스카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즉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한 그 '애치슨 라인'을 발표한 것이다. 소련과 북한엔 복음이오, 한국엔 치명적 폭탄이었다. 
    왜 이런 위험한 선언을 공개하는 모험을 했을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그러나 그것은 트루먼 정부의 미숙한 국제인식의 자기폭로, 그것이 과오인 줄도 모르는 전략적 무정견과 오만함을 드러낸 것이었다. 당시 미국 지도부의 인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말이 있다.
    “남한은 미국의 이익에 있어 자산이 아니라 부채이다. 남한정부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의문시되며, 따라서 미국은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다” 이것은 중국학자 래티모어(Owen Lattimore)가 국무부의 위촉에 따라 1949년 8월 제출한 정책보고서에 나오는 대목이다.(허정 [우남 이승만] 태극출판사, 1970)

    그 말은 마치 1948년4월 북한을 다녀온 김구가 중국공사 유어만에게 고백한 말을 연상시킨다. “내가 가서 보니 북한군의 규모가 엄청나서 인민군이 쳐내려오면 한국정부는 사라지고 인민공화국이 될 것”이라고 김구는 말했다. “남북통일 되면 김구선생님을 대통령으로 모시겠다”는 김일성의 유혹을 믿었던가, 대한민국 건국을 건국후까지 반대했던 임정주석 김구였다.
    그처럼 트루먼 정부도 한국을 “없어져도 그만인 나라”로 치부하는 ‘미필적 고의’를 품었단 말인가. 그 증거는 수두룩하다.

    ◉아이젠하워가 의장인 미 합참은 세계2차대전 종결후 유럽에 동진하는 소련을 가상의 적으로 상정, 합동전쟁계획위원회(JWPC: Joint War Plans Committee)가 비상전쟁계획을 수립할 때 소련과의 전면전을 벌일 경우 한국은 전략점에서 제외시키고 주한미군을 조속히 일본으로 철수하는 작전을 짰다. 이 계획은 6.25때까지 변함이 없었다.
    ◉트루먼이 1948년 4월8일자로 승인한 주한미군 철수안(미안보회의 NSC-8)은 남한의 어떤 반란사태라도 미군의 개입을 금지하고 있다. 바로 제주도 4.3사건이 폭발했을 때였다. 이 규정은 그 대신에 한국군을 원조한다고 되어있으나 6.25까지 원조는 실행되지 않았다.
    ◉미군 철수가 한창이던 1949년초 미CIA(중앙정보국)은 “남한내 폭동(제주)에 호응하여 북한이 남침할 것이며 한국은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백악관에 올렸다.
    ◉미군정 하지 사령관과 정치고문 제이콥스는 미군철수를 늦추라고 건의했다. “한국인들은 이제 막 독립하였는데 미국이 버릴 것으로 판단해 떨고 있다.”
    ◉미군철수 시한을 6개월 연장하는 NSC 8-2를 마련, 한국에 경제군사원조를 명문화했다. 그러나 1949년 6월말까지 철수하면서 ‘원조’는 오직 철수미군의 장비를 남겨준 것 뿐, 그것마저도 ‘방어용’으로 제한하였다.
    ◉미 하원은 트루먼이 이승만의 성화에 못 이겨 급조한 대한원조 1억5천만 달러를 6천만 달러로 후려치더니 1월19일 아예 부결시켰다, 애치슨 선언 1주일 후의 일이다.
    이에 트루먼은 “군사개입 안하는 대신 경제원조”라며 재고를 요구, 미 의회는 2월14일 2억4천만 달러 원조안을 통과시킨다. 하지만 이 원조액도 4개월 후 터지는 6.25까지 한 푼도 대한민국에 지급되지 못하고 만다.
    ◉서울의 무초 대사와 도쿄의 맥아더 사령관은 미군철수 이후 끊임없이 북한의 남침임박 정보를 워싱턴에 보냈다, 맥아더의 보고서 가운데에는 ‘북한군이 38선을 넘는다면 1950년 6월경일 것’이란 정보까지도 보인다. 
    ◉스탈린이 북한에 항공기와 탱크등 최신무기를 대량 공급하고 있다는 정보를 보면서도 트루먼과 애치슨 국무장관은 마이동풍이었다. 
    애치슨은 뒷날 회고록에서 이렇게 변명한다. “소련의 베를린 봉쇄이후 유럽에도 소련의 침공을 경고하는 보고들이 많았다. 한국은 소련의 우선순위에서 멀어 보였고, 가까운 일본에 미군이 있으니까...더구나 한국은 모스크바에서 너무나 먼 거리에 있으므로 남침을 예상 못했다.” (애치슨 회고록 [나의 국무성 재직시절] 1969) 
    무능한 지도자의 솔직한 자백이다. 미국의 계산과 달리 1949년 마오쩌둥 공산군이 장제스 군대를 제압하자 “트루먼 정권이 중국대륙을 빼앗겼다”는 사면초가의 집중공세를 받았으므로 “아시아는 지겹다”며 쳐다보기도 싫었던 트루먼 민주당 정권이었다. 미국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 김일성이 모스크바 클렘린 궁에서 스탈린과 식사하는 모습, 이 사진은 스탈린 사후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북한이 조작한 사진으로 밝혀졌다.
    ▲ 김일성이 모스크바 클렘린 궁에서 스탈린과 식사하는 모습, 이 사진은 스탈린 사후 김일성 우상화를 위해 북한이 조작한 사진으로 밝혀졌다.
    ◆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남한의 무력통일에 합의

