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암살된 백범 김구 선생. 오른쪽은 김일성이 남파한 거물간첩 성시백의 변장한 얼굴.
    ▲ 암살된 백범 김구 선생. 오른쪽은 김일성이 남파한 거물간첩 성시백의 변장한 얼굴.
    스탈린과 김일성이 ‘6.25 침략’을 감행하기 꼭 1년 전, 1949년 6월26일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白凡 金九)가 암살된다.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하고 건국이후 건국을 부정하며 죽기직전까지 ‘남북협상’을 외치던 김구는 ‘임정집권’이란 집념을 버리지 못한 채 그것 때문에 눈을 감은 셈이다.
    그리고 1년 후 6.25발발 한달 전 1950년 5월엔 김일성의 직속공작원 성시백이 검거된다. 해방 이듬해 말부터 김구의 한독당을 “가지고 놀던 성시백”마저 사라진 것이다. 
    이로써 스탈린과 김일성이 ‘남조선 공산화’를 위해 배후조종하던 ‘대한민국 전복공작’의 일단이 막을 내린 셈이지만, 이와 관계없이 북한군은 3년 준비한 무력통일 작전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새벽 38선을 넘어 전면남침을 개시한다.
    여기서 김구의 암살 전후, 또는 김일성의 남침전야 격동하는 남한을 둘러보자.

    이승만, 특별열차에서 잠자며 3남지방 ‘안보 순시’ 강행

    농지개혁법을 국회에 제출한 이승만은 4월22일 특별열차에 오른다. 부인 프란체스카, 교통장관 허정, 공보처장 김동성, 참모총장 채병덕, 그리고 측근인 미국인교수 올리버와 재미독립운동 동지 언론인 윌리암스(Jay J. Williams)를 동반하였다.
    이승만의 3남순행(三南巡行)은 3년전 ‘정읍 선언’으로 남북문제 해결에 대한 ‘이승만 독트린’을 천명하였듯이, 이번에는 북한군의 남침 위기에 대비하여 국민단합과 국방태세 강화를 위한 ‘안보 캠페인’에 나선 것이었다.
    이보다 보름 전 이승만 대통령은 조병옥 특사를 미국에 보내 지지부진한 군사원조문제를 협의하도록 재촉하고, 무초 대사에게 미국정부에 보낼 서한을 주어 “한국 안보태세가 강화될 때까지 미군 철수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며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른 미국의 의무를 공개적으로 재확인하라”고 촉구, 무초는 국무부에 서한을 보냈다. 

    이승만은 서울을 출발하여 대구까지 갈 동안만 주요 역에 정차하여 연설을 11회나 하고, 특별열차에서 잠을 잤다. 농지개혁등 정부시책에 대한 합심 지지와 공산침략에 대한 궐기를 호소하는 연설은 다음날 열 번, 그 다음날은 다섯 번 했다. (올리버, 앞의 책)
    경주 철도호텔에서는 38선 철폐와 국군강화를 역설한다. “유엔이나 우방의 원조에도 기대하지만 그보다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로써 국토통일을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군대 강화를 강조하는 바는 38선이 압록강 두만강 선으로 밀려나간 후에 공산군을 막는 국경 방비를 위해서이다.” ([동아일보]1949.4.26.일자)
    부산에서 “부산항을 자유항으로 개방”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이승만은 진해 해군기지에 도착, 기자회견에서 주목할 발언을 한다. “남북통일을 위해 나는 북한 자체의 애국적 요소에 기대한다. 공산군에 강제로 끌려가는 이북 군인들이 모든 동포와 함께 통일을 위해 일어날 것으로 믿는 바이며, 그렇게 되면 국군의 남북충돌사태는 없으리라. 군국은 중국 공산군만 대비하면 될 것이다.” 이승만이 북한군의 내부 반란과 북한동포의 봉기를 기대하며 촉구한 말이다.
    전남 광주에서는 여순반란사건 여파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국군 방비병 10만, 예비병 20만 정도로 강화, 남북통일을 이루어 압록강 두만강 국경을 굳게 지키자”고 역설한다. 
    “공산당을 그들의 조국 소련으로 내쫓기라도 해야 할 것이며 삼천만이 한데 뭉쳐서 조국을 소련에 바치려는 공산당을 없이하여 ”다시는 조국 없는 설움을 되풀이해선 안된다.“
    4월29일 끝난 이승만의 3남순행 연설은 대성공을 거두어 ”서울 사람들의 상상이상으로 남한 일대는 환호일색에 넘쳤다“고 [동아일보]등 언론이 대서특필하였다.
  • ▲ 미국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이승만 연설은 미군정3년간 공산당을 키워놓은 미국을 공개비판하였다. 조선일보 1949년 5월8일자 1면 아래엔 국국2개대대 월북사건도 보인다.ⓒ조선DB
    ▲ 미국에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이승만 연설은 미군정3년간 공산당을 키워놓은 미국을 공개비판하였다. 조선일보 1949년 5월8일자 1면 아래엔 국국2개대대 월북사건도 보인다.ⓒ조선DB
    ★이승만은 미국을 공개 비판...트루먼의 무정견 공격

    5월초 전국이 놀라는 사건이 터진다. 앞에서 언급한 국군 2개대대 월북사건, 4일 밤 춘천 북방 제8년대 제1대대장 표무원 소령이 ‘훈련’ 핑계로 병력을 속여 이끌고 38선을 넘었고, 이튿날 5일 제2대대장 강태무 소령이 뒤를 따랐다. 뒤늦게 월북을 알자 탈주한 병력을 제외한 병사 약 380명이 대기하던 북한군에 끌려갔다. 김일성 직속공작원 성시백의 작품임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무력침공을 앞둔 김일성의 지령대로 국군 교란-약화 작전은 한미양군에 큰 충격을 주었으나 미군의 철수는 멈출 줄 몰랐다.

