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제3차 유엔총회가 열린 파리의 빨레 드 샤요(Palais de Chaillot) 궁전, 에펠탑에서 내려다 본 오늘의 모습이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개최를 위해 지었다.
    ▲ 제3차 유엔총회가 열린 파리의 빨레 드 샤요(Palais de Chaillot) 궁전, 에펠탑에서 내려다 본 오늘의 모습이다.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 개최를 위해 지었다.
    유엔 창설이래 세 번째 총회는 1948년 9월21일 파리에서 열렸다. 이 총회에 이승만 대통령은 신생 대한민국의 운명을 걸었다. 유엔의 국가 승인, 이것이 독립건국의 최종 절차이다. 유엔 총회의 승인을 받으려면 세계를 지배하는 주요 블록 지도국들을 공략하지 않으면 안된다.
    당시 유엔 가입국은 58개국, 가장 큰 세력은 미국 중심의 범아메리카회의(Pan American Conference) 20개국이었고 영국연방 8개국, 아랍 종족 6개국, 그리고 소련 공산 위성국 6개국 등이다. 어떻게 한국지지표를 얻어낼 것인가.

    ▶이승만은 두 갈래 사절단을 파견한다. 유엔총회 담당 대표단과 우방 순회 특별사절단이다. 
    유엔총회 대표단 단장에 이승만은 독실한 가톨릭신자 장면(張勉, 1899~1966)을 임명, 구미의 광범한 가톨릭국가를 의식한 ‘히든카드’를 내세웠다, 그때 사람들은 놀랐다. 무명의 동성중학교 교장이 외무장관 장택상이나 한민당 실력자 조병옥 같은 인물을 제치고, 일약 세계외교무대의 수장이 되었던 것이다. 뉴욕 가톨릭계 맨해튼 대학을 졸업한 장면은 미군정의 버치 중위나 브라운 장군등과 친밀하고 하지 사령관과도 가까웠다. 장면은 단장이 되자 가톨릭계를 접촉하여 “파리에서 힘든 일이 있으면 유럽의 추기경과 주교들이 도와 줄 것”이라는 약속을 미리 받기도 하였다. (박실 [벼랑끝 외교의 승리] 청미디어, 2010)
    미국 정부비용으로 파견되는 만큼 이승만은 미군정의 노블(Harold J. Noble) 박사를 대표단 고문으로 임명하고 자신의 정치홍보고문 올리버(Robert Oliver) 교수도 포함시켰다. 

    대통령 특별사절단 정사(正使)는 조병옥이다. 뉴욕 컬럼비아 대학 유학파 조병옥은 미군정 경찰총수로 3년을 지내고 한국민주당 주역이 된 정치인으로 약점은 ‘과도한 주색’이었다고 한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이승만의 ‘제자’인 조병옥은 미국에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도우며 ‘청춘의 대망’을 배웠고, 이승만은 아끼는 제자의 ‘과음’이 늘 걱정이었다. 그래서 정일형(鄭一亨)을 대표단에 넣으며 이승만이 말했다. “닥터 정을 파리에 보내는 이유를 알겠지? 조 박사 술이 과하니 돌봐주라고...” (정일형 [오직 한길로] 신진문화사, 1970)

    두 그룹은 9월9일 오전에 같은 비행기로 김포공항을 출발하였다. 일본 하네다에 도착한 일행은 갈라진다. 유엔대표단 4명은 미국으로 직행하고 특사단은 도쿄에 머물다가 각국 순방 길에 오른다. 그들이 다시 합류한 것은 파리 샤요(Palais de Chaillot) 호텔이다. 빨레 드 샤요는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지은 거대한 궁전이다. 
    10월17일 동남아와 카나다, 영국을 순방한 조병옥 일행 4명이 도착하였고, 미국서 YMCA대회에 참석했던 모윤숙도 이승만의 전보를 받고 파리로 달려갔다. 유엔 대표단 정사(正使) 장면, 부사(副使) 장기영(張基永), 법률고문 전규홍(全奎泓), 수행원 김활란(金㓉蘭), 모윤숙, 그리고 특사 조병옥, 정일형, 김우평(金佑坪)과 비서 김준구(金俊九) 등 남녀 9명이 그날부터 대한민국 독립국가 승인획득이라는 역사적인 외교전에 돌입한다. 
  • ▲ 파리 유엔총회 옵서버 석에서  회의를 지켜보는 한국대표단.
    ▲ 파리 유엔총회 옵서버 석에서 회의를 지켜보는 한국대표단.
    ★김구, 유엔에 편지 “대한민국 승인하지 말고 임시정부 승인해달라”

