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내한하는김포공항 연도에 세운 환영아치.(1948년 1월)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내한하는김포공항 연도에 세운 환영아치.(1948년 1월)
    유엔이 ‘남북한총선’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각 정파들은 새로운 문제에 봉착한다. 스탈린이 모스크바 결정을 내세워 결의안을 반대하고 총회 표결에서 기권하였으므로, 소련이 북한의 선거를 거부할 것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게 될 경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특히 이승만은 문제된 ‘시국대책요강’이 미군정내와 좌우합작 한국인들의 ‘미군정 장기집권’ 저의를 획책하는 음모였기에 하지가 배후인 것으로 보고 이것부터 막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승만, 하지에 쐐기...“용공정책-괴뢰정부 연장 포기하라"
     
    11월 26일 ‘애국동포에게 거듭 경고’라는 성명을 낸 이승만은 하지 사령관을 정조준한다.
    “소위 미소공위가 연거푸 실패한 후에는 즉시 총선거를 실시하여 남한에 독립정부를 세워서 우리에게 정권을 맡기고 함께 소련군의 철퇴를 도모할 것이어늘, 하니 중장은 종시 자기주장을 버리지 못하고 백방으로 핑계하야 총선거를 막으며 민의를 불고하고 중간파를 지지하야 괴뢰정부를 연장하야 자기들의 권력을 공고케 하려는 중이다.”

    이승만은 미군정 장관 안재홍 등 한인들을 하지를 따르는 ‘괴뢰정부’라 규정한 뒤, 유엔 결의는 남북통일을 위한 선거를 하자는 것이오, 유엔 감시란 소련의 간섭을 막자는 조처이거늘, 7개월간이나 우리 총선거 주장을 가로 막은 하지 중장이 “민족진영을 극우라 지목하고 좌우합작이란 허울로 공산측과 내통하는 중간파 인사들로 우리를 대표하게 한다니...(중략)...우리강토를 일척일촌(一尺一寸)이라도 양보할 수 없으며 북한 동포를 하루바삐 구제키로 결심 매진해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1947.11.27.)

    이승만은 ‘남한의 단독선거’도 특유의 비유화법으로 설득한다.
    “사람이 반은 살고 반은 죽었는데 그 죽은 부분을 살리기 위하여, 산 부분에 약치료를 하면 죽은 부분도 살릴 수 있는 것과 같이, 지금 살아있는 남조선에 총선거를 실기하여 장차 전조선 총선거를 실시하면 조선은 온전히 살아날 수 있다”

  •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내한을 환영하는 포스터.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내한을 환영하는 포스터.
    ★김규식, “제주도에 있어도 단독정부 아닌 통일정부”

    설립 1년 남짓한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15일 공식적으로 ‘해체’를 선언하였다. 김규식은 기자들이 소련의 총선거 거부 관련해 질문하자 이렇게 답변한다.

    “그러한 경우 나의 보는 바로는 유엔대표단이 처리하기 보다는 유엔에 보고하여 결재를 요할것이고, 설혹 남조선단독정부가 수립되다 할지라도 나의 견해로는 그 명칭만은 남조선단독정부라 아니할 것이고 한국 중앙정부라든지 부를 것이다...(중략)...국토의 일부만 차지해도 앞으로 전국통일을 기도하며 중앙정부라 칭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현금에도 타국에서 쓰는 말이다. 그런즉 제주도 일우만 차지해도 중앙정부라 할지언정 단독정부라 함은 그 명칭부터 불가할 것이다.”([서울신문] 1947.12.14.)
    ‘민족자주연맹’이란 단체가 새로 등장한다. 좌우합작을 포기한 김규식이 12월21일 천도교회관에서 열린 결성식에는 하지 사령관이 메시지를 보내고 여운형의 근로인민당 장건상, 조병옥 경무부장,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등이 참석하여 축사를 했다. 이 단체는 좌우합작에 실패한 하지 사령관이 김규식을 특별 지원하여 설립한 것으로서 주석에 김규식을 선출하였다. 이승만을 견제하려는 정치카드임은 물론이다. 김규식은 이로써 하지가 만들어준 독자적 정치세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 조병옥-장택상에게 “이승만과 손떼라” 종용
    미군 방첩대 보고에 따르면 이때 하지 사령관은 김규식에게 1억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하였고 (손세일, 앞의 책), 조병옥과 장택상을 집무실로 불러 “이승만과 손을 떼라”고 종용했다고 한다. (장병혜 [상록의 자유혼: 창랑 장택상 일대기]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992)
  • ▲ 소련이 유엔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 기사(조선일보1948.1.25)
    ▲ 소련이 유엔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한 기사(조선일보1948.1.25)
    ◆소련이 유엔의 入北 거부...김구도 ‘단정 반대’ 발표

