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다시 세운 나라인가. 고종의 ‘매국’(賣國)부터 이승만의 ‘복국’(復國)까지 참 멀고도 먼 여정이다. 그 나라는 29세 이승만이 옥중에서 쓴 책 [독립정신]에서 설계한 그대로 치열한 독립운동을 하여 마침내 반세기 만에 젊은 날의 꿈을 실현한 자유민주공화국이다.
    해방전부터 공산화하려는 소련의 스탈린과 싸우고 공산주의를 모르는 미국과 싸우며 건국한 대한민국! 특히 건국을 반대하는 김구 등 국내 ‘우물안 개구리’들이 스탈린의 꼭두각시들에 놀아나 또 한번 ‘제 손으로 매국’을 저지를 뻔하였지만 이승만이 막아냈다.
    "나라를 한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힘드는지 아느냐" 이승만은 그러나 쉴틈이 없다.

    정부수립 순간, 이승만의 머릿속에 오래 저장된 설계도 ‘나라 만들기’(Nation-Building) 프로그램이 빠르게 돌아간다.
    대한민국의 외형은 건국헌법에 담았으되, 실제의 국민들을 그에 맞는 국민으로 키워야한다.
    그것은 20세 이승만이 배재학당에서 발견했던 미국 같은 나라의 국민, 현대적 국민국가를 만드는 원대한 프로젝트이다. 
    바로 건국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다.
    자유민주공화국이 무엇인지 올바로 인식할 줄 아는 국민, 자유민주 권력을 제대로 선택하고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국민이 절대다수가 되어야 비로소 국가의 ‘주권’이 튼튼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통령이 된 이승만 앞에 주어진 상황은 지주제에 골병든 농노(農奴)의 농민국가, 국가예산을 짤 세금도 거두기 힘든 판인데 다행히도 미국이 ‘귀속재산’을 고스란히 대한민국 정부에 넘겨준 일이다. 귀속재산(Vested Property)이란 일본이 36년간 한반도에 만들어놓은 재산을 미군정이 모두 미국재산으로 귀속(vest)시키면서 붙인 이름이다. 
    이승만은 미군정이 귀속재산을 불하하려는 것을 적극 반대하였다. ”일본이 우리 땅에 건설한 산업시설은 우리 동포가 피땀 흘린 재산이다. 우리 정부가 수립되면 우리가 처리할 것인데 미국 맘대로 처분하지 말라.“ 이에 따라 미군정은 일부만 불하하다가 중지하고 건국과 함께 이승만 정부에 이양하였던 것이다.

    이승만의 ‘건국 프로젝트’는 분주하게 응용프로그램을 만든다. 
    그것은 ‘농민 해방’과 ‘상업국가 건설’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 즉 농지개혁과 함께 귀속재산을 국민에게 불하하여 농공병진(農工倂進) 산업국가-무역국가로 변신시키자는 오래 된 꿈이다. 바로 23세 이승만이 자신이 창간한 [매일신문]과 [제국신문]에 쓰고 또 썼던 주장들을 드디어 자신의 손으로 실천하는 일이다. <대표적 논설 한편을 골라 맨뒤에 붙이니 참조할 것>
    이리하여 대대적으로 동시에 실시한 ‘농지개혁’과 ‘귀속재산 불하’과정을 살펴보자.
  • ▲ 농지개력법 표지와 이승만 대통령. 오른쪽 책은 안호상 문교부장관이 정리한 이승만의 정치철학서 '일민주의 개론' 표지.
    ▲ 농지개력법 표지와 이승만 대통령. 오른쪽 책은 안호상 문교부장관이 정리한 이승만의 정치철학서 '일민주의 개론' 표지.
    ◆ 농지개혁=신분 평등-경제적 자유권을 가진 국민 탄생

    “백성의 마음이 먼저 자유해야 한다”
    “자유가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다”
    “민권(民權)이 곧 국권(國權)이다”
    “정치제도는 백성의 수준에 달려있다”
    “마음의 결박을 풀고 노예의 사상을 벗어나야 한다”

     이상의 인용문들은 이승만이 20대시절 계몽운동과정과 한성감옥에서 발표한 논설들 가운데 극히 일부이다. 이런 논설들을 묶고 새로운 주장을 엮어 펴낸 것이 유명한 [독립정신]이다.
    그리하여 500년간 지주들에게 억매인 농노(農奴) 농민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이승만의 평생정치신념 ‘만민평등-일민주의(一民主義)’를 구현하는 지름길이요, 그 첫 걸음이 농지개혁이다.
    ‘일민주의’는 이승만의 정치사상 철학을 담은 이론으로서 안호상이 정리한 책자가 남아있다.

    이승만은 해방직후 귀국하여 미군정을 설득, ‘민주의원’을 설립하고 의장이 되었을 때 1946년 3월15일 ‘과도정주 당면정책 33항’을 직접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사실상 남한 임시정부의 ‘건국정책’으로 채택되었다. 그 내용 중에 ‘토지의 유상 몰수, 유상 분배’를 명시하였다. 그리고 건국헌법 제86조에 ‘농지개혁’에 대하여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고 기정사실화 시켰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제주4.3폭동, 여수순천 군반란, 국회프락치사건 등 건국을 방해하고 신정부를 전복시키려는 국내 좌익세력을 진압하며, 반민특위의 친일파 청산문제, 미군 철수 댓가로 한미동맹 체결 문제와 씨름하는 와중에서, 힘들게 ‘농지개혁법’을 국회에서 통과시키게 만들어 공포한 것이 이듬해 1949년 6월이었다. 그러나 보완개정을 거치느라 1950년 3월에야 본격시행하기에 이른다. 북한의 6.25남침 불과 3개월 전이다.

    ★이승만의 ‘농민해방’ 의지, 공산주의 출신자 조봉암을 특별 기용

    이승만의 농지개혁 의지는 초대 농림부장관에 조봉암(曺奉岩,1898~1959)을 기용한데서 극적으로 드러났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창당(1925)한 조봉암은 중국에서 코민테른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는데 박헌영의 독주를 비판하며 “전향했다”고 말하지만 그 증거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인물을 과감하게 농지개혁의 책임자로 등용한 이승만의 목적은 한마디로 국회의 지주계급을 제압하여 정면돌파 하려는 노림수, 농기개혁의 시급성과 중요성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국회내 다수의 지주 의원들은 경악과 충격에 빠져 비상이 걸렸다. 왜냐하면 북한은 이미 2년전 1946년에 ‘무상몰수-무상분배’란 이름으로 전국토의 국유화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공산당 장관한테 재산 다 빼앗기는 거 아니냐” 국회의원들뿐만 아니라 일반 크고 작은 지주들도 전전긍긍이다. “이승만 때문에 수백년 가문이 망하게 생겼다”며 초상집 형국이다.
    당시 상황은 조선왕조때보다는 일제식민지를 거치며 지주가 차지한 농토는 줄어들었고 그만큼 소작농도 줄어 있었다. 하지만 미군정이 토지개혁을 위해 조사한 바로는 아직도 “전농토가 6대 지주의 분할점령상태”였다는 후일담이 전해졌지만 실상은 확인되지 않았다. 미군정이 1948년 뒤늦게 실시한 토지개혁은 “우리정부가 할일”이라는 이승만과 정당들의 반대와 농민의 호응이 적어 일부분 진행하다 멈추었다.

