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48년 8월15일 독립의 날, 광복의 날--중앙청광장서 열린 대한민국 건국 선포 '국민축하식' 모습. 이날 밤 12시를 기해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 1948년 8월15일 독립의 날, 광복의 날--중앙청광장서 열린 대한민국 건국 선포 '국민축하식' 모습. 이날 밤 12시를 기해 미군정이 끝나고 대한민국은 주권을 완전히 회복하였다.
    5천년사에 영원무궁 빛나는 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 선포식! 
    이것은 이승만이 25년간 ‘스탈린과의 전쟁 ’에서 1차 승리한 개선(凱旋) 선언식, 이날부터 본격적인 스탈린과의 2차 전쟁이 계속되고 2년 뒤 6.25침략전쟁을 물리침으로써 2차 승리를 거두게 된다. 스탈린과의 전쟁이란? 1919년 상하이 임정부터 시작된 레닌-스탈린의 코민테른(세계 공산당)이 던진 악마의 그물 ‘민족통일전선’의 화전양면 공세에 맞서 싸워 온 이승만의 투쟁을 말한다. 1923년 3월에 발표한 세계최초 반공논문 ‘공산당의 당부당’이 첫 포문이었다.
    그리고 일본의 항복직전부터 북한을 점령한 스탈린이 ‘9월 지령’으로 남한에 펼친 그 교묘한 ‘통일전선‘ 심리전에 이승만이 결사적으로 반격할 때, 갑자기 김구가 끌려가고 말았다. 
    김일성과 이구동성으로 대한민국 건국과 총선거를 반대하고 정부수립을 비난하며 ”나의 내각참여를 거론하는 자체가 모욕이다. 논평할 가치도 없는 정부“라고 김구는 핀잔했다.  
    임시정부 주석이란 사람이 1941년 스스로 공표한 ’건국강령‘에 정한 바, 건국의 마지막장 ’건국 팡파레’가 울려퍼지는데 이를 외면하고 평양의 하늘만 쳐다보았는가? 

    자, 그 보다 우선 삼천만이 몽매에 그리던 대한민국 독립의 날 기념식장으로 가보자.
    건국의 땅 중앙청 광장에서 자유민주공화국의 출범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정부수립 국민축하식’이 열린 ‘독립=광복’의 아침, 식장은 물론 세종로와 태평로를 뒤덮은 축하인파가 춤을 추며 환호성을 터트린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던 피눈물의 기쁨이란 말이냐!.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이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 하리
    이날이 사십 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이 ‘광복절 노래’는 이듬해 ‘광복절’이 제정되면서 만들어졌지만(정인보 작사 윤용화 작곡), 건국 당일의 감격을 어찌 노래로 다 표현할 수 있겠으랴. 
    이날이 바로 ‘광복절’ 첫 회, 임시정부 일부세력이 말하는 ‘임정출범=건국’이 아니요, 언론과 역사문맹 지식인들과 정치꾼들이 헤매는 ‘해방=광복’은 더더욱 아니다. 
    처음부터 ‘광복’은 국권과 주권을 찾은 이날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건국의 날=‘독립기념일‘이다.(1949년 이승만정부가 국회에 낸 국경절 법령안에 ’독립기념일‘로 규정, 국회에서 ’광복절‘로 변경함).

    11시30분 개회사에 이어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 연단에 오른다. 
    그가 입은 연회색 두루마기는 긴 옷고름대신 단추를 끼는 개량한복, 이승만 자신의 아이디어로 만든 작품이다. 
    3부요인등 내외 귀빈들이 가득 메운 단상 앞줄 중앙엔 이승만 부부와 맥아더 장군 부부가 나란히 앉았다. 이승만의 유엔 외교로 세운 나라, 그 외교를 결정적으로 도와준 맥아더를 이승만이 초청한 것, 즉 대한민국 건국의 두 주역이 나란히 환희의 미소로 손을 잡고 새 나라의 첫 막을 활짝 열었다. 이날 밤 12시를 기해 미군정의 모든 권력은 대한민국으로 넘어온다.