    격분한 이승만은 5월8일 특별성명을 발표했다. 미국의 ‘원조 침묵’과 ‘대책 없는 철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직격탄이다. ”이래서야 외부 침략을 당했을 때 말로만 약속하는 미국의 군사지원을 믿을 수 있겠는가. 소련과 밀약으로 한반도를 분단시켜놓은 미국이 해방3년간 소련과 타협정책으로 남한에 공산당만 강화시켜놓고 일방적으로 미군을 전부 빼내다니...“ 트루먼의 신뢰할 수 없는 무정견을 집중 규탄하였다. 
    공보처장 김동성을 시켜 미군정이 자신의 반공투쟁을 억압한 사실을 폭로시키고 ”미국은 공산군이 38선을 침범할 경우 무엇을 지원해줄 것인가“를 대답하라며 ”우리의 질문에 행동으로 답할 때까지 미군은 철수하지 못할 것이며 철수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희망겸 다짐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당황한 애치슨 국무장관은 무초 대사에게 강력 항의하라고 지시했지만 이승만의 대미 강온(强穩) 대응은 한 치의 후퇴도 없다. ”한국군의 방어능력이 갖춰질 때까지 철수는 안된다.“
  • ▲ 1949년 6월 경교장의 옛모습, 김구의 피살 소식에 몰려온 시민들이 앞마당에 앉아 줄을 지어 조문하고 있다.
    ▲ 1949년 6월 경교장의 옛모습, 김구의 피살 소식에 몰려온 시민들이 앞마당에 앉아 줄을 지어 조문하고 있다.
    평양방송, 남측의 남북회담 제의 수락=이 무렵 평양방송은 불난데 불을 질렀다. ”남한의 정당-사회단체로부터 ‘조국통일민주민족전선’(조국전선)을 결성하기 위한 남북지도자회담을 평양에서 열자고 제의한데 대하여 북한은 이를 기꺼이 수락하며 실천하겠다“는 방송을 5월17일 남한에 쏘았다. 
    세상의 눈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쏠렸다. 김구의 한독당은 19일 담화를 발표, 남북회담을 ”서울에서 열자“고 한술 더 떴다. 김구가 여러 번 주장한 ‘평화통일’ 방안을 다시 내놓는 것이었다. 북한에 회담을 제의한 남한 좌익정당들은 이승만을 ‘인민의 원수’ ‘매국노’ ‘친일파’로 규정, 농지개혁법도 지주를 위한 것이라 매도했다.

    ◉슈티코프, ‘조국전선’ 결성대회 선언서 작성=5월31일 김일성과 박헌영을 부른 슈티코프는 남북회담이 발표할 선언서 내용을 직접 작성하여 지령을 내린다. 
    *남북한대표들로 선거지도위원회 구성 *1949년 9월 남북한 총선거 실시.
    *총선후 북한헌법에 따른 정부를 구성, 남북한 정권을 접수 *제주도 인민항쟁(4.3폭동)과 빨치산투쟁을 탄압한 남한 경찰 등 일체의 공권력 해산 등이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총선거를 실시하면 남북한에서 공산당이 승리할 것이라 장담하였다. 슈티코프는 6월5일 스탈린에게 이 선언서의 승인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고, 스탈린은 외무상 비신스키(Andrey Y. Vyshinsky)를 통해 ‘허가’를 내린다. 

    ◉김구, 평화통일을 위한 투쟁 다짐 선언문=김구는 6월13일부터 한독당 전국대표자대회를 열고 15일엔 ‘선언문’을 채택한다. ”동아시아, 인도네시아, 발칸 등지에서 민족자결을 위한 강렬한 반제투쟁이 전개되고 있다.(중략) 우리 조국의 국토양단은 경제적 파탄과 동족상잔을 초래하여 생사의 벽두에서 헤매게 하며,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발호와 봉건세력의 잔존은 새로운 민주주의 발전을 방해하고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외군철퇴와 남북평화통일을 위하여 최대의 열의를 경주하여 투쟁할 것이다.“ ([조선중앙일보] 1949.6.17)
    민족우파를 자처하던 한독당의 정체는 불과 1년 사이 소련 코민테른과 북한 공산당의 전략과 투쟁논리가 그대로 반영된 선언문을 내놓았다. 이 선언문도 슈티코프의 지령대로는 아닐까? 이날부터 경교장에서 칩거에 들어간 김구가 23일 기자들과 가진 짧은 만남이 생전의 마지막 기자회견이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

    김일성이 6월 25일 소집한 평양 모란봉 회의장에서는 남북한 71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704명이 모였다. 김구의 한독당과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대표들도 참석했음은 물론이다. 하루 종일 ‘이승만 매국정권’을 규탄하고 ‘소탕 방법’을 논의한 회의는 이튿날 모스크바의 스탈린이 ‘결재’한 ‘남북총선거’안을 제의하고 ‘조국전선’ 결성대회의 선언서로 채택하였다.
  • ▲ 김구 암살을 긴급보도한 조선일보 1949년 6월27일자 1면과, 육군본부가 발표한 암살사건의 수사결과 진상(오른쪽).ⓒ조선DB
    ▲ 김구 암살을 긴급보도한 조선일보 1949년 6월27일자 1면과, 육군본부가 발표한 암살사건의 수사결과 진상(오른쪽).ⓒ조선DB
    ◆탕 탕 탕 탕...경교장 김구, 대낮에 암살되다

    평양에서 김일성이 ‘남북평화통일 총선거’를 선전하던 그 시간, 1949년 6월26일 12시 40분경, 서울에선 지난 1년간 남북평화통일을 주장해온 백범 김구가 경교장2층 자기 방에서 자신의 한독당 청년당원이 쏜 총탄 4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공산당, 암살배후로 ‘이승만 도당’ 지목
    먼저 평양대회에 참석중인 한독당 ‘열성자 대표’ 김세련이란 사람은 김구의 절명 소식을 듣자 즉각 거침없이 주장한다. ”김구 선생을 누가 죽였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명백합니다. 식민지학살자 미 제국주의자들과 매국노 이승만 임은 추호도 의심할 여자조차 없습니다.“
    또한 김구를 포섭한 뒤 북한에 들어가 부수상이 되는 홍명희도 김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암살 배후로 이승만을 지목하고 나섰다. ”미군주둔을 반대하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백범선생이 이승만 도당의 손에 조난당한 것을 비분할 뿐입니다.“ 이처럼 공산진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김구 암살사건에 ‘이승만 도당’을 끌어들여 새로운 불씨로 남한의 민심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 ▲ 김구를 살해한 범인 안두희. 오른쪽은 안두희가 1955년 출간한 책 [시역의 고민]을 출판사 '타임라인'이 2020년에 재발간한 책 표지.
    ▲ 김구를 살해한 범인 안두희. 오른쪽은 안두희가 1955년 출간한 책 [시역의 고민]을 출판사 '타임라인'이 2020년에 재발간한 책 표지.
    ★범인 안두희는 누구인가?
    이날 김구를 살해한 범인은 포병사령부 소속 안두희(安斗熙, 1917~1996) 소위였다. 그는 경교장을 찾아가 김구를 단독으로 만난 자리에서 ‘언쟁’ 끝에 권총을 뽑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32세 청년장교가 ”임정 주석으로 존경한다“는 김구(73세)를 어떻게 살해할 수 있었을까? 그보다 그동안 ‘암살’을 방지한다며 철저한 신변보호를 해왔던 김구가 일개 젊은 당원과 ‘단독면담’을 허락한 까닭은 또 무엇인가? 
    당시 군당국의 수사기록은 6.25전쟁 와중에 사라지고 없다. 남아있는 기록은 범인 안두희가 휴전후 1955년 출간한 책 [시역(弑逆)의 고민]인데, 범행동기와 범행과정 등을 비롯, 옥중생활까지 일기체로 생생하게 써놓았다. 