    ▶농지개혁법 완성 과정◀

    수천년 봉건적 신분사회가 현대적 시민사회로 대전환하는 농촌사회혁명, 그 역사적 과업을 자임한 주인공이 청년혁명가 출신 이승만이다. 5.10총선거를 앞두고 그는 올리버에게 “새 정부가 수립되면 토지개혁법이 제일 먼저 제정될 것”이라며 흥분한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건국선포식이 끝나자마자 서두른다.
    조봉암 농림부장관을 위원장으로 세운 농지개혁법 기초위원회부터 발족시켰다. 농림부 직제법이 공포되기도 전이어서 농림부 조직구성과 농지개혁이 함께 출범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기획처장 이순탁(李順鐸)이 합류하고 부위원장에 농림부차관 강정택(姜錠澤), 위원들에 농지국장 강진국(姜辰國)과 3명의 담당과장들로 위원회는 조사와 입법을 시작하였다. (김성호 외 [농지개혁사 연구]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9)

    이승만은 격노한다. 신문들에 지주와 소작인들의 분쟁이 연일 보도되기 때문이다.
    “조봉암을 불러라” 이승만은 불같이 호령한다. “새해 춘경기(春耕期:봄농사철)가 오기 전에 개혁을 끝내야하는데 뭣들 하고 있는 것이오?” 꾸중을 들은 조봉암은 위원들을 재촉하였고 강진국의 집에서 위원들은 ‘농지개혁법’ 시안을 만들어냈다. 신문들도 내용을 소개하면서 개혁을 재촉한다. ([조선일보] 1948.11.25.일자)

    ★‘농지개혁’이란 이름의 ‘다목적 혁명’...이승만의 국가비전

    이승만은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로 ‘토지개혁문제’라는 장시간의 연설을 했다.
    “이 단계에 제일 중대히 여기는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잃은 독립을 찾아서 우리 강토(북한)를 회복하자는 것이요. 둘째는 강토를 회복하여 ‘참주인’들에게 맡기자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적에 양반과 상놈을 구별하거나 부자와 빈민을 인(印)쳐서 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동등으로 천연적 복리를 누리게 한 것인데...(중략)...임금이 그 나라를 다 자기 소유물이아 하였으며 세가(勢家)와 부자들은 광전옥토(廣田沃土)를 다 자기들의 물건으로 만들었으므로, 대다수 민중은 남의 세상에서 남을 위하여 사는 것으로 알게 되었나니, 그 나라 주인되는 대중인민은 거의 소유권을 다 잃어버리고 몇몇 사람들이 복리를 독점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몇 천년을 지내고보니 이것이 자연 법이 되고 습관이 되어서 부자는 대대로 부자요 양반은 대대로 양반으로 지냈으니 이처럼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일이 다시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장하는 민주정체의 주의는 반상(班常)이나 귀천(貴賤)은 다시 없고 모든 인민이  평등 자유로 천연복리를 다 같이 누리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근본적 법통을 먼저 교정하여 모든 폐단이 차서로 바로 잡힐 것이므로, 토지개혁법이 유일한 근본 해결책인 것입니다.” 
    이승만은 농지개혁법의 대강을 설명하면서 “지주는 일 아니하고 편안히 앉아서 도조(睹租:소작료)를 높여서 경작 농민이 먹고 살 것도 없이 하니 농민은 노예나 소와 말 같은 생명과 다를 것이 없이 되니, 이는 경제발전에만 손해가 아니가 인류도의에 크게 위반되는 것”이라 질타하였다.
    특히 북한의 무상몰수-무상분배 토지국유화를 알기 쉽게 비판하여 국민들에게 설명한다.
    “공산제도는 토지를 인민에게 분배한 것이 아니라 정부가 빼앗아서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이 되어 정부에 바치기만 할뿐이니, 지주 땅을 경작하는 것보다 더욱 자유롭지 못하고 속박을 받는 것이니, 전에는 부호의 노예였던 것이 지금은 정부의 노예가 되었으니 무슨 차별이 있으며 농민생활에 아무 도움도 없을 것입니다.”

    “지주의 노예가 정부의 노예로 변했다“는 말이 정곡을 찌른다. 북한의 허울 좋은 ‘무상분배’에 현혹되는 농민들의 생각을 자본주의 경제로 교육시키려는 강론이었다.
    이에 덧붙여 이승만은 일찍이 1923년 하와이에서 자신이 발간하는 [태평양잡지]에 발표한 논문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에서 논파한 바, 공산주의가 ‘자본가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 한번 상세히 비판함으로써 농지개혁이 자본주의 실현의 일단임을 인식시키려 강의를 계속한다. 

    “....인구는 해마다 증가되어 한정된 토지만으론 민중이 먹고 살기에 부족하므로, 공업을 일으켜서 생산력이 발전되어야 우리도 먹고 쓰고 외국에 수출하여 남의 물건을 바꾸어다가 우리 생활을 풍족하게 할 것이며...(중략)...그러므로 자본가를 다 없이 하여 노동자만 살수 있게 하자는 것은 우리가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니, 공장이 문을 닫게 되면 실업자가 먼저 타격이요. 그러므로 공산주의자들은 파공파업(罷工罷業) 등 폭력적 행동으로 자본가와 충돌아고 농민들을 동원해서 민중이 서로 싸우게 하여 정부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하는 폐단을 우리는 절대로 포용치 아니하는 것이니, 세계 모든 재원의 세가지 근본되는 토지, 노동, 자본이 서로 충돌하지 말고 피차 도와서 합류하여 나가는 중에 노동자와 농민, 자본가들이 다 잘 살 수 있기를 도모하자는 것입니다”

    농지개혁과 공업 발전, 수출 무역 등 이승만의 농지개혁 구상이 ‘노사 협력-수출 입국’까지 아우르는 것임을 한눈에 보여주는 연설이다. 이는 물론 그 동안 남로당의 계급투쟁 논리에 포섭된 농민들의 의식이 농지개혁과 함께 개혁되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승만의 국민교육이다. 
    그는 올리버에게도 말했다. “농지개혁은 농민은 잡기 위해서” 라고. 공산당에게 빼앗겼던 농민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되찾아 오겠다는 결심의 표현이었다.