    이때, 김구는 유엔을 향하여 “대한민국을 승인하지 말라”는 로비를 벌인다.
    김구의 통일독립촉진회(통촉)는 9월27일 경교장에서 회의를 열고 유엔 사무총장 리(Trygve Lie)에게 ‘남북통일정부 수립방안’을 제시하는 편지를 김구-김규식 명의로 보내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중립을 지키는’ 통촉을 유엔총회에 참석시켜달라고 요구한다. 
    “유엔은 얼마 지탱 못할 이 정부를 승인하지 말고 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는 김구의 ‘임정 집착’은 변함이 없었고 갈수록 굳어졌다. 
    또한 김구 명의로 유엔총회에 보내는 메시지를 만들어 서울의 유엔한국위원단에게 전하였다. 그 내용은, 미-소 양군 즉시 철수, 남북지도자회의 소집, 남북한에 새로운 총선거 실시, 등이었다. ([조선일보] 1948.9.30.일자)

    소련은 9월21일 유엔총회 개막에 맞춰 미-소 철군 요구를 본격화하였다. “북한에서 소련군이 철퇴한다. 미국도 남한에서 즉시 철수하라” 이에 발맞춰 북한은 남북한총선거를 들고 나왔다.
    이보다 일주일 늦게 나온 김구의 메시지는 소련과 북한의 주장에 편승한 꼴이 되었고, 양국철군과 남북총선 등 소련의 주장이나 북한의 선전문과 문구까지 같은 것이었다. 4월 평양의 남북연석회의 참가후 김구의 측근들이 김일성 직속 공작원 성시백과 더욱 밀착된 활동을 벌였음은 뒷날 드러나게 된다.

    ★이승만 격분...“남한정부로 통일...소련군 즉시 물러가고 미군은 철수 말라”

    두 김씨의 반정부 활동에 분노한 이승만 대통령은 대변인 김동성과 외무장관 장택상을 시켜 단호한 경고를 발한 뒤, 10월8일 중앙청 제1회의실서 내외기자 회견을 열고 직접 경고에 나섰다. 
    “양김씨의 유엔 송한(편지)에 대해서는 별도 방안을 세운 것이 없다.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로 정부를 세운 것은 인구비례로 보아 남북통일정부로 공포했다. 공산당에서는 북한의 정부를 주장하나 남한 정부를 통일정부로 믿어야 한다. 남한정부를 반대하고 북한정부를 찬성하는 자는 절대로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하는 것에 대하여는 “소련군은 무조건하고 즉시 철퇴하고 미군은 남한의 치안유지상 지장이 없을 때까지 주둔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남북분단은 우리가 행한 것이 아니요, 미-소 양국이 행한 것이며, 그 책임은 미국에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고 철수해야 할 것이다. 북에는 20만의 공산군이 조직되어 있는데 남한에선 그동안 미군이 우리 군대조직을 허가하지 않은 관계상 아무 준비가 없으므로 치안을 유지할 상당한 국방군이 조직된 후에야 철수하라는 것이니 미국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1948.10.9.일자)
  • ▲ 한복차림의 김활란과 미국 덜레스의 악수. (사진은 1950년 3.1절 기념식때)
    ▲ 한복차림의 김활란과 미국 덜레스의 악수. (사진은 1950년 3.1절 기념식때)
    ◆샤요 궁전의 환호...유엔 “대한민국이 유일합법정부“ 결의