    미군 철수가 시작되자 김일성은 안달이 났다. 스탈린의 ‘미-소 동시 철군’ 제안에 따라 미군이 남한을 떠나고 있으니 눈 빠지게 기다리던 남한정복의 길이 환하게 열렸기 때문이다.
    “스탈린 원수님의 전략대로 때가 왔으니 무력통일 거사를 허락해주시오” 김일성은 평양주재 소련대사로 들어앉은 ‘북한 총독’ 슈티코프에게 스탈린의 결재를 받아달라고 되풀이 간청하는데 40여 차례나 졸라댔다는 말이 전해진다. 성시백 등을 통해 남한의 취약한 군사형편을 환히 들여다보는 김일성은 자심감이 넘쳤다.

    ★스탈린, 김일성 일단 제동, 군사원조협정 선물...‘조-중 방위협정’도 주선

    1949년 3월 3일 김일성이 박헌영을 데리고 모스크바로 달려갔다. 7일 김일성이 ‘남침 허가’를 요청하자 스탈린은 3가지 이유로 일단 제지한다. 북한군이 남한군보다 월등하지 못한 점, 미군이 남아있는 점, 미-소간의 38선 약속을 깨면 미군 개입 우려 등이다. 이러면서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침입하기를 기다려 반격 침공해야 세계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위장침략 전술이다.
    이때 투덜대는 김일성에게 경제문화교류 협정이란 이름으로 ‘비밀 군사원조협정’을 선물한다.
    3월17일 체결된 군원협정의 내용은 이렇다. 
    ▷6개보병사단과 3개 기계화부대 편성을 위한 무기-장비 추가 제공. ▷7개 기동보안대대 편성.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 추가 원조. ▷특별군사고문단 120명을 1949년5월20일까지 파견. ▷10억원대 물자 추가지원.

    다음날 3월18일 소련의 중재로 중국과 <조중(朝中)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어떤 침략에 대해서도 양국은 공동전쟁. ▷중국공산당은 7월1일부터 8월31일까지 만주의 병력 및 무기를 북한에 제공한다. ▷북한은 만주의 일본 기술자 및 일본 군수품 사용.
    1990년대초, 러시아 엘친 정권이 공개한 소련 비밀문서는 이때 북한의 무장 상황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보여준다.

