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한민국 건국후 소련 스탈린과 북한군정 담당 슈티코프(왼쪽)은 대한민국을 파괴하기위해 많은 폭력과 선전선동을 지령 지휘하였다.
    ▲ 대한민국 건국후 소련 스탈린과 북한군정 담당 슈티코프(왼쪽)은 대한민국을 파괴하기위해 많은 폭력과 선전선동을 지령 지휘하였다.
    건국1년후 1949년 6월에 일어난 국회 프락치사건은 한마디로 소련 스탈린의 작품이다.
    3월 파리 유엔총회 개막에 맞춰 ‘소련군의 북한 철수와 미군의 남한철수’를 제의, 국제적 선동을 시작한 스탈린은 대한민국 국회내 프락치 의원들을 공작하여 미군철수 결의안을 제기하도록 만들었다. 한국국민대표들이 직접 한국내 미군 철수캠페인을 벌이는 작전, 즉 레닌의 소련공산혁명 때부터 성공을 거둔 공산화 선전선동 전략으로서 레닌이 이름붙인 ‘쓸모있는 바보들’(Useful Idiots)을 활용하는 ‘민족통일전선’ 전술이다.

    돌이켜보면, 해방 다음해 1946년 2월 북한 단독정권(인민위원회)을 세운 평양의 소련군정은 즉시 ‘민족통일전선’을 발족시키고 남한의 ‘쓸모있는 바보들’을 포섭하여 남한 민족통일전선을 조직하였다. 그것은 좌파정당과 단체들 뿐만 아니라 우파적 정당과 단체들을 포섭하여 이름만 다른 통일전선 조직을 극대화 시킨 것, 다시 말하면 당시 남로당-북로당에 포섭된 인물들이 조직마다 숨어서 남한의 모든 정당과 단체들을 알게 모르게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1948년 4월 평양서 개최한 남북한 제정당-사회단체들의 연석회의였다.
    그동안 포섭된 지도층 인사들과 원래 공산당이었던 인물들이 앞장섰고, 거기에 대표로 나선 이들이 김구와 김규식이었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 ▲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의 주요인물,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박윤원 국회의원들(왼쪽부터).
    ▲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의 주요인물,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박윤원 국회의원들(왼쪽부터).
    ◆슈티코프의 기록--국회프락치사건은 스탈린이 결재하였다

    국회프락치사건의 발단은 2월 국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남 진도출신 ‘무소속’ 국회의원 김병회(金秉會)를 비롯한 71명의 긴급동의로 ‘남북 화평통일에 관한 결의안’을 2월7일 본회의에 상정한다. 남북한의 미-소 양국군이 철수하고 우리 민족끼리 평화통일을 이루자는 내용으로 당시 소련과 북한의 평화공세 그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국회로 달려간 이승만 대통령은 “지금 당신네들이 이 나라를 파괴하려는 것이냐”고 설득한다.
    “가뜩이나 미군이 다 철수하고 7천여명 밖에 남지 않았는데 이들까지 철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 미군이 얼마라도 남아있어야 소련 군사가 내려 올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결의안은 비공개 회의에서 표결결과 찬성 47표, 반대 95표로 부결되었다.

    수사당국에 비상이 걸렸다. 3월 중순부터 경찰 정보를 받아 국회 내외를 추적하던 검찰은  5월18일 전북 익산 출신 이문원(李文源) 의원과 강원도 정선의 최태규(崔泰奎) 의원, 경남 고성 이구수(李龜洙) 의원을 검거하였고, 다음달 6월20일 국회가 폐회하자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하여 노일환, 김옥주, 박윤원, 강욱중, 황윤호 의원등 7명을 연행한다.