    대한민국 건국사에 운명적인 해, 1948년의 아침 해가 밝았다.
    유난히 추운 정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8개국 대표들은 1월 8일부터 29일까지 개별적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우크라이나는 진작에 빠졌고 엘살바도르 대표가 맨 마지막에 입경한 것이다.
    제1진 호주와 인도, 시리아 대표단과 유엔 사무차장 호세택(胡世澤) 등 30여명이 도착한 김포공항에서 시내까지 연도엔 맹추위도 무시한 인파가 무려 25만명 쯤이나 몰려나와 태극기를 흔들어 환영하였다.([동아일보] 1948.1.9.)
    환영 나온 이승만은 호세택의 손을 잡고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15년전 제네바 국제연맹서 일본의 만주침략을 규탄, 국제연맹서 탈퇴하게 만들 때 이승만은 호세택과 깊은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 노련한 중국외교관 호세택이 유엔한국위원단의 사무총장이 되어 왔으니 좋은 징조가 아닌가.
    위원단은 덕수궁 석조전에서 인도의 메논을 위원장으로 선출한다. 그리고 16일 메논은 하지 미군사령관과 평양의 소련군사령관 코로트코프(Gennadii P. Korotkov)에게 수시로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동시에 유엔의 소련대표 그로미코(Andrei A. Gromyko)에게도 전달하도록 조치하였다. ([경향신문] 1948.1.21.)

    ★소련, 유엔위원단의 북한 입경 거부

    [레이크석세스24일발AP합동] 22일 UN에서는 소련이 유엔 조선위원단의 소점령하의 북조선 입경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사실에 있어 남조선 미군점령지대에 있어서의 UN위원단의 노력을 제한하는 소련의 태도는 소련외상대리 그로미코씨로부터 UN사무총장 트리그브 리씨 보좌 안드류 코디어씨에 대하야 전달된 1월22일부 서한 중에 표명한 것으로서 동서한의 내용은 다음과 간다.
    「북조선 소련군사령관 방문의 희망을 표명한 조선위원단 임시의장으로부터의 서한원문을 전달한 1948년1월18일부의 서한에 관련하여서는 우리는 귀하에게 1947년의 제2차 UN정치총회 상에서의 UN조선위원단 수립에 대하여 상기시키는 바이다」 ([조선일보] 1948.1.25. 1면 머리기사)
    소련의 ‘거부’는 미국은 물룬 국내의 정파들도 모두 예상했던 일인지라 즉각적인 반응은 없었다. 조선일보는 다만 서울 미군정의 여론국장을 역임했던 게일 크리랜드 박사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음과 같이 논평한 내용만 1면에 보도하였다. 
    “조선의 현실정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가 한나라에서 충돌할 때 어떤 사태가 발생하느냐하는 비극의 예일 것 같다. 소련은 지금 북조선, 루마니아, 불가리아, 항가리 등 소련 연방에서 시현된 바와 같이 조선전체를 소련에 종속한 공산주의국가화 하고자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미국은 조선에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도입하려고 노력을 다하였으나 소련의 방해 사보타주, 선전, 그리고 모스크바가 고취한 폭력적 공격에 의하여 큰 지장을 받아오고 있다”

  • ★유엔, 이승만-김구-김규식-김성수 등과 면담

    덕수궁의 위원단은 1월22일 남북한 총선문제 협의 대상자로 이승만, 김구, 조만식, 김규식, 김성수, 박헌영, 김일성, 허헌, 김두봉 둥 9명을 선정 발표하고, 26일 오전10시 맨 먼저 이승만을 초청한다. 이승만은 하지 사령부의 답답한 정책을 비판하고 소신을 명확하게 밝혔다.
    “미군 정부가 중간파를 후원해서 공산분자가 다시 활약할 기회를 얻게 되었으므로 전 민족이 공포중에 있다. 하루 바삐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 3분의 2 이상의 인구를 가진 남한에 통일정부를 수립하고 유엔이 그 정부를 원조하여 국권과 강토를 먼저 회복시켜서 극동평화를 보장시켜야 한다”
    김구는 오후2시반부터 유엔단을 면담하고 나서 짧은 담화를 냈다.
    “미-소 양군이 철퇴한 후에 요인회담을 하여 선거준비를 한 후에 총선거를 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1948.1.28.)
    여기서 ‘요인회담’이란 남북 정치지도자 회담을 말한다. 김구가 처음으로 남북회담을 거론한 이 담화는 앞으로 전개될 김구의 “대한민국 건국 반대” 운동의 출발점이 된다.