    한달후 4월28일 김일성은 중국에 김일을 보내 마오쩌둥에게 중군군내 조선인부대를 넘겨달라고 요청하였고 마오는 즉석에서 2개사단을 입북시키고 장제스와 내전이 끝나면 기타 조선인부대도 보내주기로 했다. 이 무렵 중국인민해방군은 양자강을 건너 장제스 정부의 수도 남경(南京)을 함락시켰는데 걱정하던 미군은 구경만 하였다. 이에 마오는 김일성이 남조선을 침공해도 미군 개입은 없으리라 판단했다고 한다. 
  • ▲ 마오쩌둥이 1950년 10월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고 있다.
    ▲ 마오쩌둥이 1950년 10월1일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고 있다.
    ★마오쩌둥, 조선인부대 3개사단을 북한에 제공

    장제스 군대를 파죽지세로 몰아붙인 마오쩌둥은 드디어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만주와 화북지방 등에서 전공을 세운 조선인부대 3개 사단은 이미 7~8월에 북한으로 들어갔다. 
    유명한 ‘방호산 사단’은 심양의 166사단으로 신의주로 들어가 북한 인민군 6사단이 되었고, 장춘지역 164사단을 함북 나남에서 5사단이 된다, 하남성 정주(鄭州)의 15사단은 북한 원산에서 인민군 12사단으로 변신한다. 모두 중공군의 무기를 가져갔음은 물론이다. 방호산은 6,.25당시 최전선에 나서 개성에서 목포까지 단숨에 휩쓸어 유명해진 팔로군이다.

    이들의 규모는 총 5만 5,000명 내지 6만 명으로 북한군의 7개 공격사단 병력의 주력이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중공 팔로군(八路軍)의 선봉이 되어 광대한 중국의 산악전, 평야전, 도시전 등 갖가지 전투로 단련된 정예의 용맹을 떨침으로써, “스페인 내전에서 이름 날린 ‘국제종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수 있는 대오’라는 평을 들을 정도였다. (김중생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 명지출판사, 2000. 김용삼 [김일성, 신화의 진실] 북앤피플, 2016)
    여기에 더하여 1950년이 되자 스탈린은 180대의 군용기, 독일 나치군을 무찌른 최신형 탱크 T-34전차, 야포와 자동화기등 대규모 현대무기를 북한에 실어보낸다.
  • ▲ 소련이 1949년8월 카자흐스탄 비밀도시에서 처음 실시한 핵폭발 구름사진. 오른쪽은 미국의 맨하튼 핵개발정보를 빼내 소련에 제공한 로젠버그 부부간첩.
    ▲ 소련이 1949년8월 카자흐스탄 비밀도시에서 처음 실시한 핵폭발 구름사진. 오른쪽은 미국의 맨하튼 핵개발정보를 빼내 소련에 제공한 로젠버그 부부간첩.
    ★스탈린 ‘핵 개발’ 성공...김일성에 ”남침해도 좋다“ 승인

    마오쩌둥이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출범하기 33일 전, 1949년 8월29일 소련 지배 카자흐스탄의 사막에서 검은 핵구름이 솟아올랐다. 스탈린의 핵개발이 마침내 성공한 것이다.
    소련의 핵실험장이 있었던 세미팔라틴스크(Semipalatinsk:현 쿠르차토프)는 당시 지도에도 안나오는 곳, 스탈린은 이곳을 ‘비밀도시’로 지정했다. 1990년대까지 소련의 715회 핵실험 중 456회를 이곳에서 행하여 ‘소련 핵무기의 산실’로 불리운 사막엔 집중 핵세례를 받아 '차간호‘(Lake Chagan)'란 인공호수도 생겨 ’원자호‘(Atomic Lake)라 일컬어진다. 
    미국이 1945년 7월16일 뉴멕시코 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핵구름을 쏘아올린지 약 4년 후 성공한 스탈린의 핵개 발은 세계 두 번째, 드디어 2대 핵국(核國)의 정면충돌을 세계에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그것도 미국의 ’맨하튼 계획‘(Manhattan Project)을 도둑질한 스탈린의 대규모 스파이 작전이 앞당긴 것, 스탈린은 "만들 수 없다면 훔치라"고 핵개발 책임자 베리아에게 다구쳤다. 비밀경찰(NKVD) 총수 라브렌티 베리야는 스파이망을 총동원한다.  수많은 스파이들 중에 자발적으로 정보를 빼낸 미국 과학자 로젠버그(Julius Rosenberg) 부부가 대표적 간첩이다. 공산당 지식인 사르트르, 피카소 등이 로젠버그를 변호하였지만 기록은 속일 수 없는 것, 1990년 공개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의 파일엔 "핵개발에 로젠버그 부부의 도움이 컸다"는 말이 생생하게 녹음되어 있었다.