    ★38선에서 여간첩 정재한 검거, 남로당 비밀 통신문 발견

    이때 서울지방검찰청이 작성한 공식수시기록은 다음과 같다.
    「반민특위가 발족되어 반민족행위자들의 검거가 본격화하자 박헌영은 남로당의 도상익(都相益)이 국회 담당 공작책이 되어 국회의원들을 포섭하여, 남로당에 비밀 입당시킨 다음 국회활동을 통하여 합법투쟁을 전개하도록 지령했다. 도상익은 언론인 출신 인텔리 남로당원 이삼혁(李三赫)에게 비밀공작조직을 평성케 하여 국회 소장파 의원들을 상대로 포섭공작을 벌였다. 2월 초순 무렵 노일환을 포섭한 이삼혁은 다시 변호사 오관(吳寬)을 통하여 하사복이란 가명으로 이문원을 포섭, 이들 두 의원을 남로당에 입당시켰다. 이삼혁은 국회부의장 김약수(金若水)를 포함한 10여명의 국회의원들을 포섭했고, 이들의 국회교란책동은 더욱 가열해졌다. 
    3월 중순 무렵, 서울시 경찰국으로부터 이들의 동태를 보고받은 검찰은 정보부의 부장검사 장재갑(張在甲), 검사 오제도(吳制道), 경찰국 사찰과장 최운하(崔雲霞)를 중심으로 특별사찰반을 편성하여 은밀히 내사활동을 시작했다. 검찰은 자수한 남로당 전우겸(全禹謙)의 진술을 받아 이문원, 이구수 등의 범법 내용 일부를 밝혀내고 이문원, 이구수, 최태규를 구속하였다...」 (서울지방검찰청 [서울지방검찰사] 1985. 손세일, 앞의 책)

    일본 유학파 김약수는 해방후 김성수가 조직한 한국민주당 창당에 조직부장을 맡았다가 탈당,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 설립에 동참하여 미군정의 좌우합작에 앞장 섰다. 김원봉과 어릴 때 친구로 사회주의에 참여, 가명을 지을 때 김원봉은 약산(若山), 자신은 약수(若水)로 선택하였다고 한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 중국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해방후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도 맡았다. 건국후 제헌의원이 되어 소장파 의원들의 대부격으로 활동하였고, 국회프락치로 암약, 투옥되었다가 6.25때 공산군이 석방시켜 그길로 월북하여 김원봉과 만나 북한정치인이 되었다.

    국회프락치사건의 결정적 증거물이 발견되었다. 
    국회의원들의 행적을 쫓던 6월10일, 개성(開城)에서 38선을 넘던 광주리장사 여인을 잡았는데 알고 보니 남로당 특수공작원이었다. 정재한(鄭在漢)이란 여인은 박헌영의 비서와 도피하여 밀입북하려다 검문에 걸린 것, 몸수색 결과 음부에 숨긴 비밀보고문이 발각되었다. 암호해독결과 남쪽 남로당 특수조직부에서 북한의 박헌영에게 보내는 ‘국회공작보고서’임이 드러났다.
    정재한의 집을 압수수색한 검찰은 국회공작에 관한 지령문 등 다수의 자료를 확보, 그 실태와 공작내용을 파악하여 추가 검거를 진행, 김약수 등 13명을 구속기소하게 된다.

    검찰총장 권승렬이 국회에 보고한 지령문 내용은 이러하다.
    1) 외국군을 완전철수 시킬 것. 2) 남북의 정치범을 석방할 것. 3)남북 정당사회단체로써 남북정치회의를 구성할 것. 4) 남북 정치회의는 일반, 평등, 직접, 비밀의 4대원칙에 입각한 선거로써 최고입법회의를 구성할 것. 5) 최고입법기관은 헌법을 제정하고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6)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할 것. 7) 조국방위군을 재편성할 것 등이었다. ([제헌국회속기록-5] 1949.5.23.) 이 지령문 내용은 국회의원들의 진술과 부분적으로 일치하였다.
  • ▲ 김약수와 김원봉(오른쪽)은 어릴때 친구,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한 김약수는 국회프락치로 투옥되었다가 6.25때 북한군이 석방시키자 월북, 김원봉과 함께 북한정권에 참여했다.
    ▲ 김약수와 김원봉(오른쪽)은 어릴때 친구,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한 김약수는 국회프락치로 투옥되었다가 6.25때 북한군이 석방시키자 월북, 김원봉과 함께 북한정권에 참여했다.
    ★이승만의 극비편지 “한독당과 공산당이 연결되어있다”