    이에 따르는 중요한 과제는 ‘토지자본의 산업자본화’--이승만은 농지개혁 한가지로 몇가지 혁명적 효과를 노렸다. 국민의식의 자유화, 전제적 공산당 침투 방지, 그리고 토지매매로 생성되는 자본을 경제발전에 동원하려는 계획이 그것이다. 
    “현금 우리나라의 자본은 대부분 토지에 있나니, 지주들이 다 토지는 내어놓고 그 가격을 받아서 자본을 만들어야 공업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므로 지주들로 하여금 상당한 자본을 얻게 하는 것이 긴요한 문제이니, 많은 연구로 해결책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우리나라 재벌가로 지목받는 이가 많지마는 그 중에 민중의 호감을 가진 이가 많지 못하니, 이것은 왜정시대 친일자로 지목을 받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민국이 수립된 이후로 다 합심합력해서 앞으로 건설개량을 위주로 할 것이요. 과거사를 연연해서 앞에 나아갈 길을 장애한다면 우리의 기초적 대업에 불리할 것이므로, 전에 무슨 공작으로 재정을 모았든지 지금부터는 그 재정으로 민족생활개량과 국가기초 건설에 공헌하여 공효(功效)가 나타나게 된다면 이것을 우리는 찬성할 것이니, 경제가들은 사리사욕에 사소한 이익을 도모하지 말고 국가경제대핵에 힘써서 국내 국외의 큰 경제가의 명예를 얻도록 하는 것이 공과 사에 실로 복될 일이므로, 이 기회를 이용해서 우리 경제가들은 세계 경제가들과 경쟁 전진하는 세력을 잡아서 세계 부강한 나라들의 재력과 물질을 교환하여다가 우리나라의 이익을 확대시키기를 목적하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국민들은 물론, 친일파 청산을 외치는 반민특위 측에도 이승만은 “세계로 나아가는 글로벌 수출국가 건설의 비전”을 펼쳐보이며 빈약한 국민역량의 ‘합심합력’을 호소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한 ‘수출입국’의 원조는 이승만 대통령임을 잘 증거하여 준다. 
  • ▲ 건국정부의 농림부장관 조봉암과 농지개혁 현장조사 보고서 보도(조선일보). 오른쪽 사진은 1958년 진보당사건때 북한과 내통혐의로 재판받는 당수 조봉암.
    ▲ 건국정부의 농림부장관 조봉암과 농지개혁 현장조사 보고서 보도(조선일보). 오른쪽 사진은 1958년 진보당사건때 북한과 내통혐의로 재판받는 당수 조봉암.
    ★지주들, 농지 방매 바람...국회, 조봉암 ‘국비 유용’ 사퇴 압력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지주들이 재산 지키기에 분주하다. 법에 의해 ‘몰수’당하기전에 헐값으로라도 농지를 처분하는 이들이 속출한다. 잇따르는 ‘농지 방매’의 심각성에 농림부는 ‘소작권의 이동’이나 ‘박탈’을 금지시키는 ‘임시조치법’을 만들어 국회에 회부하였으나 보류되었다.
    조봉암은 새해 1월4일부터 ‘농지개혁법’에 대한 지방순회 공청회를 열고 법을 손질한 다음, 국무회의에서 승인받는다. 그리고 2월5일 국회에 정식 제출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2월11일 농지방매를 방지하기 위해 “악덕지주들을 고발하라”는 담화를 냈다.
    “지주들이 농민들을 꾀며 위협하여 농지를 사사로이 매매하려는 폐단이 심하다 하니 협잡 간신배의 수단에 빠지지 말아야하며 두려워 말고 관계기관에 신고, 보호를 받을 수 있다. 만일 법을 무시하고 사사매매하는 일이 있다면 전부 무효로 돌아갈 것이므로 농민들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 1949.2.12일자)


    지주들이 소작인들을 상대로 농지를 지키려 불법적인 술수를 부리고 있을 때, 국회에는 뜻밖의 고발장이 날아들었다. 감찰위원장 정인보(鄭寅普)가 1월31일 국회에 ‘농림부장관의 비행에 대한 통고’를 제출한 것이었다. 
    조봉암 장관의 ‘비행’이란 한마디로 ‘예산 유용’이다. 양곡매입촉진위원회의 예산에서 장관 사택 수리비, 출장비 등 명목으로 500만원가량 사용, 예산책정이 안된 문화영화 제작에 500만원, [농림일보]를 제작한다며 700만원 부당 갹출 등 당시 거금 1,700여만원을 유용한 혐의였다. 조봉암은 2월3일 국회본회의에 나가 직접 해명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가 출신 법률가 이인(李仁) 법무부 장관은 ‘장관의 독직’ 스캔들 자체가 독립 정부의 신뢰와 권위에 치명적이라며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조봉암 구속 요청서를 국회에 냈다. 국회는 이를 부결한다.
    조봉암은 결국 2월21일 취임 6개월 남짓 만에 사표를 제출하고 불구속 재판을 받았는데, 1-2-3심에서 “개인횡령은 아니다”는 무죄판결이 나왔다. ([조선일보] 1949.11.12.일자)

    이승만이 ‘농지개혁’을 위해 선택한 ‘지주계급 돌파용’ 선봉장 조봉암, 그러나 그의 꿈이기도 했던 ‘지주 타파, 농민 해방’의 문턱에서 조봉암은 자기 발목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기득권을 깨부수려는 자는 500만원이 아니라 단 5원이라도 조심해야 할 것을, 법 무서운 줄 모르던 불법투쟁의 공산주의자 출신은 지주계급을 우습게 알았는지도 모른다. 고발자는 누구이고 그물을 쳐놓은 자들 또한 누구들일까. 지주 국회의원들을 손가락질 하는 농민들의 여론이 한동안 수근거렸다고 전해진다.
    뜻밖의 사건으로 조봉암의 사표를 받은 이승만은 “봄철이 다가오는데 만난(萬難)을 배제하고 속히 단행하라”며 날마다 농림부를 독려하였다고 윤영선(尹永善,1896~1988)이 회고한다. 청년 이승만의 독립협회시절 함께 했던 민권운동가이자 사상가 윤치호(尹致昊,1865~1945)의 아들인 윤영선은 농업 전문가로서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관철해낸 3대 농림부장관이다. (윤영선 [농지개혁과 나의 할 일] 혜성사출판부, 1950)

    ★이승만, 청년세력 힘 모아 지주세력을 견제

    마침내 농림부의 농지개혁법안이 2월5일 국회에 제출된다. 이승만의 불같은 독촉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들의 심의는 석달이나 걸렸다. 지주들의 지연작전 때문이다.
    특히 국회 산업위원회는 독자적인 법안을 만들어 지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시일을 끌었다. 이때 대한농민총연맹(농총)이 ‘국회의원 제공에게 고함’이란 성명을 발표, 정면 공격에 나섰다. “국회본회의에서 우리는 우리의 적을 뚜렷이 보았다. 적은 얼마나 노회하고 교활하고 후안무치하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이요. 자기의 탐욕을 위해서는 민족도 국가도 대의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의 눈과 귀로 보고 들었노라.”고 선언, “대통령의 의지를 꺾으며 농민동포의 적으로 자부자처하는 행동”으로 “지주들을 위한 농지개혁을 강행하려하니 다음 선거때 낙선운동을 하겠다”고 달려들었다. ([서울신문]1949.3.15.일자)
    이승만 대통령도 농총 집회에 참석하여 ‘불같은 격려사’를 했다. “농총은 그동안 전국각지에서 좌익과 투쟁하는 중에 63명의 사상자를 낼 만큼 확실한 반공단체로서 민족공생주의를 표방, 자본가 독재와 노동자 독재 모두를 반대하는 ‘공생공영의 균등사회’의 구현을 지향한다고 지지하였다. 농총 역시 1947년 이승만이 만든 농촌청년단체 연합체이다. (손세일, 앞의 책)
    이승만이 추구한 농지개혁은 이처럼 반공체제의 구축과 이를 통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확립, 농민의 경제적 자립과 공업 부흥을 위한 산업자본의 조성 등 국가건설과 국민통합을 동시에 이루자는 것이었다. 당시 75세 이승만이 스스로 청년층과 노동자-농민을 이끌며 앞장섰던 이유이다. 