    노심초사하던 핵개발에 성공한 스탈린은 한 시름 놓았다. 이어 중국대륙의 공산화에 성공하자 미루어왔던 ’남조선 무력통일‘ 시나리오를 실행할 때가 찾아 온 때문이다. 
    김일성은 1950년 3월30일부터 4월25일까지 모스크바를 비밀 방문해 스탈린과 3차례 면담한다. 여기에서 스탈린은 비로소 김일성의 남침요구를 승인했다. 
    그는 김일성에게 3단계 기본작전계획을 제시한다. 1)38선의 특정지역에 병력 집중배치. 2)남한에 새로운 평화통일 제안을 할 것, 거부할 것이므로 이를 구실로 공격할 것. 3)옹진반도에 위장교전에 동의함. 전쟁은 속전속결로 이승만이 국제적 지지를 동원할 시간을 주지 말 것. 
    스탈린은 소련군이 유럽지역의 도전에 묶여있어 ”북한의 남침엔 직접 참전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중국의 마오쩌둥이 한반도를 잘 알므로 그의 도움을 받으라“고 재차 지시한다. 이것은 만약 미국이나 일본이 개입할 경우 중국에게 대리전쟁을 시킨다는 스탈린의 계산이었다.
    핵개발에 성공했지만 아직은 미국과 맞상대할 실력은 못 될 뿐더러 동유럽에서 또 하나의 전쟁이 난다면 두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소련군의 불참전략을 두고, 스탈린이 마오쩌둥의 중국을 초장부터 대미전쟁에 내세워 국력을 소모시켜서 소련에 맞서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 즉 발칸반도 유고의 티토처럼 독자성을 주장하는 ’아시아의 티토‘가 등장하는 것을 미리 막으려는 전략이었다고 해석하는 전문가들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스탈린의 진심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찾기 어렵다. 
  • ▲ 김일성과 중공 마오쩌둥이 건배하는 모습, 1975년 베트남의 공산통일 직후 김일성은 베이징으로 달려가 마오에게 한반도 무력통일 전쟁을 타진하였는데 외면당했다.
    ▲ 김일성과 중공 마오쩌둥이 건배하는 모습, 1975년 베트남의 공산통일 직후 김일성은 베이징으로 달려가 마오에게 한반도 무력통일 전쟁을 타진하였는데 외면당했다.
    ★마오 ”한반도는 우리 땅“...’500년 식민지‘ 회복에 나서다

    공산정권수립 두 달 뒤, 마오쩌둥은 평생처음 외국 여행길에 오른다. 1949년 12월 6일 베이징에서 전용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떠났다. 중공 지도자로서 첫 외국 공식방문은 다목적이다. 그동안 중공의 투쟁과 공산화를 도와준 스탈린에 대한 감사, 12월21일 스탈린의 70세 생일축하, 그리고 신생 중공과 소련의 새로운 우호동맹 및 원조협정 체결이다.
    세계 공산권의 우두머리 스탈린의 생일잔치가 성대하게 끝난 후, 마오는 소련에 계속 머물러야 했다. 1945년 스탈린이 중화민국 장제스와 맺은 ’우호조약‘을 폐기하고 중공과 새로운 협정을 맺자고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차일피일 미뤘다.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1월 베이징의 주은래가 날아와 교섭을 본격화하여 2월14일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중국명:中蘇友好同盟互助条约)에 서명할 수 있었다. 
    이때 스탈린이 마오와 ‘김일성의 남침’에 대한 협의와 합의를 했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기록은 나오지 않는다. 

