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김일성 정권, 초대내각 기념사진. 앞줄 중앙 김일성, 그의 왼쪽 박헌영, 오른쪽 홍명희. 가운데줄 왼쪽부터 두번째 김원봉.
    ▲ 김일성 정권, 초대내각 기념사진. 앞줄 중앙 김일성, 그의 왼쪽 박헌영, 오른쪽 홍명희. 가운데줄 왼쪽부터 두번째 김원봉.
    유엔감시 5.10총선 저지 폭동작전이 실패하고 이승만의 헌법 공포-정부수립이 진행될 때, 소련의 스탈린은 새로운 카드를 준비한다. 동유럽에선 실패한 적이 없는 ‘민족통일전선’ 공산화 전략이 한반도에선 이승만이란 국제전략가 때문에 일단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남조선공산화의 여건은 더욱 무르익었다.
    ◉김구-김규식을 이용한 남북민족통일전선이 살아있어 이승만 정부의 국제공인을 막는다.
    ◉미군정이 이승만에게 인계하는 군대와 경찰대 깊숙이 침투한 남로당 조직이 탄탄하다. 
    ◉특히 김일성이 남한의 지하대표 성시백을 지휘, 자금을 풀어 포섭-당선시킨 국회의원들이 제헌국회에 진을 쳤다. ‘무소속’ 60여명 가운데 절반에 가깝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런 좋은 조건들을 풀가동하려는 스탈린은 북한공산화 총책 슈티코프를 모스크바 클렘린(Kremlin:성채)으로 불러들여 측근들과 대책을 논의한다. 그것은 미루고 미루었던 김일성의 위성정권 출범을 국제적으로 공식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바로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란 낙인을 미국과 이승만에게 찍은 작전이다. 이미 준비된 시나리오--“너희가 먼저 남한만의 단독정권을 세웠으니 우리는 남북통일 정권‘을 세우겠다”는 헤게모니 쟁탈 수법이다. 그래서 실시한 것이 남한의 지하선거, 공식선거는 불가능하므로 남모르게 ’도장받기 두더지 선거‘였다. 

    ◆남한에 ’지하선거‘...북한에 ’흑백선거‘...’인민공화국‘ 선포

    1. 박헌영의 지하선거 총동원 작전—김일성과 충성경쟁
    남조선로동당(남로당) 불변의 자도자임을 자처하고 있던 박헌영은 때를 만났다. 평양에서 개성 근처까지 수없이 달려와 남한의 이승엽-김삼룡 등을 접선, 남한의 지하선거를 진두지휘한다. 
    북조선로동당의 고위당료 박병엽(朴炳燁, 가명 서용규徐容奎, 신경완申敬完, 신평길 등)은 뒷날 구술한 두 권의 책 [조선인민공화국의 탄생] &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에서 당시 박헌영의 적극적인 활약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박헌영은 1947년 중반이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 가장 바쁜 정치인이었다. 평양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해주, 강동, 연천, 양양 등지를 오가며 남로당의 사업 전반을 총괄, 모든 문제에 결정을 내리고 구체적 활동을 전개하였다...(중략)...1948년 정초부터는 거의 38선 인근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남로당이 주도한 ’2.7구국투쟁‘이나 ’3.1투쟁‘과 ’제주 투쟁‘(주-제주 4.3폭동)은 그가 직접 지도하였다.”
    남로당 간부들을 만날 때 주로 이용한 38선 이북의 연천(連川) 루트 아지트는 산정호수 근처에 있었는데, 박헌영은 여러 개의 연락 거점을 만들어 운영하는데 집중했다고 한다. 

    ★’강동정치학원‘서 훈련시켜 대거 남파 공작
    박헌영은 지하선거때 평양의 ’강동정치학원‘ 교육생들을 수백명씩 남파 시켜 활용하였다. 김일성이 ’박헌영학교‘라고 부른 강동정치학원은 서울에서 ’정치학교‘를 비밀 운영하던 박헌영이 미군정에 쫓겨 월북한 뒤, 평양근교 강동에 설립하여 자신의 추종세력을 양성한 시설이다. 
    그는 남한의 남로당을 시켜 남한의 가난한 집안 15~25세 청소년들에 접근, “남로당에 가입하면 평양 김일성 대학에 입학시켜주고 공짜로 공부할 수 있다”며 대대적으로 포섭하였다. 이들이 개성까지 갈수 있는 기차비를 주고 38선 곳곳에서 몰래 월북시켜 강동정치학원에 수용, 공산당 의식화 교육과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인원이 넘쳐나 교사를 증축하고, 5천명 이상 1천 수백명이 상주하였다고 한다. (대검찰청 수사국 [좌익사건 실록] 전11권. 비매품, 1970).
    박헌영의 세뇌교육을 3~6주간 거친 이들 청소년들은 ’지하선거‘ 이전에도 수시로 남파되어 남로당의 지령을 수행하였다. 이들 중에는 1946년 국대안(國大案:국립 서울대 설립) 반대투쟁과, 10월 대구폭동에 참여했다가 월북한 이들도 포함된다. 1948년 지하선거를 거쳐 김일성 정권 수립후 ’남침계획‘이 무르익으면서 군사훈련을 받은 이들은 침략전쟁에 총알받이로 투입되어 이름 없이 죽어갔다. (박병엽, 앞의 책).