    ▶농지개혁법 요지◀

    대한민국의 ‘토지개혁’은 ‘농지’에 국한시켜 논-밭 만을 분배한 것으로서, 북한이 임야-하천 등을 포함한 전국토를 국유화 시킨 것과 근본적인 대조를 이룬다. 그리하여 우리의 법 이름도 ‘농지개혁법’이다. 이 역사적인 농지개혁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1949년 4월27일, 첨예하게 대립했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 확정되었다.
    ◉유상몰수 되는 지주 농지의 보상지가(地價)와 보상방식=지주 의원들은 내놓는 토지의 보상가격을 연평균 생산량의 300%를 요구하였으나, 농림부 안에 따른 150%로 낙착되었다. 보상방식은 지가증권(地價證券)으로 지급하며 능력과 희망에 따라 정부가 벌이는 각종사업에 우선 참여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졌다. 
    ◉유상분배 받는 농민이 갚아야할 상환지가와 상환방식=농지를 분배받는 농민들은 수확량의 30%를 5년간 현물로 갚도록 정해졌다. 이것은 당시 각국서 실시한 토지개혁의 사례와 비교하여보면 세계적으로도 한국이 가장 싸게 분배한 제도였다. 
    ◉농지 소유면적의 상한선=지주나 농민의 농지소유 면적은 3정보(약9,000평)까지로 제한하고, 그 이상의 농지는 모두 분배하였다. 따라서 지주와 소작농의 소유농지는 대략 평준화되었다. 
    ◉농지분배에서 제외된 토지=과수원, 종묘(種苗), 상전(桑田:뿅나무밭), 염전, 500평이내 채마밭, 위토(位土:종중전답) 등은 분배대상에서 빼고, 지주가 정부나 공공기관 및 교육기관에 기부한 토지도 분배를 면제하였다. 이에 따라 양반가나 지주들은 가문의 전통을 보존할 수 있었고, 몰수될 토지를 상당량 ‘기부’ 형식으로 빼돌려 지켜내기도 하였다.

    호남 제일의 지주 김성수(金性洙,1891~1955)는 일찍이 중앙학원, 동아일보, 경성방직, 보성학원, 고려대학교 등을 운영하였기에 농지분배 과정에서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국회에서 농지개력을 반대하는 지주들을 설득, 자신이 솔선수범을 보임으로써 크게 공헌하기도 했다. 
  • ▲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김성수의 담소. 농지개혁때 인촌 김성수는 자신의 방대한 농지를 내놓음으로써 지주들의 반발을 무마하려했다고 한다.
    ▲ 대통령 이승만과 부통령 김성수의 담소. 농지개혁때 인촌 김성수는 자신의 방대한 농지를 내놓음으로써 지주들의 반발을 무마하려했다고 한다.
    ◆6.25침략 석달전 실시...실패냐? 성공이냐?
     
    농지개혁법은 국회를 통과한 뒤에도 내용수정을 거듭함으로써 그 개정안과 시행령이 이듬해 1950년 3월에야 확정된다. 따라서 개혁의 본격적인 실시는 북한의 6.25침략 3개월 전에야 가능했던 셈이다. 
    이러다보니, 금방 전쟁에 휘말린 농지개혁에 대한 평가는 ‘완전실패’ 일방 매도로 모아졌다. 특히 지주계급의 정치인, 언론과 이에 편승한 좌익 지식인들이 무차별 비판에 앞장 서 왔다.
    내용인즉, 한민당을 비롯한 지주세력이 개혁을 지연시키며 상당수의 소작농지를 사전에 방매하면서 ”소작농에게 강요한 땅값이 법적 상한가를 넘는 수탈적인 것“이라거나, 지주들의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화시키려던 목적도 전시(戰時) 인플레이션 탓으로 실패하였으며, 영세 농민만 양산하고 지주들이 부활하여 지주제로 돌아가는 결과를 낳았다”는 식의 혹평이었다. (유인호 [한국농지제도연구] 1975)
    박정희 시대 ‘반정부 캠페인’처럼 횡행하던 이와 같은 ‘운동권적 평가’는 1980년대 이후 농지개혁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뒤따르면서 부정되었다. (이영훈 [한국경제사]-Ⅱ, 일조각, 2016)
    대표적인 연구성과는 농촌경제원의 김성호(金聖昊) 외 전경식(全敬植) 장상환(蔣尙煥) 박석두(朴錫斗) 4명이 펴낸 [농지개혁사 연구](1989)에 제시되어 그 합리적 분석 평가가 정론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 주요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지주들의 지연작전도 사실이 아니다. 한민당 등 지주의원들이 초반에 반발했지만 “공산화를 막자‘는 국가적 명제 앞에 곧 찬성으로 돌아서 실익 챙기기에 나섰다.
    둘째, 지주들의 농지방매는 농지개혁의 불가피성을 인식한 행위로서 그것은 폐해가 아니라 농지개혁의 성과로 인정해야 한다.
    셋째, 사전방매의 땅값이 법적 상한가보다 높았다는 것은 실정을 모르는 오해이며, 조사결과 ‘수탈적’인 강매의 사례는 극소수였다. 실례로 충청남도 서산군의 경우 사전방매 81건 가운데 상한가 이하가 38건, 2배 이상 폭리는 4건이었다. (장상환 [농지개혁과정에 대한 실증적 연구] 연세대 석사학위논문, 1985. 이영훈, 앞의 책)
    넷째, 지주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직접적전환은 부진하였지만 간접적 경로를 통한 성과는 적지 않았다. 예컨대, 정부는 지주와 농민으로부터 거둔 지가에 사업잉여가 발생하여 이를 농업개발을 위한 각종 사업에 투자할 수 있었다.
    다섯째, 지주에게 지급한 지가증권은 한국 증권시장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휴전후 1955년 증권거래의 73%를 지가증권이 차지한다. 
    여섯째, 지주들에게 불하한 귀속재산 값도 지가증권으로 납입하여 결과적으로 산업자본이 되었다. 한국 자본주의는 농촌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평가가 과언이 아니다.

    ★6.25전쟁 전에 사실상 끝나버린 농지개혁

    한마디로 농지개혁은 6.25전쟁 이전에 사실상 완료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성화같은 독촉으로 농림부는 법이 공포된 3월10일을 전후하여 분배농지일람표를 완성, 4월말까지는 ‘농지분배 예정 통지서’를 전국의 대상농가들에 발급을 완료하였다. 이 통지서를 받은 농민은 통지서 자체가 곧 농지소유권을 이전받은 것으로 인식, “오늘부터 이 땅은 내 것” 즉 ‘땅을 가진 농민’으로 재탄생하는 감격을 누렸기 때문이다. 
    이때의 ‘감격’을 현장 취재하여 보도한 [부산일보]의 기사가 상징적이다. ‘오늘이야말로 진정한 대한민국 전국 해방의 날’--농민들은 대대의 한을 풀어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성보 ‘남한 농지개혁의 성격’ 2001)
    그러므로 전쟁 전에 ‘논밭’을 분배받은 소작농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지주’(자기땅 소유자)가 되었고, 경제적 자유권과 법적 소유권을 지닌 경제주체로 변신하였다. 그리하여 6.25전쟁중 공산당의 무상분배 감언이설에도 넘어가지 않았을 뿐더러, “대한민국은 내땅, 우리나라”라는 주권의식이 생겨나 “내 땅을 지키자”는 거의 본능적 ‘반공-호국전사’로 변신하여 싸우는 ‘국민다운 국민’으로 거듭났던 것이었다. 