    이 무렵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의 올리버에게 보낸 ‘기밀’ 편지 내용이 흥미롭다. 
    “...국회 안의 몇몇 친공분자와 반미분자들은 한편으로 한국독립당에, 다른 한편으로는 공산당 조직 남로당에 연결되어있다. 이들은 정부의 위치를 약화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별러왔다. 하지만 그들은 성공 못할 것이다. 전국민이 정부를 굳게 뒤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박헌영의 비서와 여성이 붙잡혔고 비밀통신문을 숨기고 있었다. 명백한 증거가 드러났으니 철저한 조사가 진행중이므로 다른 국회의원들이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신익희 국회의장은 나더러 이들 공산주의자들을 모두 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리버, 앞의 책)

    “한독당과 공산당이 연결되어있다”는 이승만의 말은 국회프락치사건을 파헤친 검찰의 수사보고를 받은 것이었다. 이 무렵 김구는 과연 어떤 행보를 취하고 있었는지 따라가 보자.

    ★김구, 미-소 양군철수 주장...“민주주의민족혁명으로 남북평화통일”

    ▷4월19일=지난해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1주년을 맞은 김구는 ‘북행1주년을 맞이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1차 남북협상은 시작에 불과하다. 남북의 통일을 위한 협상은 반드시 있을 것이다. 미-소 양군 철퇴는 우리의 주장이 부분적으로 실현되어가는 것이다.”([서울신문]1949.4.20.일자)
    ▷4월20일=군산의 ‘건국실천원’ 개강식에 참석, 기자 회견. “화평통일을 위하여 조직적 국민운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양군이 철퇴함으로써 급속히 추진시켜야한다”
    ▷5월9일=한동당 창설 19주년 기념식. “본당은 앞으로 반봉건적 반제국주의적인 부르주아식 민주주의 민족혁명의 큰 기치 하에서 평화적 방법으로써 모든 민족 역량을 통일 단결시킬 결심을 갖고 나갈 것이다. 무엇보다 선결조건은 강력한 민주주의민족혁명세력이 조성됨으로써 조국평화통일의 주도적 지위를 확보하고 고수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1949.5.10.일자)
    5월21일=임시국회의 개회에 맞춰 이례적으로 국회의원들을 편달하는 담화 발표. 
    “국회의원들은 한편의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겠다는 이유하에서 선거에 출마하였다. 선거민에게 굳게 약속한 것들을 아직까지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심각한 반성과 새로운 투쟁이 없으면 민중의 기대를 만족케 할 길이 없을 것이며...” ([자유신문] 1949.5.22.일자)
    ▷5월31일=김구, 유엔한국위원단과 덕수궁에서 회담후 기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발표하다.
    남북민간지도자 혹은 정당 단체대표의 남북회담 개최. 서울에서 회담할 것. 통일방안에 초보적합의가 되면 남북협상 추진 노력. 유엔 한위는 적극 협조할 것. ([조선일보]1949.6.1.일자)
    이와같이 김구는 1년전 평양 연석회의 때 서명했던 ‘김일성의 남북공동성명‘ 노선에 따른 평화통일 노력을 계속하고 있었다. 특히 미-소 양군 철수 촉구와 함께 ’반봉건적 반제국주의적 부르주아식 민주주의민족혁명‘의 깃발을 강조한 대목이 스탈린의 ’민족통일전선 민주화혁명론‘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다. 김구 자신이 쓴 표현일까? 아니면 누가 김구의 담화문이나 기념사를 써주고 있었던가. 국회프락치사건으로 국회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는데도 거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 ▲ 전국 남로당 조직간부들을 200여명 검거하고 국회프락치사건을 전담하였던 서울시 경찰국 김호익 경감은 대낮 경찰서에서 남로당원에 살해되었다. 조선일보 1949.8.14일자 사회면 기사. ⓒ조선DB
    ▲ 전국 남로당 조직간부들을 200여명 검거하고 국회프락치사건을 전담하였던 서울시 경찰국 김호익 경감은 대낮 경찰서에서 남로당원에 살해되었다. 조선일보 1949.8.14일자 사회면 기사. ⓒ조선DB
    ★이승만, “공산당과 섞여 살수 없다”...’자유-반공 세계투쟁‘ 국제정세관 가르치다