    깊은 밤 비밀집회서 연판장 서명...’도토리 도장‘ ’감자 도장‘까지.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되기 일주일 전, 7월10일 박헌영은 교육이 끝난 200여명을 선발하여 닷새동안 38선 여러 곳에서 몰래 남파시킨다. 
    담당지역에 잠입한 이들이 한 일은 선거가 아니다. 남로당이 천거한 후보에 대하여 설명하고 공산당 정부를 세워야 하니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의견을 듣지도 않고 “도장을 찍으라”는 ’연판장 서명 받기“였다. 도장은 안가져 왔으면 손도장을 찍었고, 워낙 도장이 없는 시골 사람들은 즉석에게 ‘도토리 도장’ ‘감자 도장’을 만들어 찍어야 했다. 
    군청이나 경찰서에 먼 지역 중심으로 깊은 밤 집집마다 동원된 마을 사람들은 거부할 수가 없다. 불응하면 즉각 협박이 날아오기 때문이다.
    ‘낮에는 미군정, 밤에는 좌익세상’이 되는 촌락들에서는 ‘공개투표’가 당연하였다. 집회가 불가능한 도시 지역의 남로당 전권위원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연판장을 맘대로 조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모여진 ‘엉터리 투표지‘들은 서울에서 집계되어 해주의 박헌영에게 전달되었다. (우사 연구회 [송남헌 회고록: 김규식과 함께한 길] 한울, 2000. 손세일, 앞의 책).
  • ▲ 여순반란을 지령하고 지휘한 원흉들. 왼쪽부터 소련 슈티코프, 북한 김일성과 박헌영.
    ▲ 여순반란을 지령하고 지휘한 원흉들. 왼쪽부터 소련 슈티코프, 북한 김일성과 박헌영.
    해주 남조선인민재표자회의...슈티코프가 김일성-박헌영에 지시한 연극

    남한의 지하선거가 어찌 박헌영의 맘대로 되는 것인가. 스탈린의 ’남북통일정부‘ 수립이란 시나리오를 슈티코프가 현장지휘를 맡은 일이다. 남북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김일성 위성정권을 세운다는 명분 갖추기, 8월10일 끝났다고 발표한 지하선거는 8월22일까지 가까스로 머릿수를 채워야 했다고 한다. (김학준 [북한의 역사] 제2권, 박병엽 앞의 책).
    김일성과 박헌영의 작전 매뉴얼 실행을 매일 체크하는 슈티코프는 평양의 소련군정 정치책임자 회의에서는 이렇게 지시한다.
    ”우리 소련군은 선거사업에 간섭해서는 안된다. 호기심을 드러내지도 말며, 선거구에 나타나서도 안되며, 선거 당일에는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라“ 외출금지령까지 내렸다. ([슈티코프 일기] 1948.7.30.~8.14)
    왜 그랬을까. 남북한 인민들의 통일열기가 ”자발적으로 김일성정권을 세우는 모습“을 세계에 보여주려는 것이나 이를 인정한 나라는 공산국 말고 하나도 없다.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에서 대한민국 건국선포식을 거행한 며칠 후, 8월21일 황해도 해주에서는 급조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지하선거로 ’만들어진 대표‘들 1,080명이 모였다.
    전망 좋은 남산 기슭에 신축된 인민회당, 사방에는 ’조선인민의 진정한 벗 스탈린 대원수 만세‘ ’조선인민 만세‘등 구호가 나붙었고, 단상엔 김일성, 박헌영, 김두봉, 허헌 등 남북로동당 수뇌들이 자리 잡았다.
    홍명희의 개회사 등 개막행사가 끝나자 35명의 주석단과 서기국 인원을 선출하였다.
    주석단에서 단연 눈길을 모은 것은 25세 청년주석 김달삼(金達三)이다. 제주4.3폭동의 주역은 지휘권을 28세 이덕구(李德九)에게 맡긴 뒤, 제주지역 연판장을 가지고 배편으로 목포를 거쳐 해주로 왔다. 박수갈채를 받은 그는 북한 최고인민회의(국회) 제1기 대의원에 선출되고 ’국기훈장‘을 받은뒤, 평양에서 박헌영의 강동정치학원 강사노릇도 하다가 이듬해 1949년 남로당 9월공세 빨치산 투쟁에 나섰다가 강원도 정선지역에서 총살되고 만다. 