    ◉한독당 ‘비밀당원’으로 입당=1917년 평안북도 용천군 대지주 안병서(安秉瑞)의 아들로 태어난 안두희는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나와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에 유학했다.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한 그는 신의주 학생반공의거와 수탈적 토지개혁에 가족과 함께 월남, 서북(西北)청년회에 가입하고 열렬한 반공주의자로 활동한다. 육사8기 졸업 후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갔고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포병사령부 소속 포병소위가 된다. 서북 청년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안두희도 아버지의 ‘김구 숭배’에 따라 김구를 존경하던 터였는데, 주변의 한독당 입당권유에 이어 어느 날 한독당 조직부장 김학규(金學奎)의 은밀한 설득을 받고 기꺼이 입당한다. 김학규는 김구의 최측근이라 더욱 기뻤다고 한다. 그것은 입당사실조자 발설하면 안되는 ‘비밀당원’이었다.
    ◉김구와 여러차례 단독면담=김학규를 따라 경교장에 간 안두희는 꿈에 그리던 백범선생을 보자 큰 절을 올렸다. ”일찌기 신(神)처럼 앙모하던 세기의 거성 선생께서 ‘오호 네가 두희냐?’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잡아주었을 때 그 감격이란...“ 안두희는 세상을 다 얻은 듯 환희에 넘쳤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안두희는 김구의 ‘총애’를 받는 당원이 되어 단독면담을 이어갔으며 비서들이나 당 간부들도 ”크게 기대되는 일꾼“이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만날수록 친밀하게 대해주는 선생은 친필 족자를 두 폭이나 주었다. 돈이 없어 선생께 드릴 선물을 궁리하던 안두희는 ‘포탄 탄피를 화병으로 만들어 한 쌍을 선물로 드렸다‘고 한다.

    ◉꼬리 무는 의문들=조직부장 김학규는 안두희에게 ”포병대 유능한 비밀당원을 포섭하라“고 지령을 내렸고 안두희는 후보자 명단을 작성하여 전하고 용돈도 받아썼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의문점이 피어올랐다. 왜 ’비밀당원‘을 확대하는 거지? 게다가 ”지령을 발설하면 죽는다“며 ’고기밥이 된‘ 경찰간부와 군장교 등의 사례들을 여러 번 강조하고 ”탈당하면 반동“이란 협박도 잇따랐다. 자유를 잃은 포로신세구나...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도대체 ’건국실천원 양성소‘는 무엇이며 ’백범정치학원‘은 무엇이며 ’혁신탐정사‘는 무엇 하는 곳인가? 세상이 모르는 조직들이 ’배신하면 죽이는 비밀결사‘들 같았다. 그러고 보니 ’송진우의 암살‘이나 ’장덕수의 암살‘ 같은 운명이 자신에게도 닥치는 게 아닐까. 그렇구나...임정 집권론을 되풀이 하는 김구의 모습에서 세상에 떠도는 소문들로 겹쳐 보이는 날이 늘어갔다. 순수한 선물로 여겼던 선생님의 친필족자들도 하나는 윤봉길의사 거사 날에, 또 하나는 이봉창의사 거사 날에 준 것도 심상치 않았다. 
    더구나 월북한 국군부대 강소령-표소령을 자주 만나 공작한 사람이 ’혁신탐정사‘ 이모씨라는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게다가 국회프락치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김약수 등이 경교장에서 살다시피 들락이는 것을 보았을 때, 반공청년장교 안두희는 밤잠을 설친다. 
    드디어 국회소장파 의원들이 검거되고 김약수는 피신하였는데 ’경교장에 은신‘했다는 신문보도까지 나왔다. 사람들은 ”경교장이 공산당 공작본부“라고들 수군거리는 판이 되었다.
    그때 흥분한 안두희는 경교장으로 달려가 김구에게 직접 물었다. 김구는 호통을 쳤다. ”군인이면 군무에나 충실할 것이지, 네 따위가 정치를 알아서 무얼 하느냐“ 

    ◉김구와 ’담판‘을 결심한 안두희=혼자서는 풀지 못할 고민을 거듭하는 안두희는 김구와 담판을 해보자고 다짐하지만 번번이 때를 놓친다. 그 무렵 ’이상한 지령‘이 내려왔다. ”이번 8.15광복절을 전후하여 중대행동 지령이 내릴지 모르니 태세를 갖추라.“ 중대행동? 그래서 우리 포대 대포의 성능과 문수를 캐물었나? 심장의 피가 역류하는 듯 눈이 뒤집힐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어, 선생님만은 아니야, 측근 엄항섭이나 김학규가 그런 놈들일 거야“
    안두희는 갈팡질팡이다. 지난번 면담때 김구의 ”빨리 가버려“란 호통에 ”안오겠다“고 뱉은 말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가야한다, 만나야 한다, 최후의 담판 없이 이대로는 나라가 위험하다.
    일요일마다 선생님을 단독 면담하는 날, 그 일요일(26일) 아침 10시쯤 집을 나서 방황하던 안두희의 발길은 어느 새 경교장 옆에 다달았다. ’자연장‘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11시쯤 경교장 구내로 들어갔다. 무상출입하는 안두희를 만나는 사람들은 미소로 인사한다. 
    김구 비서 선우진(鮮于鎭, 1922~2009)이 손님과 면담중이라 했다. 30분쯤 기다리던 안두희를 선우진이 2층으로 안내한다. 김구는 높다란 회전의자에 앉아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 ▲ 경교장 2층 김구 집무실 유리창을 뚫은 총탄 자국. 창밖엔 몰려온 시민들이 무릎꿇고 울면서 조문을 기다리는 모습.
    ▲ 경교장 2층 김구 집무실 유리창을 뚫은 총탄 자국. 창밖엔 몰려온 시민들이 무릎꿇고 울면서 조문을 기다리는 모습.
    ◉저격 직전의 문답...안두희의 [시역의 고민]서 인용

    벼르고 벼른 김구와의 면담에서 안두희는 고민하던 문제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인사말은 생략하고 문제의 발언부분만 인용해보자. (안두희 [시역의 고민—나는 왜 김구선생을 사살했나] 타임라인,2020, p56~63 요약)