    이승만은 국회 프락치사건에 대하여 단호한 ’반공주의 세계관‘을 천명한다.
    “지금 국내에는 공산당들이 각계에 침입하고 있어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 생명과 재산은 물론, 우리의 자유도 박탁당하고 노예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는 현상이니, 지금 국군, 경찰, 정부를 막론하고 범법자가 있으면 처단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9.5.21.일자)
    “세계가 두 종류의 사상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두 진영이 대립하여 피생아사(彼生我死:네가 살면 내가 죽음)의 형세로 투쟁하고 있는 중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믿었든지 저희 나라도 저희 생명도 다 바치고 공산화해서 남의 속국과 노예가 되기를 감심(甘心)하는 분자들이므로, 우리는 우리나라와 우리 가정과 또 우리 자유를 보장해서 다 같이 잘사는 목적으로 우리의 목숨이라도 희생해서 민주주의를 세우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으면 우리 자손까지도 자유로 잘 살 수 있겠지만 공산주의에 정복을 당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몇 십년동안은 이러한 희망조차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다 적색화(赤色化) 할지라도 우리로는 꿋꿋이 싸워서 죽어도 자유민으로 죽고 살아도 자유민으로 살겠다는 결심뿐인 것을 세계에 표명해야 우리가 죽어도 산 백성일 것이요, 살아도 영광스러운 생명이 될 것입니다.”
    5월19일 국회 개원식에서 행한 이승만의 이 연설은 평생 ’자유민주주의‘ 신념과 노선의 실체를 남김없이 보여주며 자유수호가 곧 ’생명수호‘임을 국민들에게 가르치는 대통령의 결사적인 생명철학 선언문이었다.
    “언제든지 결국은 민주주의가 승리를 차지하고 말 것이니, 이것을 알고 믿는 우리로서는 조금도 주저나 의뢰하지 말고 공산분자들과 섞여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맹세해야 할 것입니다....(중략)....제주도와 여수순천 반란사건 뒤에 우리 민족이 그것을 확실히 깨달아 관민과 군경이 합해서 반란분자들은 지하공작으로 발붙일 곳이 없이 하려는 결심이니, 정부내 국회내부터 이 결심을 확실히 각오하고 이것을 지켜나가지 못하는 분이 있다면 다시 경성(警醒)해야 될 것입니다” ([제헌국회속기록-5] 1949.5.21.)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지 못하는 분’은 프락치 국회의원들만이 아니라 남북협상 평화통일론을 계속 주장하는 김구 일파를 겨냥한 말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국회는 이승만의 피를 토하는 자유철학을 이해하기는커녕, 다음날 21일 전남 무안의 김용현(金用鉉) 등 소장파 의원들의 긴급동의로 ‘구속 의원 석방 결의안’을 제출하였으나 부결되었고, 노일환 의원 등이 낸 ‘국무총리와 각부장관 총사퇴 결의안’은 가결되었다. ([국회속기록-5] 1949.6.2.)

    그뿐이랴. 국회프락치사건 수사에 앞장섰던 서울시 경찰국 수사과 중앙분실장 김호익(金昊翊,31세) 경감은 8월12일 대낮에 암살된다. 남로당 서울총책 김삼룡(金三龍)의 하수인 이용운이 가짜 명함으로 정문을 통과하여 별관에서 근무중인 김 경감에게 권총7발을 쏘았다. 김호익은 함경남도 출신으로 그동안 남로당 간부급 200여명을 검거하고 법조계 침투 남로당 법조인들도 숙청하였고 국회프락치사건도 해결함으로써 남로당의 표적이 되었는데, 그 뛰어난 공로로 총경 승진 발령을 받은 그날 쓰러지고 말았다. (김호익 [국제간첩사건: 김호익 수사일기] 삼팔사, 1949)