    그것은 이승만이 50년동안 꿈꾸고 계획했던 ‘자유독립 국민국가’ 형성의 첫 걸음이 보기좋게 성공하였다는 증거였다.
    활짝 열린 자작농 시대 ‘경자유전’(耕者有田)의 보편화—다름 아닌 ▶노예백성의 해방 ▶계급을 타파한 평등사회로의 민주화 ▶정치적 국민통합 ▶현대적 자유국민 등장 ▶공산화 방지 ▶신분상승 경쟁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성장으로 줄달음질쳤다. 농민들의 자녀교육열은 식량증산, 축산업 등으로 확산, ‘소를 팔아 아들딸 대학 보내는 열풍’이 불어 새로운 대학이 줄줄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그 대학건물을 ‘우골탑’(牛骨塔)이라 부를 정도로 변하였다.
  • ▲ 이대근 저서 [귀속재산 연구]표지, 시계방향으로 대표적인 귀속재산들--압록강 수풍발전소, 일본총독부 청사, 흥남 비료공장.
    ▲ 이대근 저서 [귀속재산 연구]표지, 시계방향으로 대표적인 귀속재산들--압록강 수풍발전소, 일본총독부 청사, 흥남 비료공장.
    ◆ ‘귀속재산’ 불하...‘국유화’ 주장 물리치고 자유기업체제 구축

    일본의 침략주의가 조선을 병탄하여 한반도에 구축한 재산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미군정은 처음에 일본의 재산권을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지 우물거리다가 돌변, 귀국하는 일본인들의 지갑까지 털어 일정금액 이상은 깡그리 몰수하였다. 
    대한민국 건국후 미군정이 이양한 ‘귀속재산’의 내역을 보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철도, 도로, 항만, 전기전신, 간척 수리시설 등 사회간접자본(SOC)에 속하는 각종 인프라스트락처(하부구조)의 방대한 재산.
    ◉총독부 청사 등 전국의 관공서 건물, 군부대, 학교, 병원, 도서관 등 모든 공공시설물.
    ◉각종 최신 공장들과 광산, 발전소, 운수 등 산업시설.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 및 각종 사회서비스업의 모든 시설.
    ◉주식, 채권, 증서, 저작권, 특허권, 상표권, 로열티 등 무형의 재산.

    ‘식민지 유산’이라 할 이런 목록만으로도 조선왕조 500년에 볼 수 없었던 근대산업국가의 면모를 보여준다. 1910년 ‘한일병탄’부터 1945년 패망까지 일본은 왜 이렇게 식민지 조선을 대대적으로 개발하였을까. 그동안 우리 학계는 “일본의 팽창주의를 위해 한국인을 착취한 결과물”이라 정의했는데, 획기적인 저서 [귀속재산 연구]를 펴낸 이대근(李大根) 서울대교수는 “실증적 연구가 결여된 평가”라고 주장한다.
    예컨대, 1920년대 이후로 일본이 대규모의 ‘정부투자’를 감행하였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계기로 전시임에도 더욱 적극적인 조선개발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륙경영’이라는 식민주의로만 설명하기엔 ‘특이한 사업기획’이 많았다고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며 설명한다.
    특히 압록강 발전소 건설을 위해 10여년간 3차 조사 끝에 동양최대 발전소를 지었고, 부전-장진호엔 수역(水域)변경이란 특이공법으로 대규모 발전소를 건설한다. 또한 철도망은 한반도를 X자로 부설하여 지선까지 6천여㎞였는데 종전 시에도 공사중인 노선이 1천㎞가 넘었다, 더구나 산림녹화 부문에선 전쟁말기 다른 산업이 멈추었는데도 사방-식목사업을 계속 진행하였으니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다며 연구과제로 미룬다고 말한다. (이대근 [귀속재산연구] 이숲, 2015)

    당시 일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 총평가액은 미화기준 약 52억달러에 달하였는데, 북한에 29억달러, 남한에 23억달러로 추산되었다. 일본이 대륙침략경영 프로젝트에 따라 만주와 북한을 통합개발함으로써, 중화학-군수산업 시설과 풍부한 지하자원 개발이 북한지역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남한지역엔 방적공장 등 소비재 중심 경공업이 대부분이다.

    ★이승만, 국회의 ‘국유화’ 주장 저지...“민간에 전면 불하”  민영화 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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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의 23억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일본재산’은 미군정 3년간 그 원형을 많이 훼손하고 망실된다. 첫째는 미군정의 무원칙하고 방만한 관리능력 때문이고, 둘째는 한국인들의 ‘임자 없는 무주물’(無主物) 쟁탈전 탓이었다. 그리하여 이미 19%쯤 미군정이 민간에 불하하고 남은 귀속재산이 1948년 9월 ‘한민간의 재산이양에 관한 최초협정’에 따라 이승만 정부에 인도되었을 때 신생국가의 산업동력으로 이용할 수 있는 물적기반은 크게 축소된 상태였다.

    그때 국회는 ‘횡재처럼 굴러들어온 귀속재산’이란 이름부터 거부감을 보이며 ‘적산’(敵産)이라 불렀다. 일반 국민들도 그랬다. ‘민족의 적이 만들어 놓은 재산‘이란 말이다.
    따라서 국회의원들은 이 방대한 재산을 모두 ’국유화‘ 시켜 국가가 직접 관리운영해야 한다는 법 제정을 추진한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는 탐욕의 본능적 암약과 함께 일반의 ’불하로비‘에 놀아나고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한마디로 “국유화냐” “민영화냐”의 대결이다. 국회의원들은 물론, 정부의 재무부도 ’국유화‘에 기울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 혼자만 ’민영화‘를 고수한다. 그것이 귀속재산 민간불하였다. 
    당시 귀속재산의 엄청난 비중은 대한민국 총 국부(國富)의 80~85%였다. 이관된 귀속재산 총 건수는 170,605건, 미군정에 인수되지 않고 농림부 등에 등록되어 있던 일본인 재산이 121,304건으로 이를 합치면 291,909건이었으며, 98%가 부동산이다.(이대근, 앞의 책). 
    하루아침에 생긴 귀속재산이야 말로 빈털터리 대한민국의 생존기반이자 ’국민경제‘ 형성의 토대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농지개혁에서 생긴 자본으로 귀속재산을 불하받게 만들어 “경제를 아는 국민, 장사할 줄 아는 경제인, 세계와 무역할 수 있는 기업”들을 될수록 많이 만들어내 육성해야 할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역설적이게도 ’식민지 유산‘이 다름 아닌 자본주의 국가 건설에 주어진 행운의 선물(?)이 되었다. 
    게다가 건국최초의 예산은 예산도 아니다. 정부의 세입 573억원에서 조세수입은 겨우 10%에 불과한 황무지, 나머지는 미국원조와 은행 빚으로 충당해야 하는 형편이다. 귀속재산의 매각대금이 너무나 절실하다. 원조를 주는 미국도 이를 적극 권하였다. 
    당시 국공유(國公有)심의위원회가 국유화-공유화로 결정한 368건 가운데 이승만이 ’재가‘한 것은 17건에 불과하였다. 국가경제 위기를 극복하는 ’전화위복‘의 묘수, 이승만의 ’민영화‘ 집념이 얼마나 강했던가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국회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며 밀어붙인 ’귀속재산처리법‘은 건국 다음해 12월에야 제정될 수 있었다. 귀속재산은 선의의 유능한 연고자나 대상 기업에 종사했던 종업원에 불하하고, 농지개혁에 참여한 지주들에게 우선 매각하도록 규정했다. 
    대금도 최장 15년간 분할 납입, 그것도 지가증권으로 지불토록 하였으니 ’지주 국회의원‘들은 살판이 났다. 큰 사업체일수록 장기분납의 혜택이 주어졌고, 높은 인플레이션 탓에 “거저 먹는 것과 같다”고 했다. 불가피하게도 “정경유착(政經癒着)과 부정부패의 온상“이란 비난이 잇따랐다. (이영훈, 앞의 책)
  • ▲ 1954년 11월 '사사오입'개헌 파동때 국회단상의 최순주 부의장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이철승 의원.
    ▲ 1954년 11월 '사사오입'개헌 파동때 국회단상의 최순주 부의장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이철승 의원.
    ★이승만, ’사사오입 개헌‘ 단행...’자유시장경제‘ 기반 완성