    건국 한달 만에 유엔총회 외교에 나선 한국대표들은 초라했지만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 입국 때부터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바로 여권 때문이다. 당시 외무부가 여권규정도 마련하지 못한 때인지라 최초의 대한민국 여권은 희한한 물건이었다.
    가로 세로 50㎝ 가량의 한지에 붓으로 ‘대한민국 여행권’이라 쓴 외교관 여권은 몇겹으로 접어야 했다. 이를 받아든 외국 출입국 관리는 ”이런 여권은 평생 처음 본다“며 놀란 듯 호기심의 미소를 날리며 ”당신들 여권을 모두 팔라“고 했다. 진기한 물건을 사겠다는 말이다.  (박실 [벼랑끝 외교의 승리] 청미디어, 2010).
    여권 뿐이랴. 아마추어 외교 대표단의 행색은 공항의 외국인들에게 관심의 표적이었다.
    이런 에피소드를 남기며 최초의 국제외교무대 빨레 드 샤요 호텔에 모인 9명의 대표단은 각국 대표들을 ‘각개전투’로 공략하는 전술을 짠 뒤, 대상자들을 찾아 나섰다.

    장면 단장은 즉시 유엔 사무국과 협의하여 각종 회의에 옵서버로 참석할 수 있는 절차부터 해결하였다. 이미 유엔은 한국의 5.10총선때 53만8천달러의 비용을 부담하여 탄생시킨 나라인지라 옵서버 참여는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이자 박사인 장면의 방을 찾는 사람들은 유럽의 가톨릭계 인사들이나 신부, 수녀들이 많았다.
    ”어쩜, 정치하는 분이 이상도 해라. 웬 신부들과 수녀들을 그렇게 끌어들일까“ 모윤숙은 그 내막을 짐작하면서도 김활란과 소근거렸다. (모윤숙 ‘완전한 신앙의 인간’ [장면 회고록] 운석기념회, 1967).
    모윤숙과 김활란은 화려한 한복을 맵시있게 차려입고 뛰어다녔고. 외국 대표들은 그런 모습에 더 끌렸다고 한다. 
    남자 대표들은 평생 처음 연미복에 실크해트(silk hat)를 쓰고 리무진 자동차로 프랑스 대통령 관저에 찾아가고, 틈틈이 다과회를 베풀며 나이트 클럽에 초대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하였다.
    ”한 마디로 각국 대표들의 숙소를 돌아다니며 로비하는데 지리도 모르고 우리 공관도 없으니 여간 힘들지 않았어요. 그냥 파리의 거리를 헤맨다고나 할까, 이 사람 저 사람 오페라 좌(座)로 데려가다 보니까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만도 열댓 번이나 보게 되었답니다.“ (모윤숙, 앞의 책. 박실, 앞의 책).

    한국 대표들은 각국들에 본의아니게 즉흥적인 ‘공약’도 남발할 수 밖에 없었다. 쿠바 대표는 ”한국을 지지할테니 쿠바 설탕을 많이 사라“고 졸랐고 김활란 정일형은 ‘설탕수입 각서’에 서명까지 해야했다.
    소련대표 비신스키는 하늘색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입은 모윤숙에게 악수를 청하고 ”북한 여성과 같다“면서 자주빛 옷고름이 ”아주 예쁜 리본“이라 칭찬을 늘어놓으며 자신의 연설을 평해달라고 청했다. 모윤숙은 ”나는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긴 것은 싫다“며 비신스키의 필리버스터를 비꼬아 주었다고 한다. 

    ★소련, 한국문제 상정 지연전술...이승만, 유엔에 지급전보

    한국문제 토의는 개막 두달이 지나도록 자꾸 뒤로 미뤄지고 있었다. 
    크렘린 외무상을 지낸 소련의 유엔 대표 비신스키(Andrei Y. Vyshinsky, 1883~1954)는 공산주의 이론가이자 변호사, 한국문제를 다음 총회로 넘기자고 지연전술을 썼다. 마이크를 잡으면 몇 시간이고 장광설을 늘어놓는 필리버스터(filibuster: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 전문가 같았다. 