    ★슈티코프의 극비보고서...북한 노동당이 남조선 국회의원들 포섭

    국회프락치사건의 진실은 44년이 지난 1993년에야 그 모습이 드러난다.
    소련이 패망하고 옐친 정권이 한국의 김영삼 정부에 제공한 구소련의 극비 군사외교문서들 속에서 1949년의 기밀보고서가 나타났다. 북한정권 출범후 평양주재 소련대사로 부임한 슈티코프(Terrentii F. Shytykov)가 모스크바 스탈린에게 보낸 문서 ‘남북조선의 정치경제 상황 개요 1949.9.15.’가 그것이다. 
    「노동당은 남조선의 국회의원들 중 일부를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사업을 조직하였습니다.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이들 국회의원들은 국회 안에서 남조선에서 시행되는 미국 정책 및 남조선 정부 당국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요구 사랑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남조선에서의 미군 철수를 내용으로 하는 62명의 국회의원들이 작성한 청원서, 정부 불신임 결의 제의, 모든 장관들의 사임 요구 등이 바로 위와 같은 목적에 따라 실행된 예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국회 다수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또한 법률안 심의시 이들은 법률안의 반민족적 성격을 폭로하고 그 내용을 수정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현수-기광서 역 [한국전쟁 문서와 자료, 1950~1953] 국사편찬위원회, 2006)
    스탈린이 읽고 결재한 이 보고서에는 대한민국 건국후의 남조선로동당(남로당)이 당원들의 집단 탈퇴로 세력이 약화되었음도 적혀있다. 
  • ▲ 김일성의 직속 공작원 성시백의 남한 암약상을 특집기사로 대서특필한 북한 '로동신문'1997.5.26일자.
    ▲ 김일성의 직속 공작원 성시백의 남한 암약상을 특집기사로 대서특필한 북한 '로동신문'1997.5.26일자.
    ★김일성-박헌영의 ‘충성 경쟁’...거물 공작원 성시백의 맹활약

    여기서 슈티코프가 말한 노동당은 김일성의 북노당이다. 그는 김일성을 북한 공산화 책임자로 만들어 북한 정권을 수립하였고 동시에 김일성을 지휘하여 남한 공산화를 위한 폭력과 선전술을 진행한 총감독이다. 이때 박헌영은 김일성의 지시를 받아서 김일성보다 더 열성적인 활약을 보임으로써 슈티코프에게 ‘충성’을 바쳐 존재감을 높이려 발버둥을 쳤다. 
    그리하여 국회프락치사건도 다른 사건처럼 김일성과 박헌영의 ‘충성경쟁’이 얽히고 설켰다.
    이것은 서울지방검찰청 수사발표에는 나오지 않는 상황, 검찰이 미처 몰랐던 내막이다. 
    다시 말하면, 국회프락치들은 박헌영의 프락치와 김일성의 프락치가 섞여있었거나 국회의원 한사람이 양쪽 공작을 다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즉, 김일성이 1946년 하반기 남조선 지하에 고정 배치한 직속공작원 성시백이다. 김일성은 당시 성시백을 불러 직접 명령한다. “당신은 북로당 남반부 정치위원회 위원장이오” 
    이에 따라 남조선의 북한정권대표가 된 성시백은 서울에 아지트를 설치하고 김일성과 직접 통신하면서 맹활약을 펼친다.
    6.25침략직전 체포될 때까지 암약한 성시백의 눈부신 공작활동은 뒷날 김일성이 죽은 뒤 김정일시대 1997년 북한 노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이 특집기사로 대서특필한다.
    「성시백 동지는 1948년부터 ‘국회’ 공작에 힘을 넣었다. 괴뢰 ‘국회’안네는 각양각색의 분파들이 있었다. 성시백 동지는 이러한 분파와 그들간의 싸움을 이용하여 우선 ‘국회’안에 민족적 감정과 반미의식을 가지고 있는 ‘국회의원’들로 진지를 구축하고 여기에 다른 ‘국회의원’들까지 포섭하여 반미 반괴뢰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공작을 대담하게 벌여나갔다. 그리하여 ‘국회 부의장’과 수십명의 ‘국회의원’들을 쟁취 포섭하는 데 성공한 성시백 동지는 그들로 하여금 ‘국회’ 연단에서 ‘외군철퇴 요청안’과 ‘남북평화통일안’을 발표케 함으로써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을 수세와 궁지로 몰아넣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필승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로동신문] 1997.5.26.일자)
    김일성의 하수인 거물공작원 성시백이 6.25침략준비를 위해 벌인 활약은 국회프락치사건 말고도 열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눈부시다. 모두 남한의 “쓸모있는 바보들‘이 엮인 비극이었다.

    ★스탈린의 목표 미군의 완전철수가 끝났다. 7만명이 넘던 주한미군은 1949년 6월말까지 고문관 500명만 남기고 한국을 떠나고 말았다. 미군을 붙잡으려 몸부림치던 이승만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