    「...안두희는 김구의 넓은 집무실 다다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한다.
    ”오지 않겠다더니 또 왔어?“ 김구는 안두희를 쳐다보지도 않고 한마디 던진다.
    ”지금 옹진 국사봉 전투에 국군 창설이래 처음으로 포병이 출동하게 되어 내일 떠납니다.“
    ”아니, 국사봉 전투가 그렇게 치열하냐?“
    ”네, 적의 작전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길을 떠나는 마당에 선생님께 꼭 여쭈어 볼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세상 이목이 귀찮다. 시끄럽다. 어서 가거라“
    ”선생님, 저는 이 의문과 번민을 풀지 못하면 죽어도 옳은 귀신이 못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소원을 풀어 주실 수 없겠습니까?“
    ”또 무엇이냐?“ 선생님은 의자를 돌려 처음으로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신다.
    ”국회 소장파와 선생님 사이에 일찍부터 내통되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정평이요. 이번 그들 피검시 김약수를 선생님께서 숨겨주셨다는 억측까지....그들과의 관계는 정말 어떤 것입니까?“
    ”세상이 아무려면 어때서,..“
    “그러시면 공통된 노선이란 말씀입니까?”
    “네 멋대로 해석하렴”
    “선생님께서 남북협상 당시 서울을 떠나시며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게 굳은 약속을 하시고서 돌아오신 뒤에 왜 뚜렷이 선생님의 심경을 밝히지 못하셨습니까? 무슨 숨은 사정이 계셨습니까?”
    “그래, 내 나라 내 땅을 갔다 온 것이 잘못이더냐?”
    “협상 다녀오신 뒤에 태도는 어떠셨습니까? 미군의 철퇴를 주장하셨고 미국의 원조를 거부하셨고, 유엔의 처사를 비방하시면서 급기야는 5.10선거까지 부인하신 것, 어찌 그 주장하심이 공산당과 꼭 같으십니까?”
    “그러면 이놈! 내가 공산당의 사주를 받았단 말이냐?”
    “전라도 방면을 순회하실 적에 정부를 부인하시고 미국을 침략자로 규정하시며 이승만 박사를 사대주의자로 매도하셨으니, 그렇게도 국민 전체가 쌍벽으로 모시던 두 분의 교의가 끊겼다고 생각될 때에 겨레의 실망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그래 이놈! 이것이 정부구실을 한단 말이냐? 그리고 미국 놈이 무슨 전생에 은혜를 입었기에 그리도 고맙단 말이냐? 대국을 큰 눈으로 보아라”
    “그런데 건국실천원 양성소는 무엇하는 기관이며 혁신탐정소는 누구의 것이며 또 한독당의  비밀당원 조직망이란 무슨 사명을 부여한 결사입니까? 선생님, 제게 8.15 기념일을 전후하여 중대한 지령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비 명령은 또 무엇에 대한 준비입니까?”
    나의 음성은 높을 대로 높아졌다. 
    선생님도 노기등등한 안색으로 안절부절 고함을 지르신다.
    “무어야? 이놈, 죽일 놈! 입이 달렸다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이제는 피차가 사리를 가릴 이지(理智)의 여유를 잃었다.
    “여순반란은 누가 사주한 것입니까?”
    “뭐야? 이 놈!” 주먹으로 책상을 치신다.
    “표 소령 강 소령과 기거를 같이 한 놈은 어떤 놈입니까?”
    “저런!” 책 뭉치가 날아온다. 얼굴에 맞았다.
    “송진우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벼루가 날아와서 머리를 스치고 뒷벽에 부딪친다.
    “장덕수 씨는 누가 죽였습니까?”
    “이 놈! 네 이 놈!”
    붓이 날아오고 또 책이 날아오고 종이뭉치가 날아오고...나는 고개를 숙이고 여유를 찾으려 애써본다. 꺾어야 한다. 폭풍을 잉태한 8.15지령이 숨 가쁘게 다가오는 아슬아슬한 찰나가 아닌가. 어느 새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권총이 뽑히고 총신을 감아쥐었다. 
    앗, 선생께서는 그 거구를 일으켜 두 팔을 벌리고 성난 사자같이 엄습해 오는 게 아닌가.
    “영감과 나라를 바꿉시다” 신음처럼 고함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빵 빵 빵 빵...유리 깨지는 소리...끄응 비명소리...코를 찌르는 화약 냄새...

    내 마음은 공허해진다. 광활한 푸른 하늘 저편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솟아오른다.
    나도 죽어버려야지...총구를 오른편 이마에 댔다.
    ’아니다, 죽을 때가 아니다. 죽으면 영원한 역적이 된다. 겨레의 안녕과 국가를 위해 저 가공할 한독당 복마전의 정체를 폭로해서 후대자손을 위하고 싶은 이 단심을 밝혀야 한다‘
    권총을 내렸다. 포병 배지와 계급장을 떼어 던져버리고 한계단 한계단 층층대를 내려간다.
    파수 보던 순경들이 카빈 총을 들고 뛰어 들어온다.
    “2층에서 무슨 총소리야? 손들어! 손들어!”
    나는 권총을 소파에 던지고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지금 선생님을 쏘았소. 선생님은 나의 총에 돌아 가셨소”
    “뭐야? 선생님을? 이 놈 죽여라!”
    카빈총 개머리판이 날아들고 의자가 날아든다. 
    “죽여라! 없애라!” 사람들이 닥치는 대로 물건을 들어 후려갈긴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죽이면 안된다” 가물가물 들리는 목소리...」

    안두희를 군인들이 연행=경찰이 범인 안두희를 체포했을 때 군인들이 나타나 안두희를 데리고 군용 스리쿼터에 태워 사라졌다. 헌병사령부로 옮겨진 안두희는 간단한 치료를 받았다.
    전봉덕 헌병부사령관은 범인 수감되어 치료 중임을 밝히고 의식이 회복되는 대로 배후관계를 엄중 조사한다고 발표하였다. 
    범인을 연행하여 수사하려던 서대문 경찰서는 군인들의 등장에 의아했다. 하지만 헌병사령부는 서대문경찰서가 김구와 직속관계인지라 범인수사를 경찰에 맡길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군의 개입행동 때문에 안두희의 배후는 군부 고위층이고 그 뒤에는 이승만이 개입했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 ▲ 얼굴에도 총상을 입은 김구의 유해.
    ▲ 얼굴에도 총상을 입은 김구의 유해.
    ★이승만, ’애도‘ 방송...“조속히 배후 밝혀 의법처단“

    이승만 대통령은 그날 저녁 9시 중앙방송국 라디오로 애도방송을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오늘 암살을 당하신 보도를 들은 나로서는 놀랍고 담한(膽寒:간담이 서늘함)해서 말이 안 나옵니다. 범인이 잡혔다니 무슨 주의로 이런 일을 행하였으며 이것이 개인행동인지 연루자가 있는지를 엄밀히 조사해서 일일이 공표하고 범인은 법대로 처벌할 것입니다. 한인들이 어찌해서 이런 만행을 범하는지 통탄할 일입니다. 이로운 사람을 살해하고 어찌 그 국민이 개명한 사람의 대우를 받을 수 있으리오. (중략)
    나와 백범 선생 사이의 사분으로 말하면 호형호제하고 의리는 실로 사생을 같이하자는 결심이 있었던 터이며, 임시정부 주석으로 내가 절대 지지하였고....(중략)....중간에 와서 정치상 관찰의 약간 차이로 말미암아 정계에 다소 의아해하는 점이 없지 아니해서 우리 두 사람이 양편으로 시비를 듣고 있었으나 내가 믿고 바라기는 백범 선생이 조만간 나의 주장하는 것이 사심이 아니오, 민국 대계에 유일한 방침으로 각오될 날이 있을 것을 믿고 있었으며, 근자에 와서는 이런 희망이 점점 표면에 나타나는 것을 보고 기뻐하던 중인데, 졸지에 이런 일이 생기고 보니 어공어사(於公於私)에 원통한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해외 해내에서 백범 김구 주석을 사모하는 모든 동포는 한 줄기 뜨거운 눈물로 그분의 죽음을 조상하며 그 분이 평생 애국애족하는 대의를 본받아 그 사업을 계속 완수하기를 결심하기로 다 같이 맹세하기 바랍니다.”([조선일보]1949.6.28.)