    김활란은 12윌1일 밤, 이승만에게 지급전보를 쳤다. 
    ”시간의 긴박성에 비추어 유엔 정치위원회는 한국문제를 명년 1월 말까지 연기할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는 현재 개회중의 유엔총회가 폐회되기 전에 전보로 즉시 상정을 요청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서울신문] 1948.12.4.일자)

    이승만은 즉각 파리 유엔총회에 한국문제 조속상정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다.
    ”어찌해서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지금 결정 못한다는 것인가. 미국이나 한국은 유엔의 결의안을 철저히 준행하여 성공된 것임을 세계가 다 아는 바이며, 유엔은 지금 이것을 고칠 수도 없고 또 물릴 수도 없는 것이다...(중략)...우리가 민주정권으로 계속 싸우는 것을 원하는가, 공산테러에 양보하기를 원하는가. 현재 한국 도처에서 살인방화(여순반란)로 우리를 공포에 몰아넣고 있는 것을 그분들은 모르는가? 조속히 한국문제를 결정해서 자유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한국인들을 권장시키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공산당은 어디서든지 공산화 공작에 시간을 요구하는 법, 유엔이 그들에게 시간을 줄 이유가 무엇인가. 간절히 호소하노니 자유세계 우방들이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와서 한국민주주의를 지킬수 있게 해주기 바란다.“ ([서울신문]1948.12.4.일자).

    그리하여 가까스로 우리 대표들은 미국 덜레스, 필리핀 로물로, 중국 후스쩌(胡世澤)등 이승만 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인사들의 도움에 힘입어, 한국문제를 유엔 정치위원회에 상정하는데 성공한다. 이 소식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의 자유민주 국가들이 격려와 원조를 계속해달라고 담화를 발표하였다.

    12월 6일, 정치위가 열리자 비신스키는 남북한 대표의 동시참가를 요구하고 나왔다. 
    북한 대표 박헌영, 홍명희, 박정애 등 남녀 20여명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도 프라하에 머물며 프랑스 입국을 신청하고 무한정 대기 중이었다. 유엔총회가 이들의 참가를 거부하고 프랑스가 비자를 발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때 정치위원회에 두 가지 동의가 나왔다. 
    체코 대표의 ‘북한대표 초청 토의참가’ 동의안과, 중국 대표의 ‘의장 직권으로 대한민국 정부대표만 토의에 참가시키자‘는 동의안이다. 표결 결과, 체코 안은 6:34로 부결, 중국 안이 39:6으로 가결되었다.
  • ▲ 대통령 특사 조병옥(왼쪽)과 가톨릭 외교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얻어낸 장면과, 영연방을 순회하며 인도 네루 수상을 설득하는 등 큰 공을 세운 대통령특사 조병옥(왼쪽).
    ▲ 대통령 특사 조병옥(왼쪽)과 가톨릭 외교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얻어낸 장면과, 영연방을 순회하며 인도 네루 수상을 설득하는 등 큰 공을 세운 대통령특사 조병옥(왼쪽).
    ★”한국인 대다수 거주지역 지배권을 가진 합법 정부가 한반도 정부“
    드디어 정치위원회에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이 배포되었다. 미국,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공동제안한 결의안 9개항 가운데 핵심은 (2)항,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와 협의가 가능하였고, 전 한국인의 대다수가 거주하는 한국 지역에 효과적인 지배권과 통할권을 가진 합법적 정부(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과, 이 정부는 이 지역 유권자 대부분의 자유의사가 정당하게 표현된 동시에 유엔위원단에 의하여 감시된 선거에 기초를 두었으며, 그래서 이 정부만이 한국에서 유일한 정부하는 것을 선포한다」 (유엔총회 결의안 195호). 
    영어 원문을 본다.
    「2. Declares that has been estabished a lawful government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ving effective control and jurisdiction over that part of Korea
    where the Temporary Commission was able to observe and consult and in which the great majority of the people of all Korea reside; that this Government is based on elections which were valid expression of the free will of the electorate of that part of Korea and which were observed by the Temporary Commission; and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 (The Resolution 195 of the UN General Assembly in 1948)
    즉, 남한에 유엔위원단의 감시로 총선을 거쳐 수립된 정부가 한반도 전체 한국인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공인, 규정한 것이었다.