    북한의 침략에 무참히 파괴된 귀속재산들이 많았지만, 그러나 전쟁재정 확보와 전시 인플레이션 억제, 군수품 생산 등의 화급한 요구에 쫓기듯 그 민영화 속도를 재촉한다. 
    휴전후 1954년 11월 18일 한미동맹의 발효와 함께, 이승만 대통령은 ’사사오입 개헌‘(四捨五入改憲)을 강행하였다. 건국 때부터 벼르고 벼르던 개헌, 그것은 건국헌법의 사회주의국가통제 경제조항들을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전면 개편하는 ’경제해방‘이라 할만하다.
    제헌때 소장파와 독립운동가 출신 의원들은 ”북한을 이기려면 북한보다 더한 민족사회주의 통제경제를 해야한다“면서 공산주의식 국영화와 노동자의 이익균점권까지 헌법에 넣었다.
    건국이 바빴던 이승만은 헌법초안의 내각책임제를 대통령중심제로 바꾸는데 그치고 유엔의 국가승인 확보를 서둘렀는데, 귀속재산 불하에서부터 헌법의 반자유(反自由)경제조항들이 장애물이 되었다. 그것을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확보하면서 말끔히 제거하고 ’자유기업체제‘로 새 출발 한 것이었다. (인보길 [이승만 현대사: 위대한 3년] 기파랑, 2020)
    ’사사오입‘이란 이 개언안 통과에 필요한 정족수 1표가 모자랐을 때 이를 정부가 수학적으로 처리, ”인간을 0.333으로 나눌 수는 없다“고 해석, 통과처리한데서 나온 별칭이다. 
    국회의원들은 ’경제조항의 자유화‘는 둘째고 개헌안 부칙(附則)을 문제삼아 ’반독재 투쟁‘을 벌여왔다. 그 부칙은 ”이 개헌안이 통과될 당시의 대통령은 임기제한을 받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즉, 재선된 이승만 대통령은 3선, 4선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 야당은 ’자유경제개헌‘엔 관심도 없는 듯 ’종신집권 독재음모‘라며 정치투쟁에 올인하였다. 하지만 그 개헌은 대한민국이 처한 당시 상황의 산물이다. 북한엔 100만 중공군이 언제 재침할지 모르고, 한미동맹은 이제 막 출범한 참이고, 전후 재건등에 필요한 미국의 막대한 원조자금을 누가 계속 확보할 수 있겠는가. 세가지 모두 감당할 능력자는 이승만 뿐이었다.
    당시 변영태(卞榮台) 총리 겸 외무장관이 미국 언론의 질문에 대답한다.
    ”소련의 국제공산주의가 이승만의 은퇴를 가로막고 있다. 이승만이 그만두면 대통령 지원자들이 수십명 나올 것인데, 우파진영의 표는 산산이 갈리는 판에, 위장한 공산당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이 너무 높다. 1년전 6.25를 막아낸 대한민국이 공산화 되어도 좋단 말인가?“ ([조선일보] 1954.12.2.)

    ’사사오입 개헌‘을 통하여 헌법을 자유시장경제체제로 전면 수정한 이승만은 이를 토대로 귀속재산 불하를 본격화하여 이 땅에 자유기업경제를 정착시켰다. 그 기업들을 주축으로 ’한강의 기적‘을 낳았으니 대한민국 선진화의 기적은 박정희 이전에 이승만이 짜놓은 국가설계의 열매 그것이다.  

    ★재벌들의 뿌리...’식민지의 유산‘이 근대화의 동력

    위에서 보았듯이 귀속재산을 불하받은 기업들은 상당한 특혜를 누렸다. 이승만의 공업장려정책 덕분이다. 그 중에도 남한의 대표적 생산공장인 방직산업은 파격적인 불하가격과 생산지원에서 남달랐다. 전쟁이 한창인 1951년 이승만은 ’면방직공업 긴급 재건계획‘을 수립, 원조자금을 총동원하여 시설복구와 증설을 촉진하여 5년후엔 면제품의 자급자족을 완전히 실현하였고 1년후 1957년에 처녀수출(3만3천달러어치)까지 하는 쾌거를 이룬다. (이대근, 앞의 책)
    이와같이 이승만의 귀속재산 불하-육성에 힘입어 ’식민지 유산‘을 받은 기업들이 전후복구 사업을 주도하며 급상정하였으며, 박정희 시대 ’산업혁명‘의 주역으로 세계적 기업이 되었으니  바로 오늘의 수십개 ’재벌‘들이 그들이다.
    이승만의 청년시절의 꿈 ”미국 같은 자유기업국가’를 4.19 하야 이전에 정착-부흥시켜 놓은 이승만의 역사적 성공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을 재벌들은 이를 외면하지 말고 감사해야 마땅하다. 
  • ▲ 오늘의 인하대학교(왼쪽) 본관 모습과, 한국외국어대학 캠퍼스.
    ▲ 오늘의 인하대학교(왼쪽) 본관 모습과, 한국외국어대학 캠퍼스.
    ◆ 중단없는 교육...전쟁중 ‘인하대’-‘외국어대’ 설립...유학 독려
     