    박헌영은 대회 마지막에 연단에 나서 장장 3시간에 걸친 연설을 뿜었다. 스탈린과 슈티코프 앞에 김일성보다 우월한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엉터리 지하선거‘를 무리하게 ’성공‘시킨 까닭이다. 박헌영이 언성을 높일 때마다 지지자들은 ”박헌영 동지 만세“를 수없이 외쳤다.
    남조선 전유권자 868만명 가운데 77%가 넘는 673만명이 참가했다고 자랑할 때 인민회당이 떠나갈 듯 환호성이 터졌다. 조작된 숫자로 정치를 조작하는 공산당의 특기였다.
    ”매국노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자“는 데 집중한 그의 연설이 끝난 뒤 김달삼의 ’인민항쟁‘ 보고가 이어지고 최승희 무용단 공연이 이어졌다. 이날의 평양방송으로 남한까지 중계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였다. 남한출신 국회의원 숫자다. 

    ★북한 총선거...찬성하면 ’흰 함‘에, 반대하면 ’검은 함‘에...

    북조선지역 총선거는 8월25일 새벽 6시에 시작, 오전 중에 금방 끝났다.
    복수의 후보자들 가운데 선택하는 투표가 아니었다. 북로당이 천거한 등록 후보에 대하여 지지하면 ’흰 함‘에 투표지를 넣고 반대하면 ’검은 함‘에 투표지를 넣는 방식이다. 
    북조선 중앙선거위원회가 발표한 결과는, 유권자 452만여명의 99.97%인 452만여명이 투표하여 찬성율은 98.49%였다. 
    여성 대의원도 무용가 최승희와 안창호의 여동생 안신호 등 33명이 나타났다.
    북한 국회의 개원은 9월2일, 위원장(국회의장)에 허헌을, 부위원장에 김달현을 선출하고, 헌법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미 지난 4월 남북제정당단체 연석회의때 참석한 김구에게도 보여준 헌법은 스탈린의 결재를 받은 것으로서 동유럽 공산화에 사용한 헌법이다. 나라 이름 등 고유명사만 바꾼 헌법을 새로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추인하는 헌법위원회인데, 49명의 명단에는 당연하게도 홍명희, 김원봉도 들어갔다. 

    이미 2년전 1946년 2월에 출범시켜 토지개혁과 ’반동 숙청’을 단행했던 ’사실상 정부‘ 북조선인민위원회와 무엇이 다른가. 
    ”김일성 동지와 대담하다. 지도부에 대한 중앙위원회 결정에 대해 설명하다. 내각 구성원에 대해 말하다. 몇몇 각료직에 대해서는 의견의 불일치가 존재하다. 나의 견해를 밝히는 것을 피하다.“([슈티코프 일기] 1948.8.3.)
    지금까지 강아지처럼 맹종하던 김일성이 무언가 이견을 보였다는 기록이다.
    9월8일 헌법 지지토론을 끝내고 헌법승인 결정서를 채택, ”오늘부터 북조선 지역에 실시한다“고 발표하였다.
    김일성은 슈티코프와 레베데프가 작성한 정권위양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북조선 최고이인민위원회 위원장 김일성이 작성한 성명 초안을 슈티코프가 ”거의 전반을 다시 작성“한 것이었다. ([슈티코프 일기] 1948.9.4.)
    이를 접수한 최고인민회의는 곧바로 정부구성에 들어가 ”김일성을 수상으로 선임하고 그에게 내각조직을 위임할 것을 제의,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김일성은 9월9일 내각 명단을 발표한다. 소위 ‘인민공화국’의 공식 출범이다.
    이 내각명단은 이미 슈티코프가 정해 놓은 인물들로서 슈티코프의 일기(8.30)에 적어놓은 대로였고 별 차이가 안 보인다. 즉, 소련이 만든 ‘인형정권’(Puppet Regime)이다. 
    대한민국 건국보다 25일 늦춘 북한정권 수립의 술수, 그러나 스탈린의 보이지 않는 큰 음모는 이제부터다.