    이 결의안을 놓고 양진영은 사흘동안이나 격렬한 대결을 펼친다.
    비신스키 등 공산권 대표들은 그 특유의 판박이 필리버스터 연설을 녹음 틀 듯이 되풀이 이어가고 있었다. 
    옵서버 석에서 지켜보는 한국 대표들을 향한 비신스키는 갑자기 조병옥를 가리키며 ”저기 싱만 리(Syngman Rhee)의 도그(dog)가 앉아있다“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조병옥도 반사적으로 ”저기 스탈린의 개가 짖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소련 부외상 말리크도 조병옥을 삿대질하며 ’우리 애국자들을 체포한 반역자”라 비난했다.
    이에 맞서 미국 덜레스, 중국 유어만 대사, 필리핀의 국제적 웅변가 로물로 장군, 오스트레일리아 수석대표 플린스캇(Jim Plinscott) 등이 나서서 압도적 열변을 가하였다.

    12월7일엔 역사상 처음으로 한국대표의 유엔 연설이 진행되었다. 정치위 225차 회의에서 장면 수석대표는 유창한 영어로 대한민국 정부의 국제적 합법성 등을 강조,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튿날 8일 밤, 마침내 정치위에서 한국결의안(유엔결의안 195호)이 표결에 붙여졌다.
    역사는 대한민국 편이었다. 한국결의안이 야간에 표결에 붙여질 수 있었던 것은 비신스키 덕분이다. 광적인 방해자 비신스키는 공교롭게도 치통(齒痛)과 감기 때문에 자리에 누워 회의에서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의 치통이 우리의 운명 결정에 확실히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고 정일형은 기록을 남겼다. (정일형 [유엔의 성립과 업적] 정일형기념사업회, 2009)

    역사가 도와준 역사적 유엔결의안 195호는 찬성 41표, 기권 6표로 가결되었다.
    서울에서 소식에 접한 외무장관 장택상은 국회로 달려가 결과보고를 하며 기립박수를 유도하자 의원들도 일제히 일어나 화답하였다.([제헌국회 속기록(2)], 손세일, 앞의 책)
  • ▲ 한국문제 결의를 방해한 소련의 비신스키는 치통으로 결정적 장면에서 빠져야 했다. 오른쪽 사진은 유엔총회가 열린 파리의 빨레 드 샤요 궁전 분수.
    ▲ 한국문제 결의를 방해한 소련의 비신스키는 치통으로 결정적 장면에서 빠져야 했다. 오른쪽 사진은 유엔총회가 열린 파리의 빨레 드 샤요 궁전 분수.
    ★유엔총회 마지막 날 밤, 소련 비신스키의 치통...“대한민국 만세!“

    이 결의안이 마침내 유엔총회에 상정되었다. 
    그것도 전반기총회 폐막을 하루 앞둔 11일 저녁이다. 한국대표단은 비상이 걸렸다. 토요일 주말저녁, 식당과 휴게실을 뒤지며 대표들을 불러 모으고 퇴장하려는 대표들을 문앞에서 막아서며 성원을 시키려고 동분서주 힘든 줄도 몰랐다. 

    치통이 나았는지 비신스키가 다시 나타나 훼방을 놓았다. 결국 회의는 다음 날로 연기되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 허탈해진 한국대표단은 걱정이 태산이다. 휴일에 과연 성원이 될 수 있을까, 안되면 한국결의안은 다음해 뉴욕 레이크석세스 총회로 넘어가 재론해야 할 판이다.

    장면 박사 방에 모인 대표들이 지쳐있을 때 가톨릭 신자 장면이 입을 열었다.
    “내일 새벽3시에 성당에 가서 하느님께 기도하려는데 누구 같이 가지 않겠소?”
    장 단장의 새벽 전화를 받고 일어나 동행한 것은 모윤숙이었다.
    장면은 쌩 조셉(성 요한) 성당에 들어서자 촛불이 흔들리는 성모 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윤숙도 따랐다. 
    장면의 기도는 30분이 넘어도 끝날 줄을 모른다. 다리가 아픈 모윤숙은 고통스러웠지만 기도하며 참았다. 
    유엔총회 마지막 날에 걸린 대한민국의 운명을 두고 하느님께 은총을 간구하는 장면의 기도는 한 시간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시간도 있으니 이 근처 아베마리아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 합시다”
    “전 무릎이 아파서 도저히 따라가기 힘들겠어요” 모윤숙은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큰일을 눈 앞에 두고 그것도 못 참다니...” 장면의 위엄에 끌린 모윤숙은 결국 미사에 참례하고서야 호텔에 돌아왔다. (모윤숙, 앞의 책).