    세계가 지켜보는 그 순간,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역사적인 기념사를 시작한다. 
    그것은 29세 때 한성감옥에서 몰래 저술한 명저 [독립정신]에 썼던 ‘건국 구상’ 내용을 그대로 소환한 듯, 독립운동 40여년 간 변함없는 국가관, 국민관, 역사관, 세계관과 정치철학을 응집한 것으로서, 평생의 삶을 관통한 초지일관(初志一貫)의 현대적 국민국가 상(像)과 불굴의 신념을 또 다시 국민과 함께 다짐한 ‘자유민주주의 바이블’같은 구절들이다. 전문(全文)을 들어보자.
  • ▲ 이승만의 유엔외교를 결정적으로 도와준 맥아더를 건국선포식에 초청, 나란히 앉은 건국-호국의 파트너가 환담하는 모습.
    ▲ 이승만의 유엔외교를 결정적으로 도와준 맥아더를 건국선포식에 초청, 나란히 앉은 건국-호국의 파트너가 환담하는 모습.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 기념사

    ”외국 귀빈 제씨와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러분.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에 동양에 한 고대국(古代國)인 대한민국정부가 회복되어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하여 온 결실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은 내 평생에 제일 긴중(緊重)한 시기입니다.

    내가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 내 동포의 자치 자주하는 정부 밑에서 자유공기를 호흡하며 이 자리에 서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이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대통령의 존귀한 지위보다 대한민국의 한 공복(公僕)인 직책을 다하기에 두려운 생각이 앞서는 터입니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기에는 앞길이 아직도 험하고 어렵습니다.

    4천여년을 자치 자주 해온 역사는 막론하고 세인들이 남의 선전만 믿어 우리의 독립자치할 능력에 대하여 의문하던 것을 금년 5월 10일 전민족의 민주적 자결주의에 의한 전국총선거로 우리가 다 청소시켰으며 모든 방해와 지장을 일시악감(一時惡感)이나 낙심 애걸하는 상태를 보지 아니하고 오직 인내와 정당한 행동으로 극복하여 온 것이니 우리는 이 태도로 연속 진행하므로 앞에 많은 지장을 또 일일히 이겨나갈 것입니다.

    조금도 우려하거나 퇴축(退縮)할 것도 없고 작일(昨日)을 통분히 여기거나 오늘을 기뻐하지만 말고 내일을 위해서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 할 일은 우리의 애국심과 노력으로 우리 민국을 반석 같은 기초에 둘 것이니, 이에 대하여 공헌과 희생을 많이 한 남녀는 더 큰 희생과 더 굳은 결심을 가져야 될 것이오, 더욱 굳센 마음과 힘을 다하여 다만 우리의 평화와 안전뿐 아니라 온 인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힘써야 될 것입니다. 이 건국기초에 요소(要素)될 만한 몇 조건을 간단히 말하려 하니,

    1.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는 줄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나 이것은 우리가 다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하(目下)에 사소한 장애로 인연해서 영구한 복리를 줄 민주주의에 방침을 무효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주의가 자유와 진흥(振興)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증명된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디기도 한 것이지만 의(義)로운 것이 종말에는 악(惡)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제도는 세계우방들이 다 믿는 바요 우리 친우들이 전제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안목이 우리를 들여다보며 역사에 거울을 채용하기로 30년 전부터 결정하고 실행하여 온 것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2.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정체(民主政體)에 요소(要素)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호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40여년 동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학대를 받아서 다만 말과 행동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민족이 절대로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자유 활동과 자유 판단권을 위해서 쉬지 않고 싸워 온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은 유래(由來)로 저의 나라의 전제정치(專制政治)를 고집하였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속으로 민주제도를 배워 우리끼리 진행하는 사회나 정치상 모든 일에는 서양 민주국에서는 방식을 모범하여 자래(自來)로 우리의 공화(共和)적 사상과 습관을 은근히 발전하여 왔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뿌리가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공화주의(共和主義)가 30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믿습니다.

    3.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숭(尊崇)히 하며 한도(限度) 내에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이든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계급에 진보적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정부에서 계단을 밟아 진행하는 일을 비평하는 폐단이 종종 있는 터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언론과 행실을 듣고 보는 이들이 과도히 책망해서 위험분자라 혹은 파괴자라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임으로 자유 권리를 사용하여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해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한다면 이것은 남의 사상을 존중히 하며 남의 이론을 찰고(察考)하는 원칙에 위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비와 선악이 항상 싸우는 이 세상에 우리는 의로운 자가 불의(不義)를 항상 이기는 법을 확실히 믿어서 흔들리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