    크렘린에서 스탈린의 ‘남침허가’를 받아낸 김일성은 5월13일 베이징 마오를 찾아간다. 스탈린이 마오의 참전동의를 꼭 받아야한다고 조건을 달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김일성의 요구를 ‘중국통일’이후로 미루자고 했던 마오는 ‘수락’할 수밖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첫째, 스탈린의 명령을 거부 못한다. 마오는 ‘스탈린의 제자’를 자처하며 원조를 받아 공산혁명을 이룩한 스탈린주의적 코민테른 운동가였다. 둘째, 북한 공산화에서 스탈린에게 헤게모니를 빼앗겼지만 남한 공산화에서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무엇보다 한반도는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방, 500년 식민지 아니던가. 

    김일성은 스탈린이 지시한 3단계작전을 설명하며 ‘남한정복’을 장담, 중국의 ‘승인’을 요청한다. 주도면밀한 주은래는 주중 소련대사 로쉰에게 ‘스탈린의 확인’을 요구, 비신스키 외상이 스탈린의 암호전보를 급히 마오에게 보냈다. 
    「필리포프(스탈린 암호명)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선반도 통일에 관한 김일성 동지의 제의에 동의했다.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반드시 조선과 중국 동지가 내려야한다. 만일 중국동지들이 거절한다면 새로운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연기해야 한다」 (바자노프, 김광일 역 [소련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 열림, 1998)
    마오는 스탈린의 작전을 동의하고 ‘신속한 작전’을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과 미국의 개입가능성을 논의한다. 김일성은 미군이 완전 철수하였으므로 개입은 없을 것이라 장담하였고, 백전노장 마오는 ”일본이나 미국이 개입하면 우리 팔로군 1개 군단을 투입해 돕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미 팔로군의 조선인 6만 병력들은 북한에 들어가 주력부대로 마지막 침공훈련 중이다.
    마오는 김일성과 박헌영을 위한 만찬을 베풀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로부터 ‘남침 승인’을 받아내자 기고만장한 일장연설로 ‘승리’를 다짐한다.
    마오는 장제스군과 내전을 벌일 때 조선인 병사들이 앞장 서주었고, 북한이 후방기지로서 도와준 ‘혈맹’이었음을 지적하고, 김일성을 격려한다.

    ◉마오, 처음부터 참전 결심=마오쩌둥은 스탈린과 협상에 나서는 저우언라이(주은래)에게 다짐하였다. ”우리가 출병하지 않음으로써 잃는 것은 만주의 공업지대와 북조선의 압록강 수풍 전력과 자원이다. 요컨대 우리는 당연히 참전해야 하며 반드시 참전하지 않으면 손해가 지극히 클 것이다“
    미국의 참전을 우려하는 군부에게 강조한다. ”북조선을 잃는다는 것은 입술이 없어져 이가 시리고, 문짝이 떨어져나가 집안이 위태로운 격((脣亡齒寒 戶破堂危)이다“ 
    신중론을 펴던 린뱌오(林彪), 주더(朱德) 등도 금방 이구동성 찬성하였다.
    마오에게 소련군이 직접 참전하지 않는 김일성의 남침은 절호의 기회, 명나라 이래 속방이던 조선반도에 중공의 영향력을 회복할 수 있다면 스탈린의 코민테른 헤게모니에 맞설 수도 있는 역사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조선전쟁은 중국통일 못지않게 중국혁명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고 참전결의를 모았다. (박실 [6.25전쟁과 중공군] 청미디어, 2013)
  • ▲ 한미군사원조쌍무협정 체결,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제 개헌 추진에 반대하는 기사도 보인다. (조선일보, 1950.1.28)
    ▲ 한미군사원조쌍무협정 체결, 이승만 대통령이 내각제 개헌 추진에 반대하는 기사도 보인다. (조선일보, 1950.1.28)
    ◆ 이승만, 맥아더 만나 ‘공동방위’ 다짐...'이념전쟁' 예고