    이승만은 동양학 선비였고 배재학당과 미국 유학을 거쳐 동서양의 학문을 겸비한 당대 최고의 학자로 변신하였으며, 독립협회 이래의 국민계몽운동 언론인-교사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국민 교육자’로 평생을 살았던 보기드문 인물이다. 
    “인간은 교육으로 만들어 진다“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말은 그 100여년 뒤에 한국서 태어난 이승만에 의해 루소 시절보다 월등한 인간교육혁명을 낳았다.
    왕부터 노비까지 중국의 성리학 질서의 노예 되기를 기꺼이 자처한 조선왕국, 수구질서에 찌든 나라와 백성을 개혁-개조하려던 이승만은 일본에 쫓겨 하와이 망명시 한국기독학원을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남녀공학‘을 통해 미래 한국의 독립지도자들을 양성에 25년을 바친다. 그의 교육철학이 ’기독교 정신을 근본 삼은 현대적 자유국민 양성‘임도 앞에서 밝혔다.
    옥중 저서 [독립정신]은 물론 [한국교회 핍박]에서 기독교기반 교육을 열렬히 주창하였다. 
    1919년 3.1운동때 필라델피아에서 4월 14~16 사흘간 이승만 박사가 서재필과 함께 개최한 ’제1회 대한인 의회‘ (The First Korean Congress)에서 채택한 6개결의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Aims and Aspirations of Koreans)에 ’국민교육‘이 강조되어있다. 또한 해방후 ”모범적 독립국 건설을 위해“ 1946년2월 발표한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에서 ”강제교육령을 발하여 학령에 참여한 남녀 어린이는 학교에 안가지 못하게 할 것이며 교육경비는 정부가 담보할 것“을 천명(17항), 의무교육 방침을 확고히 선언한다.
    1948년 8월15일 건국선포식 기념사에서는 ”새 나라 건설에는 새 정부가 필요하지만 새 정신이 아니고는 될 수 없는 일“이라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새로운 국가를 만세반석 위에 세우자“고 열망한다. 평생의 꿈을 실현할 대통령이 되었으니 이승만 특유의 정신혁명, 곧 국민혁명을 본격적으로 개시하는 ’혁명선언‘이다.
    ’교육대통령‘ 이승만이 12년 집권기간 펼친 국민의식개혁 정책들은 몇권의 책으로도 모자란 역구과제임에도 한국학계는 아직까지 이를 외면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의 방대한 국민교육 프로젝트의 성공결과를 간단히 요약하는 필자의 안이함이 부끄럽기 그지없다.

    의무교육 법제화=헌법 제16조에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 모든 교육기관은 국가의 감독을 받으며 교육제도는 법률로써 정한다.」 즉 자유민주공화국의 공교육 원칙을 명시하였다. 이 조항은 그후 9차례나 개헌을 거치는 과정에서도 변함없이 더욱 강화된다. 1987년 개헌 때 제31조가 되었다. 
    1949년 12월31일 ’교육법‘ 공포, 다음해 시행. 전쟁중 1951년 3월10일 6-3-3-4 초-중-고-대 학제 정착. 문교부 예산 70%를 교사 신축과 교사 양성에 투입한다. (김현태 [이승만대통령의 교육입국론] 도서출판 샘, 2020)
    전쟁중 교육=6.25전란 부산임시수도 시절 ’전시 학교‘를 운영, 운동장과 판자촌에 ’천막 교실‘들을 세워 각급학교의 피난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멈추지 않았다. 국방비가 엄청난 전시에도 문교부예산을 20%로 유지, ’초등교육6개년계획‘을 실시하여 학교수 2,834에서 4620개교로 급증하고, 취학율 95.2% 학생수 360여만명을 기록, 의무교육이 확립된다.
    ◉대학생 징집연기=1950년 2월(6.25발발 4개월전) 이승만은 ’재학생징집연기 잠정령‘을 공포, 세계사에 유례없는 특별조치를 내려 대학생들의 병역을 잠정면제 시킨다. 전쟁 발발후 1951년 5월4일 ’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을 내려 ’전시연합대학‘을 설립 운영하였다.
    해방직후 19개였던 대학은 휴전후 63개로 급증, 학생수가 10만명을 넘어섰다. 특히 여자대학생이 17배나 폭증, 남녀평등교육의 대성공이다. 

    ◉문맹퇴치운동=청소년 교육이외에 문맹인구를 대상으로 ’전국민 문맹퇴치 5개년계획‘을 마련, 1954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면 실시한다. 해방당시 80%를 웃도는 문맹률은 정부의 각종 문맹퇴치 프로그램을 통하여 5년 뒤 1959년엔 22,.1%로 줄었다. (교육부 [교육50년사] 1998)
  • ▲ 1954년10월 인하공과대학 개교기념식에서 '한국의 MIT' 설립자 이승만 대통령이 이원철 학장에게 교기를 수여하고있다.ⓒ인하대학박물관.
    ▲ 1954년10월 인하공과대학 개교기념식에서 '한국의 MIT' 설립자 이승만 대통령이 이원철 학장에게 교기를 수여하고있다.ⓒ인하대학박물관.
    전시중 2개 특수대학 설립=▶인천에 세운 ’인하공과대학‘과 ▶종로의 ’한국외국어대학‘이다. 
    미국의 일방적인 휴전압력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이승만은 동시에 ’휴전이후의 한국‘을 준비하였다. 하나는 전후재건과 공업화에 필수적인 기술인재 양성, 또 하나는 국제외교와 대외무역에 필수적인 외국어 인재의 양성이다. 
    1952년 8월, 소위 ’부산정치파동‘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달성한 이승만은 역사상 최초의 국민직선제 대통령에 취임하고, 더욱 강력한 ’휴전결사반대‘ 카드를 내세워 미국과 ’한미동맹‘ 및 대규모 원조협상의 시나리오를 진행시켰다. ”미국이 나라를 분단시켜 전쟁 났으니 미국이 한국의 전후복구를 책임지라“는 이승만 특유의 용미(用美)전술을 발휘, 미국의 힘을 이용한 새로운 국가 만들기(Nation-Building)=국가재건 마스터플랜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2월 중순 문교부장관 김법린(金法麟,1899~1964)을 불러 ”한국의 MIT를 세우라“고 지시한다. 미국서 독립운동때 다진 국가설계도의 일단이다. 보스턴 매사추세츠에 위치한 세계최초-최고의 종합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과 같은 대학, 전후 한국의 공업화-산업화 과학기술인력 생산기지를 세우려는 이승만이다.
    왜 1952년인가? 한국노동자들이 인천을 떠나 하와이로 이민간지 50주년을 기념하자는 것. 대학이름은 ’인하(仁荷)대학‘-인천의 인(仁)과 하와이의 하(荷)를 합친 작명까지 마쳤다. 
    1952년 6월4일 이승만 대통령은 ’인하대학의 설립에 관하여‘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50년전에 한국이민이 인천에서 하와이에 들어가서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온 것을 기념하며.....이 물질시대에 기계학과 공업화 산업화를 통해 다른 나라들과 경쟁하자는 목적을 가진 것이며.....우리의 자급자족뿐만 아니라 우리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여 국부창출을 기하려는 원대한 꿈을 이 학교 건립에 담았노라...“ 그리고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와의 연락을 만드는 기념으로 교명을 ’인하‘로 지었다고 밝혔다. 
    .그 인하대 설립자금을 이승만이 내놓았다. 하와이 망명시절 교육기관 한국기독학원을 처분한 15만 달러와 교포들의 성금, 그리고 국내 유지들의 성금에다 국고보조금을 보태고, 학교부지는 인천시로부터 기증받았다. 인하공과대학은 1954년 4월24일 기계-금속-조선-화학-광산-전기 등 6개학과로 교문을 활짝 열었다. 이승만은 인하대의 설립자이다. 
  • ▲ 원자력연구소 청사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는 이승만 대통령(왼쪽), 1956년 한국이 창립회원으로 가입한 국제원자력기구 로고 IAEA(가운데), 원자력연구소 외벽에 걸린 시험용 원자로 표시. 건물 앞에는 이승만대통령 일행(오른쪽).
    ▲ 원자력연구소 청사 기공식에서 첫 삽을 뜨는 이승만 대통령(왼쪽), 1956년 한국이 창립회원으로 가입한 국제원자력기구 로고 IAEA(가운데), 원자력연구소 외벽에 걸린 시험용 원자로 표시. 건물 앞에는 이승만대통령 일행(오른쪽).
    ★원자력 도입과 인재양성=이승만은 원자탄을 만들고 싶었다. 막강한 군사대국 일본을 원자탄 2개로 패망시키는 미국을 보자, 급변하는 세계 헤게모니는 신무기 보유(핵무장)임을 직감한다. 
    이승만은 1955년 미국과 한미원자력협정을 맺고, 아이젠하워가 원자력평화이용을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1956년 설립하자 그 창립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신설하며 과장 윤세원(뒷날 서울대공대교수)을 불러 물었다. 
    ”원자력을 공부했다지? 우리가 원자탄을 언제나 만들 수 있겠나?“ 
    (박익수 [한국원자력창업비사] 과학문화사, 1999)
    전력난에 시달리던 그때 이승만이 미국 발전전문가 시슬러(Walker Lee Cisler)를 초대하여 나눈 대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그때 시슬러의 말을 듣고서야 이승만이 처음 원자력이용을 결심했다는 주장들은 틀렸다. 결심한 후에 시슬러를 부른 것이었다.
    1958년 인하공대와 서울대 공대에 원자력공학과를 설립한 이승만은 다음해 1959년 3월 원자력원을 설립, 7월엔 시험용 원자로를 도입, 서울 공릉동에 연구소 건축공사장에 나가 훈시한다. ”이 연구소는 반드시 훌륭한 아토믹 머신(Atomic Machine)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승만이 말한 ’아토믹 머신‘에 원자탄이 제외될 수 없다. 
    미래를 꿰뚫는 이승만 대통령의 혜안은 이미 1951년 중공군과 전쟁을 한창 벌일 때, 미10군단장 밴프리트 장군에게 ”전쟁이 끝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식량, 물, 에너지가 될 것인데 식량은 사올 수도 있지만 물과 에너지는 그럴 수 없으니 화천발전소를 꼭 탈환해야한다“고 역설한데서 충격적이다. 탄복한 밴프리트는 용맹한 한국군을 독려, 중공군이 장악했던 화천 지역을 필사적으로 탈환하였다. 이승만은 피로 물든 화천호 이름을 ’파로호‘(破虜湖, 오랑캐를 깨트린 호수)로 짓고 기념비도 세우도록 하였다.
    이처럼 84세 노대통령의 남다른 전략적 안목과 ’건국 에너지‘는 젊은 각료들도 모르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평을 넓히고 넓혀갔던 것이었다. 