    다음날 경무대 국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김구의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하고, 저격범의 처벌은 단시일 내 완료, 조속히 발표하기로 의결했다. 그러나 한독당에서 무슨 까닭인지 국장을 사양하여 국민장으로 변경된다. 김구의 영결식은 7월5일 서울 운동장에서 수십만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거행하였다.

    ◉이승만, 외국언론에 성명 발표=미국 언론이 마치 한국에 위기가 닥친 양 보도하므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내어 상황을 설명하였다.
    “김구씨를 살해한 동기에 대해서 발표할 만한 때가 되면 공표할 것인데, 그러나 지금 이때에 모든 사실을 일반 앞에 공개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으로는 그 분의 생애를 조국독립에 바친 한국의 한 애국자에 대한 추억에 불리한 것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김구씨의 살해가 순수히 어떤 행동노선이 조국에 가장 유리할 것인가에 관한 당내 의견차이의 직접적 결과임을 표시한 것이다. 이러한 의견 불합치는 결코 당 밖에는 알려진 일이 없으며, 김구씨의 추종자가 동 논쟁을 결말짓고자 취한 격한 수단이 우리 전국에 비애를 초래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동아일보] 1949.7.2.일자)

    이보다 앞서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보낸 메모(6.28)에서 김구와 안두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동안 국민들 사이에는 김구의 비애국적인 성명이나 행동을 비난하는 강한 감정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피살 뉴스가 전해지자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암살자는 김구가 신뢰하는 육군 장교이고 자주 방문하여 비밀 회담을 했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모든 의혹이 사라졌다. 그는 또한 한독당에서 전략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라는 것도 알려졌다....” (올리버, 앞의 책)
  • ▲ 국사편찬위원회가 2009년 공개한 미육군성 비밀보고서. 미정보당국 실리 중령이 당시 김구암살에 관한 정보들을 모아놓았다.
    ▲ 국사편찬위원회가 2009년 공개한 미육군성 비밀보고서. 미정보당국 실리 중령이 당시 김구암살에 관한 정보들을 모아놓았다.
    ★실리 보고서, ’김구의 쿠데타‘ 정보 기록
    국사편찬위원회는 2009년 11월 미국 정부 측에 몇 년 동안 비밀해제를 요구해 입수한 극비문서 <김구: 암살에 관한 배후 정보(Kim Koo: Background Information Concerning Assassination)>라는 미육군정보국 문서파일(RG 319, Entry 85A, 1949년6월29일 작성)을 공개하였다. 미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조지 실리(George E.Cilley) 소령이 백범 암살 직후인 1949년 6월 29일 작성한 이 문서에서 “나는 안두희를 정보원으로, 후에 한국 주재 CIC 요원으로 알고 있었다”며 “안두희는 백의사(白衣社) 혁명단 1소조 구성원으로 백의사 지도자인 염동진이 명령을 내리면 암살을 거행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기록해놓았다. 
    실리 소령은 1946년부터 1948년 12월까지 한국 주재 CIC 파견대에서 근무한 한국통으로, 20개월간 염동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안두희가 미국정보원이란 이야기이다.  
    염동진(廉東振,1909~1950)은 경기 파주 출신, 선린상고 졸업후 상하이로 건너가 1932년 낙양군관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김구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알려졌다. 백의사는 국민당정부 장제스의 반공결사 남의사(藍衣社)를 본떠서 해방후 염동진이 만든 비밀결사이다. 특히 그는 중국에서 김구 측의 밀고로 중국 공산당에 잡혀가 심한 고문을 받던 중에 일부 실명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개인적인 원한도 김구 암살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비치고 있다.

    ‘실리 보고서’에는 백의사 측이 ‘김구가 평양에 다녀온 후 연공(聯共)의 길을 걷고 있다’며 ‘큰 나무에 빨간 벌레가 몰려든다’고 비판하는 발언이 기록돼 있다. 더욱 주목할 기록은 「1948년 여순반란을 진압한 한국 4연대가 반란군과 연계되어 있으며, 김구를 수반으로 남한에 새 정부를 옹립하려 했다」는 기록이다. 즉, 앞에서 본 암살범 안두희의 우려대로 ‘김구가 포부대 등 군을 앞세워 이승만 정권을 뒤엎는 쿠데타’를 모의하였다는 충격적 내용이다.

    실리 소령은 염동진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를 구사하는 능력자였으나 미국인과 만날 때는 통역을 내세워 위장할 만큼 비상한 지략가”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귀국후 ‘맹인장군’으로 불렸던 염동진은 북한 김일성 암살 기도 등 각종 반공 테러활동을 하다가 6.25때 북한군에게 살해된다.
  • ▲ 김구의 국민장 행렬, 1949년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40여만명이 모여 영결식을 마치고 장지를 향하여 시가지를 운구하는 모습.
    ▲ 김구의 국민장 행렬, 1949년 7월5일 서울운동장에서 40여만명이 모여 영결식을 마치고 장지를 향하여 시가지를 운구하는 모습.
    ★육본, 안두희 수사결과 발표...범행 동기 8가지
    육군본부는 7월20일 김구 암살사건의 범인 안두희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안두희는 한독당에 입당한 뒤 김구를 여섯 번 만났다.
    안두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지도를 받으면서 한독당과 김구의 사상 및 정치노선에 대하여 
    점차 회의를 느꼈다. 1) 5.10선거에 의한 대한민국 정부수립 부인. 2) 평화통일의 이름 아래 공산당과의 제휴 기도, 한독당 중요간부에 북로당원 포섭. 3) 남북정치협상에 의한 연립정부 수립 기도. 4) 미군철퇴를 주장하고 철퇴후 군사고문단 설치 절대 반대. 5)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 반대. 6) 북한체제의 합리성을 찬양. 7) 남한 정부의 혁명가에 대한 박대 공격. 8) 남한에서 조만간 일대 쿠데타 단행 예언 등이었다고 진술했다. 그리하여 안두희는 탈당을 의도했으나 테러 협박을 받고 고민하다가 김구의 진의를 타진하기 위해 범행 당일 경교장을 방문했다.
    김구는 안두희에게 대포의 성능에 대하여 자세히 물었고 , 안두희가 영등포 포병부대에서 경무대나 중앙청을 향하여 정확히 조준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김구가 만열(滿悅:만족의 기쁨)하는 모습을 보고 김구의 노선이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공산당의 노선과 완전히 일치한다는 것을 재확인하고 격렬한 논쟁 끝에 사살하게 되었다.」 ([조선일보]1949.7.21일자)