    스탈린이 모스크바로 김일성을 불러 북한 무장을 위한 대규모 비밀군사원조협정까지 맺던 무렵, 1949년 4월 서울의 이승만은 주한대사로 임명된 무초 대사를 경무대로 불러 트루먼에게 대규모 군사원조와 공군 창설 지원을 요청했다. 6만5천명의 상비군과 20만 예비군을 무장시킬 무기 제공과 함께, 육군항공대를 공군으로 독립 창설하기 위해 전투기와 폭격기, 정찰기 및 수송기 등 100대를 보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조선일보] 1949.4.21.일자)
    도쿄의 맥아더도 ”한국군은 경찰수준“이라며 이를 승인해달라고 육군부에 건의하였고, [뉴욕타임즈]는 사설로써 이를 지지했다.
    트루먼은 그러나 한국의 공군창설 자체를 반대한다. 한국은 새로운 공격력을 가지면 분쟁을 일으킬 위험집단이므로 어디까지나 현상유지에 머물도록 NSC-8에 규정한대로 따르기로 했다는 것이다.(남시욱, 앞의 책)
    트루먼은 이승만에게 전하라며 ”무기 타령하지 말고 굶주리는 국민들에게 밥 먹일 걱정이나 하라“고 했다. 

    ◉한미 군사원조 쌍무협정=이승만을 달래려는 경제원조안을 두고도 트루먼과 의회가 핑퐁 칠 무렵, 이승만은 군사원조를 되풀이 간청한다. 연설마다 기자회견마다 ”한국의 국방력 강화만이 자유민국의 살길이며 아시아의 평화유지 방안”임을 역설하며 ‘군사원조협정’을 맺자고 1년 넘게 요구하였다. 이에 경제원조도 뜻대로 못하는 트루먼은 마지못해 ‘군사원조 쌍무협정’을 1950년 1월26일 체결한다. ([조선일보]1950.1월28일자)
    명색은 앞으로 제공할 군사원조에 관한 협정이지만 실상은 ‘현재의 한국군 규모’를 유지할 정도의 지원과, 철수한 주한미군의 장비 제공 및 군사고문단 주둔에 관한 업무에 머물렀다. 트루먼정부는 어떤 경우에도 결코 최신 공격무기를 이승만에게 줄 생각이 없다. 

    ★이승만 “냉전의 열화화” 경고...“이념전쟁 세계대전” 예고

    이승만은 맥아더의 초청으로 2월16일 도쿄로 날아갔다. 건국후 두 번째 만난 두 사람의 회담 내용이 밝혀진 기록은 없지만, 지난번 만남에 이어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귀하가 적의 공격을 받으면  미국 캘리포니아가 공격받은 것처럼 한국을 수호하겠다”는 말을 하네다공항에서도 다짐하며 얼싸안았다. 이날 이승만이 공항에서 100여명의 기자들과 회견한 내용은 그의 당시 심경이 잘 나타나 살펴볼 가치가 있다.(이하 [조선일보] 1950. 2.19일자).

    “동북 아시아의 유일한 자유국가인 한국은 지금 공산 게릴라들이 방화와 대향학살을 자행하고 있는데 그들의 무기는 외부에서 제공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열화전쟁(熱火戰爭)이 아직은 없다하더라도 냉전이 열화화(熱火化)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냉전의 의미를 이해 못하고 있다”

    “미국이 소련과 평화협상을 한다는데 대하여 의미를 두지 않는다. 현재까지 민주주의 제국은 냉전에 있어서 손해를 보고 있다. 상반되는 이념과 세계적인 충돌을 평화적으로 해결시킬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운 바이다. 만약 미국이 소련과 평화적인 회담을 하게 된다면 이것은 민주주의 제국의 양보의 또 일보가 될 것이다. 미국은 제 조약을 준수하고 있으나 그 상대자(소련)는 조약을 파괴하거나 또는 그 조약 서명국가를 구속하기 위하여 조약을 체결하려는 것이다. 소련은 될 수 있으면 평화적으로 또 필요하면 전쟁으로 그 세력을 확대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 만약 소련이 냉전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나는 그 선을 획정하고 그 이상 진출하지 말라고 말할 것이다.” 

    “미군이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면 우리의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태평양 제국은 그 공동의 안전보장문제를 대서양동맹에 유사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토의하기 위하여 어떤 형태의 연맹 또는 조약회담을 개최하기를 나는 바라는 바이다.”