    4. 서로 이해하며 협의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국건(國鍵)이 돼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새 국가를 건설한 이 때에 정부가 안에서는 공고히 하며 밖에서는 위신(威信)이 있게 하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이 정부를 국민이 자기들을 위해서 자기들 손으로 세운 자기들의 정부임을 깊이 각오(覺悟)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정부의 법적 조직은 외국 군사가 방해하는 지역 외에는 전국에서 공동으로 거행한 총선거로 된 것이니, 이 정부는 국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고 제정한 헌법으로써 모든 권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리 일반시민은 누구나 다 일체로 투표할 권리와 참정(參政)할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국민은 누구를 물론하고 이 정부에서 반포되는 법령을 다 복종할 것이며 충성스러이 받들어야만 될 것입니다. 국민은 민권(民權)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에 불복(不服)하거나 번복(飜覆) 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나니, 어떤 불충(不忠)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물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도당(徒黨)으로나 정부를 전복(顚覆)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국민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해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누구나 다 이것을 밝히 알아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5. 정부서 가장 전력(專力)하려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노동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정도를 개량하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에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主義)로 모든 사람의 균일(均一)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 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는 것입니다.

    또 이 정부의 결심하는 바는 국제 통상과 공업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를 따라 발전시킬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민족의 생활 정도를 상당히 향상시키려면 모든 공업에 발전을 하게 하여 우리 농장과 공장 소출(所出)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가 우리의 없는 물건은 수입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 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悖)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를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요, 노동자는 자본가를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의 주의는 계급과 계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 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謀害)를 일삼는 것이나, 우리의 가장 주장하는 바는 계급전쟁을 피하여 전민족의 동화(同和)를 도모하나니 우리의 동화와 단체성(團體性)은 우리 앞에 달린 국기(國旗)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상고(上古)적부터 태극(太極)이 천지만물에 융합되는 이치를 표명한 것이므로 이  이치를 실행하기에 가장 노력할 것입니다.

    6. 우리가 가장 필요를 느끼는 것은 경제적 원조입니다.

    과연 기왕에는 외국에 원조를 받는 것이 받는 나라에 위험스러운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언제든지 무조건하고 청구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이 세계 대세가 변해서 각 나라 간에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서로 의지해야 살게 되는 것과 전쟁과 평화에 화복안위(禍福安危)를 같이 당하는 이치를 다 깨닫게 됨으로 어떤 작은 나라에 자유와 건전(健全)이 모든 큰 나라들에 동일하게 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연합국과 모든 그 민족들이 개별적으로나 단체적으로나 기왕에 밝혀 표시하였고 앞으로도 계속하여 발표할 것은 이 세계에 대부분이 민주적 자유를 누리게 하기로 결심할 것입니다. 그럼으로 그 우방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며 또 계속해서 도움을 줄 것인데 결코 사욕이나 제국주의적 요망(要望)이 없고 오직 세계평화와 친선을 증진할 목적으로 되는 것이니 다른 관심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미군정은 끝나며 대한정부가 시작되는 이 날에 모든 미국인과 모든 한인(韓人) 사이에 친선을 한층 더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 우리가 우리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첫째로 미국이 일본에 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있던 적군을 밀어내었고 지금은 자발적으로 우리에 독립을 회복하기에 도우는 것이니 우리 토지에 일척일촌(一尺一寸)이나 우리 재정에 분전(分錢)이라도 원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을 과연 정의와 인도의 주의로 그 나라의 토대를 삼고 이것을 실천하는 증거가 이에 또다시 표명되는 것입니다.

    모든 직원이 일을 계속진행하기를 바라며 부득이 개선할 경우가 있더라도 국사(國事)에 순조진행(順調進行)을 위해서 끝까지 기능과 성심을 다하여 애국심에 책임을 다하기 바라는 것입니다. 미국 군인이 점령한 동안에 군정이나 민정에 사역한 미국 친우들이 우리에게 동정하며 인내하여 많은 양해로 노력해 준 것은 우리가 또 깊이 감사하는 바입니다.