    ★안두희도 맞아 죽다
    고등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안두희는 8월 6일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육군형무소에서 복역중 6.25전쟁이 터지고 6월27일 석방되어 육군에 복귀한다. 휴전후 군납품업 등에 종사하였으나 4.19이후 협박과 테러에 시달린다. 1965년 곽태영의 칼을 맞고 1987년엔 유명한 권중휘의 ‘정의봉’ 세례에 골절상을 당했다. 이때부터 안두희는 사면초가의 심리적 압박감에 쫓겨 횡설수설 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내 책은 내가 안썼다” 발언해서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내가 썼다”고 말을 바꾸기도 한다. 그러다가 1994년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선생 암살 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 나가서는 실어증을 이유로 증언을 피하여 침묵했지만, 2년후 79세때 시민 박기서의 ‘정의봉’을 맞고 결국 절명한다. 
    1955년 책 [시역의 고민]을 펴낸 이유는 ‘단독범행’임을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안두희는  되풀이 주장한다. 그러나 70년이 지난 지금 ‘단독범행’도 ‘배후 사주’관계도 확인할 길은 없다. 관련자들도 기록들도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언론 보도와 안두희의 책만이 남아 당시 상황의 일단을 엿보게 해줄 뿐이다.
  • ▲ 김일성의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의 두 얼굴. 오른쪽은 변장한 성시백, 김일성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장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 김일성의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의 두 얼굴. 오른쪽은 변장한 성시백, 김일성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장의 달인이었다고 한다.
    ◆북한 거물간첩 성시백 검거...6.25침략 이틀 뒤 총살

    김구가 암살된 지 꼭 1년후 북한의 거물간첩 성시백(成始伯,1905~1950)도 죽었다. 아지트에서 잡혀 사형 선고를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1950년 6월27일 6.25발발 이틀 후 군당국이 공산주의 사상범들을 총살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남북통일정부’를 세우려던 두 사람이 1년 시차로 사라졌다. 김구는 “우리민족끼리 통일정부”를 세우겠다며 김일성과의 협상에 매달렸고, 성시백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남한공산화를 위해 김구의 한독당 등 남한인사들을 광범하게 포섭했던 지하 공작원이다. 두 사람은 일찍이 중국에서 깊은 인연을 맺은 ‘독립운동가’들이었기에 남북합작에도 의기투합했는지 모른다.

    변장한 성시백은 멋쟁이 ‘명동백작’...그를 신고할 사람은 없었다

    본 연재 (51)에서 필자는 성시백의 중국 간첩행각등 이력서와 김구 포섭 등 활동상을 간략히 소개한 바 있다. 
    김구 등 임정요인들의 ‘민원 해결사’이며 장제스와 마오쩌둥 사이의 2중간첩, 그리고 귀국후 김일성이 직접 남한에 밀파한 ‘북로당남반부정치위원’으로 아지트 구축, 막대한 자금을 만들어 물쓰듯 뿌리며 ‘남한을 가지고 놀았다’는 말 이상으로 한국을 농락한 희대의 간첩이다.

    ◉공작의 달인=당시 좌익 내지 중도파들은 날이면 날마다 명동의 다방에 몰려들어 노닥거리며 속삭인다. “자네, 알고 있나? ‘권위 있는 선’을...”  그것은 ‘성시백의 선‘이었다. 성시백에게 줄을 서야 살 수 있고 출세할 수 있음이 증명된지 오래이다. 바로 김일성 직속이라는 사실!
    ’성시백의 선‘에 걸린 인사들은 임정 요인들은 물론, 정치, 경제, 사회, 언론 등 문화계, 미군정청, 방첩대, 국군 등 끝이 안보일 지경이다. 
    성시백은 결코 나서지 않고 뒤에서 소리 없이 챙기는 암흑기사, 방황하는 중간파나 소외되는 남로당 잔당들을 품어 남반부 최대의 북로당 세력을 만들었다. 

    값비싼 최신 신사복에 김일성의 충성선물 금빛 회중시계를 찬 젠틀맨, 2개신문사의 소유주 언론인 명사, 미제 승용차(Buick)를 타고 돈을 뿌리는 40대 젊은 무역상 부호는 이름도 정백(丁柏) ...그의 활동무대는 서울 중심번화가 명동, 날마다 정치인과 경제인, 외국인, 지식인 등과 어울리는 그는 그래서 ‘명동백작’이라 불리기도 했다. 
    어느 누가 그를 김일성의 직속부하로 알아볼 수 있으랴. 그를 고발하거나 제어해야 할 사람들은 김구와 한독당, 김규식과 민족자주연맹 등 실세들인데, 오히려 이들에게 성시백은 자신들의 장래를 보장해줄 ‘보호자’로 깊이 맺어진 인물이며 그동안 쌓인 ‘김일성과의 인연’이 결정적인 약점인 것을 누가 알까 두렵기만 하다. 성시백의 돈줄과 소위 ‘빽’이 생명줄인 정치인들이나 지식인들이 성시백의 ‘말없는 협박’과 지령을 어찌 이겨낼 수 있었으랴. ‘천하의 마당발 명동백작’은 그렇게 공작의 달인이다.
    어디까지나 슈티코프와 김일성의 지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그 지령보다 뛰어난 남한현장의 아이디어로 꾸린 ‘명품 공작’을 성공시켜 보이며 평양의 상전들을 기쁘게 하는 성시백! 
  • ▲ 소위 '북로당남반부정치위원회' 총책 공작원 성시백을 검거한 기사, 조선일보 1950년 5월 27일자. 왼쪽엔 육본이 발표한 사건진상을 시리즈로 보도하였다.ⓒ조선DB
    ▲ 소위 '북로당남반부정치위원회' 총책 공작원 성시백을 검거한 기사, 조선일보 1950년 5월 27일자. 왼쪽엔 육본이 발표한 사건진상을 시리즈로 보도하였다.ⓒ조선DB
    밀수로 대규모 공작금=성시백은 가급적 북한 자금을 받지 않으려 했다. 발각되는 것을 극도로 피하려 스스로 거금을 만들어냈다. 1948년 2월 남북교역이 금지될 때까지 56차에 걸쳐 명태와 카바이드 등 당시 화폐 1억원이 넘는 물자를 반입해 떼돈을 벌었다. 
    한국 해군 누구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 해군함정을 무역선으로 개조한 ‘금비라호’(金比羅號)가 중국 칭따오나 북한 진남포를 다녀오면 가마니로 돈을 쓸어 담았다고 한다.  
    이 자금으로 [조선중앙일보]와 [광명일보]를 운영하며 언론사들에 공작금을 뿌렸다. 게다가 무려 30개를 헤아리는 부동산 단독주택에 목욕탕, 여관, 이발소 등을 구입하여 비밀아지트로 활용한다. .