    총회 마지막 날 12월 12일 오후 3시, 일요일에다 장대비까지 쏟아지는 시간에 회의는 속개되었다. 끝까지 아슬아슬한 대한민국 독립의 길, 비신스키가 또 다시 기세 좋게 등단한다.
    “유엔은 서울에서 술에 젖어 흥청거리느라 수십만 달러만 낭비하였다” 독설을 퍼붓던 비신스키가 갑자기 목이 메는 듯, 컥컥 눈을 휘 번득거리며 팔을 휘젓더니 의자에 쓰러졌다.
    또 무슨 연극인가 조마조마하던 한국대표단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감기와 치통이 도진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표결을 도와주는 소련대표 비신스키!

    마침내 호명(呼名) 표결이 시작된다.
    약 두 시간이 흐른 오후 5시, 한국 대표단은 만세를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터트렸다.
    찬성 48대 반대 6, 기권1표(스웨덴), 유엔 총회 결의안 195호는 최종적으로 “대한민국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임을 결의하고 신생정부를 승인하는 새 역사를 썼다.

    이튿날 13일 장면 대표는 이미 이승만의 재가를 받아 가져온 유엔회원국 가입신청서를 냈다.
    이번엔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 결석하지 않고 거부권을 행사, 유엔 가입의 꿈은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소련 위성국들을 제외한 전세계 모든 국가들이 대한민국의 탄생을 지지하고 국제국가로 받아들여 환영해준 파리 유엔총회, 그것은 유엔이 세운 나라를 유엔이 승인해준 새로운 세계사의 신기록이다. 세계는 이제 대한민국을 공식승인하고 외교관을 파견하는 행렬에 줄을 선다. 
  • ▲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으로써 미국과 함께 국가의 독립과 안보장치를 튼튼히 만든 이승만. 사진은 해방직후 귀국한 이승만이 '단결'을 외치는 연설장면.
    ▲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으로써 미국과 함께 국가의 독립과 안보장치를 튼튼히 만든 이승만. 사진은 해방직후 귀국한 이승만이 '단결'을 외치는 연설장면.
    이승만 “유엔의 한국 승인은 세계사조에 새로운 세기 창조”

    이승만 대통령은 얼마나 기뻤을까. 20세때 배재학당에 들어가 처음 발견한 자유, 그 자유를 완벽히 실현한 신대륙 미국이란 자유민주공화국을 본받아 썩을대로 썩은 전제군주국을 ‘미국 같은 나라’로 만들자고 결심한 이래 50여년 만에 꿈을 실현한 ‘유엔속의 대한민국 탄생’이다.
    “한국이 유엔에서 정식 승인을 얻어 모두들 기뻐하니 나도 기쁘다.
    한가지 염려한 것은 과거 50여년간 세계정치대가들이 주장한 평화만을 위한 완화정책으로 인하 양보 때문에 일본 같은 침략국을 양성해왔으니 그에 우리나라는 희생되었다. 
    그러나 유엔총회에서 한국이 정식으로 승인된 것은 이런 평화정책을 뒤집어 전쟁을 하더라도 세계적 공의(公義)를 살려야 한다는 정의감에서 나온 것이다. 
    한국문제가 세계 공의로 집행된 것은 세계 사조(史潮)에 새로운 세기(世紀)를 창조하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공의를 국가와 국가의 실천에 옮기는 데서만이 평화가 올 것이므로, 유엔에서는 세계평화 수립을 위하여 적당한 법을 제정하여 대소국가를 막론하고 평화를 무시하는 국가는 징벌해야 할 것이다.” ([서울신문]1948.12.11.일자)

    이승만의 평화관이 담긴 이 연설은 해방후 3년간 소련의 대남공산화 폭력테러와 싸우는 반공평화주의자로서 방금 여수-순천 반란을 진압하고 국가보안법을 만들어낸 대통령의 위기감, 즉 ‘소련과 북한군의 침략 태세’를 걱정하는 긴박한 상황인식에서 유엔에 발하는 경고성 요청인 것이었다. 