    ◉유학생 파견 ’큰손 대통령‘=이승만은 미국 원조자금을 이용하여 국내대학교와 미국 대학들을 연결, 학생과 교수들의 유학 및 학술-기술교류를 적극 장려하였다. 1954년 9월28일 서울대학교가 체결한 ’미네소타 프로젝트‘는 유명하다. 공식 명칭은 ‘국립서울대학교 협력프로젝트’(Seoul National University Cooperative Project)였고, 원조 계획의 실행을 미국 미네소타대학교가 전담하였다. 연세대와 고려대도 워싱턴대학 등과 비슷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이와 별도로 이승만은 많은 과학자와 기술자등을 비롯, 유학을 권장하여 훈련시켰는데 1951년부터 1960년 사퇴할 때까지 무려 5,423명에 달하였다. 금싸라기 외화 1달러도 결재하던 절약가 이승만은 유학생들에게는 몇천 몇만 달러를 아끼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다. 같은 기간 국군의 현대화를 위한 장교들 유학 교육생은 장-단기 합쳐 1만 1,900여명이나 된다. ‘부자(父子) 같았던 밴플리트에게는 육군사관학교의 현대화를 의뢰하여 ’육사의 아버지‘란 별명까지 듣게 만들었다. (남정옥 [국군과 주한미군70년] 청미디어,2021) 
    박정희도 그 유학의 혜택을 받았다. 게다가 이승만은 박정희에게 ’생명의 은인‘이기도하다. 여-순 군부대 반란때 ’숙군‘과정에서 백선엽이 ”똑똑한 인재니 살려주자’고 건의하자 그 말을 믿고 박정희를 빼준 이승만이었다. 하지만 1965년 대통령 박정희는 이승만의 죽기직전 귀국요청을 뿌리쳤고 죽어서 돌아온 장례식에도 불참하였다. 

    ★’건국의 아버지‘란 누구인가?
    농지개혁-자유경제 정착-교육혁명 등, 이승만은 나라를 세우고 나라를 만들고 국민을 국민답게 교육시키고, 미래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고 닦아준 사람이다. 
    자유-자주의 정치적 경제적 체제 구축과, 6.25침략을 막아낸 호국, 그리고 무적의 한미동맹이란 만리장성을 방패로 잘 교육받은 국민들은 ’한강의 기적‘을 일군 ’대한민국 기적의 군단‘이 되었다. 박정희도 그 중의 한사람으로 그 토대위에서 그 방패에 의지하여 산업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 
    5천년 민족사에 처음 보는 현대형 민족지도자, 글로벌 리더(Global Leader) 이승만의 정체도 역사도 한국인들만 모른다.

    예컨대 미국은 미국을 독립시킨 지도자들을 ”건국의 아버지들“(National Founding Fathers)로 영원히 모든 방법으로 기념하고 있다. 헌법을 제정한 필라델피아 회의 참가자 등 미국 건국의 주역들,  조지 워싱턴,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등 초기 대통령들과 알렉산더 해밀턴, 벤저민 프랭클린, 조지 메이슨, 새뮤얼 애덤스 등이 대표적이다. 수백년간 미국인들이 ’성인‘처럼 받드는 이들은 화폐의 주인공들이다. 
    한국엔 ’건국의 아버지‘가 한명도 없다. 사실상 거의 혼자만의 전략과 투쟁으로 나라를 세운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아예 ’독재자‘로 낙인찍어 매장시켜 버리고, 오히려 대한민국 건국을 반대했던 김구와 ’공산국 독립‘을 주창한 공산주의자들을 ’국부‘인양 교육시키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독립운동이 아니다. 스탈린이 만들어놓은 국제공산권에 들어가 ’주권 없는 위성국’이 되려는 ‘나라 바치기’ 매국운동이었음을 이제라도 정확히 인식할 줄 알아야한다.
    이승만이 미국을 이용하여 건국한 자유민주공화국에서 이승만이 목숨 걸고 쟁취한 한미동맹 ’보호막‘에 의지하여 ”누릴 것은 다 누리는“ 한국인들이 이승만에 감사하기는커녕 매도하고 저주한다, 정의와 진리의 하나님이 언제까지 이들의 ’배신‘을 두고만 볼 것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