    국군 파괴 공작=미인계까지 동원한 성시백은 한국군은 물론 미군 사령부까지 침투, 첩보망을 구축하여 한미 군사정보를 통째로 평양에 바쳤다. 남로당의 제주4.3폭동과 여-순 군반란사건을 지원한 성시백의 국군 파괴공작은 상상을 초월한다.  
    1949년 5월엔 표무원-강태무 소령에게 지시해 춘천 주둔 제8연대 2개대대를 이틀간 월북시킨다. 국군에 사단도 없던 시절 치명적인 충격, 하늘에서 바다에서 ‘거사’는 이어졌다.
    9월에는 공군내 조직원 박용석이 공군기를 몰고 월북하게 하고, 미군 초계정 1,900톤급 킴볼 스미스(SS Kimball R. Smith)호를 월북시킨다. 해양대학 2기생들이 훈련중이던 배는 남로당원 선장 형제가 미국인 선장을 포박하고 38선을 넘어 진남포로 갔는데 훈련생 한명이 탈출해 사건을 알게 되었다. 성시백은 이듬해 1950년 3월에도 군용기 2대를 북으로 보냈으며, 해상훈련 나간 해군 소함정 강철호도 북쪽으로 달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육해공군 종합세트 파괴공작이다. 
  • ▲ 성시백에게 포섭된 국회의원 출마 후보들을 검거한 기사, 조선일보 1950년5월27일자.ⓒ조선DB
    ▲ 성시백에게 포섭된 국회의원 출마 후보들을 검거한 기사, 조선일보 1950년5월27일자.ⓒ조선DB
    ◉이승만-장제스 회담내용 빼내다=성시백의 마수는 미국 대사관과 중국대표부까지 뻗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정상외교 제1호는 1949년 8월7일 진해에서 장제스 당시 자유중국 총통과의 만남이었다. 소-중-북한의 공산권 위협에 태평양동맹을 주장하던 이승만의 국제안보전략의 하나이다. 간첩이 우글거리는 서울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회담장소를 진해 해군기지내로 이동했는데 그곳에서 벌어진 회담 내용 및 군사정보까지 고스란히 성시백의 손에 들어갔다. 회담 공용어는 영어였으나 기록을 위한 통역의 필요성 때문에 참석시킨 통역관이 범인이었다. 중국통 성시백이 중국대표부의 통역관을 매수, 투입했던 것이다.
    ◉미대사관 서기관 포섭=이승만 대통령은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 주둔 요구에 대하여 미국이 우물거리자 맥아더에게 호소한다.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는 남편대신 맥아더에게 편지를 썼다. "존경하는 장군, 부디 우리 국민을 도와주십시오“ 한국 방위를 몇 번 맹세했던 맥아더는 편지를 보자 이승만을 도쿄로 초청한다. 1950년 1월21일 이승만은 두 번째로 맥아더 전용기 바탄호를 타고 건너가 1박2일간 군사원조와 한국 방위에 대한 회담을 진행하였다. 이때 작성된 회담 문서도 즉시 성시백에게 전달되었다. 주한 미국대사관 서기관 한명이 ‘성시백의 선’에 걸려들어 충성을 바친 간첩질이다.

    국회의원 출마자들에 자금 지원=국회프락치사건과 반민특위 공작에 성공한 성시백은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깊이 파고든다. 1950년 5.30총선에 좌익과 중간파를 골라 선거자금을 대주며 출마시킨다. 그러나 성시백의 검거후, 그에게 매수되었던 후보들이 줄줄이 체포되는데 10여명이 넘었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그들의 실명은 여기서 생략한다. 
  • ▲ '반공검사' 오제도와 그의 회고록 '사상검사의 수기' 표지.
    ▲ '반공검사' 오제도와 그의 회고록 '사상검사의 수기' 표지.
    ◆‘반공검사’ 오제도의 쾌거...간첩수괴들을 일망타진

    경찰과 군수사기관에서는 1949년 무렵부터 북한의 지원을 받는 공작원들이 남한의 주요기밀을 빼내는 여러 활동을 적발하고 있었다. 1950년 초, 마침내 비밀조직 정체가 '북로당 남반부정치위원회'임을 파악한 당국은 2월 그 본거지를 알아내 기습, 최고 부책임자 김명용(金明用,49)을 체포할 수 있었다. 조직문건 등 각종 정보를 조사한 당국은 군검경(軍檢警)합동수사본부를 편성한다. 12일 총지휘자로 서울지방경찰청 오제도(吳制道) 부장검사를 임명하고 방첩대장 김창룡(金昌龍)과 서울 경찰국이 합류, 일제히 수사를 개시하였다. 수많은 아지트를 잠복 추적하던 수사대는 뜻밖의 ‘대어’를 낚는 개가를 올린다. 그토록 쫓았던 남로당 총책 김삼룡과 이주하를 먼저 잡은 것이다.

    김삼룡-이주하 검거=박헌영이 월북한 뒤 남로당의 총책을 맡은 김삼룡(金三龍,1910~1950)의 아지트는 동대문 근처 효제동에 있었다. 3월에 검거한 김삼룡의 비서 김형륙의 자백을 받아보니 김삼룡 역시 변장의 달인, 콧수염을 붙이고 농민 밀집모사를 쓰고 자건거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두 칸짜리 아지트 앞엔 반찬가게가 있고 집은 여인들이 번갈아 지키는데 모두 김삼룡의 여자들이란다. 더구나 관리자로 등록된 여인은 대한부인회 부회장이라니...놀라운 사실에 아연했다.
    깊은 밤 수사진이 대문을 차고고 쳐들어갔다. 시멘트 벽돌 뒷담에 방금 부순 듯 큰 구멍이 났다. 핏자욱을 따라가니 낙산(駱山) 기슭에서 없어진다. 김삼룡을 놓쳤다. 남로당 연락책이라는  절름발이 청년을 다구치니 “예지동” 집을 알려줬다. 단숨에 달려가 덮친 수사진은 뜻 밖에도 이주하를 붙잡았다. 일본 니혼대(日本大)출신 인테리 공산당 이주하(李舟河, 1905~1950)는 김일성이 싫어해 거부하는 인물로서 김삼룡의 정치고문, 북한에서 소외된 이승엽의 지령에 따라 몰락하는 남로당 재건에 힘쓰던 중이다. 
    부상한 김삼룡은 3월15일 북아현동 어느 의사 집에서 검거했다. 전향자가 지목해준 김삼룡의 단골 의사 집이다. 충주 출신 김삼룡은 박헌영, 이현상, 이관술 등과 함께 지하조직 ‘경성콤그룹’을 조직하여 조직부장을 맡았다가, 해방후 조선공산당을 재건에 참여, 조직책이 되었다.
    오제도 검사는 체포한 김삼룡의 안주머니에서 선글라스 7개와 함께 약봉지를 발견하고 뭐냐고 물었다.
    김삼룡은 “당의 생명은 대중의 지지인데 이젠 어쩔 수 없게 되었소” 체념한 듯 답했다.
    재판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던 김삼룡과 전향을 할 듯 말 듯 주저하던 이주하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 모두 사형언도를 받았다. (오제도 [사상검사의 수기] 창신문화사, 1957)