  • ▲ 왼쪽에 김일성 정권등장 기사, 중간에 김구의 대한민국 반대 자주통일 조직 정강 발표, 머리기사는 대한민국 승인을 받으러 유엔특사 파리로 출발. 조선일보1948.9.10.ⓒ조선DB
    ▲ 왼쪽에 김일성 정권등장 기사, 중간에 김구의 대한민국 반대 자주통일 조직 정강 발표, 머리기사는 대한민국 승인을 받으러 유엔특사 파리로 출발. 조선일보1948.9.10.ⓒ조선DB
    ◆ “남조선 군대와 경찰을 장악하라” 슈티코프의 지령

    이 무서운 소련의 지령은 김일성이 북한내각 명단을 발표하기 직전 9월6일자 [슈티코프의 일기]에 나온다. 메모식으로 제목만 적어놓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다음 사항에 대해 설명하다.
    (1) 남조선 군대의 장악에 대해, 방법과 실천방안.
    (2) 경찰의 장악에 대해.
    (3) 탄약 공장에 대해.
    (4) 인민들에게 소련정부의 결정을 해설하는 문제에 대해.
    .....................
    (7) 남북조선에서 공장들과 농촌에서 무장혁명부대를 창설하는 문제에 대해.
    (8) 경찰의 무장 훈련을 강화한다.”

    김일성 정권 출범에 앞서 이러한 지령을 내린 것은 내각의 인적구성의 이유에 대한 설명과 함께 김일성 정권의 ‘사명’을 부여한 것, 즉 “남조선 무력 혁명‘을 시작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이렇게 스탈린은 민족통일전선 전략의 실패를 무력침공으로 달성하겠다는 방침을 통고하였다.
    누가 6.25침략전쟁을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간청하여 승낙을 받은 것이었다고 주장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6.25침략은 1946년 3월 미-소 공위를 시작할 때부터 준비된 스탈린의 히든카드였던 것이다. 

    ★김일성, 정권출범 다음날 ’남조선 무법 투쟁‘ 선언
    9월14일자 조선일보 1면 마지막 단에 1단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서울AP 무어씨 제공 合同] 평양방송에 의하면 조선인민공화국 수상 김일성씨는 10일 밤, 최고인민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정강을 발표하였다.
    1, 조선인민공화국이 아직도 지하적 존재로 되어있는 남조선에서 재건과 안정을 위하여 격렬한 투쟁을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2. 남조선 농민에 대해서도 공산주의적 토지개혁을 수여할 것을 약속한다.
    3. 현금까지 남조선에 있는 모리배, 반역자, 반동파들이 외래제국주의 이익을 위하여 강행해온 반민주주의적 제법률을 무효로 할 것을 약속한다.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그 다음날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공산당 재건을 위한 투쟁과, 농민을 회유하는 토지개혁과, 이승만대통령이 세운 법치국가를 ’무효화‘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불과 4일전 슈티코프가 지령한 ’남조선 군대-경찰의 장악과 무장혁명대 창설‘ 등에 대하여 김일성이 즉각 그 실천을 방송으로 공약, 남북공산당을 선동한 지시였다.


  • ▲ 여순반란 사건때 운동장에 모여있는 주민들, 경찰 조사를 받고있다.
    ▲ 여순반란 사건때 운동장에 모여있는 주민들, 경찰 조사를 받고있다.
    ★’수상‘ 김일성의 첫 작품—여수-순천 군반란

    그동안 남로당 박헌영의 지령이었다는 ’여수-순천 반란사건‘은 사실은 김일성의 지시였다.
    아니, 스탈린의 결재를 받은 슈티코프가 김일성-박헌영에 지시한 ’대한민국 파괴작전‘이다.
    건국 2개월만인 10월19일 밤에 일어난 ’여순 반란‘의 남로당 지도부가 발표한 선동문에 그 증거를 스스로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읽어보자.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
    우리는 조선 인민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노동자와 농민의 아들들이다. 우리의 사명은 외국 제국주의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고 인민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에 굴종하는 이승만 괴뢰, 김성수, 이범석과 도당들은 미제국주의에 빌붙기 위해 우리 조국을 팔아먹으려 하고 드디어는 조국을 파는 것과 마찬가지인 분단정권을 만들었다. 그들은 미국인을 위해 우리 조국을 분단시키고 남조선을 식민지화하려 하고 있으며, 미국 노예처럼 우리 인민과 조국을 미국에 팔아먹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한일협정보다 더 수치스러운 소위 한미협정을 맺었다.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만약 당신이 진정 조선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반동분자들이 저지른 이런 행동에 대한 분노를 참을 수 있겠는가? 모든 조선인은 일어나 이런 행동에 대해 싸워야 한다. 제주도 인민은 4월에 이런 행위에 대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과 붙어 있는 이승만, 이범석 같은 인민의 적들은 우리를 제주도로 보내어,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고 또한 미국인과 모든 애국인민들을 죽이려는 사악한 집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애국적 인민과 싸우도록 우리에게 강요했다.
    모든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출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인민의 진정한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
    친애하는 동포여! 우리는 조선 인민의 복리와 진정한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애국자들이여! 진실과 정의를 얻기 위한 애국적 봉기에 동참하라. 그리고 우리 인민과 독립을 위해 끝까지 싸우자.
    다음이 우리의 두 가지 강령이다.
    1. 동족상잔 결사반대 2. 미군 즉시 철퇴
    위대한 인민군의 영웅적 투쟁에 최고의 영광을!
                      (남로당 병사위원회 [여수인민보] 1948년10월24일자)