    “미국은 한국군을 38선 이남에 머물러 있으라 강요하고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 국군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한국을 통일할 것을 열망하고 있다. 국제정세 때문에 우리는 주저하고 있을 뿐이다. 는데....수년전만 하더라고 세계는 공산주의가 무엇이고 공산주의가 어떠한 것인가를 인식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이것을 알게 되었고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다른 외국(소련)에 조국을 팔아먹고 싶어 한다. 나는 단 일척(一尺)의 국토라도 외국에 내주지 않을 작정이다.” 

    이와 같이 이승만의 예리한 혜안은 역사상 최초의 ‘이념’ 충돌, 즉 자유세계와 공산세계로 나뉘어진 냉전 구도를 미국보다 먼저 통찰한 위에 그것이 폭발로 다가오는 두 세계의 ‘이념 전쟁’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북한을 소련에 팔아먹으려는 공산집단을 이참에 반드시 물리쳐 ‘자유 통일’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민족적 열망을 전세계를 향하여 토로하였다.


  • ▲ 북한 남침위기 속에서 내각제 개헌안을 추진한 야당의 추태, 난투극 끝에 폐기된 당시 국회상황을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들.
    ▲ 북한 남침위기 속에서 내각제 개헌안을 추진한 야당의 추태, 난투극 끝에 폐기된 당시 국회상황을 보도한 조선일보 지면들.
    ★제2대 총선거...야당은 ‘내각제 개헌안’ 내놓고 난투극

    그 무렵, 건국정부의 권력을 차지하지 못한 야당들은 집권 음모에 밤낮을 지새고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을 만든 제헌 국회의원의 임기는 2년이었다. 2대 총선이 다가오자 의원들은 ‘임기 2년연장’을 위한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데, 이럴 바엔 아예 ‘내각제’로 개헌하자는데 뜻을 모아 개헌안을 제출하기에 이른다. 왜냐하면, 내각제로 만들었던 건국헌법을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를 주장하여 들어주었더니 건국내각 구성에서 야당은 단 1명밖에 입각을 못했기 때문에“권력을 찾자”며 2대국회부터의 집권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이승만은 물론 ‘내각제 반대’를 역설한다. 전쟁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며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분단국에서 “내각제는 시기상조”라며 “나의 직을 걸고라도 반대 투쟁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야당의 집권욕을 누가 막으랴. 개헌안이 국회에 제출되고 주먹다짐까지 난무하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하지만 표결 결과 내각제 개헌안은 부결되었다. ([조선일보] 1950.3.15.일자)
    2대총선 투표 날짜를 두고도 “연기하자” “하지말자” “빨리 하자” 갑론을박 끝에 이승만 대통령이 ‘5월30일 총선 실시’로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앞에서 본대로 간첩 성시백이 포섭한 자들과 남로당 잔당이 무소속으로 대거 출마하여 검거선풍이 일어난다. 
    이승만은 “사상과 주의를 판별하여 투표하자”며 국민 계몽에 나섰다. 선거 결과는? 뜻 밖에도 무소속이 117명이나 당선, 210명 국회의원 절반을 훌쩍 넘었다. 언론은 ‘신진당선자 속출‘이라며 새 인물들에 기대를 건다는 사설도 썼다. 하지만 그들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한 김구의 한독당과 좌익계, 위장한 친북세력들이다.
    이승만지지 세력도 놀라고 ’내각제 개헌‘으로 권력을 빼앗으려던 한민당도 소수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무소속 ’신진‘들은 이제부터 한민당의 개헌운동에 올라타서 이승만 정권교체에 본격적으로 가세한다. 그런 상황이 전쟁 중에도 식을 줄 모른 채, 이승만이 제시한 ’직선제 개헌‘과 맞물려 진통을 거듭, 이승만은 공산당과 싸우며 정치권과 싸워야하는 ’전쟁 중의 정치전쟁‘이란 파란을 일으키게 된다. 급기야 6.25전란 2년후 1952년 5월 비상계엄을 선포, 내각제와 직선제 개헌의 40일 투쟁 끝에 직선제 개헌이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소위 ’부산 정치파동‘이다. 
  • ▲ 도쿄의 맥아더를 방문, 공동방위를 논의한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 도쿄의 맥아더를 방문, 공동방위를 논의한 이승만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냉전의 열전화"를 경고하였다.(조선일보, 1950.
    ★이승만, 미국에 무기 독촉...“우리 생명을 지키는 것도 잘못인가”