    “유엔이 법을 만들어 침략자를 징벌하라”는 요구,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나 6.25침략전쟁이 터지자 유엔은 즉시 이승만의 요구에 따른 듯 유엔군을 편성, 대한민국을 구하러 달려온다.
  • ▲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호외로 찍어 배포한 조선일보. 1948.12.13일자.ⓒ조선DB
    ▲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호외로 찍어 배포한 조선일보. 1948.12.13일자.ⓒ조선DB
    ★“남북협상파는 각성하고 함께 가자” 이승만, 두 김씨에 권유

    타고난 국민계몽운동가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유엔총회의 경과와 그 의미를 해설하는 방송 연설을 진행하였다. 
    미국에게 감사하고 유엔한국위원단에게 감사하고 한국을 도와준 중국의 유어만, 필리핀의 로물로, 호주의 플린스캇 등의 활동내용을 일일이 소개하였다.

     “전국의 애국 남녀동포와 청년들의 애국성심에 감사”한다면서 공산당에 대한 경고와 두 김씨의 반(反)대한민국 활동과 남북협상을 겨냥해서도 꼼꼼히 설명한다. 
    국민들의 인식을 바로잡는 사상교육인데, 이런 연설은 구한말 만민공동회 때부터 백성들의 호응과 효과가 컸던 이승만의 특기이자 독립운동가의 사명이었다. 

    “아직도 애매한 사상으로 남의 선동에 빠져서 공산당이 이후에 성공하리라는 관찰로, 국가독립은 어찌되었든지 공산당에 붙어서라도 잘 살 수 있으면 그만이라는 주의로 파괴운동을 응원해서 공산분자와 불충분자라는 지목을 들어가며 남의 노예가 되기를 달게 여기는 이들이 지금도 있다면, 이들은 이제 크게 각성해서 어리석음을 깨닫고 귀화하여 우리 국권을 공고히 세우며 다 같이 자유복락을 누리기로 결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은 우리 3천리 강산에서는 자유로 지낼수 없음을 깨닫고 하루바삐 국경을 떠나 어디로 가든지 자기들이 잘 살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8.12.14.일자)

    남북협상파의 주역 두 김씨에 대하여 이승만은 포용과 단결을 호소하였다.
    “기나 긴 3년 동안에 우리 앞길이 밝아보이지 않을 때에 혹 중간노선으로 혹 우익진영으로나 다소간 우리와 대치되는 주의를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남북통일을 달성한다든지, 국권회복을 꾀한다든지 여러모로 도모하던 정당이나 단체나 혹 개인이 있다면 지금부터 우리의 나가는 궤도를 다같이 따라서 새로 설립된 민주정부를 함께 지지하며 같이 협조하여 전민족의 사상을 통일시켜서 우방들과 협력하여 장벽을 헐어내고 한덩어리가 되어서 화복안위(禍福安危)를 다 같이 만드는 것이 우리민족이 바라는 바요, 또 애국자들의 직책일 것이다”
    이승만은 북한 동포들에게도 “왜적 밑에서 결심했듯이 준비하였다가 시기가 오면 악수병진(握手倂進)하여 남북통일 성취를 도모하자”고 강조하였다.
  • ▲ 김구와 김규식(오른쪽). 두 김씨는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달랐다
    ▲ 김구와 김규식(오른쪽). 두 김씨는 '우리는 서로 생각이 달랐다"고 기자들에게 고백하였다.
    ★김규식 “나는 백범과 생각이 달랐다”...김구 “남북 동족끼리 통일”

    유엔 총회에 편지를 보내 “대한민국 승인 말고 임시정부를 승인하라” 요구했던 김구는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 대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김규식이 침묵을 깬 것은 14일 기자회견에서다. 이제 중도좌파를 표방한 노선의 변화가 없겠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뜻밖의 말을 쏟아냈다.
    “그것은 민족자주연맹의 결의로 각 개인의 의사에 맡기기로 되었으니까 별반 변화가 없다. 
    본래 나의 노성이라는 것은 김구 선생과는 달랐던 것이다. 나는 본래부터 대한민국 정부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규식 개인이 부인한다고 될 것이 안되고 내가 시인한다고 안될 것이 된다는 법은 없다. 나는 다만 이제까지 (이승만과) 불합작했다는 것뿐이다.”