    ▶여수인민위원회의 결정서 6개항
    ①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기구 접수를 인정한다.
    ②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을 맹세한다.
    ③ 대한민국 분쇄를 맹세한다.
    ④ 남한 정부의 모든 법령은 무효로 선언한다.
    ⑤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한다.
    ⑥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한다.

    ▲반란군의 ’호소문‘과 여수인민위원회의 ’결정서‘에 소련의 주장 및 슈티코프의 지령과 김일성의 지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제주4.3폭도를 진압하는 것은 ’동족상잔‘이므로 결사반대, 미군 즉시 철수, 대한민국 분쇄,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수호와 충성, 특히 ’남한정부의 모든 법령을 무효로 선언‘하고 토지개혁 실시 등은 김일성의 선언을 글자그대로 복창한 것이다. 


  • ▲ 반란군에 학살된 시체들과 가족을 찾는 주민들.
    ▲ 반란군에 학살된 시체들과 가족을 찾는 주민들.
    ◆무차별 학살 1주일--”군인과 경찰은 모조리 죽여라“

    ★10월19일 밤, 여수-순천 반란 폭발...왜 이날을 선택하였나
    첫째, 이승만대통령이 한국을 비운 ’공백‘을 노린 작전이다.
    이승만은 이날 오전 김포공항을 떠나 일본 도쿄로 날아갔다. 두 달전 8월15일 건국선포식에 참석해 한국방위를 공약해준 맥아더 장군에 대한 답방이다. 물론 그것은 예의상 답방만이 아니다. 맥아더의 숙소에서 하룻밤을 지낸 이승만 대통령부부는 이튿날 맥아더와 회담을 갖고 중요한 합의를 끌어낸다. 맥아더가 통치하는 일본에 ’한국 대표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바로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의 지원을 얻기 위한 장치, 두 사람은 한국안보 수호를 위해 다시 한번 손을 잡았다. 여순반란의 급보를 받은 이승만은 더 머물 수 없었다.
    하네다 공항까지 배웅 나온 맥아더는 이승만을 얼싸안고 서울에서 했던 말을 되풀이한다. 
    ”틀림없이 나는 미국을 지키는 것처럼 한국을 지킬 것입니다.“ 계속되는 무장반란을 걱정하는 이승만의 등을 두드리며 다짐하였다. 
    둘째, 10월은 레닌 혁명의 달, 북한의 지령을 받고 때를 기다리던 좌익세력은 ’이승만의 공백’을 알게 되자 ”이때다“ 판단, 공산주의혁명 기념의 달(1917.10)에 들고 일어난다. 
    반란군은 남로당의 거사명령과 함께 ”봉기하면 38선 북한군이 쳐내려와 남한을 해방 시킨다“는 말을 굳게 믿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남로당 참패’로 끝나자 이 택일을 두고 책임전가 내분이 계속된다. 급기야 6.25후 박헌영의 숙청 때에도 김일성은 이것을 ‘박헌영의 실수’로 덮어씌워 써먹는다.

    ▶전라남도를 휩쓴 폭동...지리산 빨치산 급증◀
    ‘광주5.18’보다 32년 앞선 ‘여수10.19반란’--두 사건을 비교 연구한 논문이 나와 있는지 필자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물론 당사자 측의 비교분석은 그때 끝났을 테지만, 지금도 촛불집회-탄핵시위‘가 성행하는 대한민국에서 ’치밀한 분석-면밀한 대책‘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총칼만 들지 않았을 뿐, 그 전후 전개과정은 많이 달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장교들과 경찰들은 떼죽음...반나절 만에 여수 완전장악