    또다시 설명코자 하는 바는 미 점령군에 사령장관이요 인도자인 하지 중장에 모든 성공을 치하하는 동시에 우리는 그 분을 용감한 군인일 뿐 아니라 우리 한인들의 참된 친우임을 다시금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 새로 건설되는 대한민주국이 세계 모든 나라 중에 우리의 좋은 친구되는 나라 이 많은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의 주의(主義)하는 바는 기왕에 친근히 지내던 나라와는 더욱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요, 기왕에 교제 없던 나라들도 친밀한 교제를 열기로 힘쓸 것입니다. 미국과 우리관계가 더욱 밀접해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중한(中韓) 양국은 자고로 우의가 자별했던 바인데 이번에 또다시 중국정부에서 특별 후의를 표한 것은 금월 12일에 한국 정부를 임시승인으로 공포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친신(親信)하며 좋은 친우로 아는 류어만(劉馭萬) 공사가 대사로 승진케 된 것을 우리는 더욱 기뻐하는 바입니다. 지금 류박사를 중화민국 대사 자격으로 이 자리에서 환영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태평양에 새 민주국인 비율빈(比律賓, 필리핀)과 정의상통(情誼相通)이 더욱 밀접한 것을 기뻐하는 바입니다. 이 때에 유엔위원단장으로 이에 참석하신 이가 비율빈민국의 대표로 된 것이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비율빈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아세아민족일 뿐외에 또한 일본의 침략에 독해(毒害)를 많이 당했고 또한 우의적 원조로 자유를 회복하게 된 것이 우리와 자연한 동감(同感)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국제연합에 회원된 나라들을 일일이 다 지명하여 말할 수는 없으나 이 모든 나라들이 우리에게 많은 동정을 표하였으며 작년 11월 14일에 한국을 위하여 통과한 결의로 우리의 독립 문제를 해결하게 한 것을 감사히 여기는 중 더욱이 임시위원단에 대표를 파송한 그 나라들이 민주적 총선거를 자유로 거행하는데 도와주어서 이 정부가 생기게 한 것을 특별히 하는 바입니다.

    이 앞으로 유엔총회가 파리에서 열릴 때에 우리 승인문제에 다 동심(同心)협조하여 이만치 성공된 대사업을 완수케 하기를 바라며 믿습니다.

    우리 전국이 기뻐하는 이날에 우리가 북편(北便)을 돌아보고 비감한 생각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거의 1천만 우리 동포가 우리와 민국건설에 같이 진행하기를 남북이 다 원하였으나 유엔대표단을 소련군이 막아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처를 요구할 것이요, 다음에는 세계 대중의 양심에 호소하리니, 아무리 강한 나라이라도 약한 이웃에 강토를 무단히 점령케 하기를 허락한다면 종차는 세계의 평화를 유지케 할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기왕에도 말한 바이지마는 소련이 우리에 접근한 이웃임으로 우리는 그 나라로 더불어 평화와 친선을 유지하려는 터입니다. 그 나라의 자유로 사는 것을 우리가 원하는 이만치 우리가 자유로 사는 것을 그 나라도 또한 원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에 이 원하는 바를 그 나라도 원한다면 우리 민국은 세계 모든 자유국과 친선(親善)히 지내는 것과 같이 소련과도 친선한 우의를 다시 교환키에 노력할 것입니다.

    결론으로 오늘에 지나간 역사는 마치고 새 역사가 시작되어 세계 모든 정부 중에 우리 새 정부가 다시 나서게 됨으로 우리는 남에게 배울 것도 많고 도움을 받을 것도 많습니다. 모든 자유 우방들에 후의(厚誼)와 도움이 아니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우방들이 이미 표시한 바와 같이 앞에도 계속할 것을 우리는 길이 믿는 바이며 동시에 가장 중대한 바는 일반국민의 충성과 책임심과 굳센 결심입니다. 이것을 신뢰하는 우리로는 모든 어려운 일에 주저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며 장애를 극복하여 이정부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에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우리는 이에 선언합니다.“
    대한민국 30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 ▲ 독립의 날 축하행진, 중앙청서 세종로 일대에 모인 시민들(1948.8.15)
    ▲ 독립의 날 축하행진, 중앙청서 세종로 일대에 모인 시민들(1948.8.15)
    ▶기념사에 나타난 이승만의 건국이념과 [독립정신]◀