    기자가 또 물었다. 유엔이 북한을 비적(匪賊)으로 규정했는데 앞으로 대북관계는?
    “유엔은 유엔으로서 북한을 부정하였으며, 나는 나대로 북한을 대하는 태도가 있을 것이다. 본래 남북협상이라는 것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해본 것과 같이, 만일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또 그들과 만날지 모른다.” ([조선일보] 1948.12.15.일자)

    김구는 16일 간단한 기자회견에서 심경을 밝혔다.
    “나는 앞으로도 변함없이 민중의 한사람으로서 외군의 조속한 철퇴를 주장하며, 동족끼리 자주적 민족통일독립의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분투노력할 생각이다.”
    유엔이 절대다수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였는데 앞으로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주장할 것인가를 묻는 기자에게 김구가 말한다.
    “세계 각국이 현정부를 승인하였다고 하더라도 현재 분열되고 있는만큼 임정의 법통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구의 ‘임정 집착’은 유엔의 힘을 눈앞에 보면서도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 몰랐다.
  • ▲ 유엔총회의 대한민국 승인의 기쁨을 함께 한 한국대표단. 앞줄 오른쪽부터 김활란, 장면, 조병옥, 모윤숙. 뒷줄 왼쪽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준구.ⓒ정일형-이태영기념사업회 제공
    ▲ 유엔총회의 대한민국 승인의 기쁨을 함께 한 한국대표단. 앞줄 오른쪽부터 김활란, 장면, 조병옥, 모윤숙. 뒷줄 왼쪽부터 정일형, 김우평, 장기영. 김준구.ⓒ정일형-이태영기념사업회 제공
    ★“미국이 우리를 해방시켰다...유엔의 법적 승인이 우리를 보호할 것”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의 전국 방방곡곡에서 15일 ‘유엔 승인’ 경축대회가 열렸다.
    공보처가 만들어 발표한 경축표어들은 당시 분위기를 잘 말해준다.
    -당당한 대한민국! 빛나는 유엔 승인!
    -유엔에 감사하라! 대한민국 정부 만만세!
    -사설단체 인공국은 즉시 해산하라!
    -인조견은 인공국, 본격은 대한민국!
    -너도나도 무장하고 공산당 타도하자!
    -분쇄하자 38선! 타도하자 인공국!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경축대회장은 쌀쌀한 겨울날씨에도 시작 전부터 인파로 넘쳐났다. 열흘전에 임명된 서울시장 윤보선(尹潽善, 1897~1990)의 개회사에 이어 이승만이 연단에 올랐다.
    “오늘은 우리 3천만의 경축의 날이다. 우리나라를 승인한 유엔에 참가한 제국에 감사하는 동시에,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더욱 깊이 감사치 아니할 수 없다. 과거 40년 동안 우리민족을 지배하던 왜적으로부터 귀중한 피를 흘려 우리민족을 해방시켜준 것은 미국이며 미국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해방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 미국은 이 땅을 조금도 차지하려 않고 도리어 정권을 우리에게 이양하였으며 우리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게 됨에 따라 이 땅으로부터 물러가려 하였으나 우리의 요청으로 우리 국가가 튼튼하게 될 때까지 우리를 돕기 위하여 좀더 머물러 있게 되었다. 즉 우리는 금년 5월10일 총선거로 우리 정부를 세워 이번 유엔총회에서 법적 승인을 얻음으로써 완전히 산 사람이 된 것이다.
    법적 승인을 얻지 못하면 법률상 보호 받을 수 없음은 과거 40년동안 경험하였다. 이제 우리는 법적 승인을 얻었으므로 유엔의 보호룰 받게 될 것이다...” ([서울신문]1948.12.16.일자)

    국제법 박사다운 이승만의 국제정치적 신념은 20대 초반부터 일간신문을 창간하여 고종황제와 싸우고 러시아와 싸우고 국제필화사건을 일으키면서 축적되었고, 한성감옥에서 [만국공법] 국제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청년 죄수 이승만의 국제전략이 되었다. 
    프린스턴대 박사논문 또한 미국의 힘과 자유통상과 국제법의 메카니즘이다. 이때 ‘한미동맹’의 꿈이 무르익었던 것이었다. 그가 미군의 장기주둔을 요청한 것은 본격적인 한미 자유군사동맹작전의 개막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