    성시백 검거=1950년 5월 25일 오전 11시, 서울지방검찰청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딱 한 달 전, 이날 합동수사대는 소위 ‘북로당남반부 정치위원회‘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1차 검거인원만 112명, 공무원, 교원, 상인, 학생, 회사원, 직공, 의사, 외국공관원 등으로 다양했다. 압수한 공작비는 미화 39,000달러, 당시 환율이 1대900, 현재가치로 대충 175억쯤 되는 거액이다. 
     성시백은 열흘 전 5월 15일 새벽3시 종로 효제동 아지트에서 체포되었다. 김일성을 대신하 듯, 해방후 남조선과 건국후 대한민국을 4년동안 마음대로 농락한 희대의 거물간첩 ’남한의 지하 북한대표‘ 성시백의 역할은 끝났다. 
    그는 수사과정에서 김일성의 지령에 따른 간첩활동을 순순히 시인했으나 자신이 포섭한 수많은 인물들의 이름은 단한명도 자백하지 않았다. 그의 아지트는 22개소나 밝혀졌다.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넘나들며 ‘공산 마약‘에 중독되었던 45세 젊은 인생은, 북한의 무력침공을 위한 남한 전복에 몸을 바치고 ’상전 김일성‘의 전쟁 포성과 함께 6월27일 총살된다. 김삼룡 이주하 및 여간첩 김수임도 같은 날 같이 갔다. 

    뒷날 검찰은 “6․25사변 전에 남로당 계열은 95%의 검거율을 보였으나, 북로당계열이며 중공파인 성시백 계열은 검거율이 30%에 불과했다”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 성시백의 중동학교 후배이자 부책임자 김명룡이 6.25때 출옥 후 월북하지 않고 남한에 남았던 사실이 눈길을 끈다. 국군의 서울수복 후에도 지하공작을 계속하던 그는 결국 오제도 검사 손에 다시 잡혔다. 
    검찰이 못 잡았다는 ‘성시백 계열’ 나머지 70% 조직원들은 과연 누구들이었을까? 그들과 그 후배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을 농락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북한, 조만식과 교환제의 직후 전면남침
    김삼룡과 이주하는 잡혀서도 김일성에 이용당한다. 북한은 1950년 6월 10일 두 사람을 평양에 억류중인 조만식(曺晩植) 부자와 교환하자고 제의, 무력남침을 위장한 평화공세를 편다. 이승만 정부는 6월 16일 제의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교환날짜를 20일로 연기하자고 일방적인 지연전술로 교란작전을 쓴다. 그렇게 남한을 방심시켜놓고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최신 소련탱크부대와 중공 팔로군를 앞세운 10만 대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 ▲ 북한정권이 노동신문에 특집기사로 성시백의 남한공작 실상을 공개하여 공로를 찬양했다(1997.5.26), 오른쪽은 평양근교 열사묘지에 묻힌 성시백의 가묘와 묘비.
    ▲ 북한정권이 노동신문에 특집기사로 성시백의 남한공작 실상을 공개하여 공로를 찬양했다(1997.5.26), 오른쪽은 평양근교 열사묘지에 묻힌 성시백의 가묘와 묘비.
    ★박원순의 주장을 뒤집은 북한 노동신문 "우리가 이렇게 했다"

    북한과 국내 운동권은 그동안 국회프락치사건 등 한국 수사당국이 발표한 간첩사건들을 ‘고문조작’한 것으로 주장해왔다. 예컨대, 서울시장 재직시 ‘자살’했다는 박원순은 아름다운재단 이사장시절 [역사비평] 1989년 가을 호에서 “국회프락치사건은 고문에 의해 날조, 조작된 것이며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이승만 정권과 국회 한민당 세력의 합작에 의해 정치적으로 제거 당했다”는 주장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북한 정권은 1997년 5월26일자 로동신문에서 “성시백이 1948년 가을 남조선 괴뢰 ‘국회’공작에 힘을 넣었다”며 신문 한 면에 걸쳐 각가지 투쟁공로를 털어놓았다.
    “국회 안에서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섭하여 국회부의장과 수 십 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외군 철퇴 요청안’과 ‘남북화평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들을 수세와 궁지에 몰아넣고 남조선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안겨주었다”고 자랑한다. 
    즉, 박원순 등 남한 좌파의 주장을 김정일 정권이 “아니다, 우리가 했다”며 공식적으로 뒤엎어버린 셈이다. 국회프락치사건 만이 아니라 ‘김일성 수령의 각가지 대남투쟁 지시를 충실히 실천한 성시백 동지야말로 ‘공화국 1등영웅'이라고 치켜세웠다.

    6.25때 서울을 점령한 김일성은 “성동무의 시체를 찾아라” 다그쳤지만 찾지 못했다. 휴전후 평양근교 열사능 묘지에 시체 없는 가묘를 만들고 ‘공화국 영웅 제1호’ 칭호를 주었다.
    성시백의 아들은 3명, 김일성이 이름을 지어준 막내아들 성자립(成自立)은 김일성대학 총장까지 지냈다. 2003년 8월 대구에서 열린 세계 대학생올림픽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대표단장으로 내려왔으며, 2005년 금강산호텔의 이산가족 상봉행사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에피소드=6.25직전 어느 날, 남로당과 북로당의 수괴들을 일망타진한 합동수사본부 책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성시백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서다. 국군 방첩대 김창룡 소령과 서울지검 반공검사 오제도,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운하...그런데 거기 꼭 참석해야할 인물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서울시경 사찰과 대공분실장 백형복 총경이 안 나온 것, 무슨 일인가? 
    그 시간 백형복은 자신이 관리하던 비밀문서 보따리를 들고 38선을 넘어갔다. 공산당 거물들을 함께 추적하고 붙잡았던 경찰 대공(對共)분실장이 공산당이었단 말인가? 알고 보니 백형복의 월북은 성시백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