    이승만이 연설한 건국기념사를 보노라면 절로 탄성이 나온다.
    왜냐하면 이승만이 다짐한 6가지 항목이 1904년에 쓴 옥중저서 [독립정신]의 ‘독립실천 6대강령’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20대 시절 굳은 신념이 변함없이 시대의 흐름에 맞춰 더욱 굳어지고 업그레이드된 표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독재 배격 ◉공화주의 ◉개인의 자유와 자유의 한도 ◉노동자-농민 우대 ◉세계 통상과 자본주의 경제 건설 등이 그러하다.  
    ‘백성의 마음이 먼저 자유해야 한다’ ‘백성이 깨이지 못하면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면서 ‘노예 백성의 해방’을 외치고 외쳤다. ‘미국 백성이 누리는 권리’를 소개하고 미국 독립사, 남북전쟁사, 프랑스 혁명사 등을 설파하며 노예해방자 링컨의 민주화원칙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을 흡수, 이승만은 이렇게 풀어 보인다.
    ”민주정치라 하는 것은 백성이 주장하는 정치로서, 그 정부의 주의는 세 가지인데.
    일(一)은 백성이 하는 것이요. 
    이(二)는 백성으로 된 것이요. 
    삼(三)은 백성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를 세웠으므로 백성들은 그 정부를 자기네 집으로 알고 관리들은 백성을 자기 상전으로 알아서 서로 보호하고 받쳐주기를 자기 몸의 사지와 백체(百體)가 머리를 받쳐주는 것과 같이 한다. 지금 미국과 프랑스, 유럽의 강국들이 행하고 있는 정치가 이것이다.“(이승만 [독립정신] 대한민국사랑회, 2017).
    이승만은 건국기념사에서 새로 탄생한 나라가 구한말부터 자신이 그렸던 ‘국민국가’임으로 국민들이 새 정부를 그렇게 인식하고 일심동체가 되기를 평생 소원하고 기도하였다. 
    개신교의 자유신앙으로 뭉친 자유공동체! 여기에 ‘독재’란 끼어들 자리가 없다. 이승만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백성을 교화시키면 무슨 일이든지 다 될 수 있다’고 청년시절부터 믿고 실천한 자유민주적 국민국가론자였다. 
    1960년 4.19때 ”불의를 보고 일어난 똑똑한 국민이 있으니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스스로 하야한 85세 노대통령의 행동이 그의 건국기념사 제1항 ‘반독재 자유민주’ 신앙이 집권 12년간 한치도 흔들림이 없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 ▲ 정부수립을 끝으로 건국을 완성한 이승만, 주권회복을 선포한 국민축하식과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사 전문을 1면 전면에 보도한 조선일보 1948년 8월16일자.ⓒ조선DB
    ▲ 정부수립을 끝으로 건국을 완성한 이승만, 주권회복을 선포한 국민축하식과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사 전문을 1면 전면에 보도한 조선일보 1948년 8월16일자.ⓒ조선DB
    ◆세계 민주주의 역사의 기적—대한민국 건국◆

    박수와 환호성이 터지는 무대를 다시 한 번 둘러보자.
    전면 중앙청 기둥에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이란 대형 현수막이 걸렸고, 그 현수막 왼쪽에 파란 하늘색 유엔기, 오른쪽에 태극기가 달려있다. 그리고 무대 중앙엔 대형 태극기 판이 서있고 그 앞엔 유엔한국위원단이 자리 잡고 대한민국 건국 선포를 지켜보고 있다.
    왜 미국기도 만국기도 아니고 유엔기만을 달았을까. 이것이 이승만이다.

    유엔을 신생 약소국 대한민국의 ‘국가 보호자’로 확보

    한마디로 유엔외교의 성공작 대한민국 건국! 유엔은 대한민국 건국을 위한 총선거를 결정해주고 감시해주고 총선거가 합법적으로 성공했음을 인정해주고 그 결과물 대한민국 독립의 현장을 지켜주는 대한민국의 방패! 이것이 이승만의 반세기 외교 독립운동이 창조한 ‘민주주의 역사의 기적’이다. 
    왜 그것이 기적인가. 그때까지 이 지구상에 독립전쟁도 피 한방울도 안흘리고 순전히 외교의 힘으로만 유엔의 지지를 업어 독립을 쟁취한 자유민주공화국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발상도 전술도 결과도 이제까지 보지 못한 기상천외의 독립 성공, 어찌 기적이 아닐 것인가. ‘한강의 기적’이란 박정희의 산업화에 30년 앞서 이승만의 건국이 ‘기적의 신화’였다. 