    ”제주4.3폭동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여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1948년 10월 19일 저녁, 연대장 중령은 항만에 나가서 새로 보급받은 많은 무기와 장비의 선적을 지휘하고 있었고, 장교들은 출동하는 동료들의 환송 술판을 벌이는 중이었으며 병력은 잠시 취침 중이었다. 당시 여수엔 2,700여명의 병력이 주둔중이고 순천엔 2개 중대가 있었다. 
    밤 9시가 넘은 시각, 돌연 총성이 울리고 비상나팔 소리가 밤을 깨운다. 완전무장한 병력은 제주 출동을 위한 비상소집인줄 알고 연대 종합연병장에 금방 집결한다. 
    비상나팔은 사전모의에서 지창수(池昌洙, 1906~1950) 상사가 불기로 했다. 그 지창수가 연단에서 외쳤다. 정체불명의 사복차림 민간인들이 연단에 합세하고 뒷산에선 봉화불이 솟는다.
    "애국병사 여러분! 우리는 동족 살상의 제주도 출동을 결사반대“한다며 선동연설을 퍼붓는다.  병사들은 40여명 반란군을 제외하고 어리둥절하다. 거기에 "미제와 이승만 매국도당을 타도하자"는 떼창이 이어졌다. 그리고 누군가 "저기 경찰 놈들이 쳐들어오고 있다"고 바람을 잡는다. 정신 못 차리는 군인들은 "무기를 들라, 경찰과 싸우자"는 무리에 가담하고 절반은 우르르 도망친다.
    이때, 장교 3명과 하사관들이 뛰어나가 "안 돼! 뭐하는 거야?" 말리려는 순간,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그들은 즉사하였다. 남로당 지창수의 ‘병사 소비에트’ 소속 반란병사들이 반발하는 장교들과 하사관들, 병사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사살하는 것이었다. 
    ”모든 장교들은 미제의 앞잡이다. 발견즉시 다 죽여라“ 남로당 ‘병사 소비에트’ 특수공작책의 진두지휘로 일반병사들까지 ‘장교사냥’에 돌진한다. 결국 계급불문, 사상불문, ‘군군사냥’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반란은 여수 밤바다를 불바다로 만든다. 
    무기고와 탄약고의 보초들을 죽이고 모든 병사들에게 신형 무기를 지급, 경찰지서들을 습격 방화 살해한다. 경찰-헌병 연합부대는 순식간에 격파당하고 반란군은 유치장을 열어 각종 범죄자들을 석방, 반란군으로 만든다. 우익인사들의 가옥을 불태우며 가족들까지 집단살해를 자행한다. 제주4.3폭동과 꼭 닮은 꼴이다. 
    밤새운 폭동 반란은 이튿날 20일 정오쯤 여수를 완전점령 하였고, 공공건물과 요소마다 일제히 대형 인민공화국 깃발이 게양되었다. 오후 1시 중앙동 광장에는 여수인민대회(군중대회)가 열리고 ”여수는 해방구,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보다 앞서 반란군 일부는 첫 아침 기차를 빼앗아 타고 순천으로 몰려가 ‘군인-경찰-우익 사냥’에 돌입, 북한깃발을 꽂았다. 이날부터 두 도시의 남로당원들이 동네마다 인민재판을 벌여 ‘양민학살’을 계속한다. 또 200여명의 반란군이 서쪽 보성(寶城)으로 달려가 벌교(筏橋) 지역서 한풀이식 살육 만행을 벌였다. 이들은 거의 벌교·보성·고흥·화순·광주 출신이었다고 한다. 
    20일 새벽 광주주둔 4연대가 ”진압하라“며 1개 중대를 급파하였지만, 4연대 출신 반란지휘자 김지회(金智會,1925~1949)와 지창수가 이미 붉게 만든 조직이다. 순천에 도착하자마자 끝까지 투항을 거부한 장교-사병 30여명을 학살하고 반란군에 합세하였다.
  • ▲ 반란 지휘자 김지회 커플. 왼쪽 사진은 국방경비대 중위 복장의 김지회, 오른쪽 여인은 김지회가 입원시 연애한 19세 간호사 조경순. 항상 빨간 스웨터를 입어
    ▲ 반란 지휘자 김지회 커플. 왼쪽 사진은 국방경비대 중위 복장의 김지회, 오른쪽 여인은 김지회가 입원시 연애한 19세 간호사 조경순. 항상 빨간 스웨터를 입어 "빨간 여두목"으로 불렸다고.
    ★지휘자 김지회 중위는 북한서 훈련받은 공작원, 좌익만 모아 14연대 신설