    다음날 27일 김규식은 유엔위원단 면담에서 소련의 거부에 대한 대책을 내놓았다. 한국문제를 유엔에서 재론해야 할 것, 소련과 달리 북한 공산당은 한인이므로 남북회담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 미-소 양군 철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 등을 말했다. ([조선일보] 1948.1.28.)
    한민당 김성수는 29일 “북한의 소수인 외에는 모든 동포가 남북총선을 원하고 있으며 선거가 가능한 남조선에서만이라도 선거를 반드시 실시해야”하며 방화와 폭력행위를 한 범인은 북조선에 있다고 역설하였다. ([동아일보] 1948.1.30.)
  • ▲ 김구의 '돌변'에 대하여 한민당 측이 비판한 성명 기사(조선일보1948.1.30)
    ▲ 김구의 '돌변'에 대하여 한민당 측이 비판한 성명 기사(조선일보1948.1.30)
    ◆김구의 돌변, “미-소 양군 철수후 남북요인회담 하자“

    김구는 유엔위원단을 만난 이틀 뒤, 28일 장문의 의견서를 제출하였다. 그 요지를 보자.
    1) 우리는 조속한 총선거로 통일된 정부 수립만 요구한다. ‘시국대책요강’ 등 미군정을 연장시킬 우려가 있는 소위 남한단독정부도 반대한다.
    2) 총선거는 인민의 절대 자유의사에 의해 실시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북한의 소련당국자들은 북한 선거가 가장 민주적으로 되었다 하는데, 미 당국자들을 이것을 긍정하지 않고 남한에서는 미군정하에 모 일개 정당이 선거를 농단하리라는 것은 거의 남한의 여론이 되어있다.
    3) 소련의 입북거절을 구실로 유엔이 직무태만이나 그 과업에 위반되는 다른 공작을 전개하려 해서는 안된다.
    4) 현재 남북한에 구금되어있는 모든 정치범의 석방을 요구한다.
    5) 미-소 양군은 즉시 철퇴하되 그 진공상태로 인한 치안 책임은 유엔에서 부담하라.
    6) 남북 한인지도자 회의를 소집함을 요구한다. 한국문제는 결국 한인이 해결할 것이다. 양군철수후 즉기 평화로운 국면을 조성하고 남북 지도자회의를 소집하여 조국의 완전독립과 민족의 영원 해방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하여 공동노력할 수 있는 방안을 작성하자는 것이다.([서울신문]1948.1.29.)
    소련이 유엔을 통해 유엔결의안을 반대하고, 한국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공식 거부한 후 1주일이 지난 시점이다. 그동안 ‘남한단독정부도 단독정부 아니다’라며 이승만과 한치의 의견차이도 없다고 몇 번이나 공개적으로 다짐해왔던 김구가 왜 이랬을까? 우파의 반응부터 들어보자.

    ★한민당 ”김구는 모스크바의 대변인...자살적 행동...공산당의 모략“

    정가는 폭탄이 터진 듯 들끓었다. 김구가 부총재인 ‘독촉국민회’는 긴급회의 끝에 담화를 발표하였다.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고 남북요인회담으로 해결하자는 것은 한국독립을 지연시키려는 공산당의 주장이므로 김구 선생이 그런 주장을 하였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공산당의 모략이란 실로 새삼스럽게 생각된다. 유엔 결의에 없는 사실을 요구함은 위원단을 철수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의도 되지 않는다.”([동아일보] 1948.1.30.)

    김구가 의견서에서 ‘모 일개정당’으로 지목한 한민당은 가뜩이나 한민당 정치부장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의심하고 수사를 촉고하던 차에 다음과 같은 격앙된 담화를 발표했다.
    “김구씨의 이 주장은 유엔총회에 있어서의 소련대표의 주장과 곡 일치한 것으로서 소련은 조선의 김구씨에게서 그 충실한 대변인을 발견했다고 할 것이다. 외국군철퇴와 남북요인 회담후 총선거란 듣기에 달콤하고 좋은 듯한 말이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에 이것은 조선전체를 소련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하여서 민족진영은 물론 김구시 자신도 반대하였고 자유국가들도 단호히 반대하였던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가장 중요한 시기에 김구씨가 이와 같은 발언을 했다는 것은 조변석개의 일시적 과오로 볼수 없는 것이고 심사숙고의 결과라 보지 않은 수 없으니 김구씨의 자설적 행동으로서 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구씨의 평소 주장과 판이한 이 주장은 결국 조선을 소련의 위성국화하려는 의도를 표현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우리는 앞으로 김구씨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는 보지 못할 것이고, 크레믈린의 신자라고 규정하지 아니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조선일보]1948.1.30.)

    전국학생연맹의 이철승(李哲承)도 “우리 영도자로 경앙해온 김구 선생께서 공산당의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하신 것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며 지도자로서의 위신을 스스로 상실케 하는 자멸적 행위이다”라고 발표하였다.