    이승만은 선거기간 미국을 향하여 군사원조를 거듭 요구한다. 15일 경무대 정기기자회견에서 “북한군이 38선상에 배치되고 있다는데...”라는 질문을 받자 이승만은 “그런 정보는 여러 번 들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무기가 필요한데 미국에선 한국에 무기를 주면 북벌(北伐:북한정벌)을 할 것이고 이로 인하여 세계3차대전이 야기될 우려를 한다는데 이는 전혀 잘못된 인식착오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평화를 애호하는 만큼 그 진의를 안다면 미국이 차라리 원조 운운 말이나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승만은 평화를 수호하려는 한국군에게 평화를 수호할 만큼의 무기를 제공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다음날 외국기자들에게는 이렇게 주장한다. 
    “북한 괴뢰집단의 침범 위협이 날로 커져 우리를 날카롭게 하고 있다. 미국 민주주의가 슬로모션(Slow motion)임은 이해하지만 우리 국민은 위험에 빠져있고 이 나라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 미국 무기가 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터인데, 이웃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가 가진 일본제 무기들은 빨리 올수 있다. 우리 생명을 우리가 지키겠다는데 왜 안 된다는 것인가. 이것이 우리의 잘못이란 말인가. 이 5월 6월이 가장 위험한 달이며 금방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조선일보]1950.5.14.일자)
  • ▲ 김일성의 '남침'을 기획한 스탈린과 이에 동의한 마오쩌둥. 사진은 1949년12월 마오가 중공정권을 수립하고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방문, 중-소 새 협정을 교섭할때 모습이다.
    ▲ 김일성의 '남침'을 기획한 스탈린과 이에 동의한 마오쩌둥. 사진은 1949년12월 마오가 중공정권을 수립하고 모스크바로 스탈린을 방문, 중-소 새 협정을 교섭할때 모습이다.
    ★스탈린의 전쟁, 38선 출발...’마오의 전쟁‘...미국이 자초한 비극

    이승만의 예리한 본능적 감각은 맞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남침 시기를 7월로 잡았다가 6월로 앞당긴다. 장마철이 오기 전 ’단시일 내‘ 서울을 장악하면 남한의 20만 인민들이 봉기하여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이라는 박헌영의 장담도 있다. 김일성의 고집이 스탈린을 이겼다. 
    예감은 정확했으되 이승만은 미국을 독촉하며 무기를 기다리는 일 밖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맨주먹과 돌맹이로 최후까지 싸우겠다” 국민과 국군의 사기를 올리려는 말잔치 뿐.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은 만반의 준비태세를 마치고 첫 새벽에 38선을 출발한다. 
    “스탈린은 6.25전쟁의 신호원(starter)이자 연출자면서 감독이었다. 그는 육상선수를 훈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1주자 김일성, 바통을 이어받을 제2주자 마오쩌둥까지 마련했다.” 즉, 6.25는 처음부터 끝까지 ’스탈린의 전쟁‘이었다고 중국의 역사학자 션즈화((沈志華:심지화)는 단언하였다. (션즈화 저, 최민원 역 [마오쩌둥, 스탈린과 조선전쟁] 선인, 2010)  
    그런데 38선을 돌파한 북한군의 중추세력은 마오쩌둥이 북한에 제공한 ’팔로군‘ 중공군이다. 따라서 6.25침략전쟁은 시작부터 한반도를 선점하려는 ’마오의 전쟁‘이기도 했다. 

    그때 소련과 평화협상으로 현상유지를 추진하던 미국은 뒤늦게 소련의 야욕을 깨달은 트루먼이 미군 참전을 결정, 유엔결의를 거쳐 유엔군의 이름으로 출동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를 몰랐던 미국이 이승만의 경고를 무시하다가 자초한 전쟁---진작부터 이승만이 예고한 동서 양진영 ’이념전쟁“의 불길이 한반도를 또 한 번 폐허로 만든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