    여순반란의 두 주역은 김지회와 지창수다. 함경남도 함주출신 김지회 중위는 박헌영의 강동정치학원 전신 평양학원 대남반을 거쳐 지령을 받아 남파된 북한 공작원이다. 국방 경비사관학교 3기로 들어갈 때 신원보증인은 시인 이은상이었다고 한다. ‘공산당 잡는 고수’ 김창룡(金昌龍)이 동기생이다. 
    지창수는 전남 광주의 이름난 부호집안 출신, 일찌감치 남로당에 포섭되어 ‘병사 소비에트’ 소속으로 북한 공작원 지휘관 김지회의 ‘인민혁명군’에 합류한다. 
    48년 5월 14연대가 창설될 때 두 사람은 동조자들을 끌어들여 요직을 독점, 인사파트를 맡아 신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한다. 
    미군정의 국방경비대는 군인의 정치적 견해에 전혀 무관심했으며 남로당의 폭력투쟁때조차 거의 완전한 사상의 자유를 보장해왔다. 특히 대한민국 건국을 앞둔 때에는 ”국군을 늘려주고 우리는 명예롭게 철수한다“는 본국 정부방침에 따라 ‘신원조회’를 요구하는 이승만 등 한국측의 우려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승만의 편지-담화, 백선엽 [노병이 걸어온 길] 등)
    핑계는 지원자 부족, 불온사상 여부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입대시켰다. 이러니 전국에서 좌익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걸리면 국방경비대에 들어가고 온갖 범죄자들도 ‘도피처’로 이용하게 되었다. 신설 14연대는 아예 ‘남로당 부대’를 만드는 것 같았다. 전남 남로당이 청소년들을 포섭하여 집단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이다. 
    이때 놀라운 이야기—김지회-지창수는 4연대 군인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 이승만과 박헌영 중 누가 더 좋은지 물어 박헌영을 택한 군인들만 추려내서 14연대를 완성했다고 한다.
  • ▲ 여순반란의 참혹한 학살현장을 보도한 조선일보 사회면, 여중학교교장이 반란군을 지휘하고 중학생들도 합류시켰다는 제목이 보인다.조선일보 1948.10.27일자 사회면.ⓒ조선DB
    ▲ 여순반란의 참혹한 학살현장을 보도한 조선일보 사회면, 여중학교교장이 반란군을 지휘하고 중학생들도 합류시켰다는 제목이 보인다.조선일보 1948.10.27일자 사회면.ⓒ조선DB
    ★여수-순천 경찰 거의 몰살...겹겹이 쌓인 시체...나치의 집단학살 보는 듯

    정부 진압군은 23에야 순천을 탈환하고 여수는 반란 1주일 뒤 27일경에야 질서를 회복한다.
    정부는 여수에서만 관민 1,200여명이 피살되고 중경상 부상자가 1,150여명이라 발표했으나 
    순천지역과 벌교 등 피살자를 합하면 3천명에 육박하는 숫자가 나온다. 그 참상을 현장 취재한 조선일보 기사를 보자. 

    「...피로 물들인 순천에 들어간 것은 24일 새벽, 철도는 전주 이남이 불통이요 도로도 남원부터 차단, 자동차와 장갑차 군대가 꽉 막고 있다. 먼동이 트면서 사람소리 나는 곳을 보니 초등학교 운동장에 순천 읍민이 집결되어 있었다. 몸수색을 받는 젊은이들이 팬티바람으로 벌벌 떤다. 집들은 텅텅 비어있고 학살을 모면한 주민들이 모여 반란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손으로 지목하면 군인이 그를 뽑아내어 수사하는 광경이다.
    날이 밝아 거리로 들어갔다. 순찰 병사들은 인적이 끊긴 골목에 인기척이 나면 공포를 발사한다. 길거리에는 여기저기 시체들이 널려있다. 불에 타고 피투성이에 악취가 진동하며 개들이 덤벼 뜯어먹기도 했다. 
    경찰서 문에 들어서니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팔을 묶어 총살하고 칼로 난자한 70여구 시체들이 쌓여있다. 마치 히틀러의 나치스 만행을 그린 영화를 보는 것 같다. 불타고 파괴된 집집마다 문을 열어보면 시체가 없는 집이 드물다. 
    오후가 되자 소방차들이 시체들을 어디론가 실어간다. 비 내리는 거리를 뛰며 어버이와 자식을 찾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시내전체가 초상집이다. 
    경찰 지휘관 최천씨 말에 의하면 사망자를 집계중이나 최소 1천3백명이 넘으리라 한다. 그 중 에 경찰관 시체 211명을 확인했는데 3백명이 넘을 것 같으며 순천 경찰이 전멸한 상황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은행들도 현금 금고가 다 털렸고 방화로 연기를 아직도 뿜도 있었다. 
    (유건호 기자 [조선일보] 1948년 10월27일자 사회면)