    이승만은 일찍부터 국제사회의 힘을 믿었다. 아니, 국제적 힘이 아니고선 막강한 일본 군국독재세력을 물리칠 힘은 아무데도 없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일찍이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 외교의 승리가 이승만의 신념을 더욱 굳혀준다. 그때도 오로지 ‘1인 외교’--일본의 만주침략 희생물 한인동포의 참상을 고발하는 보고서 ‘The Koreans in Machuria’를 제출, 자유세계의 지지를 얻은 결과, 일본이 급기야 국제연맹에서 탈퇴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실험적 성공에 노하우와 자심감을 굳힌 이승만은 그래서 1945년 유엔이 탄생할 때 유엔에 가입하고자 몸부림을 쳤지만 미국무성 소련간첩들이 가로 막았다. 그것은 소련 스탈린과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이 공산당의 전략을 꿰뚫은 이승만 포기하지 않았다. ”일본이 패망하면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 공산국을 세운다“는 예언으로 끈질긴 투쟁을 전개, 마침내 해방후 유엔외교를 성공시킨 것이 대한민국 건국이다.
    ‘유엔이 세워준 나라, 그래서 유엔이 지키는 나라’...유엔은 평화시 ‘국가보호자’가 되고 안보위기의 ‘국가 방패’가 된다. 6.25때 유엔이 왜 이틀 만에 ‘북한은 침략자’로 규정하고 유엔군의 ‘집단방어’를 결의하고 16개국 군사력을 동원해주었던가? 세계를 이용할 줄 아는 이승만의 노련한 지략에 감사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국경일처럼 기념하던 ‘유엔의 날’UN-DAY(10월24일) 빨간 표는 어느 정권인가 어느 틈에 지워버렸다. ”근로자가 쉬는 날이 너무 많다“면서.
  • ▲ '건국을 국내외에 선포, 금일 대한민국 정부 발족'을 보도한 조선일보 1948년8월15일자 예고기사. '해방3주년 기념일에 건국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보도하고 있다.ⓒ조선DB
    ▲ '건국을 국내외에 선포, 금일 대한민국 정부 발족'을 보도한 조선일보 1948년8월15일자 예고기사. '해방3주년 기념일에 건국했다'는 사실을 정확히 보도하고 있다.ⓒ조선DB
     ‘정읍선언’은 스탈린에 날린 선전포고...대한민국은 그 열매

    앞에서 살폈듯이 대한민국의 건국은 ‘정업선언’의 완벽한 현실화이다. 1945년 6월3일 이승만 박사가 정읍에서 발언했다 해서 ‘정읍 발언’으로 불리는 그 요지는 이러하다.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니…” 

    이것이 좌익이 덮어씌우는 ‘분단의 원흉’ 발언인가?
    한마디로 “북한을 점령한 소련을 추방하기 위한 투쟁조직을 구성하자”는 제안이다. 그것은 세계 공론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조직으로서 국가 대표성을 가져야 하기 때문에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또는 과도정부’라 해도 좋다고 이승만은 설명하였다. 스탈린은 이미 북한 정권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남한공산화 공세를 펴고 있지 않는가. 
    이에 맞선 이승만은 ‘자유세계의 공론’의 힘으로 소련을 추방하고 남북통일 정부를 세우고자 했다. 분단의 원흉이 아니라, 자유통일 독립국가를 염원하는 통일전략이다. 통일을 핑계로 통일을 방해하는 미국과 소련에 들이댄 “소련 추방 선전포고”였던 것이다. 모두가 비웃는 그것을 세상 뒤집듯 실현시킨 이승만이다. 
    필자가 정읍발언은 ‘정읍선언=이승만 독트린’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미국에 달려가 이듬해 3월까지 “한국독립문제는 유엔이 해결하라”는 전방위 외교전을 펼쳤고, 마침내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한 미국이 소련과 대결구도로 급선회함으로써, “이승만 박사의 혜안과 집념이 결국 미국을 이승만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것이다. (올리버, 앞의 책). 
    대한민국의 건국은 배재학당과 한성감옥에서 새 나라 독립을 설계하고, 미국 유학, 오랜 망명 독립운동에서 쌓은 지미친미용미(知美親美用美) 전략이 그것을 완성시킨 1차 결실이다. 2차 결실은? 6.25 호국전쟁과 한미동맹 체결이다.
    이제 그의 나이 73세, 20세 청년의 꿈을 총칼 대신 말과 글과 신앙으로써 미국과 설득하고 스탈린과 싸우고 한인반대파와 싸운 ‘1인 독립전쟁’이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탄생순간부터 유엔의 자유세계와 깨를 나란히 맞댄 ‘국제 국가’로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4개월 후 파리에서 열린 유엔총회가 48대 7대 압도적 지지로 ‘국가승인’을 해주고, 그날 ”유엔은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합법적인 지배권을 가지는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언한다“고 결의하였다.(유엔 결의 제195호 2항).
    이 유엔 승인을 얻어내는 이승만의 막후 외교술은 또 얼마나 주도면밀했던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