    ★김구-김규식, 이번엔 유엔위원단에 ‘남북지도자 회담 의견서‘ 제출
    이후 날마다 회의를 거듭한 김구와 김규식은 2월6일 두 사람이 함께 유엔위원단이 머무는 국제호텔을 방문한다. 메논 의장, 호세택 사무총장, 잭슨(S.H. Jackson) 호주 대표와 회담하고 준비해온 ’남북지도자 회담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한다. 사흘 후 9일엔 메논 의장에게 남북회담 계획을 설명하는 편지를 보내 위원단이 협조해달라고 당부하였다. ([동아일보] 1948.2.11.)
    “친애하는 메논 박사
    남북지도자회담에 관하여 귀하와 귀위원단에 우리의 의견과 각서를 이미 제출한 바이어니와 우리는 가급적 우리 양인의 명의로 남에서 이에 찬동하는 제정당의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제1차 회의를 하겠습니다. 이 회의에서 남쪽이 대표를 선출하면 북쪽에 연락할 인원과 방법에 대한 것을 결정하겠습니다. 귀위원단이 이에 대하여 원만하고 적극적인 협조를 직접 간접으로 하여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으며, 우리 양방의 노력으로 우리가 공동이 목적하는 바가 이루러지기를 믿습니다.” ([동아일보] 1948.2.11.)
  • ▲ 남한공산화 3인방, 스탈린, 슈티코프, 레베데프(왼쪽부터).
    ▲ 남한공산화 3인방, 스탈린, 슈티코프, 레베데프(왼쪽부터).
    ◆2.7폭동...스탈린, 남한선거 저지 폭력투쟁 시작

    스탈린이 준비해 놓고 때를 기다렸던 ’제2의 남한 먹기’ 카드를 꺼냈다.
    미소공위 실패에 따른 다음단계 전략으로 스탈린이 취한 행동은 다음과 같다.
    1) 남북한의 미군과 소련군을 동시에 철수, 남북한 한국인들이 연합정부 수립 제의.
    2) 유엔총회의 남북한총선 결의안을 반대, 유엔에 통고. 
    3) 유엔위원단이 요청한 북한방문 거부.
    4) 남한전역에 ’총선저지‘ 파업-폭동 ’2.7구국투쟁‘ 전개.

    ★이와 때를 맞춘 듯 김구는 소련의 유엔결의안 거부 발표 1주일 만에 ’남한단독선거 반대‘와  ’남북한 요인회담‘ 제의를 담은 의견서를 유엔위원단에 제출하였다. 이어서 김구와 김규식이 희의 끝에 양인명의로 ’남북지도자회의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한 것은 남로당이 2.7폭동을 개시한 하루 전 2월6일이고, 9일엔 메논 의장에게 협력을 당부하는 편지까지 보냈다. 

     한민당이 김구의 ’돌변‘은 “공산당의 모략(음모와 책략)”이라 비판한 말이 아니라도, 누가 봐도 ’동시다발적 장군멍군식 상황전개‘는 김구의 배후를 의심하기에 충분한지라 온갖 소문들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유엔-미국의 한국 철수를 노린 폭동...제주도 4.3폭동으로

    1948년 2월6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소련의 ’입북거부‘에 따라 유엔소총회에 새 방침 등을 요구하기로 결정하자 즉시 일으킨 남로당의 ’2.7거국투쟁‘은 바로 남한선거를 막고 유엔위원단의 한국 철수와 미국의 남한 포기를 노린 스탈린의 지령, 슈티코프는 평양소련군정사령부와  김일성-박헌영을 총지휘한다. (김국후 [평양의 소련군정] 앞의 책 등.)

    남로당과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이 주동한 폭동사태는 7일 새벽부터 전평 산하의 산별노조를 시발로 전국 각 지역에서 총파업을 감행, 철도 전신 체신을 비롯하여 공장, 광산, 사업소 등이 일제히 폭력투쟁에 돌입하였고, 부산 선박 시위도 벌어졌다. 경찰관서 습격, 기관차 파괴, 전신주 절단, 교량 폭파 등도 잇따랐다. 제주 지역에서도 제주4.3폭동의 전초전이 시작되어 청년들이 도로 위에 장애물을 쌓아 교통을 차단하였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2월 10일 성명을 통해 “해방 이래 조국의 소련화를 기도해 온 남로당 중심의 공산도배가 남조선의 치안을 파괴하고 질서를 교란함으로써 유엔 위원단의 업무를 방해하고 조선 독립을 불가능케 하고자 폭동을 일으켰다.”라고 발표하였다.
    폭동결과는 경찰관 등 사망 39명, 부상 133명이고 8,479명이 검거되었다. 
    그러나 3월1일 곧바로 제주4.3폭동이 일어난다. <계속>