    같은 지면에 ‘감금된 14연대장 탈출’ ‘여중 교장이 반란 앞장’ ‘중학생도 합류’ 등 기사들이 지면을 덮었다. 특히 유건호 기자는  ‘경찰관은 거의 다 피살’이란 제목의 독립기사를 썼다.
    「...간신히 목숨을 보전한 경찰관 등의 말을 종합하면 순천 반란군 3일천하의 모습이 보인다.
    20일 오전 9시 20분쯤 열차에 탑승한 반란군은 순천에 도착 즉시, 역전에 배치된 1개중대 병력중 간부들을 사살하고 장악한 뒤, 개천 변에 매복한 경찰에게 백기를 흔들며 사격을 중지키시자, 경찰은 반란군이 항복하는 줄 알고 경찰본서에 보고하려는 때 반란군은 일거에 습격하였다. “인민의 고혈을 착취한 경찰을 때려죽여라” 외치며 경찰복이 눈에 뜨면 모조리 사살하며 거리를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 ▲ 도쿄로 맥아더를 답방한 이승만. 여순반란으로 급거 귀국한다.
    ▲ 도쿄로 맥아더를 답방한 이승만. 여순반란으로 급거 귀국한다.
    ◆이승만, 국가보안법 제정...김구 계열 의원들은 이것도 반대

    “공산분자들이 지하에 정당을 부식해서 내란을 일으켜 전국을 혼란에 빠트리고 남북을 공산화시켜 타국(소련)의 부속물로 만들자는 계획이 오래 전부터 농후한 것은 세인이 아는 바이다. 불행히 몽매천식(蒙昧淺識)한 분자들이 혹은 국군에, 혹은 어떤 단체들에 섞여서 반란을 빚어내고 있다가 정부를 기만하고 국권을 말살하려는 음모로 여수, 순천 등지에서 난을 일으켜, 관리와 경관을 학살하고 관청을 점령하며 난당을 초치하야 형세를 확대함으로써 국제문제를 일으켜서 민국을 파괴하고 민족의 자상잔멸(自傷殘滅)을 고최하려 한다. 이런 분자들은 개인이나 단체를 물론하고 한 하늘을 이고 같이 살 수 없는 사정이다” ([조선일보]1948.10.24.)

    맥아더를 만나고 급거 귀국한 이승만 대통령은 여순반란에 대한 담화를 통하여 23일 “반역도당은 군법을 따라 정형시위(正刑施威)하여 여환의 만연을 절금(絶禁) 하겠다”는 단호한 경고를 발하였고 28일에도 반란지역 국민들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이때 김구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어느 대학병원에 ‘요양차’ 입원하여 “동족상잔 말고 동족상애의 길로 매진하자”는 상투적 담화를 내놓고 침묵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란의 처리와 반란의 예방을 위하여 ‘국가 보안법’을 제정한다.
    5.10총선에서 서북청년회 가운데 유일하게 당선된 김인식(金仁湜) 제헌의원은 여-순 반란 한달 전 9월에 ‘내란행위특별처벌법’을 국회의원 33명의 동의로 제안한 바 있었다. 
    황해도 해주 부호의 장남으로, 소련군이 진주하자 재빨리 ‘청년치안대’를 조직, 공산당 사무실을 급습하여 좌익들을 사살하고 우익인사들을 구출해낸 ‘9.16 해주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이 사건은 해방후 한달 만에 일어난 최초의 반공투쟁사건이었다. 두달 뒤 신의주사건이 난다.

    국회 법사위는 김인식 의원이 낸 법안 이름을 ‘국가보안법’으로 정하여 본회의에 제출한다. 그러나 전남 영광의 무소속 김옥주(金玉周) 의원 외 47명이 폐기안을 내고 반대하였다. 김구의 한독당 계열 20명은 ‘제1조’를 삭제하자는 수정안을 냈다.
    그 제1조 내용은 「국헌을 위배하여 정부를 참칭하거나 그에 부수하여 국가를 반란할 목적으로 결사 또는 집단을 구성한 자는 다음에 의하여 처벌한다」고 정의하여 범죄수준에 따른 형량을 규정한 조항이다. 이것을 삭제하는 주장은 곧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지 말라는 것과 같았다.
    이 두 반대안들은 격렬한 논쟁 끝에 부결되고, 11월20일 최초의 ‘국가보안법’이 탄생한다.

    ‘국가보안법’ 제정을 한사코 막으려던 ‘무소속’과 한독당 등 의원들 가운데에는 북한 공작원 성시백의 돈줄로 당선된 사람들이 20~30명 쯤으로 추산된다는 기록은 앞에 썼다. 이들이 다음해 5월 일으키는 태풍이 ‘국회프락치사건’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